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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스크랩 경김6-2 경주김씨 족보자료 2
性法(성법) 추천 0 조회 357 08.08.14 12: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 경주김씨 유래

 

1. 경주김씨 유래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 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라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여 국명(國名)을 동일시 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 김알지(金謁智)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고쳐 삼았다가 307년(기림왕 10)에 신라(新羅)로 하였으며,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慶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 (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여 지방제도의 개편, 통치 지역의 변동 등으로 명칭의 변화가 많았으나 영남지방(嶺南地方)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지위에는 변동이  없다가 1413년(태종 13)에 와서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였다. 우리나라 성씨(姓氏) 중에서도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일컬어진 김씨(金氏)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한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新羅本記)에 기록된 탄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檀紀 2398年(서기 65년) 漢明帝  永平八年 新羅四代 昔脫解王 乙丑 3月 어느날밤에 金城(금성) 서쪽 始林(시림)의숲속에서 닭의울음소리가 길고 明朗(명랑)하게 울려옴으로 왕께서 瓠公(호공)을 시켜 가보시게 하니 금빛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음을 보고 돌아와서 고하니 왕이 친히 가서 열어본즉 용모가 아름다운 남아가 나왔으므로 始林(시림)를 鷄林(계림)이라 고치고 아이는 金櫃(금궤)에서 나왔으므로 姓(성)을 金(김)이라하고 王(왕)이 기르시는데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은지라 이름을 閼智(알지)라 하였으며,왕이 좋은 날을 골라 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알지는 김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김아도(阿都)를, 아도는 김수류(首留)를, 수류는 김욱보(郁甫)를, 욱보는 김구도(俱道)를, 구도는 김미추(未鄒)를 낳았다. 알지의 7세손인 미추가 262년 다.
대종인 경주 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약 270여개 본관만 남아있다.

    이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의 5세손인 김주원을 시조로하는 강릉 김씨,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아들인 김흥광을 시조로하는 광산 김씨,
    신무왕의 후손인 김영이를 시조로하는 영산(永山, 영동) 김씨,
    문성왕의 8세손 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선산(일선) 김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경순왕(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한뒤 왕위를 오르게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 9아들중 1자부터 4자 까지는 모두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첫째 김일(마의태자)의 1자인 김선웅은 경주 김씨 정간공파,
                         2자인 김순웅은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둘째 김굉의 1자  운발은 나주 김씨,
               2자  우발은 경주김씨 안노백파,
    셋째 김명종은 경주 김씨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은 경주 김씨 대안군파
    다섯째 김석(錫)은 의성 김씨,
    여섯째 김건(鍵)은 강릉김씨,
    일곱째 김선(鐥)은 언양 김씨,
    여덟째 김추(錘)는 삼척 김씨,
    아홉째 김덕지(德摯)는 울산 김씨 등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으며, 구안동, 청풍, 금녕, 도강, 전주, 양근, 영광, 안산 등이 모두 김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김알지계 김씨에서 다른 성으로 갈려간 성씨는 안동 권(權)씨, 강릉 왕(王)씨, 광산 이(李)씨, 감천 문(文)씨, 수성 최씨 등이 있다.

    주요 거주지

       주요세거지와 변천은 계림군파 갑자보에의하면 2세 김계성의 대부터 경기 고양군 벽제읍에 대대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가 5세 김홍령의 대 이후로 수원시 일원으로 옮겨 갔고 일부는 김귀령의 대 이후 평택군에 터를 잡았으며, 김학령의 대를 전후 하여서는 용인군에 세거한 것 같다.
    김승련은 연산군조 무오사화때 평남 가산에 세거를 시작하였고 김영수 대 이후는 홍주에 터를 잡은 것 같다. 6세 김억수의 대 이후 안성군에, 김연수의 대 이후로는 서산군 대산면 일원에, 김수정의 대 이후는 청양군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김봉수는 임진왜란당시 충남 해미로 이거하였으며, 7세 김방 김역 형제는 임진왜란시 경북 상주 낙동면과 중동면에 이거하여 세거하였다.
    7세 김경원의 대 이후 연기군 전의면 일원, 김후원의 대부터는 진천군 월촌면 일원, 김충원의 대부터는 과천, 김감의 대부터는 강원 양양군 토성면 일원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7세 김구의 대부터 공주에, 김철원의 대부터 청주에, 김인원의 대부터 결성에 터를 잡은 것 같고, 김육원은 병자호란을 만나 상주로 이거하였는데 지금의 문경군 삼남면 일원에서 세거하였다.
    8세 김의진의 대 이후는 양주군 화도면 일원에 터를 잡았고 김수성 이후 청원군에, 김수겸 이후 홍천군에 옮겨 간 것 같다.
    김수준의 대 이후 보령군 웅천면에 이거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때 김수안 김수향 형제는 서산군 고북면으로, 김기성은 평양으로 옮겨갔다. 8세 김수익은 김포군에 터를 잡았다.
    9세 김남훈은 포천군수를 지낸 후 그곳에서 세거하였고, 김남휘의 대 이후는 경북 경산 자인면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김남오는 황해도 수천으로 퇴거하였고 김남석,김남창,김남일은 경북 예천일원으로 옮겨 갔다.
    9세 김남운은 화성군 송산면에, 김남주는 합천군 삼가면에, 김남영은 춘천에 터를 잡았다. 10세 김여진은 지금의 경북 상주군 공검면에 세거하였으며, 김계진은 영풍군 순흥에 터를 잡았다.
    김준신은 아산군 신창면에, 김리진은 횡성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1세 김언성의 대 이후로 창원에 옮겨 간 듯하며 병자호란때 김승신은 양양군 위산면에, 김상신은 회양군 장양면에 이거하였다.
    김봉신은 장단군에 터를 잡았고, 김윤신은 예산군 대흥면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연기군 전의면에서 세거하던 김명원의 후손들은 12세 이후로 파주군 교하면, 광타면 일원, 온양, 공주, 여주, 광주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했으며, 김수겸의 후손은 인제, 회양, 삼척등지에도 터를 잡았다.

