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로, 나의 애환
서정권•황채원 가정
1. 내 고향, 학교, 그리고 입교 2. 성화학생 시절 3. 통일신학생에서 실천신학의 길로 4. 전국대학원리연구회(CARP) 활동 5. 세계 6000가정 축복 6. 국제기독학생연합회(ICSA) 충북지부장과 신혼 출발 7.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활동 8. 세계일보•종교신문 시절 9. 참어머님의 부르심 10. 가정회 및 교회 활동 11. 아내, 황채원 12. 내 부모님에 대한 추억 13. 여생을 앞에 두고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서정권, 오래 장수하라고 쇠뚜껑으로 출산 때에 받아 내신 모성애, 중학생 자취방에서 전도되다, 아버지의 박해, 통일신학교 제1기 입학, 학업과 일화제약 건축 노동 병행, 참아버님 앞에서 노래와 춤, 일송정 천정궁 자리에 땅 파기, 1년만에 폐교, 진도교회 건축, 승공강의, 늦깎이 대학생, 빈궁한 학사생활, 힘겨운 등록금 마련, 약혼과 축복, 아내의 동원 활동비를 도와주지 못함, 기독교 학생 상대로 설교하는 고충, 향토학교, 아내의 제왕절개 수술로 인한 외동딸만 양육, 세계일보 기자, 천복궁 6000가정지회장, 아내의 근검절약, 아내의 시, 아버지의 강인함과 정치에 관심, 의지의 한국인 어머니의 성화(聖和), 교회 걱정.
내가 ‘자서전’이란 이름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2년 전에 홀로 되신 어머님이 하늘나라로 가신 지 17일째 되던 2022년 6월 8일이었다. 어머님을 모시고 산 세월만큼이나 후회스럽고 죄송스러워서 가슴이 먹먹한 때였다. 보이는 하늘인 부모에 대해서도 이러했을진대 보이지 않는 하늘부모님에 대해서는 어떠했을지…. 그러나 먼저 가신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께서도 이런 나를 포근하게 다독여주실 것을 믿으며, 이 글을 육신의 부모님께 바친다.
1. 내 고향, 학교, 그리고 입교
나는 1953년 1월 25일(음력)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거룡리 225번지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서홍수(徐洪洙·1929년 생)와 어머니 박원심(朴元心·1930년 생) 사이에서 출생한 2남 5녀 중 맏이다. 진도는 3,300개가 넘는 섬 중에 세 번째로 큰 섬이고 지금은 다리가 연결되어 육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 불과했다. 가장 가까운 육지(해남)와 연결하는 연육교(진도대교)도 내가 30세가 넘어서야 만들어졌을 정도다. 전기도 우리 마을에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수년 후에야 들어왔다.
나의 출생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생전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당신이 낳은 자식은 총 10명으로 이 중 2명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아들을 2명이나 잃게 되자 어머니의 상심이 너무 컸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또 고추를 달고 나오는 아들에 대한 장수를 비는 특별한 의식을 취하시게 된다. 이제 막 고고의 성(聲)을 터뜨리며 자궁 밖으로 나오는 나를 가마솥의 쇠뚜껑으로 받아내신 것이다. 반영구적인 “쇠뚜껑(소댕·진도사투리 ‘소당’)에 낳은 아이는 오래 산다.”는 속설을 믿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어릴 적 나는 쇠뚜껑에 받은 아이라는 뜻의 ‘소당바’라고 불렸다.
부모님은 당시 60여 호 되는 가난한 농촌 마을의 주민 모두가 그랬듯이 얼마 되지 않은 논밭을 일구며 어렵게 가정을 꾸려가셨다. 그러나 공부를 제법 한 내가 진도읍 소재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는 아버지가 농한기 때면 방문판매에 나섰다. 재봉틀과 괘종시계를 판 가욋돈으로 내 뒷바라지를 잘하시기 위함이었다. 집에서 30리 길이 되는 중학교(공립)에는 2년 동안 새벽밥을 먹고 걸어서 다녔다. 3학년이 되자, 어머니의 손아래 이모님이 읍내 다른 중학교(사립) 신입생인 이종사촌 동생을 나에게 맡기신다면서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마련해 주셨다. 이것이 우리 교회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자취집에는 우리 말고도 내가 다니는 중학교와 같은 교정에 있는 농업고등학교의 2학년 형 두 명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후일 같은 6000가정으로 청평수련원장을 지낸 하영호씨다. 밥도 함께 먹는 등 형들의 다정한 마음에 금새 가까워졌다. 어느 날은 영호 형이 자기가 다니는 통일교회(교역장 고 박길년)에 한 번 가보자고 했다. 그 흔한 계시나 영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형이 좋아서 따라나섰다.
그날 처음 들었던 통일원리가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피조세계’에 대한 내용이었다. 특별한 종교 경험이나 지식이 없는 중3이었지만, 어린마음에도 뭔가 가슴에 쑥 들어왔다. 눈을 틔우고 삼라만상의 법칙과 인간세상의 진리가 이곳에 다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놀랍고 희열(法悅)이 느껴졌다. “그래 이것이다!” 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날이 1968년 4월 17일이었고, 내 입교일이 되었다.
2. 성화학생 시절
1969년 초 진도를 떠나 광주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학년 2학기가 되면서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인재의 산실이었던 성화학생회의 전성기였다. 성화 16회로서 고교 3년 기간을 누문동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원리강의에 빠져들수록 원대한 꿈과 미래가 보였다. 그때 나의 교과서는 원리강론이었다. 자연히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밀렸다. ‘시대적 혜택을 받은 소명자’로 자부하며 기쁨으로 취해 살던 때였다. ‘동산의 노래’와 ‘단심가’를 입에 달고 살았다. 7일 금식을 하고, 추운 겨울에도 냉수목욕을 하고, 일요일이면 새벽같이 성지에 뛰어가고, 볼펜을 들고 사업이란 걸 나가고, 도둑기차까지 타며 서울 총회에 참석하고…. 고향 진도에서 신앙의 움이 텄다면, 이 시절은 신앙의 새순이 나는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가정에서의 핍박은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아버지께서 나를 안방으로 부르시는 목소리가 무거웠다. 뭔 일이 있을까 싶어 어머니도 들어와 계셨다. 통일교회를 이유로 학업을 멀리하고 있는 심각성을 이미 알고 계신 터였다.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는 일은 나중에 사회인이 되어서도 늦지 않다.”며 사정하듯 설득하시면서 교회와 학업 중 하나를 택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막대기로 치려고 하셨다. 그러나 당시 내 마음속에는 ‘나는 진리를 수호하려는 자’였고, 지게 작대기까지 준비하신 아버지는 ‘사탄편’일 뿐이었다. 나는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참부모님을 비롯하여 뜻길에서 박해를 받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나도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음으로써 박해의 기록을 남기리라.”고 다짐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어머니께서 울면서 매달렸다. 그 덕분에 아버지는 인내하셨다. 그러나 시간은 결국 자식쪽에 줄을 섰다. 먼 훗날 부모님은 결국 내편이 되셨고, 두 분 다 교회에 출석하시게 되고, 1992년 8월에는 3만기성가정 축복을 받기에 이르렀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다. 아버지가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는 답답한 마음에 목포의 유명한 점집을 찾아가셨다. 점쟁이 왈 “아들 가는 길 방해하지 말고 그냥 놔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영계의 협조였으리라.
