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제58차 대구민학회 답사 안내
*일시 : 2024년 3월 10일
*장소 : 경산 일대
*제목 : 삼 성현의 고장 경산
*회비 : 2만원(개인차량으로 이동시)
3만원(개인차량 없을시- 차량제공)
입금 계좌번호 : 농협 352-1859-5322-53 양재명
선착순 20명 마감(통장 입금 순으로)
통장 입금 후 꼭 문자주세요(중요-식당 예약관계로)
*사무처장 김채숙 (010-5018-0039)
-개인 차량이 없는 분은 경산 역 후면쪽에 9시 30분까지 집결 바랍니다(승합차로 이동)
*모이는장소 : 경산시립박물관 주차장 3월10일 오전 10시까지
답사 코스 이동은 각자 차량으로 이동합니다.
회원 여러분등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답사 코스 : 경산시립 박물관 – 초개사,도동재 – 자인 계정숲, 원터 - 점심 – 환성사 -무학농장 -상여집과상여
준비물: 선글라스 ,물
문의 연락처
- 회장: 양재명 (010-3537-2255)
- 사무처장: 김 채숙 (010-5018-0039)
*위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인해 변경 될 수도 있습니다.
▶ 제목 : 제58차 대구 민학회 답사 안내
▶ 날짜 : 2024년 3월 10일(일)
▶ 장소 : 경산 지역 일대
▶ 주제 : 삼 성현(원효, 설총, 일연)의 고장 경산
▶ 가는곳 :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 도동재 ― 자인 계정숲 ― (점심) ― 제석사 ― 환성사 ― 무학산 무학농장및 상엿집
1.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경산시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은 경산 출신의 세 성현을 기리는 역사문화공원이다. 남산면 인흥리 일원에 사업면적 262,462㎡, 총사업비 513억원을 투입해 2009년 12월 착공하여 2015년 3월에 개장했다.
주요시설로는 삼성현 콘텐츠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삼성현역사문화관, 전통 국궁장, 이야기가 있는 둘레길, 야외공연장, 야외 썰매장, 어린이놀이터, 사직단, 암벽타기 체험장, 자라지, 한방 족욕 체험실 및 각종 편의시설 등이 있다.
삼성현역사문화관은 "삼성현, 민족문화를 꽃 피우다"를 전시 콘셉트로 국내외 30여개 기관에 흩어져 있는 삼성현 관련 자료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 체험공간이다. 지상 1층은 '삼국유사'의 원효 전기를 새긴 전통서각, 체험공간인 온가족실, 기획전시실이 있으며, 지상 2층은 원효실, 설총·일연실, 삼성현 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 있는 아카이브실로 구성되어 있다.
주말이 되면 경산지역 뿐만 아니라 인근 대구지역에서 가족 단위의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로 북적인다. 봄부터 가을까지 주말마다 음악회 및 각종 공연이 열린다. 시민들이 즐겨 찾는 가족공원으로서 삼 성현의 정신이 현대적으로 계승되는 현장이다.
♧ 화왕계 이야기
봄날 꽃의 왕 모란이 꽃들 위에 군림해 있다. 꽃들은 다투어 궁궐로 가 화왕(花王)을 뵙는다. 절세미인 장미가 아양을 떤다. ‘첩이 일찍이 왕의 큰 덕을 흠모해 찾아왔으니 행여 버리지 않으시면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하겠나이다.’ 이때 베옷 차림 할미꽃이 화왕에게 곁에서 일하기를 청한다. 할미꽃은 요염한 여자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간언한다. 그러나 화왕은 현란한 자태의 장미에 빠져 할미꽃의 충언을 듣지 않는다. 할미꽃이 다시 왕에게 분연히 아뢴다. ‘예로부터 왕이 요염한 여인을 가까이하면 충언을 멀리하여 마침내 패망을 부르지 않은 적이 드뭅니다. 서시(西施) 같은 요희(妖姬)가 나라를 뒤집고 맹자 같은 현인이 뜻을 얻지 못했습니다.’ 할미꽃이 곁을 떠나려 하자 왕도 그제야 잘못을 깨닫고 사과했다.
