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예술인
개성이 보편성임을 실증하며, 변방에서 우주를 보는 시인
―노년의 유유자적 속에서 치열함을 안고 사는 서산의 김순일 선생
한국 문단에서 김순일(金淳一) 시인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또 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서산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시인 '김순일'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실로 많은 이들이 그의 시를 사랑한다. 그의 시를 대하면 맨 먼저 '질박(質朴)'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질박이라는 말은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쉽고도 편안하다. 어려운 말은 버리거나 비켜가고 쉬운 말만을 골라 쓴다.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시들, 애써 껍질을 벗겨보면 별것도 아닌 시들과는 사뭇 다르다. 별것도 아닌 알맹이를 가지고 몹시 어렵게(또는 외양이 현란한) 시를 만들어내는 재주를 그는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들을 전혀 부러워하지 않는다.
김순일 시문학의 가장 큰 덕목인 '질박함'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별의별 것이 다 있다. 그 별의별 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고향'일 것이다. 또 그 고향을 확대하면 세상이 되고 우주가 될 것이다.
그는 고향을 보면서 세상을 본다. 고향을 지키면서 세상을(또는 삶의 아름다운 가치들을) 지켜내고자 한다. 고향 사람들의 갖가지 삶의 모습들, 이런저런 세상살이의 풍경들 속에 담겨 있는 것들을 시의 알맹이로 삼는다. 읽기 쉽고 편안한 그의 시들 속에는 보석 같은 알맹이들이 있다. 쉬운 시들 속에 담겨 있는 알맹이들은 과수들의 열매처럼 견고하고도 장중하다. 그 알맹이들 속에는 우주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구수한 입담으로 시를 짓는 이는 많지 않다. 그의 재담 속에는 때로는 풍자와 해학도 번득인다. 풍자나 해학은 비판 정신으로 말미암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판 정신의 탁월한 표현법인 풍자와 해학을 구사하면서도 그는 구수한 입담을 잃지 않는다.
김순일 시문학의 그런 특성과 미덕들은 그의 질박한 성품을 짐작케 한다. 그는 성품 자체가 넉넉하고 온유하며 푸근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인간적 '체취'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사사로운 얘기지만 필자는 오래 전부터 가까이에 좋은 선배 문인을 두고 사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왔다. 김순일 시인이 고향 선배요, 학교 선배요, 문학 선배라는 사실은 필자에게 여러 가지로 득이 되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장에서 문학공동체를 운영하면서 걸핏하면 김순일 선생께 축시와 축사 따위를 부탁하곤 하니 말이다. 그렇게 신세를 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최근(7월 7일)에도 <태안문학회> 행사를 열면서 김순일 선생께 축사를 부탁했다. 기꺼이 태안에 오셔서 축사를 해주신 선생께 감사하면서 다시 한번 가까이에 걸출한 문인을 두고 사는 것을 다행스러워했다. 군수와 군의회의장보다 먼저, 문인 축사를 첫 자리에 모시는 것으로 보답을 드리면서….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일
7월 14일 오후 3시, 서산시 읍내동의 '서산문예회관' 광장에서 김순일 선생과 만났다. 선생의 자택이 문예회관과 가깝고, 문예회관 광장에 내 차를 놓기가 수월한 까닭이었다. 근처에 있는 '첼로'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또 한번 사사로운 얘기지만 필자는 이 날 처음으로 올해 대학 새내기인 딸아이를 대동했다. 대담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일을 딸아이에게 맡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김순일 선생의 얘기를 함께 듣는 일이었다. 김순일 선생과 대담을 하는 중요한 자리에 딸아이를 꼭 동석시키고 싶었다. 기억을 공유케 하여 필자가 작업을 할 때 부분적으로 도움을 얻으려는 뜻도 있었지만, 딸아이로 하여금 그런 의미 있는 자리에서 중진 시인의 육성을 많이 접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선생은 필자의 딸아이를 무척 예뻐해 주었다. 수수함 속에 '평화'가 가득 깃들인 얼굴이라고 했다.)
선생은 가야산 산행을 마치고 와서 샤워를 하고 나온 참이라 몸이 가뿐하고 기분이 좋다고 했다. 몇 시간에 걸쳐 산행을 했다면 피곤할 터인데도(피곤하다고 해야 옳을 법한데도) 그는 오히려 몸이 가뿐하다고 했고, 되우 즐거운 표정이었다.
"서산에 '금요산악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연륜이 5-6년쯤 됐나. 퇴직 공직자들을 주축으로 현재 42명 정도 참여하고 있지요. 나도 정년 퇴임을 한 그 해부터 참여를 해서 4년 정도 매주 금요일마다 산행을 해오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원정 등산을 하고, 그 외로는 인근에 있는 산들을 오른다고 했다. 그래서 서산 홍성 당진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가야산은 물론이고, 서산시 팔봉면의 팔봉산, 부석면의 도비산, 태안읍의 백화산, 홍성읍의 용봉산과 백월산, 예산군 덕산면의 덕숭산, 당진군 면천면의 아미산 등을 수없이 올랐다고 했다.
"옛날부터 건강은 좋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건강 문제 때문에 걱정을 하거나 애를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지요. 또 옛날 학창 시절에는 축구 선수를 했을 정도로 타고난 건각이었지요. 그 건각은 지금도 잘 유지되고 있고, 정년 퇴임 후 4년이 지난 지금은 더욱 건강해진 것 같아요."