3. 통일신학생에서 실천신학의 길로
아버지의 꿈은 내가 광주의 인문고에 입학을 하고 졸업 후에는 육사생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기대와 꿈이 좌절된 이후 아버지는 후기인 광주상고에 나를 보내셨다. 차선책으로 아들이 은행원이 되어 도시에서 안정된 삶을 꾸리고, 동생들을 보살펴 주었으면 하는 가난한 부모로서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뜻길’이라는 마이웨이를 향하고 있었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대학 진학의 꿈은 간절해졌지만, 집안 사정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에게 유일한 선택지는 개척전도였다. 그 결론이 왠지 모를 서러움을 안겼다.
그러던 차에 통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통일신학대학 설립 계획과 함께 제1기 신입생 모집이라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꼭 나를 위한 낭보로만 들렸다. 그 계획은 1971년 10월 8일 성화 16회 특별총회 때 공식화되었다. 참아버님은 특별총회에 직접 나오셔서 통일신학대학 설립 구상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어서 “성화 16회는 졸업 이후 전원이 이 대학에 입학하여 뜻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라!”고 당부하셨다. 아버님이 당시 4의 배수인 16수를 강조하시며, 성화 16회에 주목하신 데에는 섭리적 뜻이 있었다.
당신이 세상을 구할 메시아로서 천명을 받으신 때가 16세 되던 해였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 침략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준 유엔 참전국이 세계 16개 국가였다.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군 파병이 의결된 자체가 미스터리였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인 극동의 작은 나라를 위해 세계의 젊은이들이 피를 뿌렸던 한국전쟁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950년 10월 14일 참아버님을 흥남감옥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내적 섭리의 일환이었음을 후일 알게 되었다.
말씀이 구체화된 1972년 4월 3일. 드디어 통일신학교 개교이자 제1기 입학식이 114명의 성화 16회를 신입생으로 구리 중앙수련소에서 거행되었다. 우리는 윤세원 박사를 비롯하여 최동희 박사, 장병길•강은형•손대오•최정창•황송문 교수 등과 이외 몇 분의 기성교회 목사들로 구성된 강사진으로부터 일반 신학교에 준하는 교과목을 배웠다. 대학 공부라는 차원 높은 지식의 향유에 가슴이 벅찼다. 그러다가도 참아버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금새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막일꾼으로 변신했다. 첫 일터로 일화제약 본건물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다. 터파기를 시작으로 콘크리트 타설, 바닥 철근 작업을 우리가 도맡아 했다.
그리고 청평수련소에서 가장 긴 단체생활을 하며, 이른 아침부터 삽과 곡괭이를 들고 서로 경쟁하듯 속도전에 나섰다. 이때 수련소는 단층의 목조 슬레이트 건물이었다. 우리가 힘을 돋우는 노동요처럼 불렀던 “딩동댕동 보슬비는…”(빛나는 대한) 노랫소리는 지금도 귓전에 아련하다. 청평수련소 강 맞은편 선인봉(참아버님 명명) 자락에 통일신학대학 터닦기에 나서 구슬땀을 쏟으며 한여름을 난 것이다.
하루는 참아버님께서 작업 현장을 찾으셨다. 이때의 일이다. 나는 동기들의 강력한 추천에 떠밀려 참아버님 앞에서 춤재롱을 부렸다. “동해바다 맑은 물결 강릉이라 경포대에…”(어부의 노래) 하는 노래에 맞춰 춤도 추었다. 마치 이슬람교의 신비주의 교파인 수피즘(Sufism) 신자들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장시간 신비한 세마춤을 추듯이, 내 특유의 흥겨운 몸짓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며 기쁨을 드렸다.
참아버님은 언제나 존엄한 자리에서 인자하신 부모님으로 다가와 우리 곁에 계셨다. 지금은 참아버님의 본향원 관리 책임자로 있는 김동국씨를 비롯하여 참아버님과 독대의 기회를 가진 동기도 몇 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천성산에 오르시어 점심식사 자리도 함께 하시는 등 늘 지근거리에서 우리를 영적으로 양육하셨다.
우리는 또 천성산에 대단위 조림을 하는 등 힘들고 고될 만한 일들이 ‘오직 은혜!’로 기억되고 있다. 참아버님의 관심과 사랑이 체온처럼 느껴졌기에 그렇고, 단 한 번도 불화나 불미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모두가 맑고 순수했기에 그렇다. 그래서 나는 물론 통일신학생 출신 모두에게 청평은 영혼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돌아보니, 그 짧은 1년의 통일신학교 생활이 내 신앙의 동력이자 활력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귀하다. 나에게 추억 그 이상의 추억으로 화인(火印)처럼 새겨지게 된 것이다.
이 기간에 가장 특기할 만한 일은 지금의 천정궁이 들어선 천성산(참아버님이 명명·장락산)에 잣나무와 낙엽송 묘목을 심게 하신 일이 아닌가 싶다. 천정궁 일대가 자연림이 아닌 인공림이었던 조건이 천정궁 건축허가가 떨어지게 한 법적 요건의 하나로 작용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신학생 출신 중 한 목회자는 “깊이 생각하여 후일을 미리 계획한다.”는 의미의 원모심려(遠謀深慮)라는 삼국지 출처의 사자성어를 써서 참아버님 혜안을 드러내었다.
또 하나는 천정궁 정문 오른편에 수문장처럼 기품 있게 서 있는 일송정(一松亭)에 얽힌 사연이다. 이 소나무를 기준으로 천정궁 설계가 되었다는 데, 원래 그 소나무는 그 자리에서 나고 자랐다. 2006년 6월 13일 천정궁 입궁 봉헌식을 올리기 33년 전 여름 어느 날. 참아버님께서는 바로 그 소나무 아래 앉으셔서 신학생들을 지도하셨다. 그때 이미 참아버님으로부터 점지된 나무가 된 것이다. 8부 능선 주변에 이웃하는 나무 없이 외롭게 홀로 서있던 소나무. 지금은 일송정이란 이름까지 내려져 독야청청 굳은 절개를 상징하는 천정궁 지킴이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1973년 3월, 개교 1년만에 김영휘 협회장 명의의 수료증과 함께 후일을 기약하게 된 통일신학교. 성화 16회의 통일신학교는 이후 1977년 5월 이요한 목사를 초대 교장으로 다시 문을 연 통일신학교와 구분하여 ‘구(舊) 통일신학교’라 부르게 되었다.
