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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外寫生
姜 南 求
1)
사생(寫生)을 나간 윤 화백 앞에 여학생 하나가 걷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 것 같았다.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여학생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순간, 윤 화백은 자지러지게 놀랐다. 60년 전 이읍리(梨邑里)에서 작별한 채순자였다. 너무도 반가워 손을 덥석 잡으려는데 앙칼진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어유, 또 쌌어요? 어서 일어나요. 어서!”
원장이 저쪽 침대 황(黃) 노인을 깨우고 있었다. 오늘도 침대에 변을 본 것이다. 고약한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다.
“어휴, 냄새!”
원장은 황 노인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윤 화백도 냄새 때문에 거실로 나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맑은 공기와 함께 말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다시 텔레비전 스위치를 켰다. 지난밤 바깥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뉴스는 없고 다른 프로만 나왔다. 일요일이기 때문이었다. 텔레비전 위쪽 거실 벽면에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간호사 등의 자격증이 눈에 들어왔다. 널찍한 거실을 중심으로 식당, 화장실, 목욕실, 영상실, 음악실 등을 갖춘 ‘노인장기요양 공동생활가정’에서 65세 이상의 치매(癡呆)와 뇌졸중(腦卒中) 장기요양 1등급 환자, 2등급 환자, 3등급 환자 9명이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간호사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장기요양 1등급 환자, 휠체어를 이용하면서 상당부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장기요양 2등급 환자, 일정부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장기요양 3등급 환자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각각의 가정에서 갇혀 살던 사람들이 2008년 7월 ‘노인장기요양보호법’ 제정으로 장기요양 1등급, 2등급은 매월 100만 원 정도의 정부 보조금이 있어 요양보호사의 간병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모든 환자들이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욕실에서 황 노인의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원장이 수도 호스로 알몸을 씻기는 물줄기가 제법 아픈 모양이었다. 통상 요양보호사의 일이지만 이른 아침이라 요양원 2층에 기거하는 원장이 맡는 것이었다.
대개 치매환자들이었다. 환자들의 증상은 각각이었다. 공연히 화를 내며 물건을 집어던지고, 자기 물건을 내 놓으라며 욕설을 퍼붓고, 자기 집에 가야한다며 보따리를 안고 서성이고, 핸드폰을 들고 가족의 연락을 기다리는가 하면 하루 종일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사람, 죽은 듯 침대에 누운 사람, 아침이면 직장에 간다며 현관을 나서는 사람도 있었다. 지난날 가족들을 부양하며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기억을 잃고 서너 살짜리 아기가 되어 요양보호사를 따라 노래하고, 손뼉치고, 웃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나쁠 때는 욕설을 퍼붓고 주먹을 휘둘러댔다.
요양원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족면회가 있었지만 윤 화백은 아내 몰래 입소하여 면회 올 가족이 없었다. 갑자기 없어진 남편을 찾아 헤맸을 아내에게 미안했다. 윤 화백은 치매가 아니라 10년 동안 재활치료를 받은 뇌졸중환자였다. 그래서 화장실이나 욕실 출입은 혼자 할 수 있는데 원장이 장기요양 2등급 환자로 만들어 주어 입소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0년 동안 윤화백은 아내의 무거운 짐이었다. 그래서 아내 몰래 요양원에 들어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다른 환자들은 하루 종일 요양원 건물에 갇혀 있었지만 윤 화백은 치매환자가 아니어서 매주 토요일, 일요일에 요양원 뒷산으로 야외사생을 나갈 수 있었다. 요양원 뒷산은 사방 임진강 강안의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져 야외사생에 좋은 곳이었다. 물론 윤 화백도 평일에는 군(연천군)에서 나올 점검 때문에 요양원 건물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점검에 걸리면 요양원에서 쫓겨나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과 일요일만 야외사생을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 주일이 금방 지나가고 요양원 생활이 지루하지 않았다. 잘 그리는 그림은 아니지만 뇌졸중환자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얼마 후 욕실 문이 열리고 원장이 발가벗은 황 노인을 데리고 나왔다. 황 노인의 몸에서 연신 물이 뚝뚝 떨어졌다. 원장은 알몸이 된 황 노인을 침실로 끌고 갔다. 침실에서 원장에게 반항하는 황 노인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옷을 갈아입히는 원장에게 반항하는 소리였다. 잠시 후 침실을 나온 원장과 시선이 마주친 윤 화백은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 아닌 게 아니라, 힘드네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하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원장은 마흔다섯 살 개띠로, 2006년 직장에서 밀려났다고 했다. 퇴직 후 재취업을 하려 했지만 자리가 없어 백수로 놀다가 2007년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제정으로 ‘노인요양 공동생활가정’을 세웠다고 했다. 다시는 쫓겨 날 일 없는 영원한 자신의 직장이었다. 요양원 위치가 휴전선 부근이라 고객 확보가 어려웠지만 매일새벽 6시면 입소자들의 침실을 돌며 하루일과를 시작하여 종일 내내 요양원을 보살피고 밤 10시가 지나서야 퇴근했다. 거처가 요양원 2층이어서 하루 15시간 이상 근무였다. 자신의 직장이라 무엇이나 성실했다. 윤 화백은 원장에게
“원장님! P요양원에서 소식 없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니요. 왜요? 찾아올 사람 생각났어요?”