    주요인물

      가문(家門)의 기백(氣魄)을 지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영분공   명종(鳴鍾)의6세손 예겸(禮謙)이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내중령(內中令) 을 지냈고, 예겸의 손자(孫子) 의진(義珍)은 고려사학(私學)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으며 문종조(文宗朝)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여 인재등용에 공헌했다.
    의진의 증손(曾孫) 영고(永固)는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며, 영고(永固)의 아들 인경(仁鏡)은 문무겸재 (文武兼才)의 현신(賢臣)으로 고종(高宗)때 조 충(趙 沖)과 함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功)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예서(隸書)로 명망이 높았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8세손 봉모(鳳毛)는 외국어(外國語)에 능하여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 :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  3품 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  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봉모의 아들 태서(台瑞)는 고종(高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특히 그의 아들 약선(若先 : 공부 시랑), 기손(起 孫 : 평장사), 경손(慶孫 : 추밀원 부사) 3형제가 유명했다.
    계대가 분명치 않은 김순웅은 대장군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인위(因渭)고려 현종의 장인인데 , 평자사로 있다가 1024년(현종15) 딸이 덕비(德妃)로 책봉되자 상서좌복사, 참지정서, 주국, 경조현개국남이되고 이어 치사(致仕)했다.  
    김원종은 덕종 3년 감찰어사가 된 후 문종조에 어사대부,동지추밀원사, 중추원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을 역임하고 1063년 수태위문하시중이 되었다.
    계림군 김균은 고려말 밀직부사를 지냈고, 조선개국공신 3등이 되어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을 역임하였으며, 후손이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일문을 이루고 있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장유(將有)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 효정 (孝貞)의 아들인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의명신(名臣) 정(淨)이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중종조(中宗朝)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서른  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졸하였다.
    태사공(太師公) 인관(仁瓘)의 9세손  자수(自粹)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恨)을 안고 안동(安東)에 은거(隱居)하였다.
    자수(自粹)의 9세손 홍익(弘翼)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쟁에서 순절하였고, 아우 홍욱(弘郁)은 효종(孝宗)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앞서 인조(仁祖) 때 사사(賜死)된  민희빈 강씨(姜氏)와 그녀의  어린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孝宗)의 노여움을 사 친국(親鞠)중에 장사(杖死) 되었다.
    홍욱(弘郁)의 손자(孫子) 흥경(興慶)은 영조조(英祖朝)의 상신(相臣)이었고, 흥경의  아들 한신(漢藎)은 영조(英祖)의  부마(駙馬 :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를 양자로 삼았다.  
    참찬(參贊) 이주의 손자인 정희(正喜)는 학문(學問)에 있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書藝)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켜 특히 예서(隸書)와 행서(行書)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호장(戶長) 위영(魏英)의  증손(曾孫) 부필(富弼)·부일(富佾 :  수태위를 역임)·부식(富軾)·부의(富儀 : 지추밀원사를 역임)가 유명했다.  
    고려  문종(文宗)과 의종대(毅宗代)에 걸쳐 문무(文武)를 겸한 명신(名臣)으로 유명한 부식(富軾)은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왕실외척임을 빙자하여 권세를 쥐고 군신의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던 이자겸(李資謙)의  방자함을 충고하여 이를 시정하게 하였고, 42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145년(인종 23) 왕명(王命)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완성하여 바치는 등 이름난 문장가(文章家)로 송(宋)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이렇게 역사를 수(繡)놓은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한말(韓末)에 와서도 그 가통(家統)을  이어  훌륭한 인재(人才)가 많이 배출되었다.  
    고종(高宗) 때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영작(永爵)의 아들  홍집(弘集)은 한말 외세와  개화의 부수 틈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  인물(人物)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정집(鼎集)의  아들 창희(昌熙)는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으며, 철희(喆熙)는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재직중 1885년(고종 22) 황해도(黃海道) 토산(兎山)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을 진압하여 승녕부 종장(承寧府從長)을 지낸 춘희(春熙)와  자산으로 도서관(圖書館)을 설립한  인정(仁貞),  중국 원세개(袁世凱 :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옥새를  새겼던 서예고문(書藝顧問) 태석(台錫),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를 개설한 영제(寧濟), 청성곡(淸聲曲)의 명수  계선(桂善) 등과 함께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었으며,  용원(庸源)과 도태(道泰)는  조국의 자유수호와  광복을 위하여   몸바쳐 헌신하였으므로 신라 왕성(新羅王姓)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361,189가구, 1,523,4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 경주김씨 사적보감 (慶州金氏 史蹟寶鑑)  < 1 >