구 통일신학교의 1년이란 단명(短命). 그 배경은 이렇다. 마지막 단계까지 갔다는 전북의 한 사립대학 인수에 차질이 생겼고, 당장 2년제 신학교 설립 인가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단시비 논쟁이 한창이던 통일교에 대한 비우호적인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그래서 기존 대학 인수와 우리 대학 설립 추진을 극렬하게 반대한 기성교계를 ‘죽도록’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김윤상 원장(교장役)을 통해 참아버님의 “다시 부르겠다.”는 말씀이 전해졌지만, 절망하고 좌절할 수도 있는 급작스럽고도 서글픈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던 것은 ‘무엇이든 명령만 내리시라’는 ‘성화 16회 다운’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참아버님의 약속을 가슴에 간직한 채 바로 개척전도와 군 입대, 대입과 공무원 시험 준비 등을 위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나섰다. 나는 경북 선산군에서는 단독으로, 성주군에서는 박범주씨와 함께 몇 개월의 개척전도 활동을 했다. 박범주 씨는 성화 16회가 배출한 5명의 교구장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부산교구장을 끝으로 환고향하여 현재는 남해교회장을 맡아 고향 복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1973년 12월에는 36가정 박종구 경북교구장의 요청으로 통일신학교 출신 16명 등 총 30명으로 편성된 경북제4차특별기동대(단장 김중수) 대원이 되었다. ‘구두닦이 선생’과 ‘타이거 박’으로 잘 알려진 박 교구장. 그분은 지금 구미 금오산과 고향 진도에서 함께 찍힌 2장의 사진으로 살아계신다. 두고두고 뵙고 싶은 하늘 같은 큰형님이요, 대선배님이시다.
우리는 달성군을 시작으로 군 단위 순회 전도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기동대 생활 막바지에 지원을 해서라도 하루 빨리 군대를 다녀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 길로 목포로 내려가 해병대 지원 장소를 찾아갔으나, 적록색맹인 시력 때문에 지원조차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군 입대 전까지 학생부장으로 머물기로 한 곳이 고향인 진도교회였다. 1975년 봄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전국적으로 A타입 교회를 세우던 시절이라, 진도교회도 그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용도 교역장과 더불어 교회 신축에 팔을 걷었다. 진도읍 남동리 소재 쓰레기 매립장이 교회 부지였다. 터파기를 시작하여 그해 8월 28일 봉헌식까지 마무리하게 되었다. 교회 하나를 세운 것이다.
이후 군 입대까지는 100여 일이 남아 있었다. 아마 이 기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국제승공연합 승공강사 자격으로 진도고등학교와 진도여고, 의신중학교 등 중•고등학생들은 물론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승공강의를 했다. 이때 내 나이 23세였다. 듣고 배운 말씀이 위대했기에 전하는 자도 당당했고, 뜨거웠다. 수백 명씩을 상대로는 처음 대중 앞에 서는 순간이었다.
불처럼 뜨거운 나이, 할 일도 많은 때에 그것도 꼬박 3년을 군대에 묶인다는 입대를 두고는 생각만 해도 암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딱히 피할 길도 없었다. “그렇다. 이건 국가의 부름이야.”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렇게 1975년 12월 중순 광주 31사단 훈련병으로 입소한 나는 이후 논산훈련소 행정병으로 거의 3년만인 1978년 가을에 만기제대하게 되었다.
드디어 국민의 의무라는 굴레를 벗어나 홀가분하였지만, 할 수 있고 해야 될 일을 찾아야만 했다. 협회본부에서 중앙수련소, 통일산업 등 재단 산하의 여기저기 모두 7군데의 문을 노크하다가 내려진 결론은 대학 진학이었다. 8번째 도전 만에 허락된 길이었다. 당시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던 광주 성화 후배와 우연찮게 연결되었다. 학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저녁에 중학생들을 가르치고, 낮에는 대입 전문학원에 다녔다. 그렇게 1972학번 통일신학생에서 1980학번으로 국민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교 졸업 후 8년만이었다.
4. 전국대학원리연구회(CARP) 활동
1980년 3월. 28살의 늦깎이 대학생으로 입학식을 마쳤다. 이날 곧바로 체육관 아래쪽에 있는 정릉학사(학사장 최규훈)를 찾아 입학 신고를 했다. 그해 식구 신입생은 나 혼자였고, 재학생을 포함해서도 성화 출신은 내가 유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입학 후 처음에는 부평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여동생들에게 신세를 지며, 왕복 4시간이 넘는 버스 통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 아침 등굣길이었다. 학교 정문을 막 지나는 순간 목에서 핏덩이가 넘어왔다. 중등도(경증에서 중증으로 가는 중간 단계)의 폐결핵 진단을 받았지만, 다행히 비활동성이라 남에게 전파시키지는 않는다고 했다. 1978년 말 군 제대 이후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극한 궁핍의 시기에 몸을 너무 혹사한 결과였다. 겨우 간만 맞춘 김치라도 싸가지 못한 날은 맨밥 도시락을 들고 이리저리 이동하며 같은 반 학원생들의 반찬을 실례했다. 미안함보다 배고픔이 더 강렬했으니까. 그렇게 잃어간 건강을 빨리 회복하기 위해 약과 주사를 함께 쓴 결과 6개월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고향집에서 고아 주신 뱀탕도 주저함이 없이 마셨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엑스레이 가슴 사진의 일관된 증언(?)으로 숨길 수 없는 병력이 되고 만 것이다.
그즈음 하영호 믿음의 부모로부터 마포구에 가정집을 얻어 과외를 하려는 데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나로서도 더없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한달음에 서울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유신 독재 체제에 이어 폭압적인 신군부 세력이 전면 등장하면서 1980년 5월 전국계엄령과 함께 대학 휴교령이 떨어졌다. 내 대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휴교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정릉학사장이 학사 아랫방 한 칸을 내줘 자취를 시작했다. 2학년 2학기 때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정릉학사에는 학사장 가족 3명과 함께 국민대생 6명 정도가 하숙을 하고 있었다. 자취생으로서 나의 궁상(窮狀)은 가히 역대급이었다. 잠깐 찾아온 신부에게도 그 현장이 노출(?)되었다. 바로 방 앞쪽 잔디밭 좁은 공간에 몇 개 심은 들깻잎 된장쌈이 최고의 계절 반찬이었던 때였다.