“아니요. 그냥 ….”
“신경 쓰지 마십시오. 동명이인(同名異人)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동명이인?”
“세상에 윤일부란 이름이 화백님 혼자인 줄 아십니까?”
“일본식 이름이라 흔치 않을 겁니다.”
“뜻밖에 같은 이름이 많답니다. 어서 아침 드시고, 사생준비 하십시오. 오늘 일요일 아닙니까?”
하고 자리를 떴다.
2)
어젯밤 외출에서 돌아온 원장이 윤 화백에게
“혹시 화백님을 찾아올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자못 심각한 표정이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그냥….”
그러나 그냥 질문이 아닌 것 같았다.
“누가 나를 찾았습니까?”
“실은 누군가 화백님을 찾는 사람이 있었대요.”
“나를 찾아요?”
“예. 어떤 여자 분이 P요양원을 찾아와 윤일부라는 사람을 찾았대요.”
P요양원은 파주 시내에 있는 원장과 친하게 지내는 요양원이었다.
“여자?”
“그렇습니다.”
윤 화백은 깜짝 놀랐다. 아내일 것 같았다. 자신을 찾아올 다른 여자가 없었다. 원장이 물었다.
“어디 집히는 분 없습니까?”
“글쎄올시다.”
“혹시, 전 사모님은 아닐까요? 이혼은 하셨다지만…”
윤 화백은 입소 당시 원장에게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사는 노인이라고 했다. 핸드폰까지 버리고 잠적했는데 아내에게 추적당한 것이 같았다. 아내에게 발각되면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사는 노인이라는 거짓말이 탄로 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부도덕한 사람이 되어 내 집처럼 먹고, 자고, 야외사생을 영위하는 낙원을 떠나야 하는 것이었다. 요양원을 떠나는 것은 아쉽지 않지만 원장에게 위선자, 사기꾼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인간적으로 교유한 원장에게 그런 실망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가 나타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문이란 문은 모조리 자물쇠가 걸리고, 건물 바깥에 높은 울타리가 쳐진 요양원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24시간 감시를 피하여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밝은 날 야외사생을 나가 도망치기로 하고 늦잠이 들어 생뚱한 꿈까지 꾼 것이었다.
윤 화백은 거실 소파에 앉아 그 꿈을 생각했다. 채순자를 만난 것은 50년 전 65년 전 가을, 승주읍(昇州邑) 조계산(曹溪山) 천자암(天子庵)이었다. 쌍향수(雙香樹)를 그리려고 천자암을 찾았다가 역시 쌍향수를 그리러 온 여학생 채순자를 만난 것이었다.
쌍향수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제자 담당(湛堂)과 금나라 수도생활을 마치고 귀국g할 때 짚고 온 지팡이를 꽂은 것이 800년 세월에 실타래처럼 몸을 비틀며 12미터 높이로 자란 향나무였다.
서로 그림을 그리는 남녀의 좋은 인연이었다. 그러나 채순자가 갑자기 아파 산을 내려가야 했다. 아픈 여자를 혼자 보낼 수 없어 찻길이 닿는 승주읍 이읍리(梨邑里)까지 4킬로 산길을 함께 하고 다음 일요일 낮 12시 정각에 벌교 홍교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그날 채순자가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그 후 6.25, 4.19혁명, 군사혁명 등으로 바쁜 세월이 지나고, 오늘 새벽꿈에 보인 것이었다.