 

 경덕왕릉(景德王陵)

 경순왕릉(敬順王陵)

 경주교동고분군(慶州校洞古墳群)

 경주노동리고분군(慶州路東里古墳群)

 경주노서리고분군(慶州路西里古墳群)

 경주동부사적지대(慶州東部史蹟地帶)

 경주황남리고분군(慶州皇南里古墳群)

 경주황오리고분군(慶州皇吾里古墳群)

 계림(鷄林)

 괘릉(掛陵)

 금관(金冠)

 금관총과대및요패

 금관총금관(金冠塚金冠)

 금동수정감장촉대(金銅水晶嵌裝燭臺)

 금령총금관(金鈴塚金冠)

 김정희영정(金正喜影幀)

 김홍집(金弘集/1842~1896)

 내물왕릉(奈勿王陵)

 무열왕릉(武烈王陵)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미추왕릉상감유리옥목걸이(味鄒王陵象嵌琉璃玉-)

 미추왕릉(味鄒王陵)

 미추왕릉금수식(味鄒王陵金垂飾)

 민애대왕석탑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

 

법흥왕릉(法興王陵)

불국사(佛國寺)

삼국사기(권1~50)(三國史記(卷一~五十))

삼국사기(권1∼50)(三國史記(卷一∼五十))

삼국사기(권44∼50)(三國史記(卷四十四∼五十))

석굴암(石窟庵)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성덕왕릉(聖德王陵)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신라소금동불(新羅小金銅佛)

신문왕릉(神文王陵)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

진흥왕릉(眞興王陵)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

헌강왕릉(憲康王陵)

헌안왕릉(憲安王陵)

황남대총북분금관수하식(皇南大塚北墳金冠垂下飾)

효공왕릉(孝恭王陵)

효소왕릉(孝昭王陵)

흥덕왕릉(興德王陵)

희강왕릉(僖康王陵)

 

경주김씨 사적보감 (慶州金氏 史蹟寶鑑)  < 2 >

 

 신라 제56대 (金씨 38대) 경순대왕 영정
 계명도
 
태종무열왕
 
원성왕릉
 신무왕릉
 
첨성대(국보 제31호)

 안압지(사적 제18호)
 
다보탑(국보 제20호)
 
경순왕릉 향사(97.10.3)
 
경순왕릉 향사에 참예한 후손들
 경주김씨회관
 
경주김씨 자녀, 대학생 하기수련회
 경주김씨 제15대 국회의원 당선기념 축하연

 

3. 신라김씨(新羅金氏)의 시원(始源)

my.jpg신라김씨 시조인 대보공 휘 알지 (大輔公 諱 閼智)의 탄생설화에는 우리민족의 운명을 암시하는 상징성이 매우 깊게 담겨 있다.
시조께서 이 땅에 탄강하실 때의 기록은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오래 되었었으며 유일한 역사기록이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 (三國史記)>와<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확실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두 기록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구에 의해서 발견되었는가와 그 시간과 계절이 다를 뿐 그 외에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기록을 차례되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 65(탈해 9)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서편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거기 나뭇가지에 금빛 나는 작은 궤가 걸려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대로 고하자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궤를 가져다 열어 보니 그 속에 조그만 사내아이가 들어 있는데 그 외보가 출충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좌우에 일러 가로되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것이 아니냐" 하고 거두어 길렀다.
차차 자람에 총명하고 지략(智略)이 많으니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 이라 하고 또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하여 국호(國號)를 삼았다."<삼국사기(三國史記)>"영평(永平:後漢 明帝의 年號) 3년 경신(서기 60년 : 혹은 中元 6년이라고 하나 이것은 잘못인 것이 중원은 2년밖에 없다)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 : 鳩林)의 하늘로부터 땅에 뻗치어 그 구름 속에 황금색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큰 광명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호공이 이것을 그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숱에 나가서 그 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 있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 라 이름하였다.
알지는 우리말로 아이를 뜻한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궁으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기뻐하면서 춤을 추고 뛰어 놀았다.
왕이 길일을 댁하여 태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그 자리를 파사대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는 오르지 않았다.
그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 이라 하였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김씨는 알지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삼국유사(三國遺事)>.
이 사서의 기록을 보면 우선 탄강의 시간대가 5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찾기에는 불가능하고 봄과 가을의 계절, 즉 시간이 다른 점은 주목할 일이라고 본다.
하나는 씨뿌리는 계절이고, 다른 하나는 수확의 계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크게 상반되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역사나 김씨의 후예들이 보여주는 삶의 족적에 대한 상징적 암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하겠다. 대보공이 출현한 시기는 신라가 건국하고도 1백여 년이 지난 시기이다.
공은 바로 왕위에 나아가지 않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7세손 미추가 왕위에 나아가고 또 그 뒤 1백여 년이 지난 뒤인 내물대왕에 이르러 김씨의 왕위 세습의 시대가 비로소 열린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민족의 대통합의 결실을 맺게 되는 주역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신라김씨는 개국이나 건국 등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과 결실과 수확의 성격을 보여주는 두 가지 의미가 다함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대보공의 탄생을 단순히 김씨의 시조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당연히 3월(봄 : 파종, 시작의 개념)의 상징이 더 큰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한 3월과 새벽이라는 시점이 그것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새벽에 닭울음 소리를 듣고 금궤를 발견하게 되니, 어두운 밤에 닭이 울고 있음은 새벽을 알림이요 새벽은 밤의 어두움을 열고 새로운 시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던가!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면 결실과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호공에 의해 금궤가 발견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반 범인이 아닌 왕의 손에 의헤 금궤가 열려졌고, 누워던 아이가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 스스로 바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혁거세대왕(赫居世大王)과 탈해대왕(脫解大王)의 탄생설화와 달리 이미 지혜와 그것을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으로 출현하였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수확과 결실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요인들의 상징적인 사실을 보면 신라김씨의 생명력이 지닌 특성을 단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한 특성은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와 조선의 모든 시대에 걸쳐 신라김씨의 인물들이 보여준 생존 방식과 역량, 남긴 족적들에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보공의 탄생에서 신라김씨의 생명력이 지닌 특성을 두 가지 기록에 나타난 상징적인 암시, 바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원형을 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후예들이 살아온 2천여 년의 유구한 삶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보여준 특성은 바로 대보공의 탄생에서 나타나는 상징적 예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신라김씨왕조의 민족사에서의 역활