이에 감동한 신문왕은 ‘이를 교훈으로 삼도록 하라’며 이 이야기를 들려준 설총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다. 설총은 우화를 통해 간신을 멀리하고 충신을 가까이해야 나라가 바로 서며, 향락을 멀리하며 도덕을 지킬 것을 아뢰고 있다. 후대에 이 글이 ‘화왕계(花王戒)’라 불리는 까닭이다.
2. 도동서원(道東書院) : 경산시 남산면 하대3길 13-6
도동서원은 유학자 설총 선생을 모시며, 도동서원에서는 봄 향제가 봉행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설총 선생만을 모신 서원이다. 지역민들이 1894년 도동단을 세워 설총을 제향하다가, 1923년 도동재를 건립했다. 도동재는 ‘설총이 유곡에서 경주로 가면서 쉬어가는 동쪽 길목에 세웠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후 2010년 도동재를 도동서원으로 변경했다.
지난 2007년 4월 지역 유림들의 건의로 경산시가 1억2,000만원을 들여 사당인 경모사를 건립했으며, 이곳에서 매년 봄 향사를 지내고 있다. 경모사 옆에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세원 신도비와 설총의 가묘가 있다.
3. 자인 계정숲과 한 장군 묘
계정 숲은 구릉지에 남아있는 천연 숲이다. 숲은 이팝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말채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의 낙엽수와 활엽수가 섞여 자라고 있다. 계정숲 안에는 한장군놀이 전수 회관이 있고, 조선 시대의 전통 관아인 자인 현청의 본관이 보존되어 있다.
자인 지역에서는 ‘한 장군’이라는 전설적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전해온다.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이 지역에서는 수호신처럼 받드는 인물이다. 현 자인중학교 공사 때 유골이 출토되었고, 그 유골을 수습하여 현재 자리에 모셨다. 자인 단오제 때 제사를 지내고, ‘한장군 놀이’라는 전승 집단무를 공연한다.
왜구가 쳐들어와 도천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 장군은 누이를 시켜 아녀자들이 고운 옷을 입고 버들못에서 강강술레 춤을 추도록 지시했다. 버들못가에서 추는 화려한 집단무에 왜구들이 정신을 빼앗긴 틈을 타서 왜구를 섬멸했다고 한다. 버드나무가 많았던 버들못은 아쉽게도 자인공단 조성 때 매립하고 말았다.
4. 제석사(帝釋寺) : 경산시 자인면 북사안길 18
제석사는 원효대사(617-688)의 탄생지에 지어진 사찰이다. 원효대사는 신라 고승으로 통불교(원효종, 분함종, 해동종)을 제창하고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고 한국 고대사, 철학사, 사상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며,
독창적 지식체계의 위상과 가치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 꾸준히 재조명되고 있다.
원효의 어머니 조씨 부인이 유성이 품에 안기는 태몽을 꾸고 원효를 잉태하여 만삭이 되었을 때 불지른 북쪽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산기를 느껴 남편의 옷을 밤나무에 걸어 산실을 마련하고 해산하게 되었는데, 이때 하늘에서 오색구름이 내려와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밤나무 열매의 크기와 굵기가 보통과 달라 사라울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후에 원효는 자신이 태어난 밤나무 옆에 절을 지어 ‘사라사’라 하였다.
제석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출가한 후 생가 곁에 지어졌던 사라사가 폐사되었다가 400여 년 전 밭갈이하던 농부가 불상과 탑신을 발견하고 사찰을 복원했다는 설화가 있다. 제석사에 남아 있는 석조좌불과 부서진 탑신, 석등 연화대석 등이 신라말기의 것으로 추정하며, 사라사의 후신이 제석사임을 짐작케 한다. 제석사에서는 원효대사 탄생일인 음력 5월 4일 매년 다례제와 원효·설총·일연 삼성현(三聖賢)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삼성현 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 되면 경산시에서 주최하는 경산 자인단오제에 참여한다.