그러나 서클룸과 학사를 중심한 선교 활동에는 열심이었다. 성화학생과 신학생 출신에 군대도 갔다 온 자로서 어쩌면 당연지사였고, 실제 캠퍼스 활동 외엔 소명의식과 신명을 충족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해서였다.
그때의 활동 과정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장면 하나가 있다. 어느 날 멤버들과 함께 학교 정문에서 타블로이드판 전단지를 배포하던 중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과는 달리 한 ROTC 복장의 건장한 학생이 이를 받아들자 마자 마구 구겨서 땅에 내팽개치고 가는 게 아닌가. 아마 학내 존재감이 뿜뿜했던 CARP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기독교인이었을 것이다. 순간, 진실 자체는 물론 진심인 내 스스로가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거룩한 분노”와 함께 그에 대한 가련한 마음이 일었다. 그 대학생의 일련의 행동이 지금도 화질 낮은 동영상처럼 떠오른다.
당시 정릉학사 멤버들 중에는 공대생이었던 송용철(송용천•선문대재단이사장), 김동우(남미대륙회장)씨가 현직으로 크게 활동하고 있다. 송용철은 특유의 수줍은 듯한 미소와 함께 시내버스 학생 토큰 몇 개를 손에 쥐어준 고마운 기억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김동우의 경우는 어느 날 아침, 연탄가스로 몸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내 색시를 발견하고는 급하게 약을 사다 줬다는 색시의 말이 기억에 새롭다. 나는 그 시각 학교에서 영어 어휘력 특강을 듣고 있었다.
여기에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한•일가정으로 가정학과에 다니던 1800가정 선배다. 신앙도 공부도 본이 되었던 일본 출신 식구로 나 보다는 2살 위 누님이셨다. 더더욱 잊지 않고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게 된 배경이 있다. 그 누님으로부터 한 학기 등록금으로 상당액을 지원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학사장의 중간 역할도 있었을 것이다. 40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청평에서의 우연한 만남과 한 번의 통화 외에는 제대로 된 감사의 시간을 가진 적이 없었다. 다행히 이 글을 쓰는 동안 연락이 닿아 그간의 안부를 확인하는 반가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 멀지 않은 가까운 좋은 날에 식사자리를 마련하리라 약속까지 했다.
또 연락조차 끊겨버린 당시 정릉학사장의 안부도 궁금해진다. 여러모로 감사했던 마음을 꼭 전하고 싶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내 졸업 이후 일어난 김암산 장로 파동으로 자취를 감추거나 신앙길에서 떠나게 된 몇 후배들의 안부 또한 궁금하다.
학원이 정상화 되면서 토요일이면 종로3가 낙원빌딩 13층에 자리하고 있던 CARP(회장 김봉태) 회관을 의무처럼 들락거렸다. 전도 대상과 함께 토요원리강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대학 4년 내내 학사 내지는 중앙회 주관 행사 장소 외에는 서울 근교조차 가본 기억이 없을 만큼 나름의 믿음과 열정으로 넘쳤다. 그러나 그 열정과 믿음으로 낳은 아들딸이 제대로 없어 자괴감과 함께 하늘 앞에 한없이 송구스럽다.
5. 세계 6000가정 축복
내가 6000축복가정의 일원이 된 1982년은 대학 3년생으로 30세였다. 기다리고 바라던 축복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 ‘혼인’으로서가 아니었다. 하늘이 주신 ‘천복’을 받는다는 의미의 그런 축복결혼이었다. 그래서 “누구라도 좋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약혼 성사를 위해 중앙수련소로 갈 때는 손태우 씨가 넥타이를 빌려주고 문정국 이창응 등의 학사 후배들이 응원해 주었다. 기대되고 설레는 가운데 참아버님의 두 번째 매칭에 의해 영원한 배필로 맺어진 아내가 황채원이다.
약혼 이후 축복식을 앞둔 어느 날, 미아리에 살고 계시던 6촌형 댁에 인사차 갔다 오는 길에 들렀던 다방에서였다. 당시 대상인 아내는 혼수품처럼 ‘태극기와 회초리’를 구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애국심과 참자녀로서 자녀를 교육할 것을 상징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나는 그녀가 참으로 달라 보였다. 그만큼 ‘있어’ 보였기에 마음이 더욱 끌렸던 것 같다. 그때 길음시장 입구쪽에 설치된 여자 구두 매대 앞에서 호주머니를 털었다. 그렇게 사 주었던 구두 선물은 두고두고 씹히는 건수(件數)의 하나가 되고 말았으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당시 나는 “구두를 연인에게 선물하면 이별하게 된다.”는 속설도 몰랐다. “첫 선물이 구두? 그것도 길거리표 싸구려를!!!” 이렇게 속상했던 아내의 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지금도 언짢으면 소환되는 레퍼토리다
아내가 임지기간을 대구에서 시작하여 서울 증산슈퍼에서 모두 21개월을 보내는 동안 생활비 한 번을 보내주지 못한 일은 또 어떤가? 대학 4년 내내 거의 고학생 수준의 처지였기에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철든 자로서 성의라는 게 있고, 주체로서의 책임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래서 더더욱 무안한 또 하나의 건수가 돼 버렸다. 그 기간 스스로는 자존감이 상하고, 나에게는 섭섭하고 한심해 했을 아내의 기억을 클릭 한 번에 삭제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아내는 서울여상 시절인 1972년 1월 12일을 입교일자로 고향인 충남 금산교회와 인연이 되었다. 약혼 당시는 경기 안양교회 소속으로 잘 다니던 유한양행을 그만 두고 약혼대상자로 참석했다.
6. 국제기독학생연합회(ICSA) 충북지부장과 신혼 출발
교회 개혁과 일치를 표방하며 1981년 11월 14일 설립된 ICSA(대표 손대오) 충북지부장으로 1984년 2월에 발령이 났다. 대학 4학년 때인 1983년 전국대학연리연구회(CARP)에서 ICSA 소속으로 배속돼 활동하다 졸업하던 해에 첫 발령이 난 것이다. 전임자는 같은 6000가정 이재승씨였다.
지부 사무실이 처음에는 시내에 따로 있었고, 가까운 곳에 살 집을 얻어 신혼생활도 시작하였다. 단칸방 생활이었지만, 별다른 행사와 만남이 없으면 점심도 집에서 먹었다. 아내가 지은 뜨끈뜨끈한 밥에 잘 차려진 밥상은 신혼의 달달함을 느끼게 했다. 그때 입맛에 입력된 탓인지 난 지금도 찬밥은 여지없이 노댕큐다.