선생은 서산중학교장을 끝으로 2002년 정년 퇴임을 했다. 45년에 걸친 교직 생활을 끝낸 아쉬움과 허전함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갖가지 감회 때문에 눈물이 나기도 했지만), 해방감도 컸다. 해방감 속에서 맘껏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고 또 금요산악회에 참여하여 매주 금요일에는 어김없이 산행을 하니 몸이 더욱 경쾌해졌다는 얘기였다.
선생은 1939년 태안군 안면읍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서산군 안면면이었다. 가계(家系)는 태안읍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 김만업(金萬業·2002년 86세로 작고)님과 어머니 조정일(曺貞一·86)님 사이에서 8남매(4남4여) 중 맏이로 태어난 선생은 누구보다도 고향 체감이 풍성한 편이라고 했다.
"안면도에서 태어나고, 태안에서 자라고, 어른이 되어서는 서산에서 살았으니 고향 땅을 넓게 고루 체감했지 싶습니다."
태안에다 조상의 뿌리를 두고 있는 선생이 안면도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금융조합(농협 전신) 직원이었던 아버지가 안면도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된 탓이었다. 개신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안면면 승언리에 있는 감리교회 목사관의 방 하나를 얻어 생활했다. 그리고 목사관에서 장남을 낳았다.
"두 살 때 태안으로 나왔지요. 아버지가 다시 태안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돼서…. 태안읍 동문리 '약방샘"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약방샘은 이미 옛날에 없어졌지만, 그 동네의 집들은 지금도 있고, 내가 살았던 그 동네의 풍경을 지금도 훤히 그려볼 수 있습니다."
선생은 태안에서 살았던 소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많다고 했다. 안면도는 두 살 때 떠나왔으니 기억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야릇한 그리움이 있다고 했다. 가끔 안면도에 갈 때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이상한 애착을 느끼게 되더라고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줄곧 서산에서 살면서도 내가 태어난 안면도에 대한 애착, 내가 자라난 태안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들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지요."
선생은 태안초등학교 졸업 후 태안중학교로 진학했으나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1학년말에 서산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중학교 동창생들이 태안에도 많고 서산에도 많다고 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대전사범학교로 진학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육상 릴레이 선수를 했지요. 어찌나 발이 빨랐는지 '발발이'라는 별명으로 통했지요. 그리고 중학교와 대전사범학교 시절에는 축구 선수로 활동했지요. 대전사범학교 시절 충남대표로 전국 체전에 나간 경력도 있고…. 학창 시절에 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한 이력 때문에 훗날 내가 중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을 때 옛 친구들로부터 체육교사인 줄 알았다는 말도 들었고, 시인이 되었을 때는 축구 선수가 시인이 된 사실이 경이롭다는 말도 들었지요."
초등학생 시절부터 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날이 많았지만 다행히 공부를 잘했다고 했다. 운동장에 뺏기는 시간만큼 집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학창 시절 내내 우등생이었다고 했다. 거기에서도 소년 시절부터 발휘된 선생의 대단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일반 고등학교로 가지 않고 사범학교로 진학을 한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지요. 한편 대전사범으로 가게 된 데에는 한가지 우연이 겹치기도 했고…."
선생은 소년 시절 가난을 절절히 체감하며 살아야 했다. 그 시절은 누구나 가난했고, 공무원은 더욱 초라하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금융조합 직원인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쪼들리는 생활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미 그에게는 동생들이 줄줄이 생겨나 있는 형편이었다.
"학교 선생 직업도 초라하게 보였고, 구차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사범학교를 나오면 확실한 직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범학교 진학을 결심했지요. 사범학교를 나와 빨리 직장을 잡아야 적은 봉급이라도 받을 수 있고, 또 그래야 적은 봉급이나마 쪼개어 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일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거지요."
그때 아버지와 함께 금융조합 직원으로 근무하시는 분들 중에 대전 목동에 집을 두고 계신 분이 있었다. 그 분이 대전 집을 다니러 가서 따님의 입학원서를 사러 대전사범학교를 간 길에 원서를 한 장 더 샀다며 그것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필연과 우연이 겹쳐서 대전사범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옳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일찌감치 교단에 진출하여 평생 교단 생활을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나 자신에게나, 내 동생들에게나,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지 싶습니다."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57년 18세의 나이로 교단에 서게 된다. 첫 부임지는 서산군 인지면에 있는 인지초등학교였다. 인지초등학교와 성연면의 성연초등학교를 거쳐 서산읍(현 읍내동)의 부춘초등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계속한다.
부춘초등학교 근무 시절은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기였다. 인생의 중대 전환점이 마련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룬다.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한 선생은 확실한 직장으로부터 갖게 되는 소속감과 안정감 속에서도 갑자기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자신의 젊음을 어떤 속박 속에 밀어 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것은 이상한 자괴감마저 갖게 했다. 자신이 너무 일찌감치 청운의 큰 꿈을 접고 단조롭고도 빤한 새 조롱 같은 작은 틀 속에서 인생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은 정말 자신을 괴롭게 했다.
"학창 시절 운동 선수로 운동장을 누비고 살았으면서도 내게는 내성적인 면이 강했지요. 수줍은 성격에다가 겁이 많았고, 한가지 생각에 골몰 집착하기 잘하는 성격이었지요."
내성적인 성격 탓에 그는 심각할 정도의 우울증을 앓았다. 동료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싫었고, 잘 웃지도 않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럴 때 군 징집 영장을 받았지요. 입대 영장을 받는 순간 이상하게 반가운 생각이 들더군요. 내 우울증과 관련하여 어떤 돌파구가 생긴 것만 같았고…."