5. 환성사(環城寺) : 하양읍 교리 150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말사이다. 835년(흥덕왕 10)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고, 고려 말에 불타버린 것을 그 뒤 다시 중창하였으며, 1635년(인조 13) 신감대사(神鑑大師)가 중건하였고, 1897년(광무 1)에 긍월대사(亘月大師)가 중창하였다. 1973년 대웅전을 해제 보수하였고, 1982년에 명부전을, 1995년에 요사인 감로당(甘露堂)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심검당(尋劒堂)·성전암(聖殿庵)·수월관(水月觀)·산령각·천태각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보물 제56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고려 말 조선 초의 건축으로 추정된다. 약 1.6m 높이의 석단(石壇) 위에 정면이 5칸, 측면이 4칸이며, 1974년에 복원되었다. 대웅전 안에는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미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39호)이 있다.
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는 심검당은 대웅전 옆에 있는 강당(講堂) 건물로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며, 근래에 양와(洋瓦)로 새로이 단장하였다.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띤 심검당은 은해사 영산전(靈山殿)보다 먼저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1976년에 해체 중수되었다.
대웅전 앞에 고려시대에 조성한 석탑과, 입구에 석주(石柱) 4개가 서있다. 석탑은 일명 연화탑이라고도 부르는데, 상층 기단부 갑석과 초층 탑신 사이에 별석(別石)으로 된 매우 큰 괴임돌을 받친 매우 드문 형태를 하고 있다. 또한 석주는 예전에 있었던 일주문(一柱門)의 기둥이다. 그밖에 통일신라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방형(方形) 석조(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0호)와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주형(舟形) 석조(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2호)가 남아 있다.
『화성지(花城誌)』에 의하면 이 절이 조선시대에 임고서원에 속하여 공물을 드렸는데, 숙종 때 박서봉(朴瑞鳳)과 황윤중(黃允中)이 여러 번 상소하여 하양향교(河陽鄕校)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월관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1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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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성사 行
조용미(시인)
환성사의 수미단을 보고 돌아온 날 밤
잠을 설쳤습니다
연꽃과 모란 매화 국화 지저귀고 새들은
향기를 뿜어내고 들짐승들
밤새 머리맡을 어지러이 날아다녔습니다
반야월 청천 지나 하양 가는 길
밤에 지난 길들이 서툴게 펼쳐집니다
탱자나무 울타리 좁은 길과 눈 녹은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 수미단을 보러 갑니다
일주문 아래 길을 만들며
절을 찾아다닙니다
몸에 길이 새겨집니다
6. 무학산과 무학농장, 상엿집
▶ 무학산과 무학농장
“푸른 목장에 아침 햇빛 솟았네. 찬란한 이상을 가슴에 안고 진리의 상아탑 봉사의 길로...”
이 노랫말은 경산시 하양읍에 있는 무학중·고등학교의 교가다. 노랫말에는 1960년대 하양지역 주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무학산을 개간하여 무학농장을 만들고, 궁극적인 빈곤퇴치를 위해서는 학교를 설립하여 도시로 유학 보내는 부담을 줄이고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며 무학중·고등학교를 설립한 고 이임춘 교장 신부님(펠릭스)의 삶과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무학산은 신부님이 직접 지은 노랫말처럼 하양 근동의 주민들에게 푸른 목장에 솟은 아침 햇빛처럼 꿈과 희망을 선물한 거룩한 산이다.
또한 무학농장은 영국 명문가의 딸로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재원이 23세의 나이로 우리나라에 와서 일생을 한국의 사회복지를 위해 헌신한 양 수산나 선생님(Susannah Mary Younger, 이하 수지 선생님이라 칭함)의 숭고한 삶의 자취이기도 하다. 우리와 동시대에 거룩한 이타행(利他行)의 삶을 사신 분들의 치열했던 삶의 현장인 무학산을 올라보자.