지부 사무실과 주거 공간이 함께 있는 2층 건물로 이전하게 되었다. 아내는 수시로 찾아오는 대학생들을 대접하느라 바빴다. 뻔한 살림에도 ‘밥 퍼주는 사모’로 청주에서 서울 남부지부로 옮겨갈 때까지 수고가 많았다.
ICSA 활동은 기본적으로 기독학생을 대상으로 금요정기모임, 수련회와 강연회, 일본 친선세미나 그리고 여름 신앙캠프 등의 행사가 연중 계속되었다. 서울 남부지부장 때의 일이다. 정기모임은 거의 설교에 준하는 내용을 준비해야 했다. 식구 내지는 반식구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들은 아니었지만, 대상 대부분이 서울대생이라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제목잡기부터 녹록치 않은 설교의 어려움을 절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보면, 늘 촉박한 대내외 활동 중에도 주일설교를 해야 하는 우리 목회자들의 심적 고충은 얼마나 클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1987년 7월 서울 남부지부장을 끝으로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서울 동부지부장 인사명령을 받을 때까지 ICSA 활동 중 특기할 만한 일이 있다. 우선 손대오 대표가 집필한 ‘누가 예수를 죽기 위해 왔다고 가르치는가?’라는 제하(題下)의 전단 배포다. 타블로이드판으로 제작돼 1984년 4월 2~8일 전국의 각 대학은 물론 지역 주요 교회에 뿌려지고, 부활절인 17일을 기해서는 조선과 동아일보 전면에 실렸다. 나도 회원 학생들과 더불어 충북대와 청주대 등 지역 대학과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는 중앙 소식에 더욱 신이 났다. 어느날 이른 아침이었다. 이날따라 늦잠을 잤는데, 그 반응을 궁금해 하신 손대오 대표의 전화가 걸려와 가슴 뜨끔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일요일 대형교회(복대교회?)에서 배포를 할 때는 멱살을 잡힐 뻔 했지만, 저들은 섭리 앞에 무지몽매한 불쌍한 존재들일 뿐이었다. 청주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소감문과 전화를 통해 나타난 그 반응은 놀라웠다. 이 전단 내용을 접하고 한 젊은 여성 신도가 지부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러나 통일교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쌩하니 돌아섰다. 국내 기독교계를 크게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저항과 반대만큼 새하늘 새땅을 위한 새말씀인 것이 입증된 셈이다.
2천년간 재림주님이 오셔서 전할 새 진리를 갈망해 왔던 기독교인들이 정작 참부모님의 강림을 냉정하게 뿌리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복을 받을 기회를 놓친 저들이 후세로부터 참소를 받을 것인데,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천운의 때를 놓치지 않는 지혜로운 성직자나 신도가 되기를 기도하였다.
이어 서울 남부지부(서울대 중앙대 중심)로 발령을 받았다. 1986년 3월 5일 제1기 입학식을 가진 한울향토학교(야학) 활동을 들 수 있다. 내가 교감(운영자)으로서 교내 모집광고를 통해 전원 서울대생들로 교사진을 구성했다. 봉제와 신문 배달을 하는 학생 20여 명을 모아 중학과정을 가르쳤던 일이다.
또 1986년 같은 해에 일어난 ‘5•3 인천사태’가 발단이 된 대자보 논쟁을 잊을 수 없다. 이 시대는 전대협이니, 주사파니 하는 운동권이 중심이 된 학생데모가 메인 뉴스였을 때다. 이 사태를 시발로 CARP와 운동권 간에 대자보 논쟁이 촉발됐다. 이때 논쟁의 도화선이 된 CARP의 첫 대자보가 ‘5•3 인천사태를 고발한다.’였다. 서울 주요 대학에 일제히 게시되었던 이 대자보 작성자는 바로 나였다. 얼마 후인 5월 15일 박보희 총재 강연회가 고려대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주사파가 장악하고 있던 총학생회 측에 의해 난장판이 되었고, 돌멩이 세례까지 받았다. 이때 총학생회장은 이인영이었다. 그는 최근에 들어서 통일부장관을 지냈고, 지금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맡고 있다. 사상적으로 치열했던 시절의 한 장면이다. 그때 발호했던 운동권 세력이 그들이 신봉했던 김일성 주체사상과 공산주의 이념으로부터 자유스러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현실적으로 북한 주체사상의 한계가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서울 남부지부장 시절 겪은,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은 아픈 가정사가 있다. 아내가 당시 2년여의 노력 끝에 34세의 나이로 제왕절개를 통해 첫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의의 의료사고로 아내의 목숨은 구했지만, 외동딸 말고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리수술이 아니었나 싶다. 아내의 몽시를 통해 몇 차례나 반복적으로 위험 상황을 예시했지만, 이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다.
대학 내 초교파 운동인 ICSA 활동을 통해 확인한 것은 ‘우리의 정신’이 아닌 ‘우리’와 연결시키려고 의도하는 순간, 대부분 떠나가고 조직체만 앙상하게 남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축복결혼이 ICSA 운동의 최종 목적지로 드러나면서 조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도한 것이다. 물론 우리의 목적은 축복결혼이다. 혈통전환만이 역사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길어야 대학 4년 내의 승부, 여기에 우리 운동의 한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나이 70세(從心•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 나이). 이제라도 뒤돌아보면, 나도 우리도 ‘생각’이라는 걸 좀 하면서 살자고 말하고 싶다. 참부모님의 말씀이 분명한 금과옥조라도 어떤 작가가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택하라.”는 조언을 한 것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때도 있다고 믿는다.
7.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활동
1987년 5월 15일에 그야말로 풀뿌리 통일운동의 외길을 걸어온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대표 손대오)이 창립되었다. 창립대회 때부터 함께한 나는 그해 7월 정식발령에 따라 이후 4년 동안 서울 동부(강남·서초·송파구 관할)위원회 사무국장으로 범국민 통일운동을 펼쳤다. 이때 활동은 서울동부교구장(송근식)을 중심하고 교학통련(전국대학교수학생남북통일운동연합) 예종덕(단국대) 교수를 위원장으로 모시고 ‘통반격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 활동 인증의 기념품으로 송근식 교구장께서 1989년 12월 31일자로 장식용 돌 뒷면(앞면은 참부모님 양위분 사진을 코팅 처리)에 “韓國統一의 主役으로 1年間 手苦를 記念”이라 써서 주신 것이 있다.
참아버님은 말씀을 통해 남북통일운동연합의 목표는 “전국의 모든 통•반을 사상 무장시키는 것이다.”라고 제시하셨다. 또한 ‘격파’란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사상 무장이다.”라고 규정하셨다. 이어서 “이 운동은 남북총선 때 대통령 당선에 연결된다.”고 하셨다. 이에 따라 우리 사무국장들은 관할 지역 통반격파를 위한 대회 및 관련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만큼 대학교수들을 우리의 전면에 내세워 활동했던 때도 없었으리라.