신라의 융성기의 문을 연 17대 내물대왕(356~401)은 중앙집권적 강력한 왕권시대를 구축하면서 외국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되었다.
내물대왕 26년 전진의 부견에게 위두를 사신으로 보냈다.
부견은 위두에게 묻기를 "경의 말에 해동의 사정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 변혁이나 명호가 바뀌는 것처럼 우리도 어찌 옛날과 같을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사신 위두가 지적했듯이 이미 왕권이 안정되어 있었으며 국력도 크게 신장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영토확장이나 일반제도 문물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법흥대왕대에 이르러 불교를 받아들이는 등 국가경영의 사상적인 이념체계에 이르러기까지 완벽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는 540년 진흥대왕이 즉위하면서 한반도의 중요한 세력권의 하나인 가야제국을 합병하고 북쪽으로는 한수(지금의 한강)일대와 함흥평야까지 이르는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력의 신장은 물론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면서 발달된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 중에서 가장 척박한 영토와 적은 인구의 신라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번창할수 있었던 것은 외래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민족의 성향에 맞추어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 지혜가 뛰어났던 것이 가장 주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토착 신앙과 외래 종교인 불교를 조화시켜 호국 불교로 승회시켰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정신적인 지주인 화랑도 등을 만들어 국민을 하나로 묶는 이념적인 바탕으로 쌓아 올렸다.
그로므로써 백성과 지도자가 하나 되는 신뢰감을 창출해 내었으니 신라 김씨왕조가 우리나라 역사상 위대한 것은 바로 여기에 의미가 있다.
그 당시 다른 나라에 비해 가장 척박한 땅에서 작은 인구로 대륙과 바다로부터의 수없는 외침을 물리치고 막강한 국력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마침내 29대 태종무열대왕과 문무대왕에 의해 삼국 통일의 위업이 달성되었다.
나아가 당나라 30만 대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자주적인 통일을 완성하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으니 우리 민족사를 통해 이때처럼 일사불란한 국가 경영체계를 보였던 때도 많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 찬란한 민족의 고유문화를 창조하여 정착시킬 수 있었던 장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존재를 한때의 역사를 지배했던 단순한 국가의 흥망성쇠의 문제에 국한시킬수는 없는 것이다.
길게는 한 민족의 정체성과 고유문화의 창출이 없었다면 그 시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김씨왕조의 신라는 우리 민족사에서 사상,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존재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우리 김씨는 왕조 시대를 마감한 이후에도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1천년 역사에서도 잠시도 그 저력이 소멸되거나 명백이 끊기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충정은 왕조의 주역으로서나 아니면 조역으로서도 맡은 임무에서는 소홀함이 없었다.
우리 민족사의 중흥기에는 반드시 김씨가 있었고 난국을 맞았을 때는 언제나 앞장서 위난극복의 첨병이 되었던 것이다.