군 입대는 정말 그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다. 그리고 최전방 경험은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군대 생활이 참으로 어렵고도 고생스러웠던 시절이었다. 최전방에서의 고된 군대 생활이 오히려 그의 우울증을 치유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낳았으니 거기에도 '역설'이 존재하는 셈이었다. 어쩌면 거기에서부터 김순일 시문학의 중요 가치 중의 하나인 '역설의 미학'이 자리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교사들은 심각한 교원 부족 현상에 따라 군 복무 기간이 1년이었다. 군대 생활 1년 만에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그리고 다시 교단에 복직을 하면서 그는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자신의 현재 위치와 현재 상황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자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가르치는 일의 귀중함을 스스로 깊이 인식하고, 그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교사로서의 자존심과 교육에 대한 가치 인식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고향을 사랑하자는 것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일년만에 돌아오는 고향은 그에게 색다른 질감을 안겨주었다. 겨우 일년 만인데도 그는 고향이 한없이 반갑고 정다웠다. 평생 동안 고향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막연하면서도 절실한 자각이 그에게 이상한 힘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그는 고향을 사랑하기 위한 한가지 방편으로 고향을 뜨지 않기로 결심했다. 고향에서 교사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때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랄까, 그런 것만 막연하게 느꼈을 뿐이었지요. 그러다가 고향에서 교사 생활을 계속하고 또 시를 짓게 되면서 고향에 대한 애정의 어떤 윤곽 같은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곧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향을 사랑함으로 세상을 사랑하자는 것, 고향을 통해 세상을 보자는 것, 내 고향을 잘 보면 세상이 더 잘 보일 거라는 것, 그런 것들을 줄기차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지요."
그리하여 시인 김순일 선생의 고향 돌아보기는 세상을 더욱 넓고 확실하게 보기 위한 일종의 확대경인 셈이었다.
문학을 섬기고, 시를 살고자 할 뿐
선생은 학창 시절에는 문학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글짓기 소질이 있는 친구들이 이런저런 글짓기 대회에 나아가 상을 타오는 것을 보면서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조금 부럽기는 했지만, 공 차는 소질을 타고난 자신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앞서곤 했다.
선생이 생전 처음으로 글을 써본 때는 대전사범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졸업을 앞둔 동기생들은 졸업 기념으로 뭔가를 남기자는 뜻으로 '백지 철'을 만들어 3학년 전체 학생들에게 돌렸다. 자신의 취미, 좌우명 따위 시시콜콜한 얘기를 적어달라는 주문 외로 맨 첫 장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솔직한 얘기를 적어야 한다는 단서도 전달되었다.
선생은 그 백지 철을 받아들고 고민을 하다가 맨 앞장에 몇 줄의 글을 적어 넣었다. 고향의 아카시아 꽃향기를 추억하는 글이었다. 선생은 그 기억이 신비롭게 느껴진다고도 했다.
그런데 선생의 글을 읽은 동료들이 이상한 말을 했다. 맨 앞장에 쓴 글이 '시' 같다는 얘기였다. 전혀 시를 의식하지 않고 쓴 글인데, 그 글이 시 같다니, 선생에게는 그런 말들이 실로 이상한 말로만 들렸다.
"하지만 그런 말들 때문에 나는 그때부터 비로소 시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요. 수업 시간에는 다소 막연하게 대했던 시에 대해서, '시는 무엇인가?' 비로소 의문부호를 갖고 진지하게 대하게 된 것이지요."
시의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고향을 추억하는 글이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그는 시를 생각하면서 더불어 고향도 생각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아무튼 동료들로부터 그의 글이 시 같다는 말을 들은 것은 그에게 중대한 계기를 안겨준 셈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단에 서면서부터 그는 시에 사로잡혀 끙끙대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를 돌아보면 사범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문학에 관심도 없었고 '시'라는 것의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자신이 갑자기 <'시'의 그믐밤 길을 헤매며 새벽마다 가슴을 쓸며 사는> 사람이 된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꽤 내성적인 성격인 데다가, 지금껏 문학에는 별 관심이 없던 사람이 친구들로부터 들은 '시 같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문학을 공부한다는 게 겸연쩍기도 해서 누구한테도 자신이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혼자 속으로만 끙끙대며 책을 구해 읽고 습작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던 1960년(그러니까 군에 입대하기 직전) 그는 시 몇 편을 지어서 초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전문잡지인 <새교육>과 <교육자료>에 투고한다. 난생 처음 시도해본 일이었다.
"그런데 <새교육>에 내 시 한 편이 실리게 되었지요. 시랄 것도 없지만, 「산」이라는 제목의 시였지요. 잡지를 받아들고 떨리는 손으로 내 시가 실린 페이지를 열어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더군요. 내 시가 최초로 활자화된 것인데, 최초로 활자화된 내 시를 처음 보던 순간의 그 감격은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웠다. 자신의 시들이 활자화되어 잡지에 실리긴 했지만 왠지 자신이 없었다. 얼른 잡지를 덮고 책상 서랍 속에 감춰 두고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교단에 복직한 후에도 그는 시 공부를 계속했다. 이미 시를 공부하는 일은 자신이 살아갈 '길' 하나를 새롭게 만들며 나아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혼자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대전, 공주, 천안 등지에 이름 있는 시인들이 몇 분 살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정도 향학열도 가지고 있었고, 4년제 정규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 소망도 있었다. 그는 상아탑에 대한 소망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고, 야간대학이라도 다니고 싶었다. 그리하여 단국대에 입학을 했다. 현장 교사 근무를 하면서, 더구나 시골에서 서울을 오르내리며 야간대학에 다닌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덕에 그는 서산읍의 부춘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인 1966년 중등교원 자격 검정고시에 도전하게 된다. 그리고 무난히 합격을 한 다음 부춘초등학교에 사표를 내고 그 해 다시 중등교원 임용시험을 치른다. 그리하여 1등 합격을 하게 된다.