8. 세계일보•종교신문 시절
1989년 2월 1일 창간된 세계일보. 나는 1991년 12월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과 전교학신문 등에서 활동하던 멤버 중에서 차출될 즈음 편집국 기자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정치부를 시작으로 9년을 근무하다, 판매국장을 끝으로 14년 동안의 세계일보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이 기간 일반기자들과의 갈등, 파업사태 등으로 한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나는 국회를 시작으로 서울시청, 창원주재, 행정자치부 출입기자, 그리고 교열부 기자를 거쳤다. 특히 사건사고를 다루는 현장 기자에게 요구되는 순발력이 부족해 심적 부담이 컸던 경우가 있었다. 이후 판매국장으로 재직하던 중 회사 재정난에 따라 당시 정년보다 3년 정도 일찍 세계일보를 떠나게 되었다.
세계일보 퇴직과 함께 종교신문 편집국장으로 2006년 5월까지 재임하다 총 15년의 활동을 끝으로 언론계 종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2007년 4월부터는 같은 가정인 이기현 형제가 운영하는 출판사(현문미디어)에서 10년 가까이 출판 업무 경험을 쌓게 되었다.
9. 참어머님의 부르심
구 통일신학교 출신 가운데 누구는 목회자로, 누구는 대학으로, 누구는 언론·출판계에서, 그리고 누구는 자영업으로 각자의 빛을 발하고 있던 2013년 6월 6일, 나는 그 때에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2006년 5월 종교신문 편집국장을 끝으로 재단 산하 단체 또는 기관에서의 활동을 두루 마친 후였다.
천정궁의 참어머님께서 통일신학교 1년 수료 후 30년 세월이 흘러 어느덧 60대가 된 우리 신학생들을 부르신 것이다. 참어머님은 참아버님과의 추억어린 자리를 안내해 주시고, 지금의 천원궁 건설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등 깊은 사랑을 베푸셨다. 우리는 내심 참아버님의 다시 부르심의 기약이 어머님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뤄진 것이라는 데 입을 모아 믿음의 해석을 했다.
그날 우리는 천상에 계신 참아버님을 그리며, 은혜와 감사의 시간을 갖게 해 주신 하늘 앞에 뜨겁게 감사드렸다.
10. 가정회 및 교회 활동
나는 원래 통일교회의 본령은 목회요, 뜻길의 꽃이라 생각했다. 한 때 교회 분위기가 그랬다. 그런 나에게 목회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20대 때는 당시 박종구 경북교구장께서 기동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나와 또 다른 한 명을 불러 군 단위 책임자를 권면하셨으나, 아직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사양한 적이 있다. 이후 30대 때는 미국 선교사와 구 단위 책임자 권유를 받았으나, 이 또한 개인 중심한 구실을 붙여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런 나였기에 공직에 대한 채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가정회와 출석교회인 천복궁교회에서의 여러 봉사 기회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감사한 마음으로 수용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었다.
1)6000가정회 봉사
사실 나는 제15대 가정회가 출범한 2011년까지 가정회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었다. 몇 번의 총회 참석 외에는 가정회 발전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던 중에 내가 몸담고 있던 현문미디어 출판사 이기현 사장이 제15대 가정회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편집위원장으로서 ‘참사랑’(타블로이드 8쪽)지를 5회에 걸쳐 발간하였다. 이와 함께 가정회지(《참사랑》, 340쪽)를 펴내 2013년 10월 총회 시 배본하여 호평을 받았다.
나는 이어 제16대 가정회가 출범하는 총회 현장에서 제5대 장학회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후 4년간 나름의 실적을 거두며 제6대 이사장인 문효중 형제에게 바통을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2022년 6월 현재 천복궁지회장으로 3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지난 2년간 함께 모이지 못한 것은 코로나19 창궐이라는 전대미문의 묘한 세월 탓으로 돌린다.
2)천복궁 천심교회 봉사
교회 봉사는 2013년부터 3년간 동부운영위원장 직무를 수행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2016년부터 2년 동안은 제직회장으로서 교회 살림을 꾸렸다. 스스로 기준을 세워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하고 싶다. 십일조 중 1%를 기금으로 적립하고, 형편이 나은 식구들도 이에 동참하여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국제가정들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정관까지 만들어 추진했지만, 이해 부족 내지는 형편 부족으로 중도 포기하게 된 일은 큰 아쉬움 중의 하나다.
재임기간, 재정을 통해 목회자 사기와 그 실적을 우선하는 목회자 측과 예산의 효율적 집행을 중시하는 교인들 사이에서 그 접점을 찾아야 되는 제직회를 이끄는 일이 간단치 않았다. 때로는 목회 책임자와 얼굴까지 붉히며 언성을 높였던 적도 있었다.
우리 세계는 그동안 절약이 미덕은 아니었다. 필요하면 돈은 생긴다는 믿음으로 쓰고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와 식구 간에 불신이 생기고, 불신이 생기면 조직은 약해졌다. 조직 결속력이 약화되면 성장은 커녕 현상유지조차 어렵게 되는 이치, 이는 조직 퇴행의 순리다. 이를 깨달은 교회 봉사 기간이었다.
11. 아내, 황채원
오래 전 아내는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냐?”고 묻고는 자신은 ‘돈’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성장과정에서 받은 영향이 컸을 것으로 나는 이해하였다.
아내는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되신 홀어머니와 3명의 동생들을 책임지는 처녀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일찍부터 지게 되었다. 자신에게 기대는 강도가 강해질수록 그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여고 졸업 후 첫 직장으로 들어간 유한양행 다닐 때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주로 가장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무거움에 관한 것이었다.
월급을 타더라도 5인 가족의 생활비, 동생들의 학비부터 걱정해야만 했다. 그 현실 때문에 한창 멋을 부릴 나이에 그리 비싸지 않은 옷 하나를 사는 데도 몇 번씩이나 망설였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 퇴사를 미루다 29살이 되어서야 6000가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로는 꽤 늦은 나이였다. 아래 남동생이 은행에 취직이 되면서 비로소 탈출구 같은 축복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체라고 짝 지어진 사람이 처한 환경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나이에 대학 3년생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여우를 피하니까 이리가 나온다.”는 우리 속담이 떠올랐을지 모른다. 나를 피해 가려고도 했지만, 그럼에도 믿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했다.
사실, 아내가 임지기간을 마칠 당시 내 사정으로는 서울에서 반지하 전셋집 하나도 얻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물론 많은 형제가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반(半) 공직의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과 세계일보 식구 직원으로서는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는 정도의 박봉이었다. 경제적 자립이 절박하였다.