학이 날아올라 항상 하늘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무학산(舞鶴山)은 하양읍 대학리·교리·사기리와 와촌면 강학리에 걸쳐 있는 해발 588.4m의 하양읍 진산(鎭山)이다. 정상에서는 하양읍 시가지와 금호강 물줄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무학산 올라가는 길
오르는 길은 정상부 하단에 위치한 경산 상엿집까지 도로가 나 있어 자동차로 쉽게 갈 수 있다. 이 길은 무학농장을 개간로 할 때 5.16 군사정부 군인들의 지원으로 개설됐다. 지금은 옛 무학농장 입구를 지나 환성사까지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
무학산 정상부는 남북으로 길게 지붕의 용마루처럼 뻗어있고 평탄하여 한때 화전민들의 터가 되기도 했고, 약 30만 평에 이르는 무학농장의 기반이 됐다.
정상에서 북면의 가파른 벽면을 내려가면 원효대사가 수도한 석굴과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기도하며 마신 ‘아동제일약수’라는 약수터가 있는 신라대 고찰 불굴사가 나온다.
남동쪽으로 발달된 산기슭은 배산임수의 명당 조건을 갖춘 하양 고을의 터전이다. 교리에는 하양향교와 육영재(조선시대 인재 양성을 위해 건립된 지방교육기관, 경북도 기념물 제178호)가 있고, 금락리 부호리 일원에는 대구카톨릭대, 경일대, 호산대가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하양읍 대학리와 와촌면 소월리 일원에 대구경북자유경제구역 경산지식산업지구가 조성되고 있다.
무학산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무학산 푸른 목장의 아름다운 풍경, 무학농장과 수지 선생님, 무학산이 가진 문화적 가치에 대해 나의 기억과 생각을 적는다.
무학산, 푸른 목장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
무학산과 무학농장에 대한 나의 기억은 가을의 아름다움이고 각별함이다. 무학산 자락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가을에 무학산에 올랐다. 아마 50년도 더 된 것 같다. 거의 매년 무학산에 올랐던 이유는 무학산 정상부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지가 있어서 가을이면 벌초나 성묘, 추수 후에는 묘사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7, 80년대 자가용이 없던 시절에는 집에서 무학산 정상까지 걸어서 갔다. 하양읍 대학리 용정마을에서 무학리(지금의 8919부대 자리)를 거쳐 무학산 정상까지 형님들은 제수를 지게에 지고 큰아버지 비롯한 어른들은 힌 두루마기 차림으로 뒷짐을 지고 일렬로 산길을 올랐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성묘나 묘사에 자주 따라간 이유는, 처음으로 따라간 날 바라본 무학농장의 아름다운 풍경이 너무나 인상 깊었고, 아울러 토실토실한 알밤을 한 주머니 주워 오거나 떡을 챙겨 오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70년대 초중반, 어린 시절에 바라본 무학농장의 풍경은 매우 이국적이고 특별했다. 무학산 정상부 비탈에 조성된 광활한 초지에는 소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파아란 하늘과 맞닿은 산마루엔 억새들이 끝없이 펼쳐져 햇볕에 반짝였다.
검붉은 흙 이랑과 하얀 무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줄지어 선 무밭이 펼쳐져 있고, 드넓은 옥수수밭에는 어른 키보다 더 키가 큰 옥수수들이 갈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농장을 가로지르는 도로변에는 코스모스들이 무더기를 이루며 파란 하늘에 하양과 분홍으로 살랑대고 산 아래 펼쳐진 와촌 들녁은 온통 황금빛 물결이었다.
3층짜리 축사 등 이국적 목장건물과 어우러진 검푸른 옥수수밭과 목초지, 그 너머로 억새가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 발아래로 펼쳐진 황금들판, 시원한 한 줄기 바람, 참으로 아름다운 가을풍경, 빛의 대향연이었다.
목장 문을 닫은 이후로 목초지는 점차 억새밭으로 변했고, 청소년기의 나는 무학산과 무학농장이 마치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워더링 하이츠’ 같다는 공상을 하기도 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솔밭길이 정겹고 아름다웠던 무학리 마을이 군부대 이전으로 소나무들이 모두 베어질 무렵부터 무학산과 무학농장의 억새밭은 잡목들로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무학농장을 개간한 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농장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일부는 겨우 뼈대만 남은 상태다. 목초지는 거대한 잡목 숲으로 변했다.