"정식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해미중학교에 임시 교사로 들어가서 2년 동안 근무를 하고 1968년 4월 당진상고로 정식 발령을 받았지요."
그리고 서산군 음암면의 음암중학교에서 근무하던 1975년 그는 한국 시단의 큰 인물인 한성기 시인을 만나게 된다.
"한성기 선생님은 내 대전사범학교 시절의 은사이신 분이셨지요. 솔직히 말해 학교 시절에는 그냥 선생님으로만 알았지 한성기 선생님이 한국 시단의 비중 있는 시인이신 줄을 잘 몰랐어요. 내가 시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탓이기도 할 테지만…. 그런데 내가 본격적으로 시 공부를 하면서 보니 한성기 선생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되더군요. 내 대전사범학교 은사님들 중에 유명 시인이 계시다는 사실이 내게 어떤 위안을 주는 것을 느끼면서도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1975년 그때까지 한 번도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지요. 그런데 내가 음암중학교에 근무할 때 한성기 선생님이 음암중학교엘 오신 겁니다."
그러나 한성기 시인이 김순일 선생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음암중학교의 교장 선생님 역시 김순일 선생의 대전사범학교 은사이셨으니, 한성기 시인은 대전사범학교 근무 시절의 동료였던 음암중 교장 선생님을 찾아온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날 부르셔서 교장실에서 뜻밖에도 한성기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참 송구스런 마음이었지요. 습작을 하며 시를 공부하는 사람이 대전사범학교 은사님 중에 거물 시인이 계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교단에 나온 지 20년이 다 되어가도록 한 번도 찾아뵙지를 않았으니 얼마나 외람 되고도 송구스런 일입니까.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아서 몸둘 바를 몰랐지요."
한성기 시인은 아드님이 서산군(현재는 태안군) 근흥면의 근흥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되어 함께 내려와 사신다고 했다.
그때부터 김순일 선생은 주말이면 근흥면 정죽리로 한성기 시인을 찾아뵙는 일을 시작했다. 타지에 오셔서 적적하게 생활하시는 노(老) 은사님을 위로해 드리고 챙겨 드리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한성기 시인을 자주 뵙게 되면서 사사(師事)를 받고 싶은 마음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오래 망설이고 또 망설인 끝에 하루는 선생님께 '제가 혼자서 시 공부를 좀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자 선생님은 반색을 하시면서 내 시를 좀 보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내 시를 가져다 보여드리곤 했지요. 내가 시인을 만난 것도 1975년 그때가 처음이었고, 시인께 내 시를 보여 드린 것도, 또 시인으로부터 내 시에 대해 직접 말씀을 들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1975년을 내 인생의 매우 의미 있는 해로 여기고 있습니다."
1960년 <새교육>에 자신의 시가 처음 활자화된 이후 무려 15년 만에 그는 대전사범학교 은사이신 거물 시인을 만나 본격적으로 사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무려 15년 동안이나 혼자 끙끙대며 시 공부를 해온 셈이었다.
그는 매주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달려 근흥면 정죽리의 한성기 시인을 찾아뵙고 자신의 시를 보여드리곤 했다.
"선생님은 술자리에서는 말씀도 부드러웠고 농담도 잘하셨지만, 시에 대해서만은 매우 엄격하셨지요. 나는 선생님께 시랍시고 써온 내 시를 보여드릴 적마다 바짝 긴장을 해야 했지요."
한성기 시인은 보통 까다로운 분이 아니었다. 김순일 선생이 애써 지어온 시를 보고 고개를 젓는 일이 많았다. "이건 시가 아니야. 내용은 있는데 그릇이 없어."하시며 밀어놓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때로는 시문학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김순일 선생의 시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세월이 몇 년이나 계속되었지요. 나는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애간장이 타는 기분이었지요. 자꾸만 내 나이도 의식하게 되고…. 그렇게 꼬박 4년을 공부하고 1979년에 들어서자 그때부터 내 시를 보시는 선생님의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지시더군요."
그리하여 그는 <현대시학> 1979년 6월 호에 한성기 시인의 초회 추천을 받게 된다. <현대시학>은 시인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선망하기 마련인 한국 시단의 유수한 시 전문잡지였다. 그는 권위지 <현대시학>의 존재가치를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고,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하고 싶은 마음을 키워온 터였다.
"<현대시학>의 초회 추천을 받은 기쁨이 완천(完薦)을 받은 때보다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가슴이 떨리면서도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곧 다시 긴장을 해야 했고, 추천 완료를 얻기 위해 또다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지요."
당시 <현대시학>은 오늘과 달리 2회 추천을 받아야 추천이 완료되었다. 그래야 정식 등단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렵고도 까다로운 등단 절차였다.
선생은 <현대시학>의 추천 완료를 향해 더욱 정진을 했다. 어두운 길을 스스로 닦으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겨우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시는 마음대로 살아나지 않으면서 초조감이 커지는 형편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한성기 시인의 '죽비'는 더욱 가혹한 느낌을 주었다.
