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삼국사기 완질본. 50권 9책. 보물 제 525호이다.
'만력원년월일옥산서당'이라는 글씨위에 낙인이 찍혀있어 1573년 경주부에서 찍어 옥산서원으로 보낸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읽은 책과 같이 삼국사기목록 신라본기 제 1권 시조혁거세거서간,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탈해이사금의 순서로 되어져있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서들을 살펴보면 국사, 유기, 서기, 제왕웅기, 삼국고기, 해동고기, 신라고기, 해동고승전, 화랑세기 등과
이 외의 많은 책들이 있었다고 전해져 오나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이중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유기, 백제의 서기 그리고 신라 진흥왕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도 그 책은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서의 가장 중요한 당시대에 기록된 1차적 기술이 없다.
1차적 기술이 없는 가운데 2,3 차적 기술의 역사서를 읽고 있을 뿐이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1차적 기술이 잘못되면 그것을 참고로 하는 2,3차적 기술은
그것에다 당시 정치적 상황과 서술자의 의견이 첨가되기에 그만큼 오류가 점점 심해지는 것이다.
#. 신라의 건국시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이 두 책을 근본으로 할 수 밖에 없지만,
신화를 제외하더라도 신빙성에 가장 의문이 가는 부분이 신라의 건국시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는 BC57년, 고구려는 BC37년, 백제는 BC18년으로 되어져 있는데
고대국가의 발전 과정을 볼 때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신라의 건국시기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 박혁거세는 BC57년 갑자년에 즉위하여 AD4년 갑자년에 죽었다.
- 남해가 다시 갑자년에 즉위하였다.(이 갑자년은 60갑자가 시작되는 해로 새나라의 건국에 맞추기 위해 서술하였다는 견해가 많다)
- 호공이라는 사람(또는 직위를 말하는 일반명사)이 혁거세와 80년 후인 탈해왕때도 등장한다.
- 3대 유리왕이 AD24년에 즉위하여 AD57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80년이 지난 AD134년에 유리왕의 아들 일성이 7대 왕이 된다.
(연표를 따져보면 일성왕은 100살 정도에 왕위에 올라야만 한다)
- 을해왕도 100살이 넘게 살았다.
- 내물왕도 150년 넘게 살았다.
- 13대 미추왕은 262년에 즉위하여 283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의 두 딸은 356년에 즉위한 17대 내물왕과 402년에 즉위한 18대 실성왕의 왕비로 되어있다. 이 기간의 차이는 100년이다.
이상의 것들로 살펴볼 때 신라 초기의 역사는 시기적으로 많이 부풀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부풀리기 위해 늘인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것들에 대한 반론으로 삼국사기의 오류를 잡는다고 새로운 왕실 가계도를 작성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역사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연대를 신뢰할 수 없다면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무엇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면 할 말은 없지만,
모든 역사서에는 신화와 설화가 존재하며, 옛일에 관하여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닌 구전되어오는 것들을 정리하여
역사서로 만들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앞선 시대의 연표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의심가는 부분이나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전체적 내용이 꾸며낸 이야기나 허구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내용을 소설이나 설화, 신화집으로 가벼이 생각함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 결론
역사라는 것은 시대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왜곡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신라 건국 초기의 경우 토착세력이었던 여섯부족과 새로운 박씨 집단의 충돌결과
세력을 잡은 박씨집단에 의한 역사가 시작되었고,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알영부인 집단 세력과, 뒤이어 석씨성을 가진 탈해의 등장,
석씨와 박씨세력의 결합, 자치세력이었던 김씨의 확장 등 정치적 과도기를 겪는 과정을 거쳐 김알지 신화로 알 수 있듯이
힘을 가진 김씨가 세력을 잡을 시점까지는 정치적 안정화단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 오는 정통성을 가진 집단에서 작성된 역사서이기에
고구려, 백제보다는 신라위주가 되었을 것이며,
특히 삼국유사는 스님의 신분에서 작성된 유사이기에
전체적인 내용이 신라의 불교에 관하여 더 많이 할애되고 있음을 미리 알고 이해하면 될 일이다.
연대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허구라거나 그 사실이 없었던 것으로 단정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임을 잊지 말고 그에 근거할 수밖에 없음이다.
첫댓글 사기나 유사나 승자의 기록이지만
사기보다는 유사가 더 인간적이고 사실적이라 생각되네요.
그런 관점에서 일연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하셨는지?
요새 인각사 옆 철로 신설로 주지는 시위하고 있다고...^^
인각사 옆에 철도?
기존철도 말씀하시는가요? 아니면 인각사 옆으로 새로이 철로가 놓이나요?
@백종하 중앙선 신설 고속철도...
우리의 DNA가 담겨진 역사서......국어, 수학, 영어만 딥다 해제끼니....ㅠㅠ
저도 공부해야겠습니다.^^
늘 안셀모님이 부럽습니다.
체력도 좋으시고 부지런도 하시고...
삼국유사는 일연이 탈고하지 않은 초안이라서 아쉽지 않나요???
일연이 몇년 더 사셨더라면...아니면 조금일찍 탈고 했더라면...
일연스님이 탈고하지 않은 초안이라 하심은 어떤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신지요?
1281년 편찬되었고, 1310년 초판간행, 1512년 중간행이어서 제가 보고 있는 책은 1512년의 정덕본의 해석본을 읽고 있습니다.
@백종하 제가 어디에서 보긴했는데... 다음의 백과사전에 아래내용이 있구요..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고려 말에 찬술되었지만 처음 간행이 이루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찬술된 당시 간행되었는지 아니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간행된 것인지 불분명하다. 즉 고려 간행을 포함한 세 가지 층위에 대한 견해가 있고 조선에서만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고 하는 두 가지 층위에 대한 견해가 있다.
현재 『삼국유사』의 판본 중 간행 연대가 가장 확실한 1512년 경주에서 간행된 임신본의 발문을 통해 당시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백종하 이 책의 간행에 관해 유탁일은 일연이 분권(分卷)없이 권자(卷子), 절첩(折帖)의 형식으로 만든 원고본을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이 1322년 정고본을 만들고 자기 의견을 보입하고 분권하여 일차 간행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선 초인 1394년 김거두(金居斗)의 발문본(跋文本) 『삼국사기』를 중간할 무렵에 다시 개각 또는 보각되었고 다시 1512년 『삼국사기』를 개각할 당시 이계복(李繼福)이 전래의 구판(舊板)에다가 80% 이상 보각을 한 것이 중종본 『삼국유사』이다. 즉 모두 3번 또는 그 이상의 전승 층위를 갖는다고 하였다.
@백종하 그래서 완전히 믿기에는 조금 의아하더라구요...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탱크대드 아... 간행이라는 말은 목판이나 활판으로 새겨서 책을 찍어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연스님이 젊은 시절부터 자료를 수집하여 70대 후반부터 말년에 기술하시어 고려말 1281년 편찬 찬출하셨고, 1310년에 제자 무극이 초간, 1512년에 중간하였습니다.
초간인지 중간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간행당시 제자 무극이 두군데 첨자를 붙인곳이 있을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일연스님께서 활자로 책을 찍지는 않으셨겠죠... 붓으로 적었던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자나 후대사람이 인쇄본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초기에 몇번 간행이 되었습니다. 석남본과 송은본이라고 불리어지는 이러한 책들이 낱권으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백종하 일연스님께서 붓으로 쓰신 원본책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백종하 감사합니다.
또 하나 배웁니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