 

5. 김씨의 왕조진입과 왕권확립 시기

대보공 탄생설화에는 7세손 미추대왕이 왕위에 오르는 이야기에서 끝난다.
신라의 제 13대 미추대왕은 대보공의 6세손 구도공의 세 아들 중 장남이며 그 나머지 두 아들의 후손도 뒤에 왕이 되었고 결국은 구도공 소생의 아들고 그 후손이 모두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대보공으로부터 2백여 년이 지나 6세손에 이르러서 김씨의 세력이 크게 번창했음을 말해 준다.
당시의 신라는 강력한 골품제도로 성골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었으나 1백여 년이 지나 냇물대왕부터 김씨의 왕위세습이 이루어졌고, 후대인 654년에 이르러서는 진골도 왕위를 잇게 되니 세습왕조의 터전이 확고하게 마련되었다.
신라을 건국한 박혁거세로부터 3대가 박씨, 4대가 석씨인 탈해왕 때에 천지의 서기를 입어 김씨의 시조이신 대보공께서 세상에 나시고 5대 파사왕에서 8대 아달라대왕까지 박씨가 나라를 다스렸고, 9대 벌휴대왕에서 12대 첨해대왕까지 왕위를 계승했다.
마침내 262년 김씨가 왕위에 오르니 대보공이 세상에 출현하고 2백여 년만의 일이다.
신라 13대 미추대왕은 대보공의 7세손이며 6세손 구도의 장자로 어머니는 박씨 갈문왕의 따님이며 왕비는 11대 조분대왕의 따님인 광명부인 석씨였다. 보위는 22년이었다.
그로부터 14대 왕에서 3대에 걸쳐 다시 석씨가 왕위를 이엇고, 356년 17대 냇물대왕부터 세습왕조로서 왕권확립기에 들어섰다.
이후는 신라왕조의 마지막 왕인 경순대왕 바로 이전의 3대를 빼고는 김씨 왕조가 신라의 역사를 주도하였다.
신라는 박씨가 나라를 일으켜 석씨와 함께 기반을 닦고 김씨의 손에 의해 민족사 발전은 물론 찬란한 민족문화의 업적을 동방에 꽃피우게 했던 것이다.
세계사에서 볼 때 암흑기의 전반부에 속하는 5, 6세기에 유독 지구 동쪽의 조그마한 국토를 차지한 우리 김씨왕조는 민족혼의 기개를 세계에 드높혔다.
뿐만 아니라 동방문화의 햇불이 이 땅 위에서 한껏 타오르게 할 수 있는 민족의 저력을 창출했던 것이다.
 

6. <신라김씨 세부 원류도>  

 

 

 

 

 

7. <시조(始祖) 소개>

1. 신라김씨 시조 대보공(大輔公 또는 太輔公-諱 閼智)

   시조인 대보공(휘 알지)은 서기 60년(신라 탈해왕 4년) 8월 4일,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금성) 서쪽 계림(鷄林, 또는 始林)의 숲속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하늘이 준 아들>이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씨를 김씨로 사성(賜姓)하였다.

   금궤 속에서 나온 동남(童男)이 마치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고사와 같으므로(혁거세가 알지라고 한)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 이름 했다. 이 '알지'는 향찰(鄕札-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표기하던 신라시대의 문자)로 표기한 것으로 '소아(小兒), 아이, 아기'를 일컫는다.

  당시 탈해왕(脫解王)은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후에 알지는 이를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그 6대손인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알지'를 신라김씨(안동김씨 포함)의 시조로 모신다.

이에 대한 <三國遺事>(一然 著)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永平3年 庚申(一云 中元 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 八月四日, 弧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鷄鳴於樹下.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掛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 倉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娑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해석>

  영평3년(서기 60년, 탈해왕 4년) 경신(혹은 중원 6년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중원은 2년 뿐이었다.)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月城)의 서리(西里)를 걸어 가고 있었는데, 큰 광명이 시림(始林-혹은 鳩林이라고도 한다)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쳐 있었고, 그 구름 속에는 한 황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빛은 바로 그 궤로부터 나오고 있던 것이었고, 그 나무 밑에서는 흰닭이 울고 있었다.

  이 모습을 왕(석탈해왕)께 아뢰자 왕은 친히 그 숲으로 행차하였다. 그리고 왕이 그 궤를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서는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 있다가는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는데(혁거세가 알지라고 한) 왕은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고 이름하였다. 알지는 곧 우리말로 '아기(小兒)'를 일컫는다. 왕은 이 사내아이를 안고 대궐로 들어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춤추었다.

  왕은 길일을 택하여 세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뒤에 파사왕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씨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仇道 혹은 仇刀라 함)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으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되었다.

<三國遺事>李丙燾譯.大洋書籍 刊. 1972. p104)
   
    
                                   <鷄林:태보공 탄강지. 경주시 >

  * <금궤도(金櫃圖)> 소개 (대보공 탄강 신화 관련 그림)

 1)작가 :  조속(趙涑. 1595-1668).

  조선 중기의 서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 또는 창추(滄醜). 병조판서에 추증된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문인 화가 지운(之耘)의 아버지.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까치를 잘 그려 '조까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이 분야의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대표작으로는 <고매서작(古梅栖鵲)〉과 <매작도(梅鵲圖)〉 외에 공필(工筆)로 그린 채색의 <금궤도(金櫃圖)〉가 있다.