시라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뼈에 새기고 또 새김으로써 '사무친다'는 말의 의미를 절절히 체감하며 숱한 밤을 지샌 끝에 그는 초회 추천을 받은 때로부터 꼭 1년 후인 1980년 6월 <현대시학>의 추천 완료로 공식 등단을 하게 된다. 만 40 나이에 드디어 '시인'이라는 공식 칭호를 얻게 된 것이었다.
"막상 천료가 되고 보니 초회 추천 때와는 달리 오히려 담담한 심정이 되더군요. 참 기나긴 공부였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저런 감회가 클 것 같은데도,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앞서더군요. 출발 라인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은데도, 출발 라인에 섰으니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고, 오랜 훈련기간이 받쳐주는 지구력에 의지하여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주먹이 꼭 쥐어지더군요."
학교 은사이시자 문학 스승이신 한성기 시인은 그에게 "등단은 시작"이라는 말씀을 해주었다. 그의 등단 후에도 제자를 더욱 조이시는 일을 놓지 않았다. 가끔 대전으로 그를 불러 대전의 여러 시인들을 소개해 주고 그 분들의 시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들을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한잔 술로 거나해지면 이런 말도 해주었다.
"네 시는 촌티를 벗어야 해. 촌놈 티가 너무 심해. 촌티가 네 시의 강점일 수도 있지만, 촌티를 벗어나는 시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야."
한성기 시인은 가끔 지면에 발표되는 김순일 시인의 시를 보고는 "그게 시냐!"며 호되게 꾸짖는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이번 작품은 참 좋더군. 대전의 시인들도 이번 시가 참 좋다는 말을 많이 해. 그래서 나도 기분이 좋아."라는 말로 격려를 보내주기도 했다.
"내 시에 대한 좋은 평이 나오게 되면 본인인 나보다도 더 좋아하시는 분이었지요. 추천을 해주고도 내버려두지 않고 늘 그림자처럼 내 시를 따라다니시며 걱정과 격려를 해주신 분이었지요. 아주 가끔은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이 '너는 앞으로 틀림없이 좋은 시를 많이 쓸 거야. 나는 그걸 믿는다.'라는 말씀으로 가슴 벅찬 격려를 베풀어주신 분이기도 하고…."
스승의 그런 기대에 자신이 온전히 부합하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스승의 그런 말씀 그런 모습들을 떠올리다보면 이제는 이승 밖에 계시는 스승이 더욱 그리워진다고 했다. 그런 분과 이승에서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는 것도 자신의 큰복이라는 말을 하며 김순일 선생은 미소를 지었다.
1960년 자신의 시가 <새교육>에 처음 활자화된 때로부터 정확히 20년만인 1980년에 그는 <현대시학> 추천 완료로 등단을 했다. 그 습작기간 20년 중에서 스승 한성기 시인으로부터 사사를 받은 기간이 무려 5년이었다.
그는 20년의 긴 습작기간이,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던 5년의 사사 기간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다고 했다. 20년의 공부 끝에 나이 40에 겨우 얻은 '시인'이라는 칭호가 더욱 사랑스럽고, 그래서 더욱 자부심을 갖게 된다고 했다.
등단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9권의 시집과 1권의 선집을 갖게 되었다. 내년에는 열 번째 시집을 펴낼 계획이다.
참 부지런히 시를 살아온 셈이다. '다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시작에 열중해 오면서 그는 하나의 좌우명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늘 문학을 섬기고, 시를 사는' 자세를 올곧게 지켜나가자는 일념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고 했다. 비록 다작을 하더라도 시를 쓰고 짓기보다는 빚는 마음을 유지하고 싶다고 했다.
빚는 것은 낳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시를 쓰거나 짓기보다는 빚거나 낳는 것이기를 소망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을 섬기고 시를 사는 것일 터였다. 이미 예전에 이순도 지나고 어언 고희를 바라보는 중진 시인 김순일 선생에게서는 문학을 섬기고 시를 사는 어떤 고유한 체취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풍겨나는 것을 필자는 감미롭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숲을 이루고
오늘의 김순일 시문학은 우선 울창한 느낌을 준다. 어느덧 장중한 수림(樹林)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다. 수림이라는 말을 수해(樹海)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을 법하다.
수림은 양(量)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종이 다양해야 한다. 또 다양한 수종은 서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큰 조화를 이루어야 보기 좋은 수림이 된다. 그 수림에 깊이와 규모가 더해지면 수해가 된다.
김순일의 시 세계를 탐색하다보면 수림과 수해의 확실한 질감을 얻을 수가 있다. 그것은 결코 아홉 권 시집의 양으로부터 얻는 느낌이 아니다. 그의 아홉 권의 시집은 누구에게나 '질량'이라는 단어를 쉽게 안겨줄 법하다.
그는 여러 지면에 자신의 시 세계를 소개하거나 시업(詩業)의 이면에 어려 있는 사연들을 고백하는 산문 형식의 글도 여러 편 쓰고 있다. 그의 육성이나 다름없는 글들이다. 「시인의 시화(詩話)/내 시의 집」, 「내 시에 관하여」, 「문학 데뷔의 상처와 고통을 말한다/멍 자국에서 돋아난 날개」, 「나의 문학 나의 삶/내 몸 속에 출렁이는 갯바람 소리」등등의 제목을 갖고 있는 글들을 읽다보면 진솔한 고백과 수림 속에 숨어 있는 진액(眞液) 같은 것에 숙연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산문 형식의 그 글들 속에 자신이 가려 뽑은 자신의 시편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 시편들 중에서 「나의 문학 나의 삶/내 몸 속에 출렁이는 갯바람 소리」라는 글 속에 들어 있는 '산문시' 한 편을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께 선사한다.