윤 화백의 어린 시절은 국민의 90% 이상이 소작농이었다. 자녀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부모의 농사를 돕다가 자연스럽게 농부가 되고, 학교를 다닌 몇몇 소수들이 공무원, 은행원, 판검사, 교원 등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윤 화백은 벌교의 부농 부모덕으로 일본에 가서 소학교를 다니고 소학교에서 그림으로 상을 받아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다. 정부수립 후에도 그림을 계속하여 17회 국전 서양화부문에 입선했다.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특선 등이 서예, 조각, 등 동양화 부분에 몰린 국전이었다. 당시 서양화 심사위원 남관(南寬) 화백이 심사가 사전 담합이라며 퇴장하는 가운데 서양화부분 입선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림에만 몰두하다 보니 윤 화백은 그림 외의 교양과목, 역사, 철학, 과학, 외국어 등은 무식이었다. 그러나 국전 입선 덕분에 15살 연하 나미(羅美)를 만나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득문득 지난 날 채순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에 나미를 만난 것이라 생각했다.
유명화가들의 아내는 대개 연하였다.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의 아내 ‘에비테른’은 열네 살 연하, ‘이응로’ 화백의 아내 ‘박인경’은 스무 살 연하, ‘피카소’의 마지막 아내 ‘쟈클린’은 무려 마흔일곱이나 연하였다. 화가는 아내를 잘 만나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했다.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는 아내 ‘김복순’ 때문에, ‘이중섭’ 화백의 <가족>은 아내 ‘마사꼬’ 때문에, ‘르누아르’의 매끄러운 누드화는 포동포동 살찐 아내 ‘알린’ 때문에, ‘보나르’의 관능적 누드화는 유난히 목욕을 좋아하는 아내 ‘마르트’ 때문에 탄생한 것이라 했다.
윤 화백은 아내 나미가 ‘이응로’ 화백의 아내 ‘박인경’, ‘모딜리아’의 아내 ‘에비테른’이기를 희망했고, 자신은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쉴레이기를 다짐했다. ‘에비테른’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 모딜리아가 죽자 임신 8개월 몸을 5층 창밖으로 던져 남편을 따랐고 에곤 쉴레는 임신 6개월에 독감으로 아내 ‘에디트’가 세상을 떠나자 그와 아내 ‘에디트’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까지 그린 ‘가족’이란 작품을 남기고 사흘 후에 아내를 따랐다.
그러나 윤 화백의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 남은 채순자의 기억 때문일지도 몰랐다. 15세 나이 차는 세상을 보는 시선, 여가를 즐기는 방법이 달랐다. 아내 나미는 전통문화, 대중문화는 물론 모차르트 소나타 <터기행진곡>, 비제 오페라 <카르멘>의 서곡, 영화감상을 좋아하고 텔레비전 연속극을 좋아하여 자정이 넘도록 채널을 돌려댔다. 그러다 보니 아내를 체념하고 각방을 거처했다. 그러는 사이 매번 국전 낙선을 거듭했다. 17회 국전에서 함께 입선한 서예부문 하남호 씨는 훗날 국전심사위원까지 역임했지만 단 한 번 입선이 모두였다. 낙선을 거듭한 어느 동년배 화가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가 세계의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직접 접하고는 자신은 그들이 될 수 없었고 또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와 열심히 노력하여 훗날 미술시장에 두각을 나타냈다. 열심히 노력하면 이룬다는 교훈이었다.
3)
1996년, 윤 화백은 환갑 개인전을 갖기로 했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사형선고가 내리고 강릉 안인진리 해상에서 북괴잠수함 침투한 그해였다. 화가들은 대개 일 년에 한두 번, 적어도 이삼 년에 한 번은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개인전도 열지 못한 윤 화백은 회갑 개인전 한 번으로 마침표를 찍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챙겨보니 겨우 오십 점 정도였다. 평생 그린 그림이 오십 점이라는 사실이 창피했다. 전시장을 채우려면 적어도 10점 정도는 더 있어야 했다. 결국 환갑기념 개인전은 포기하고 다음해에 진갑(進甲)기념 개인전을 열기로 하는데 섣달그믐날 아침, 아내가 교회봉사활동을 나가 혼자가 된 윤 화백은 가까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망년회를 갖고 당산역 2호선 마지막 전철을 타자고 제의했다. 당시 당산철교 재시공을 위하여 그날 자정 막차를 끝으로 2호선 전철 운행을 중단하기 때문이었다. 당산철교는 그 4년 전 붕괴된 성수대교 시공사가 건설한 것으로 처음이니 마지막이니 하는 의미 있는 현장을 찾아가 창작의 의욕을 북돋우려는 것이다.