 2)제작년도 : 1635(인조 13) 

 3)종류 :비단에 채색

 4)크기 : 105.5cm x 56cm

 5)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6)작품 해설: 조속의 <금궤도>에는 위쪽에 이 그림을 그린 뜻과 화가의 이름이 적혀 있어서 회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채색화인 이 그림은 중앙에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에 금궤가 매달려 있으며, 밑에는 흰 수탉이 울고 있다. 위쪽에 적힌 내용으로 보아 신라 김알지의 시조 설화(始祖說話)를 소재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진한 채색을 써서 장중하게 표현하였는데, 채색화가 드문 조선시대의 채색화 전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수묵화가로 유명한 조속의 색다른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금궤가 매달린 나뭇잎의 모습이나 배경의 구름이 신화의 내용에 더욱 환상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신라김씨의 분관(分貫) 및 개성(改姓)>

  미추가 262년 신라 13대 미추왕(味鄒王)에 올라서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되었는데, 신라는 총 56명의 왕중에 김씨가 38명이다. 이 신라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85년 경제 기획원의 인구조사에서는 약 270여개 본관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武烈王)의 5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시조(始祖)로 하는 강릉김씨,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아들인 김흥광(金興光)을 시조(始祖)로 하는 광산김씨, 신무왕(神武王)의 후손인 김영이(金令胎)를 시조(始祖)로 하는 영산(永山, 영동)김씨, 문성왕(文聖王)의 8세손 김선궁(金宣弓)을 시조(始祖)로 하는 선산(일선)김씨, 문성왕(文聖王)의 5세손 김락(金樂)을 시조(始祖)로 하는 당악(唐岳)김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경순왕(敬順王 : 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한 뒤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은 아홉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첫째 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중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잘 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으로 입산(入山)하였다.

 첫째 김일(鎰)은 부안김씨,  둘째 김굉의 아들 김운발(金雲發)은 나주김씨, 셋째 김명종(金鳴鐘)은 경주김씨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金殷說)은 경주김씨 은열공파, 다섯째 김석(金錫)은 의성김씨,여섯째 김건, 일곱째 김선(金鐥)은 언양김씨, 여덟째 김추(金錘)의 아들(김위옹)은 삼척김씨, 아홉째 김덕지(金德摯)는 울산김씨 등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는데, 둘째 아들 김숙승(金叔承)은 안동김씨로, 5세손 김봉기(鳳麒)의 넷째 아들은 김녕김씨로 분관했다.

 김방경의 넷째 아들은 대구김씨로, 7세손은 도강김씨로, 13세손은 밀양김씨로, 5세손은 서흥김씨로, 그 후손 중 안악김씨, 안산김씨가 나왔고, 14세손은 야성(영덕)김씨로 분관하였다.

  김녕에서 분관하여 양근김씨, 9세손에서 양주김씨, 후손에서 연주김씨, 4세손에서 영광김씨, 후손에서 영산(靈山)김씨, 15세손에서 월성김씨, 8세손에서 전주김씨, 첫째 아들 김정구의 11세손에서 청풍김씨 등으로 분관하였다.

 기타 첫째 아들 김일(鎰) 후손은 통천김씨,  여덟째 아들 김추의 아들 김우(金佑)는 희천김씨,  여섯째 아들 김건의 후손은 영월김씨, 홍주김씨 등으로 분관하였다.

 신라 김씨에서 다른 성(他姓)으로 갈려간 성씨는 김행(幸)이 안동권씨(權氏)로, 김순식(順式)은 강릉왕씨(王氏)로, 김궁예(弓裔)의 후손 김순백(珣白)은 광산 이씨(李氏)로, 세광은 감천문씨(文氏), 김은열(殷說)의 13세손 김영규(永奎)는 수성최씨(崔氏) 등으로 각각 개성(改姓)하였다.

 