내 얼굴에는 늘 바보스럽게 헤에 웃는 웃음이 붙어 다녀서 사람되기는 다 틀렸다고 한다 피사리를 가서도 피 대신 벼를 뽑아 놓고 헤에 웃는다고 주인에게 퇴박맞고 이른 새벽부터 논두렁에 나와 웃는 그 웃음소리만 들어도 하루종일 재수 없다고 사람들은 투덜댄다 막걸리 냄새만 맞고도 절로 나오는 그 바보스런 웃음 때문에 술맛이 없다고 잘 끼워주지도 않고 초상집 시신 앞에서까지 웃는다고 뺨을 맞으면서도 헤에 웃는다 병원엘 가보았지만 별 이상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절에도 갔었지만 헤에 웃는 나를 내려다보시던 부처님이 한바탕 웃어대더니 치성드릴 게 따로 있지 어서 가라고 한다
(무슨 웃음이 그렇지 부처님도 꼭 바보스럽구먼)
나는 시무룩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오면서 별 희한한 일이라도 엿본 듯이 헤에 웃는다.
<서산사투리 1 - 부처님도 꼭 바보스럽구먼> 전문
김순일 시문학이 수많은 평자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로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김순일 시세계에 대한 분석과 평가 작업에 참여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김순일 선생의 작품들을 놓고 구체적인 기술을 한 시인/평론가들과 글제들을 기록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 같다.
구재기(시인) / 「모순에서 진실 찾기」
구재기(시인) / 「풍자와 기지 사이에서」
김현(문학평론가) / 「살아 있는 시들 ②」
나태주(시인) / 「향토를 지키는 시정신」
박명용(시인, 대전대 교수) / 「인간의 참 모습 찾기」
박진환(시인, 문학평론가) / 「세 공간의 시적 궤적」
윤석산(시인, 제주대 교수) / 「백지동인의 시적 특질과 과제」
이관묵(시인) / 「김순일의 시적 영토」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 「인간다운 삶의 시들」
전봉건(시인) / 시집 「서산사투리」서문
정공량(시인) / 「산문시, 그 환상과 생명의 공간」
정순진(문학평론가) / 「우리들의 꿈과 거울」
정진석(시인, 문학평론가) / 「바닷가 순향자적 나무꾼 낫날」
홍용의(문학평론가) / 「물 또는 생명의 씨앗」
그리고 가장 최근의 평문으로는 우대식 평론가의 「벌집을 보면서 외 9편, 이렇게 읽었다」(<현대시학> 2004년 1월호)와 최문자 시인(협성대 문창과 교수)의 「평범을 거부하는 전통서정의 영토」(<시와 상상> 2005년 상반기호)가 있다.
이 글들에서 우대식 평론가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또한 마음이 무겁다. 60대 중반을 넘어선 변방 칼잡이의 칼에서 이잉 이잉 칼 우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에 푸른 결기가 돈다. 서산 장터 몇 백년 묵은 대장간에서 달군 칼 우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겨울밤이다."라는 말을 말미에 적었다.
또 최문자 교수는 "자연의 생명력 앞에 무한히 숙연해지기만 하는 많은 시인들 사이에서 자연에 대한 이런 탄력을 가진 전통 서정의 영토를 가진 시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라는 말로 결말을 짓고 있다.
이렇게 많은 평자들이 예리하고 정확한 분석의 눈으로 김순일 시문학의 성과를 논하고 있는데, 그 귀한 평문들 중에서 1990년 48세 이른 나이로 별세를 했음에도 가장 탁월한 평론가로 꼽히는 김현 선생(서울대 불문학 교수)의 재미있는 평문 한 대목을 소개해 본다.
바보스런 웃음은,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타박 맞을 수밖에 없는 웃음이지만, 바보스런 부처님 같은 분들에겐 즐거운 웃음을 웃게 하는 웃음이다. 바보스런 웃음 앞에서 시원스럽게 웃어대는 부처님의 웃음은, 바보스런 웃음을 웃는 사람들에게까지 희한한 일처럼 여겨진다.
서정주의 게으른 삶은 삶의 목표이지만, 김순일의 바보스런 웃음은 삶의 방법이다.
<피사리를 가서도 피 대신 피를 뽑아놓고 헤에 웃는다고 주인한테 퇴박맞고 이른 새벽부터 논두렁에 나와 웃는 그 웃음소리만 들어도 하루종일 재수 없다고 투덜댄다>의 '투덜대다'의 주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해도, 김순일은 헤에 웃을지 모르겠다. 그것이 서산사투리인가 보다.
―「살아 있는 시들②」중에서
김순일 선생의 창작열은 등단 30년과 인생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에도 식을 줄을 모른다. 창작 욕구가 더욱 왕성해지는 자신을 느낀다고 한다.
선생은 최근 2년 동안 60여 편의 시를 낳았다고 했다. 최근 시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한마디로 '젊은 시'라고 대답했다.
