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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師範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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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와서 스크랩 밀양 답사/07.9.21(금)
윤상홍 추천 0 조회 20 10.01.03 14: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9월 21일 경북교육삼락회 제7차 문화재 답사행사  여행지 밀양을 다녀왔습니다. 편집 솜씨가 미흡하지만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휴대폰으로 촬영한 사진이라 선명도가 떨어짐을 이해하여 주십시오./윤상홍

 

대중가요의 작곡가 박시춘의 생가터가 영남루 입구에 위치해 있는데

거기에 그의 흉상이 지키고 있었다.

 

 `

 

 

영남루는 조선시대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루

이며,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풍광은 조선 16경 중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낮 기온이 33도로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길손을 누각 마루에 붙들어 놓아 간담이

서늘하도록 시원하였다.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의 절벽위의

영남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은 절경

 

영남루는 고려 공민왕(1365년)때 부임한 밀양부사 金湊(김주)가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1843년 李寅在부사가 중건하였다. '영남제일루'와 '영남루'는 그의 아들인 이증석(11세)와 이현석(7세) 형제가 썼다고 한다. 

 

 

 

암반의 형상이 흡사 꽃봉오리 같다고 해서

'石花'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영남루 경내 마당에 있다.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며, 영남루 아래 죽림 속에 사당을 지어 혼백을 위로하고는데, 매년 '밀양아리랑축제'때 선발된 모범 규수들이 제관이 되어 아랑이 죽은 음력 4월 16일 제를 올리고 있다. 아랑 영정은 육영수 여사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솜씨를 빌어 1963년에 하사한 것이다. 

 

 

 

 

아랑이 죽은 곳 '아랑 遺址' 

 

김종직(金宗直)은 누구인가? 

김종직 (金宗直 ; 1431~1492)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문신으로서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계온(季) ·효관(孝)이고 호는 점필재(畢齋)이다. 그리고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경남 밀양 출생이다.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뒤 형 종석(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1453년(단종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특히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目)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1485년 사복첨정(司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했다.

  그리고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1492년 죽은 뒤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에 묻혔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제자인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것은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김종직의 학문은 무오사화 때 그의 많은 글이 불살라진 관계로 전체적인 모습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정몽주와 길재의 도학사상(道學思想)을 이어받아 절의(節義)와 명분을 중요시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고 했다. 또한 〈소학〉과 사서(四書) 및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강조하였으며, 오륜(五倫)이 각각 질서를 얻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이 자기의 직분에 안정하도록 하는 인정(仁政)의 실시가 이상적인 정치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향교 교육과 인재의 등용을 매우 중시했다. 한편으로는 경술(經術)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당시 대명사대외교(對明事大外交)에서 꼭 필요하였던 사장(詞章)의 학문을 겸비하기도 하였다. 김종직의 문학세계는 명분·절의·수기(修己)에 근간을 두는 여말선초의 처사문학(處士文學)과 송시(宋詩)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채(文彩)를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이(理)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나, 경(經)과 문(文)을 다같이 중시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김종직의 학문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한 김굉필·정여창,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린 김일손·유호인·조위, 사회적인 체제와 구속을 벗어나려는 방외인문학(方外人文學)의 입장에 선 남효온(南孝溫)·홍유손 등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림파의 학문은 무오사화·갑자사화로 한때 침체했다가, 김굉필에게서 배운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 등에 이르러서 크게 융성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米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선생 생가

 

 

 

강호 김숙자가 처음 거처를 정했던 곳이 '추원재'이다.

아들 점필재 김종직이 나서죽은 곳. 묘소가 뒷산에 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전후하여 비석에 구슬 같은 땀이 흐르는 신비한 비석.이곳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염려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하여 신성시한다.

임진왜란 때 승려로서 국난을 극복한 사명당(1544-1610)의 충의의 높은 뜻을 새긴 비석으로서 영조 18년(1742년)에 대사의 5대 법손 南鵬이 건립. 재질은 오석. 전면엔 松雲대사(四溟)의 행적, 후면엔 스승이신 西山대사의 공덕을 적었다. 

 

 

 

 

 

 

사명대사의 생가터

 

 

 

사명대사 기념관

 

 

 

사명대사  친필

 

승병활동 시의 활

 

 염주

 

 

 

 일상 용품

 

 

일본에 건너 가 납치, 억류 중이 조선 인재 3500여명을

구해서 돌아 왔다.

 

조선초 장수였던 어변당 朴坤장군이 무예와 학문을 닦던 곳. 박곤은 무과에 응시 초시, 복시, 전시를 거쳐 21세에 장원급제, 세종1년(1490년) 최윤덕 장군의 막하로서 대마도 정벌, 남해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중앙에는 忠孝祠가 있고, 어변당 앞에는 박곤이 부모 공양에 필요한 고기를 길렀다는 연못, 赤龍池가 있다.

 

 

 

 

卞季良(1369(공민왕 18)~1430(세종 12).)
 
조선 초기의 문신.
정도전·권근의 뒤를 이어 조선초 관인문학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본관은 밀양.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옥란(玉蘭)이며,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 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郞將)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건국 때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郞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태종말까지 예문관대제학·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지내다가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과 권근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 華山別曲〉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정도전에게 바친 〈봉정정삼봉 奉呈鄭三峰〉에서도 정도전이 완벽한 인재라고 칭송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 樂天亭記〉·〈헌릉지문 獻陵誌文〉을 편찬했다. 저서에 〈춘정집〉 3권 5책이 있다. 거창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내해 죠타 하고/변계량

내해 죠타 하고 남 슬흔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義) 아니면 좃지 말니

 우리는 천성(天性)을 직희여 삼긴 대로 하리라.
                                                            
   <청구영언, 해동가요>

 

 

 

 

 

작원관(鵲院關 )

 밀양 삼랑진 검세리에는 작원관이 있다.

영남지방의 동·서와 남북의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이곳은 여행하는 관원의 숙박소 기능과 왜적을 공격에 방어하는 기능, 작원진이라는 나루터로 출입하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는 기능을 하였다. 즉 원(院), 관(關), 진(津)의 역할을 겸한 곳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밀양부사 박진 장군이 몰려오는 왜적을 맞아 결사적으로 항전을 펼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혹시 경부선 열차를 타고 삼랑진역에서 부산방향으로 1분정도 가면 좌측에 작원관의 항일운동

기념탑을 볼수 있으니 참고 하였으면.....

[교통]55번고속도로 삼랑진IC하차/삼랑진발전소방향/검세리입구에서 우회전(고속도로에서

5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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