그날 술자리를 파하고 전철역으로 가려고 일어서던 윤 화백은 머리가 깨지는 통증에 섬망(譫妄)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흐릿한 시야에 아내와 친구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신 들어요?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팔을 들어 봐요!”
팔다리는커녕,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의사가 말했다.
“다행히 병원이 가까워서 목숨은 구했습니다. 뇌졸중은 반드시 전조증이 있어요. 팔다리에 마비가 오고, 힘이 떨어지고, 복시(複視) 현상이 오고, 두통, 어지러움이 있어요. 재발이 잘 되는 질환이니 2차적 예방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병신이 되는 것인가 싶었다. 준비하던 개인전도 생각났다. 아내가 물었다.
“선생님,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재활치료만 잘 하면 나을 수 있어요.”
“그림은?”
“그림도 그릴 수 있어요. 재활치료만 잘하면-.”
아내는 울었다. 30년 동안 남남이던 아내가 운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묻는 것을 보면 그를 정말 사랑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 윤 화백은 10년을 아내에 의지하여 재활치료를 받고, 덕분에 장애가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아내에게 짐이 되는 것이 미안했다.
그러던 작년 10월, 혼자 재활치료 병원에서 나오다가 50대 초반의 원장을 만났다. 원장이 말했다.
“저희 요양원에도 재활치료 코스가 있어요. 재활치료는 환자와 보호자, 물리치료사 노력이 중요합니다. 제가 그걸 하고 싶습니다.”
귀가 솔깃했다.
“요양원, 아무나 갈 수 있습니까?”
“그럼요. 혼자 거동이 불편한 65세 이상의 치매환자와 뇌졸중환자라면-.”
“거동이라면?”
“혼자 옷을 입고 벗을 수 없다든지, 화장실 출입을 못한다든지….”
“나는 화장실 출입 정도는 아무 문제 없는데….”
“가실 생각은 있어요?”
“거동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아도 갈 수는 있어요?”
원장이 웃었다.
“엄살을 부리는 연극을 하십시오. 누가 안답니까?”
순간 봉사활동을 나간 아내가 생각났다. 재활치료 때문에 10년을 중단한 봉사활동을 다시 나가는 아내의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운 것 같았다. 아내를 짐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림만 그릴 수만 있다면 요양원으로 가는 것도 무방할 것 같아 물었다.
“요양원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까?”
“예.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원장은 장담했다. 기왕이면 풍광이 좋은 요양원이면 싶었다. 풍광을 직접 대하고 그리는 그림과 찍어온 사진을 놓고 그리는 그림이 같을 수 없었다. 원장이 말했다.
“저의 요양원, 좀 멉니다만….”
“어딥니까? 강원도-?”
“아닙니다. 휴전선 부근 연천군입니다. 서울은 땅값이 비싸 그 쪽으로 잡았습니다. 산과 임진강이 아우르는 곳이라 경치 하나는 끝내 줍니다. 차로 1시간 정도 거리라 양평, 용인, 안성보다 가까운 수도권입니다. 가보시겠어요?”
“그냥 가기만 하면 됩니까?”
“네. 장기요양인정서 사본, 의사소견서(진단서), 주민등록등본, 건강보험증 사본 등을 준비하시면-.”
“수속이 복잡하네요.”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리지요. 화백님께서는 평소 드시는 약, 겉옷 1벌, 여벌 속옷, 양말, 휠체어만 챙기십시오.”
마음을 정하자 아내가 봉사활동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원장의 봉고차에 올라 북으로 자유로(自由路)를 달려 오두산 통일전망대 안내판, 문산IC를 지났다. 원장이 지나는 주변을 설명했다.
“지금 임진각(臨鎭閣) 관광지를 지나고 있습니다. 좌측 방향은 통일대교를 건너 개성으로 통하고, 우리는 37번 국도로 임진강을 따라 연천군 장남면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4)
아침식사 후 원장은 윤 화백을 봉고차에 태워 요양원 뒷산으로 갔다. 차에서 내린 원장은 한 손에 여러 가지 사생도구를 들고 다른 손으로 윤 화백을 부축하여 요양원 뒷산을 올랐다. 원장에게 매번 이런 신세를 지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이름 모를 풀들, 수목 사이로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산비탈은 바로 자연이었다. 얼마를 오르지 않아 온 몸에 땀이 솟고 밤꽃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폐부에 닿는 공기가 닫힌 요양원 실내와 비교할 바 아니었다.