지역민들의 가난과 영양실조를 구제하고자 무학농장을 개간하신 이임춘 신부님이 선종하신 지도 28년이 됐다. 자금을 지원했던 수지 선생님도 미수를 바라보는 연세다.
두 분 모두 내게는 각별한 은사님, 선생님인데 무너져가는 무학농장의 건물을 볼 때마다 두 분의 거룩한 삶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되살렸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양수산나 선생님(Susannah Mary Younger)
수지 선생님은 1936년 런던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황실 가문,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명문 귀족 스튜와트 가문 출신으로 영국 외무차관과 노동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외삼촌과 사촌오빠 두 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블레스 오블리즈’ 가문의 후손이다.
고등학교시절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을 읽고 예수님과 강렬한 만남이 있었던 수지 선생님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정치·경제·철학 전공)하고, 일년여 사회사업 관련 공부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사제도 없이 스스로 신앙심을 키워온 한국교회와 순교자들에게서 큰 감동과 경이로움을 느꼈고,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님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선교의 삶을 시작했다.
효성여대(대구카톨릭대 전신)에 피아노가 없다는 말을 듣고 할머니 등 친척들이 사용하던 피아노 7대를 싣고 1959년 12월 8일 아침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때 수지 선생님의 나이는 23세에 불과했다.
수지 선생님은 효성여대에서 영어와 불어를 가르치면서 대구 생활을 시작했지만, 거리에서 구걸하는 배고픈 아이들이 많은 심각한 상황을 접하고는 1960년 대구 삼덕동에 ‘근로청소년의 집’을 설립하여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어머니 역할을 했다.
1962년에는 대구·경북 여성복지시설 제1호인 ‘가톨릭여자기술학원’을 설립하여 불우여성들에게 직업교육과 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의 본격적인 사회사업을 시작하여 일생을 한국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셨다.
초창기 수지 선생님은 이들 시설을 자신의 유산, 친구 및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마련하여 운영했다. 수지 선생님이 직업여성들의 재활을 위해 카톨릭여자기술학원 운영에 혼신을 다하고 있던 1964년 어느 날, 무학산을 개간해 농장을 조성하려던 하양천주교회 이임춘 신부님이 자금난으로 수지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지역민들의 가난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 신부님의 개간사업에 수지 선생님은 흔쾌히 동참했다. 수지 선생님은 영국 NGO 구호단체인 옥스팜(Oxfam)과 카톨릭국제개발조직(CAFOD)으로부터 후원금과 물품을 지원받아 소, 돼지, 닭을 키우기 위한 스코틀렌드식 농장을 지었으며, 아이들에게 우유 한 컵과 계란 하나를 주려는 목적으로 우유가공소까지 만드는 등 당시로는 30만 평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초현대식 농장을 일구어냈다.
무학농장을 개간할 무렵은 6.25 전란의 여파로 곳곳에 영양실조로 부황들린 사람들이 많았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무학농장은 가난한 지역주민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희망의 일터가 되었고, 돌 하나라도 옮겨오는 등의 실질적인 근로를 제공할 때에만 품삯보다 더 많은 밀가루를 지급하여 자립과 자활 정신을 북돋우었다.
이러한 활동은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보다 5년 이상 앞서 사실상 우리나라 ‘농촌 지역 주민공동체 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무학농장은 우리 현대사 최초의 농촌 가난 극복을 위한 ‘주민공동체 운동’이라는 큰 의미가 있었지만, 운영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어려움에 봉착하여 문을 닫게 된다. 우유를 생산하여 가난한 아이들에게 무료로 공급하자 우유 판매에 위협을 느낀 우유업체들의 위협과 방해로 목장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무학농장을 매각한 대금은 무학중학교를 개교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후일 무학고등학교 설립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로써 이임춘 신부님의 뜻대로 가난을 극복하는 가장 궁극적인 방안이 이뤄졌다.