그는 '젊은 시'를 추구한다고 했다. 젊은 시를 빗기 위해서는, 그리고 진정한 시인이기 위해서는 먼저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또 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이미 시의 수림을 형성하고 있는 이에게서 '변화'라는 단어를 듣는 것은 다소 경이적인 일이기도 했다. 어언 노년의 세월로 접어들어 있는 지금에도 변화를 소망하고 젊은 시를 추구하는 그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가 형성하고 있는 수림은 수해로 나아갈 것임이 거의 분명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안온한 일상 속에서도 가슴엔 늘 숯불을 안고
김순일 선생은 초등 교사로 출발했다가 중등 교원이 되고, 중학교 교장으로 교직 생활을 마친 분이다. 서산시 부석면의 부석중학교와 서산중학교에서 7년 동안 교장 근무를 했는데, 서산중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서산중 교장을 지낸 분이기도 하다.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는 사항이었지만 필자는 그의 색다른 교직 이력에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 교원에서 중등 교원으로 '변신'을 하게 된 과정에 어떤 특별한 계기는 없었는지, 궁금증을 표했다. 그리고 마침내 재미있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부춘초등학교 근무 시절은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기였다. 인생의 중대 전환점이 마련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룬다.>라는 말을 앞에서 했다. 이제 그 얘기를 하자.
그는 부춘초등학교에 근무하던 1966년 같은 학교 직원인 정선희(鄭仙姬) 교사와 만나게 된다. 정선희 교사는 1945년생 해방둥이였고, 공주교육대학 2회 출신이었다. 그들은 그 당시엔 흔치 않았던 '연애'를 했다.
"그 시절에는 같은 학교 직원들끼리 연애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부부가 같은 학교에 근무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었고…."
지금도 부부 교사가 같은 학교에 근무하지 않는 것은 교육 공무원들의 규범 사항이다. 예외적으로, 한 학교에 적을 두더라도 본교와 분교로 나뉘어 근무할 수는 있다. 또 도서 벽지 학교에서는 부부가 함께 근무할 수 있다.
부부가 같은 학교에 근무할 수는 없어도, 지금은 같은 학교 직원끼리 연애를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1960년대 당시에는 연애 사실을 남에게 들킬까봐 바짝 조심을 해야 했다. 자칫 '풍기 문란'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유롭게 교제를 하고 싶었고, 꼭 결혼을 할 결심이었지요. 자유롭게 교제도 하고, 앞으로 결혼을 하려면 어떤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중등교원 자격 검정고시에 도전할 생각을 했지요. 그런 연유로 부춘초등학교에 사표를 낸 거지요."
―그럼, 초등 교원에서 중등 교원으로 변신을 하신 것은 사모님 덕분이군요?
"그런 셈이지요. 결과적으로 나는 중등 교원도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하게 되었으니 일거양득, 일석이조의 과실을 얻은 셈이고…."
그러며 선생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유로운 교제와 결혼을 위해 사표를 내고, 중등교원 자격 검정고시를 치르고, 중등 교원이 되면서 결혼을 했던, 조금은 숨가쁘던 그 시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고 했다.
"그때의 그 도전과 변화 속에서 시에 대한 소망이 더욱 자라난 것 같기도 해요."
그는 '그 시절의 행복이 있었기에 지금도 행복하다'는 매우 의미 있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는 또 한가지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개신교 신자이신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개신교 신자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연인이 천주교 신자였다. 장차 처가가 될 집은 온 가족이 성당에 다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 가정이었다. '우리 딸과 결혼을 하려면 반드시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 조건은 매우 완강했다.
"지금은 융통성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만 옛날에는 정말 완고했지요. 나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잠시 동안이나마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했지요. 그래서 세례를 받고 견진까지 받았어요."
그랬음에도 결혼 후에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선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필자가 짐작컨대 개신교 신자이신 부모님과 천주교 신자인 부인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 기류도 흘렀을 터였다. 그 중간에 위치하면서 조종 역할을 하느라고 견진성사까지 받은 그가 천주교 신앙 생활을 기피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종교 관련 부분 대담을 하면서도 필자는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김순일 선생에게서 선생의 선친 함자를 듣는 순간 필자는 약 10년 전의 일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서산에서 사시는 김만업 어른님으로부터 받은 종교 관련 편지가 있었다. 그 편지에는 김만업 어른님께서 당신의 며느님에게 주신 편지 사본도 한 통 동봉되어 있었는데, 내게 참고로 보라고 보내신 것이었다. 나는 어른께 답서를 올렸고, 그 결과 어른의 서신을 또 한번 받았는데, 그 편지들은 모두 내 홈페이지의 '신앙의 길' 방에 올려져 있다.)
선생은 부인 정선희 여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대학에서 건축과를 전공한 장남(35)은 서른 셋에 설계사 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대전에서 설계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올해 10월 서산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했다. 또 한의사인 차남(32)은 현재 공주에서 개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부인 정선희 여사는 선생이 2002년 정년 퇴임을 하기 1년 전에 명예 퇴직을 했다고 했다.
"부부가 1, 2년 사이에 교단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살게 되니, 새롭게 연애를 하는 기분도 들더군요."
맥주 잔을 기울이며 선생은 즐겁게 웃었다. 그리고 선생은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참으로 고마운 존재들이라고 했다. 우선 아버지가 시인이라는 사실에서 자부심과 존경심을 챙길 줄 알며 아버지의 시작품들을 열심히 읽어주니, 그런 아들들과 며느리들 덕택에 시를 사는 재미가 한결 농밀하다고 했다.