정상에 오른 윤 화백은 나무 등걸에 기대앉아 얼굴의 땀을 닦았다. 목발 짚은 겨드랑이가 환측(患側), 건측(健側) 할 것 없이 얼얼했지만 기분은 날아갈 듯 상쾌했다. 띵하니 무겁던 머리도 산뜻하게 맑아졌다. 산 아래로 펼쳐지는 사미천(沙美川), 임진강(臨津江) 강안(江岸)의 올망졸망한 야산들이 만드는 수평구도, 동북방향 백학면 석장리 일대의 야산을 아우르는 삼각구도 등이 더없이 좋았다. 원장이 말했다.
“화백님, 역시 야외사생 다니기 잘했지요?”
“네에. 덕분에 야외사생도 하고 좋은 재활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등산을 최고의 병원이라 하지요.”
야외사생을 나올 때마다 듣는 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장애도 많이 나아지고 그림 감각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면 우울한 기분도 좋아지는 것이었다. 원장은 김황원의 ‘장성일면 용용수(長城一面 湧湧水) 대야동두 점점산(大野東頭 點點山)’을 읊조리며 대동강 부벽루에 비견되는 조망이라 했다. 70세 후반에 산을 오르고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원장 때문에 얻은 행복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내가 나타나기 전에 이곳을 도망쳐야 했다. 윤 화백은 원장에게
“원장님, 이곳 지리 좀 가리켜 주시겠어요?”
하고 부탁했다.
“지리? 왜요?”
“동서남북을 전혀 몰라서요.”
“그걸 알아 뭘 하게요?”
“그래도….”
야외사생을 나올 때면 원장은 윤 화백을 산 정상에 데려다놓고 요양원으로 돌아가 다른 업무를 본 후 사생이 끝나면 다시 데리러 오는 것이라 원장이 요양원으로 간 사이에 산을 벗어나 도망가려면 이곳 지리(地理)를 알아야 했다. 원장은 사방을 가리키며 주변 곳곳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저 남쪽은 임진강 장남교-. 기억나세요? 그날 화백님과 함께 장남교를 건너 왔죠. 저기 북쪽과 서쪽은 휴전선을 사이하고 북한 장단군과 개풍군이 자리하고, 이곳 연천군 장남면(長南面)은 원당리, 자작리, 고랑포리, 반정리, 판부리 등 5개리로 구성되는데 반정리, 판부리는 군사분계선이라 출입영농만 가능하고, 주민들은 원당리, 자작리, 고랑포리 일부에 거주합니다.”
원장은 다시 동쪽을 가리켰다.
“저 동북쪽 방향 연천군 군남면, 왕징면 경계 연천읍 고문리에 지금 한탄강 댐이 건설 중입니다. 매년 되풀이 되는 홍수를 막기 위하여 2000년 기존 연천댐을 철거하고 2006년 그 2킬로미터 상류에 2014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하고 있습니다.”
“새로 건설할 것을 왜 철거해요?”
“아, 네에. 새로 건설하는 댐은 발전이나 용수를 공급하는 다목적 댐이 아닌, 댐 본체에 구멍을 뚫어 평상시에는 물을 그대로 흘려보내다가 홍수 때에 물을 가두는 홍수조절 댐입니다.”
원장은 브리핑을 하는 작전장교 같았다.
“저쪽 철원 북쪽에서 서쪽으로 흘러온 역곡천과 철원 남쪽에서 서쪽으로 흘러온 한탄강이 합류하는 임진강 유역 휴전선 일대는 장차 평화공원이 조성되면 세계적 관광명소로 떠오를 희망의 땅입니다.”
원장은 다시 남쪽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임진강이 비룡대교에서 몽계토성으로 남하하여 다시 북상하여 서북방향을 흘러온 임진강 지류 사미천과 북쪽 백학면을 흘러온 석장천을 만나 S자를 만들며 장남교로 남하했다가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오 장남면 원당리를 U자로 감싸며 고랑포리를 향하여 물 태극을 그리며 북상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물 태극!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원장은 설명을 계속했다.
