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옥판차의 근원지로 알려진 백운동 계곡에 위치한 이효천씨의 집이다. 이곳에서는 다산선생과 초의선사가 함께 녹차를 마셨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
강진청자 관심, 다산 저술 번역, 백운옥판차도 심도 있는 관심
-문화탄압 지속, 꼼꼼한 기록문화 긍정적 측면도
2년 후인 1916년에는 조선총독이 직접 강진 대구를 찾아 요지를 둘러보기도 했다. 대구요지가 총독부에 보고되고 전문가가 현지를 조사한 다음 총독이 강진을 찾기까지 발빠르게 움직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대구일대에 대한 부분적인 발굴작업을 벌여 청자파편을 일본으로 수거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에 일본에서는 고려청자를 연구한 서적까지 발행될 정도였다.
이후 1928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대구일대를 조사해 100여기의 도요지를 확인했으며, 이어 1935년에는 일본인 야전이라는 사람이 2개월 동안 대구에 머물며 청자의 기술발달 사항을 단계별로 연구했고 이때 수집된 파편을 연대별로 구분해 일본으로 반출하기도 했다.
일본총독부는 또 1939년 대구의 가마터를 사적으로 지정해 이 곳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계획까지 세웠었다.
▲ 1940년 발간된 '조선의 차와 선' 일본어판 원본이다. 김승홍 전 강진군의회의장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아 가보처럼 소장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발간 8년 후 해방이 되면서 한국에서는 극히 소량만 유통이 됐으며 훗날 우리나라 차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교과서 역할을 했다. |
조선연구회에서 발간된 책 중에는 정약용선생의 경세유표 등도 포함되었고 조선총독부직원과 한성고등학교 교감 등 다양한 사람들이 평가원으로 참여했다.
일제가 지천에 널려 있는 강진의 차에 관심을 갖지 않을리 없었다. 일제는 전남 서남해안지역의 차 문화 현황을 비교적 자세히 조사해 1940년 '조선의 茶와 禪'이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을 통해 성전면 월남마을에서 백운옥판차라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상표를 붙힌 차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됐고, 백련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남해안 사찰이 차의 전통을 이어오는 맥이라는 것을 분석해 냈다.
일제가 강진을 비롯한 서남해안 지역 차 현황을 조사한 내역은 이렇다. 1938년 전남도청 산림과에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라는 임업직 공무원이 있었다.
이 사람은 1925년 부터1년 동안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 재작할 때부터 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전남도청에 근무하면서 무등산의 차를 연구하며 직접 씨를 뿌려 묘목의 성장을 눈여겨 봤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차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된 계기가 마련됐다. 1938년 11월 1일 일본의 차 전문가인 모로오카 다모쓰제(諸罔 存)란 명인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모로오카 박사는 총독부의 파견으로 광주에 강연을 위해 내려 왔다가 이에이리씨를 만나 '조선의 茶와 禪'을 공동으로 저술하게 된다.
두 사람은 도청의 지원을 등에 업고 4차례에 걸쳐 본격적인 조선 차 탐방을 시작했다. 그들이 들른 곳은 무등산 차밭과 나주 다도면 마산리 불회사, 해남 대둔사, 장흥 보림사, 구례 화엄사, 보성, 순천, 함평, 영광 등을 망라하고 있다.
강진은 1939년 2월 23일부터 시작된 3차 조사 때 들르게 된다. 그들이 강진을 찾아온 계기가 재미있다.
▲ 1930년대 강진과 장흥지방에서 사용하던 차를 끓여먹은 약탕기이다. 앞쪽에 있는게 차의 종류인 청태전이다. |
당시 16세였던 이 학생은 강진읍 목리의 유대의씨의 딸이었다. 이 여학생은 헛간의 벽에 오래전부터 걸려 있던 차를 선생님께 선물했던 것이다.
이를 전해들은 이에이리씨와 모로오카 박사는 그 길로 강진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강진군청 임업계직원의 안내로 강진읍 목리로 가서 여학생의 아버지 유대의씨를 만난다. 유씨는 강진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큰 부자였다.
▲ 1939년 2월에 일본인 모로오카 박사가 촬영한 백운옥판차 상표. |
백운옥판차는 꾸러미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꾸러미 속에 대나무의 테가 있어서 꾸러미의 모양을 가지런히 하고 있었다. 앞쪽에는 상표가 있고 뒷면에는 차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조선의 茶와 禪'에서 "백운옥판차를 판매한 사람이 있으면 틀림없이 만드는 사람도 있으리라. 묶은 청태전을 따라온 결과 대단한 수확이 생기게 됐다"고 적고 있다.
두 사람이 백운옥판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많은 호기심과 관심을 갖게 됐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두 사람은 백련사와 다산초당 등을 돌며 다산선생이 차와 관계했던 일 등을 견학 한 후 해남을 거쳐 광주로 가는 길에 유대의씨로부터 들었던 '백운옥판차'의 제조자를 찾기 위해 성전으로 향한다.
"마을이름은 월남리였다. 집은 남향의 조선가옥이었다. 주인은 건강이 나빠져 자고 있었는데 방금 일어난
▲ 1939년 2월에 일본인 모로아카 박사가 촬영한 이한영씨의 모습. |
이를 시작으로 1978년에 우리나라 다성으로 일컬어지는 최규용씨 선생이 '금당다화(錦堂茶話)란 책을 통해 이한영씨를 구체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강진의 이한영씨는 우리나라 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됐다.
이에이리씨와 모로오카 박사는 전남지역 일원의 차문화를 비교적 공정하게 소개하면서 강진의 사진을 가장 많이 실은게 눈에 띈다. 1939년 8월 고성사의 모습이 생생하고 이한영씨가 백운옥판차를 제조하고 있는 모습도 선명하다.
당시 다산초당의 모습을 유색물감으로 그린 것도 그렇고, 다산선생의 제자 후손들을 인터뷰한 것도 의미가 깊다. 특히 매화꽃이 선명한 백운옥판차의 상표는 아마도 일본인 두 사람이 사진을 촬영해 두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이 잊혀질 뻔 했는지도 모른다.
/강진신문(0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