그러다 우연찮게 그것도 조금은 급하게 뛰어든 게 밥장사였다. 아내는 식당의 식(食) 글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미각은 원래 특별한 데가 있었다. 사모로서 대접한 학생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 “밥이 맛있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밥을 더 달라고 하며 칭찬을 하던 것도 밥장사를 할 용기를 갖는데 도움이 되었다.
부동산중개사무소를 통해 위치도 좋고, 손님도 넘친다는 강동성심병원 바로 인근의 약 20평 규모 식당을 소개받았다. 보증금에 시설비 3천만원 전액은 은행에 다니는 남동생에게 빌려 가슴 떨리는 대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딸이 3세 때인 1989년 늦가을이었다. 때 맞춰 환갑을 치른 고향 부모님도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상경하여 함께 살며 도와주시게 되었다.
아내는 그렇게 시작한 장사를 10여년 계속하였다. 식당에서 호프집, 게임방으로 업종을 변경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식당을 운영할 때는 휴일은 물론 설날조차도 쉬지 않았다. 눈치코치 없이 하루라도 쉬며 하자는 내 말에는 “생각이란 게 없냐?”며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 고생한 만큼 돈도 벌었지만, 시댁과 친정 양쪽 다 넉넉치 못한 데다 딸린 식구들이 많아 나가기도 많이 나갔다. 아내는 마음도 그랬지만 손도 컸다. 도움 요청에는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는 것으로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럼에도 강동구 성내동에 아파트를 장만하고, 갭투자로 집을 또 몇 채 소유하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순풍만 계속 불지는 않았다. 아내의 1순위 목표 경제복귀가 쉬이 되질 않았다. 재복은 따로 있나 싶다고 했다.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느즈막에 개명까지 해 가며 경제 복귀! 경제 복귀! 하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도 아내는 기도한다. “축복가정으로서 체통은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막내동생에 부모님까지 모시는 상황에서 가장으로서의 나는 늘 아내에게 미안했다.
지금 아내는 집에서의 살림은 별 지장이 없으나,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어지럼증 치유를 위해 양방 한방을 두루 찾았으나, 근본적으로 호전되지는 않았다. 집을 떠나 멀리 떠난다는 데 두려움을 늘 호소한다.
본 지면을 통해 아내에게 특별히 전할 고마움이 있다. 아내는 우리 7남매 모두와 한 번씩은 같은 집에서 살았다. 몇 달에서 몇 년씩은 함께 살았다. 남동생의 경우는 부모님과 우리와 함께 살면서 대학도 다녔다. 그럼에도 아내는 시동생들과 불편함이 없었고, 지금도 스스럼이 없이 가족처럼 지낸다. 이제는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과는 15년 가까이 한 집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홀로 되신 이후에는 곁에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시기 전 3년 가까이 한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한 번도 그 모심의 현실을 거부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맏며느리로서 당연지사로 여겼다. 아내는 어머니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 불평 한 마디 한 적이 없다. 내 기억으로는 단 한번도!
아내는 “부모는 보이는 하나님이니, 나는 그리 알고 살겠다.”라고 한 말을 스스로 잘 지킨 듯하다. 이런 아내에게도 시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이 있었다. 스스로가 원하고 행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2022년 5월 25일 오전 7시 어머님의 발인일이었다. 지상에서는 어머님의 얼굴을 마지막 대하는 순간이었다. 관을 붙든 아내는 손자 하나를 안겨드리지 못한 것에 죄송함을 전하면서 애써 눈물을 참는 모습을 스치듯 봤다. 인간사를 뒤로 하고 떠나시는 어머님께 위로가 되길 바랐다. “근심도 가난도 살아있을 때 느끼는 소중함이다.”라는 싯구를 봤다. 아내가 가슴에 안고 살 이 아픔 또한 살아있음의 증좌 아니겠는가?
아내는 ‘내 사는 동안’이라는 시 한편을 참사랑지에 기고한 적이 있다.
“…파란나라 이야기만 하고 어찌 산다니! 하늘나라, 구름나라, 신기루 이야기만 하고 어찌 산다니!…오늘도 자취 없이 왔다 날 저물면 또 다시 빈손. 날마다 초조로이 아쉬움만 남는다.… 아직도 속죄할 시간이 남아있으므로 나는 행복하다.”
12. 내 부모님에 대한 추억
아버지는 1929년 11월 26일 생으로 고향 진도에서 중학교까지 마쳤다. 하지만, 갓난아기 시절에 사고를 당하여 한쪽 눈을 실명하신 신체적 불리함 때문에 그럴만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로서의 담력과 의로움, 예인 기질을 타고 나서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다. 운동신경이 좋아 면 씨름대회 우승으로 황소까지 타셨다.
특히 정치에 관심이 많아 진도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관여하고, 야권 대선 후보의 연설을 듣기 위해 부산까지 다녀오실 정도였다. 완전 농사꾼은 되지 못해 그만큼 어머님의 고생은 가중되었을 것이다. 특히 아들(나)의 교육과 관련해서는 헌신적이셨다. 나에게 그런 아버지가 없었다면, 어찌 낙도(落島), 깡촌의 진도 출신으로 이만큼의 ‘나’라도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싶다. 그 이면에 여동생들의 희생도 컸다. 제때 공부도 하지 못하고 봉제공으로 전자회사 여공으로 심지어 남의 집에 보내지기까지 하며 집안을 도운 효심 깊은 동생들이다. 맏이로서 두고두고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이럴진대 아버지의 마음은 그때 어떠했겠는가?
이런 여동생들의 희생을 뒤로 하고 선택한 이 길이요, 여기까지 왔다. 따라서 믿음의 중심이 흔들려 멈칫이라도 하면 어찌 가슴저리며 움츠리지 않으리요. 내가 택한 길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어 그저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이런 아버지의 나에 대한 꿈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로 정치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웅변을 하게 지도하셨다. 그 덕분에 중학교 3년 내내, 그리고 군 시절에도 자대인 논산훈련소에서 웅변으로 훈련소장 상장을 꽤나 받았다. 이등병 때부터 일주일 포상휴가를 나가게 된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내가 후일 세계일보에 입사해서 정치부 기자로 출발했으니, 아버지의 기대도 컸을 것이다.
1992년 이기택 총재의 꼬마민주당 시절이었다. 그때 그곳 당사에서 인사를 나눈 동향(同鄕)의 박지원 전 국정원장과의 인연은 계속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에게 정치권을 향한 권력의지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들의 성향을 아신 아버지가 크게 아쉬워 하셨을 것은 자명하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담임선생과 연결시켜 과외를 받게 하셨다. 그리고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불편한 교통 사정에도 가끔 먹을 식량과 음식을 지고 들고 오실 정도로 적극적이고 자상하셨다. 눈물도 많은 이런 아버지셨기에 아들딸 모두는 다른 집과 달리 아버지에 대한 정을 더 많이 느낀다.