8. 신라김씨유래

대보공(大輔公) 휘 알지(閼智)의 후손들이 갖고 있는 김씨(金氏) 성(姓)을 함께 일컬어서 신라김씨(新羅金氏)라 한다.
이 말은 일연선사(一然禪師)가 편찬한 <<삼국유사>>에 나타난다.
[..인김궤이출 내성김씨(因金櫃而出 乃姓金氏)..신라김씨자알지시(新羅金氏自閼智始)]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신라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신라김씨는 계림에서 탄생한 대보공의 후손들이 갖고 있는 김씨성씨를 함께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는 것이다.
현재 일천만의 후손들이 각기 본관을 다르게 하고 있지만 근본은 신라의 김씨로 한 혈족이라 할 것이다.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도 많은 인구를 가진 대성으로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동국만성보]에 623 본, [증보문헌비고]에 499 본으로 나타나 잇으나 그중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것은 100여 본이다.
이들 여러 김씨는 신라의 알지 계통과 가락국 수로왕 계통으로 대별되며, 현존하는 거의 모든 김씨가 이 두 계통중 어느 한쪽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라김씨 시조인 대보공 휘 알지의 탄생설화에는 우리민족의 운명을 암시하는 상징성이 매우 깊게 담겨 있다. 시조께서 이 땅에 탄강하실 때의 기록은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오래 되었으며 유일한 역사기록이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확실하게 찾아볼수 있다. 다만 두 기록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구에 의해서 발견되었는가와 그 시간과 계절이 다를 뿐 그 외에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외 삼국유사의 기록을 차례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65(탈해9년)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편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거기 나뭇가지에 금빛 나는 작은 궤가 걸려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대로 고하자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궤를 가져다 열어 보니 그 속에 조그만 사내아이가 들어 있는데 그 외모가 출충하였다. 왕이 기쁘하여 좌우에 일러 가로되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것이 아니냐' 하고 거두어 길렀다. 차차 자람에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니 이름을 '알지' 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 이라 하고 또 시림을 고쳐 '계림' 이라 하여 국호를 삼았다. 영평 3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의 하늘로부터 땅에 뻗치어 그 구름 속에 황금색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큰 광명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잇었는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호공이 이것을 그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 라 이름하였다. 알지는 우리말로 아이를 뜻한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기쁘하면서 춤을 추고 뛰어 놀았다. 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그 자리를 파사대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는 오르지 않았다. 그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 이라 하였다. 알지는 열한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수류는 욱부를 낳고 욱부는 구도를,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사서의 기록으로 보면 우선 탄강의 시간대가 5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찾기에는 불가능하고 봄과 가을의 계절, 즉 시간이 다른 점은 주목할 일이라고 본다. 하나는 씨뿌리는 계절이고, 다른 하나는 수확의 계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게 상반되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역사나 김씨의 후예들이 보여주는 삶의 족적에 대한 상징적 암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하겠다. 대보공이 출현한 시기는 신라가 건국하고도 1백여 년이 지난 시기이다. 공은 바로 왕위에 나아가지 않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7세손 미추가 왕위에 나아가고 또 그 뒤 1백여 년이 지난 뒤인 내물대왕에 이르러 김씨의 왕위 세습의 시대가 비로소 열린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민족의 대통합의 결실을 맺게 되는 주역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신라김씨는 개국이나 건국 등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과 결실과 수확의 성격을 보여주는 두 가지 의미가 다함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대보공의 탄생을 단순히 김씨의 시조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당연히 3월 (봄 : 파종, 시작의 개념)의 상징이 더 큰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한 3월과 새벽이라는 시점이 그것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새벽에 닭울음 소리를 듣고 금궤를 발견하게 되니 어두운 밤에 닭이 울고 있음은 새벽을 알림이요 새벽은 밤의 어두움을 열고 새로운 시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던가!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면 결실과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호공에 의해 금궤가 발견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반 범인이 아닌 왕의 손에 의해 금궤가 열려졌고, 누었던 아이가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 스스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혁거세대왕과 탈해대왕의 탄생설화와 달리 이미 지혜와 그것을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으로 출현하였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수확과 결실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요인들의 상징적인 사실을 보면 신라김씨의 생명력이 지닌 특성을 단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한 특성은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와 조선의 모든 시대에 걸쳐 신라김씨의 인물들이 보여준 생존 방식과 역량, 남긴 족적들에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보공의 탄생에서 신라김씨의 생명력이 지닌 특성을 두 가지 기록에 나타난 상징적인 암시, 바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원형을 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후예들이 살아온 2천여 년의 유구한 삶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보여준 특성은 바로 대보공의 탄생에서 나타나는 예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왕계를 보면 역대 56왕중 김씨가 38명이며 최초의 김씨왕은 신라 13대 미추왕으로 알지의 7세손이 된다. 알지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오면서 무려 6백여 관향으로 분적 되었으나 그중 뚜렷이 현존하는 본관은 대략 80여 본으로 추정되며 이중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후손들이 나왔다
경순왕에게는 아들 아홉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넷째 아들인 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구안동, 청풍, 김녕, 도강, 전주, 익화, 영광, 안산 김씨 등이 모두 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해지며, 이밖에 선산, 의성, 언양, 울산, 나주, 상산, 안로, 연안, 순천, 고령 등이 알지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또한 알지계에서 타성으로 갈려나간 후손으로는 김행이 안동 권씨로, 김순식은 강릉 왕씨로, 궁예의 후손 순백은 광산 이씨로, 세광은 감천 문씨로, 은열의 13세손 영규는 수성 최씨로 각 각 개성 하엿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명문거족으로 가문의 번성을 이룩하여 온 범 김씨는 많은 명신, 대유, 석학들을 배출시켜 나라에 공헌하고 명문의 긍지를 심어 신라와 근대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 김씨들의 입김이 닿지않은 일들이 없을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특히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구한말에 죽음으로써 나라와 가문의 기백을 지킨 인물들과 일본의 압제정치 속에서 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자립정신과 굳건한 투혼을 불살라 온 독립투사들의 거룩한 발자취는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현대에 와서도 많은 김씨들이 조국의 발전과 가문의 번영을 위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9. 신라시대 왕위 (B.C.57년~A.D.935년, 992년간, 총 56대)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







 

1

박혁거세(朴赫居世, BC69~AD4)

BC57~AD4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BC27년 천일창(天日槍)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2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24)

4~24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삼아 정사를 맏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3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57)

24~57

남해왕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인 '도솔가' 등을 지음

4

탈해이사금(脫解, BC19~80)

57~80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탄생.

5

파사이사금 (婆娑, ?~112)

80~112

유리왕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6

지마이사금(祗摩, ?)

112~134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지미왕(祗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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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이사금(逸聖, ?)

134~154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8

아달라이사금(阿達羅, ?~184)

154~184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현(縣)의 설치와 도로개통등 내치에 힘씀.

9

벌휴이사금(伐休, ?~196)

184~196

탈해왕의 손자

10

나해이사금(奈解, ?~230)

196~230

벌휴왕의 손자.