"대전에서 설계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큰아들이 올 가을 서산으로 사무소를 옮기려는 것은 부모와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싶은 소망 때문이라는 거예요. 자식들이 부모 곁을 떠나 사는 것이 당연지사처럼 되어 있는 지금 세상에, 나가 살던 아들이 반대로 고향으로 와서 부모와 함께 살고자 하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요. 아들의 그 뜻에 기꺼이 찬동을 한 큰며느리가 더 고맙고…."
둘째 며느리도 고맙다고 했다. 둘째 며느리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는데, 시집 가족이 모두 천주교 신자이니 가족 간의 화합을 위해 종교 일치를 이루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선생이 제의하자 둘째 며느리는 즉시 "아버님 뜻에 따르겠습니다"하고는 그 날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생의 자택 대문에는 천주교 신자 표식이 붙어 있다. 원래 침례교 신자였다가 한때는 '여호아의 증인'에 빠져들기도 했던 선친께서 말년에는 종교 문제에 크게 융통성을 보여 가족 간에 종교로 인한 갈등 문제는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선친 사후에는 온 가족이 종교 일치를 이루었고, 종교 일치를 이루는데 선생이 큰 역할을 했지만 정작 선생은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서슴없이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말했다.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노장 쪽에 깊이 빠져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것 같아요."
'노장(老莊)은 종교가 아니고 학문 차원이요 사상일 뿐인데'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필자는 그것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주로 선생의 얘기를 들으며 열심히 메모를 해야 하는 자리였다.
선생은 교직 생활과 시인 활동을 조화롭게 병행해 나가던 시절 문학단체의 수장 노릇도 많이 했다. 서안시문학회장, 한국문인협회 충남지회장, 한국펜클럽 충남회장 등을 역임했다.
상복도 없지 않아서 1996년 제1회 서산시문화대상, 2000년 제7회 한성기문학상, 2002년 제46회 충청남도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타고난 건강한 체질, 부지런한 습성, 낙천적인 성품을 지니고 매일매일 즐겁게 살지만 가슴속에는 늘 숯불을 안고 산다고 했다. 물론 치열성을 의미하는 말이겠지만 왜 '숯불'이냐고 물었더니 숯불은 화력이 강하고 끈기 있는 불이면서도 연기를 피우지 않는 불이라고 했다. 연기를 피우지 않는 불인 숯불의 이미지는 김순일 선생의 정갈하고 의연한 성품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어느덧 노년의 세월을 사는 지금에도 가슴에 숯불 같은 치열성을 안은 채 문학을 섬기고 시를 산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산여성문학회> 회원들을 지도하는 일에서도 각별한 즐거움을 얻는다고 했다. <서산여성문학회>는 2003년에 결성되어 그 해에 작품집 창간호 「징울림」을 발간하고, 2004년 제2집 「바다는 그 자리에 있었네」, 2005년 제3집 「바람 저리 맑은 하늘가」를 내고 올해 제4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김순일 선생은 주로 주부들인 25명 정도의 회원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메일 전송을 하면서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2시간씩 서산문화원에서 시작(詩作) 지도를 하는데, 이 강좌에는 현재 열 명 정도 참석을 한다고 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필사를 많이 시킵니다. 선정된 시 하나를 30번 정도 반복 필사를 하게 합니다. 그렇게 필사를 하다보면 절로 시의 의미가 파악되고 표현법에도 익숙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여성문학회원들에게 '비유의 문학'을 많이 얘기한다고 했다. 비유와 상상력과 낯설음의 상관성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는데, 여성문학회원들과 진지하게 문학을 논하는 그 시간이 정말 즐겁다고 했다. 그 일 또한 문학을 섬기고 시를 사는 것이기에….
레스토랑 '첼로'에서의 대담을 마치고(맥주를 곁들인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우리는 함께 일어섰다. 근처에 있는 선생의 자택을 잠시 구경하기로 했다. 선생의 자택은 서산시청 뒤편에 있었다. 서산시청과 서산문예회관 사이이기도 했다.
선생의 자택은 이층 양옥집이었다. 20여 년 전에 지은 집이라고 했다. 그때는 주변이 거의 들판이었고, 동네에서 유일한 이층집이었다고 했다. 산이 가까이에 있어서 굳이 당시엔 한적한 변두리였던 곳에 집을 지었다고 했다.
선생의 집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수목이 많았다. 우거져 있는 형태였다. 선생의 집을 찾는 사람들 중에서 나무들을 위해서라도 전지를 좀 하라고 권하지만, 전지가 반드시 나무를 위한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고 했다. 나무들을 위하고 울안의 작은 숲에 깃들여 사는 새들과 작은 동물들과 벌레들을 위해서 자연 상태 그대로 둔다고 했다. 멋대로 자라고 헤벌어지고 흐드러지고 엉클어지기도 하는 그 자연미가 좋다고 했다.
선생의 집 구경까지 마치고 태안으로 돌아오면서 필자는 서산시 읍내동 494-3으로 표기되는 그 집의 작은 정원 풍경을 떠올려보았다. 선생의 시에서 쉽게 감지되는 또 한가지 덕목들인 야성미, 자유, 푸름의 이미지와 매우 관련이 있는 풍경으로 여겨졌다.
이제는 도심 안에 박혀 있는 형태지만 울안의 숲 속으로 날아든 갖가지 새들과 작은 동물들과 벌레들, 뭇 생명체들이 자유로이 살며 노니는 선생의 집은 '시인의 집'이기에 앞서 '시의 집'인 셈이었다. 그리하여 김순일 선생은 '시의 집'에서 시를 사는 시인이고….
ㅡ충남예술 200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