수지 선생님은 무학농장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는 너무 가난한 시절이었어요. 무학농장에서 일을 하는 주민들에게 품삯으로 돈 대신에 금액보다 더 많은 밀가루를 지급하였어요. 주민들은 그 밀가루를 다시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지요.
무학농장이 하양의 가난한 주민들을 먹고살게 해주고, 자녀들이 다니는 무학중학교를 위해 쓰이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느님께서 역사를 인도하신 일입니다.” (천주교대구대교구 사회복지회 간행 ‘처음과 같이 이제와...’ 중에서)
무학산의 문화적 가치
무학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하양은 ‘꽃재’로 불리기도 했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 아름다운 언덕, 무학산에는 이타행의 거룩한 삶을 사신 분들의 아름다운 발자취와 향기가 남아 있다.
삼국통일 전쟁의 상처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민중의 한을 달래기 위해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니며 박애의 무애행(無碍行)으로 우리 민족의 해원을 이룬 원효대사가 수도한 불굴사 석굴, 이임춘 신부님과 수지 선생님의 숭고한 삶이 녹아 있는 무학농장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꿈과 희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특히 무학농장은 옥스팜의 구호 지원이 크게 성공한 사례이고, 수지 선생님의 인생 스토리가 담겨 있어 세계적인 관광 콘텐츠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고는 대구카톨릭대 캠퍼스 한가운데에서 36억 년 전 원시의 바닷가에서 생명이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거대한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발견되어 천연기념물 제512호로 지정됐다.
상여집
조선 500년 역사의 유교실천덕목인 관혼상제(冠婚喪祭) 중에서 효의 적극적 표현형식이 상례(喪禮)이다. 이 상례의 상징인 상엿집(곳집)이 급속한 경제개발ㆍ생활문화의 변화와 더불어 혐오시설이라는 무관심속에 소멸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경북 경산시 하양읍 대학리 무학산 자락의 곳집(상엿집)의 경우도 철거위기에 있었으나 한 문화재 애호가의 노력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지은지 100년이 훨씬 넘은 이 곳집은 지난해 5월 국학연구소 대구경북지부가 당초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에 있던 것을 사들여 연구소가 있는 하양 대학리 무학산 자락으로 이전, 원형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 상엿집은 원래 양쪽에 상여꾼 16명씩 총 32명이 드는 대형 상여를 두던 곳으로 상량문에 ‘1891년 3번째로 옮겨 왔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최초 건축연대는 훨씬 이전으로 추정된다.
연구소는 대형 크레인과 트레일러를 동원해 상엿집 기와, 서까래를 걷어낸 뒤 건물 본체를 그대로 옮겼고 기와공을 불러 지붕을 복원했다.
이전한 상엿집은 3칸 규모로 왼쪽 칸과 가운데 칸에 문짝을 단 마루가 있고, 오른쪽 칸에는 장례용구를 보관했다. 내부에 상여를 올려두는 7m60cm짜리 방틀이 있으며 장례식에서 누가 상여를 메고 흙을 팠는지 등을 적은 문건 10여 점이 발견됐다.
이번에 지정예고 된 문화재는 곳집(상엿집) 1동, 상여 2습 및 관련된 문서 등이다. 곳집(상엿집)의 경우 상량문에는 1891년에 세워진 것으로 돼 있으나, 지역주민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실질적으로는 250~3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형태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로 이뤄진 맞배지붕 형식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의 선이 아름답고 화려하며 위엄을 갖춘 누각의 형태를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건물내부는 상여를 보관하는 공간과 부속품 등을 두는 2개의 공간으로 구분됐다.
이 경산의 곳집(상엿집)은 일반 곳집이 흙벽과 평지 바닥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전체가 목부재를 사용한 벽과 높은 마루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건축학적인 가치가 있다.
또한 이 곳집 속에서 전통 상여 2습, 장례에 쓰던 각종 제구, 상여제작ㆍ운반 등과 관련된 비용기록 문서 및 마을 공동체의 촌계(村契) 문서들이 함께 발견돼 상여문화 전체를 한 곳에서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민속학적ㆍ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