11

조분이사금(助賁, ?~247)

230~247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12

첨해이사금(沾解, ?~261)

247~261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13

미추이사금(味鄒, ?~284)

262~284

김씨 왕가의 시조

14

유례이사금(儒禮, ?~298)

284~298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15

기림이사금(基臨, 289~310)

298~310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16

흘해이사금(訖解, ?~356)

310~356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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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402)

356~402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이라고도 함.

18

실성마립간(實聖, ?~417)

402~417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19

눌지마립간(訥祗, ?~458)

417~458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20

자비마립간(慈悲, ?~479)

458~479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21

소지마립간(炤知, ?)

479~500

 

22

지증왕(智證, 437~514)

500~514

휘는 지대로(智大路).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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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법흥왕(法興, ?)

514~540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24

진흥왕(眞興, 534~576)

540~576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25

진지왕(眞智, ?)

576~579

휘는 사륜(舍輪)

26

진평왕(眞平, ?~632)

579~632

휘는 백정(白淨)

27

선덕여왕(善德, ?)

632~647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28

진덕여왕(眞德, ?~654)

647~654

휘는 승만(勝蔓)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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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무열왕(武烈, 604~661)

654~661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30

문무왕(文武, ?~681)

661~681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31

신문왕(神文, ?~692)

681~691

휘는 정명,명지(政明,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32

효소왕(孝昭, 643~702)

692~702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33

성덕왕(聖德, ?~737)

702~737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34

효성왕(孝成, ?~742)

737~742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35

경덕왕(景德, ?~765)

742~765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36

혜공왕(惠恭, 765~780)

765~780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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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선덕왕(宣德, ?~785)

780~785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38

원성왕(元聖, ?~798)

785~798

휘는 경신(敬信). 김주원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39

소성왕(昭聖, ?~800)

798~800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40

애장왕(哀莊, 788~809)

800~809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41

헌덕왕(憲德, ?~826)

809~826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42

흥덕왕(興德, ?~836)

826~836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43

희강왕(僖康, ?~838)

836~838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44

민애왕(閔哀, ?~839)

838~839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흥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45

신무왕(神武, ?~839)

839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46

문성왕(文聖, ?)

839~857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47

헌안왕(憲安, ?~861)

857~861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48

경문왕(景文, ?~875)

861~875

휘는 응렴(膺廉)

49

헌강왕(憲康, ?~886)

875~886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50

정강왕(定康, ?~887)

886~887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51

진성여왕(眞聖, ?~897)

887~897

휘는 만(曼). 음행(淫行)을 일삼고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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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효공왕(孝恭, ?~912)

897~912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53

신덕왕(神德, ?~917)

913~917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54

경명왕(景明, ?~924)

917~924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55

경애왕(景哀, ?~927)

924~927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56

경순왕(敬順, ?~978)

927~935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 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

 

10.  알지계 김(金)씨의 유래 

 

60년(신라 탈해왕 4년) 8월4일 새벽에 어느 사람이 월성(경주)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밝은 빛이 계림(鷄林)에서 비치는것이 보여 가서보니 소나무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금궤가 걸려있고 아래에서 흰 수닭이 울고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숲으로 가서 궤를 열어보니 어린 남자아이가 누어있다가 곧 일어났다. 왕이 "하늘이 내리신 아들"이라며 아이의 이름을 어린아이라는 뜻의 알지(閼智)라고 하고 성을 금궤에서 나왔다고하여 김(金)이라고 했다. 왕이 좋은 날을 골라 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알지는 김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김아도(阿都)를, 아도는 김수류(首留)를, 수류는 김욱부(郁部)를, 욱부는 김구도(俱道)를, 구도는 김미추(未鄒)를 낳았다. 알지의 7세손인 미추가 262년 신라 13대 미추왕에 올라서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되었다. 신라는 총 56명의 왕중에 김씨가 38명이다.
대종인 경주 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약 270여개 본관만 남아있다.

이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의 5세손인 김주원을 시조로하는 강릉 김씨,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아들인 김흥광을 시조로하는 광산 김씨,
신무왕의 후손인 김영이를 시조로하는 영산(永山, 영동) 김씨,
문성왕의 8세손 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선산(일선) 김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경순왕(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한뒤 왕위를 오르게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의 9아들중 첫째 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7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9아들중 마의태자로 잘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금강산)으로 입산 하였고(후에 부안 김씨로 되었다고함)
둘째 김굉은 나주 김씨,
셋째 김명종은 경주 김씨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殷說)은 경주 김씨 은열공파,
다섯째 김석(錫)은 의성 김씨,
여섯째 김건,
일곱째 김선(鐥)은 언양 김씨,
여덟째 김추(錘)는 삼척 김씨,
아홉째 김덕지(德摯)는 울산 김씨 등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으며, 구안동, 청풍, 금녕, 도강, 전주, 양근, 영광, 안산 등이 모두 김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김알지계 김씨에서 다른 성으로 갈려간 성씨는
안동 권(權)씨, 강릉 왕(王)씨, 광산 이(李)씨, 감천 문(文)씨, 수성 최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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