2010년 11월 29일 82세를 일기로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의 마음은 늘 풍족치 않으셨다. 그래서 “돈을 무서워하라.”고 엄하게 내리치는 죽비 같은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버지는 크게 부담되지 않을 외식 제안에도 한번을 응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어디에서든 빈 박스 등 재활용품을 밤낮으로 수집하여 한푼 두푼 모으시는 데 재미를 붙여 사셨다.
아버지가 죽음을 맞기 4일 전 정오쯤이었다. 아버지는 강동성심병원 병상에서 미리 써 놓으신 손바닥만한 쪽지의 유언장에 당신의 인장을 찍어 나에게 건네주시고는 입원 21일만에 성화하셨다.
지금도 그 유언장을 대할 때마다 울컥해지는 구절이 있다. “정권아 너에게 신세 많이 지고 간다.” 아무리 따져 봐도 나에게 신세 진 게 전혀 없는, 아니 전적으로 그 반대인 데도 그런 마음을 전하셨다. 참으로 존경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 아버지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꿈도, 3대 가정도, 내놓을 만한 부(富)도 어느 것 하나 이뤄드린 게 없는 못난 불초자(不肖子)다.
“아버지, 죽도록 죄송합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곱기도 하셨던 나의 어머니(1930년 8월 19일 생). 우리 부부는 그런 어머니를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칭했다. 그야말로 부르튼 손발이 아물 새가 없도록 생활력이 강하셨다. “우리 동네에 나만큼 고생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지긋지긋하다고 하시든 농촌생활을 정리하고 상경하신 것은 환갑을 맞아서였다. 어머니는 심장 수술에 당뇨, 고혈압, 관절염 등 온갖 병으로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하셨다. 그럼에도 구순 노인이 걷기운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 등 생활습관도 철저하셨다. 건강으로 인해 자식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는 모성의지의 발로였을 것이다.
태생이 살갑지 않아 자식들에 대한 애정 표현에는 박했다. 대신 제 새끼들 제때 밥이라도 굶길까 봐 새벽부터 온종일 밭으로 논으로 뛰시는 것으로 그 표현을 대신하셨다.
어머니는 이제 내 곁에 안 계신다. 영원한 세상으로 가신 지 40일이 지났다. 나는 고생하신 어머님을 추억하며 특별히 두 가지를 감사드리고 싶다.
어머님이 홀로 되신 후에는 새벽녘이 되면 하얀 예복에 정화수를 떠놓고 촛불기도를 하셨다. 장남 가정이, 당신의 아들딸들이 잘 되기를 빌어주신 것이다. 그 기도의 힘이 우리 7남매를 지켜주신 것이리라. 부모 먼저 간 자식 없고, 서로서로 의지가 되고, 굶지는 않고, 큰 병치레 없이 오늘을 살아가게 한 것은 다 어머님의 기도의 힘이라 믿는다. 그래서 고맙고 감사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머니는 평소 기도를 통해 생을 마감하기까지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간구하셨다. 그리고 잠을 자듯이 임종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하늘은 정말 그 기도에 응하셨다. 어머니는 2022년 3월까지 주간노인보호센터에 잘 나가시다 그곳에서 코로나에 감염되셨다. 4월 19일 자가격리 해제 후 40여 일이 지나면서 갑작스럽게 폐수종에서 폐렴과 중증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2차례 119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리고 3번째 병원에 입원하신 뒤 5월 23일 오후 입원 12일만에 성화하셨다. 특별한 고통 호소도, 연명술 고민도 하지 않게 하시고, 정말 잠자듯이 그렇게 보내시다 그냥 편한 모습으로 가셨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물론 동생들도 어머니께 크게 감사드린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맡겨지지 않아서 그렇고, 오랜 시설 생활로 경제적 부담이나 마음의 짐을 지워주지 않아서 그렇고, 그것도 좋은 계절 5월에 떠나셔서 그렇다. 이건 분명 하늘의 기도 응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떠나셨지만, 내 편함을 위주로 모신 것이 아니었나 하는 후회스러움만 가득하다. 돌아보면, 내 얕은 효심에 어머니가 감동하고 나 또한 감동한 일이 있기는 했는지, 그 자문조차 두려운 마음이다.
“어머니, 용서해 주세요~~~!”
13. 여생을 앞에 두고
내 여생이 얼마나 될까. 축복가정에는 몇 가지 본분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기본은 자녀 번식이라고 본다. 친자녀와 믿음의 자녀 번창. 그러나 이 기본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딸 하나를 둔 사연에 자식운이 없다고 위안을 삼아야 할지…. 믿음의 자식에 있어서도 그렇다. 긴 세월, 노력을 안 한 건 분명 아닌데 변변히 남아지지를 않았다. 왜 왜 몸으로 낳은 자식에 마음으로 낳은 자식복도 이리 박한가. 추수할 것 없는 가을의 허전한 만큼이나 쓸쓸하고 마음 서럽다. 하나님, 참부모님께 한없이 송구스럽다.
그렇다면 나의 신앙의 현주소는? 언제부턴가 나의 신앙이 혼란스러워졌다. 믿음의 구호는 가득하지만 예언인양 말씀하신 참아버님의 어록에서처럼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혼돈의 시대일까.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하(何) 수상한들 반세기 이상을 따라 나온 이 길인데 예서 말 수는 없지 않은가?
두 세 사람이 모이면 기도가 아니라, 교회 걱정에 ‘힘쓰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인류가 그토록 소망해온 메시아 참부모를 독점한 우리. 1세대는 가고, 2세대는 지고, 3세대가 떠오르는 세월 동안 우리가 선언한 승리의 깃발은 대체 얼만가? 행여 무리를 지어서 우리만의 천국을 찬양하고 있지는 않은 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바라보는가? 답은 분명하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다. “이건 아니다!” 떼 창(唱)처럼 들려오는 이 외침은 대전환의 때를 알리는 광야의 소리가 아닐까?
문제는 나 자신이다. 어느덧 칠순인 나의 지난날은 어디에 쓰임이 되었는가? 그리고 나의 여생. 나에게 공(公)을 향한 성심은, 제자로서의 의무 의식은 얼마나 남아있는 것일까.
나는 부복(俯伏)한 채, 첫정은 어디 두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핑계에 쉽게도 뇌동(雷同)함을 고백하며 두 손을 모은다. 그리고 느보산에 올라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에 담는 허락 외에는 정작 그 땅을 밟아보지 못한 모세노정의 교훈을 잊지 않길 기도한다.
“하늘부모님 천지인참부모님, 가라 하신 길이 있기에 고백하고 간구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