“이곳에서 서울은 남쪽 60㎞, 평양은 북쪽 140㎞, 개성은 동쪽 28.5㎞, 북한군 초소는 북쪽 1.6㎞, 휴전선은 북쪽 0.8㎞입니다. 그야말로 남과 북이 대치하는 전장(戰場)이지요. 옛날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접경이라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고, 지금은 남과 북이 대치하여 6.25 때는 수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북한이 끊임없이 NLL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지만 미국이 그냥 있겠어요? 이제 중국도 미국과 함께 북한 비핵화에 공조하고 있어 연평해전이나 연평도 폭격 때와는 다를 겁니다. 더 궁금한 것 있어요?”
“이곳에서 서울은 얼마나 멀어요?”
“60킬로, 백 오십 리입니다.”
“걸어간다면…?”
“걷다니요?”
윤 화백은 아차 했지만 원장은 여느 때처럼 윤일부의 목에 자신의 핸드폰을 걸어주고는
“아마 하루는 꼬박 걸어야 할 겁니다. 사생이 끝나면 1번을 길게 눌러주십시오. 바로 모시러 오겠습니다.”
하고 성큼성큼 산을 내려갔다. 원장이 완전히 떠나자 윤 화백은 남쪽 전방을 주시했다. 그 조망 속에 고향 벌교가 떠올랐다. 이곳에서 보는 임진강 주변 산야가 벌교 부용산(芙蓉山)에서 보는 제석산(帝釋山), 백이산(伯夷山), 존제산(尊帝山), 장군봉(將軍峰), 병풍산(屛風山) 등에 에워싸인 벌교읍 지동리, 전동리의 낙안평야 같기만 했다. 요양원 뒷산 표고 또한 부용산(芙蓉山)과 비슷한 표고 100미터 정도였다.
이윽고 윤 화백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가 남쪽 장남교를 건너 파주시 적성면으로 달아나야 하는 것이었다. 원장을 만나지 않으려고 약간 방향을 바꾸고 보니 수목이 더욱 울창했다. 휴전 후 반세기 동안 사람들의 출입이 없는 수림은 하늘도 보이지 않고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목발걸음이 자꾸만 앞으로 꼬꾸라지려 했다. 수풀에 막히면 돌아가고,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 속절없는 한 마리의 개미였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숨이 가빠 가슴이 터질 것 같아 하늘을 향하여 그냥 땅바닥에 드러눕자 빽빽한 나무 사이로 현란한 광음(光陰)이 새어들고 등 아래로 흙의 부드러운 감촉에 마음이 안온하고 기분이 황홀했다. 사람이 죽어서 산에 묻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 나미를 만나지 않으면 도망을 쳐야했다. 다시 일어나 목발을 짚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갑자기 목에 건 핸드폰의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원장의 전화가 분명했다. 벨소리에 심장이 감전되는 듯 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전화를 받는 순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신호는 계속 울려댔다. 원장이 뒤쫓아 오는 것만 같았다. 핸드폰을 팽개쳐버릴까 하다가 참았다. 탈출에 실패할 경우 때문이었다. 신호음이 계속 울리다가 끊어지기를 되풀이 했다. 얼마를 더 내려서자 입목 사이로 임진강과 농무에 싸여 섬이 된 표고 100미터 내외의 올망졸망한 야산들과 오후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나는 임진강 강안 수직 현무암 절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폭의 그림에 담고 싶은 정경이었다. 평지로 내려가 모랫길을 따라 장남교로 향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지쳐서 기진맥진이었다. 이제 장남교를 건너 남쪽 적성면 두지리로 가야 했다. 그런데 전방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봉고차 하나가 멎더니 차에서 원장이 내려
“어찌된 겁니까? 전화도 받지 않고…. 어서 타요!”
하고 화를 냈다. 윤 화백이 차에 오르자 원장이
“화백님, 혹시 채순자 씨, 알아요?”
하고 물었다. 윤 화백은 깜짝 놀랐다. 원장이 채순자를 알 까닭이 없었다.
“화백님 찾는 분이 채순자 할머니래요.”
윤 화백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공연히 이혼한 사모님을 의심했지요? 채순자 할머니, 화백님 실종방송을 보고 첫사랑을 찾아 전국요양원을 뒤지고 있대요. 화백님 첫 사랑 맞습니까?”
윤 화백은 자신을 찾는 사람이 아내가 아니라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다음 순간 원장이 다시 물었다.
“어떻습니까? 화백님, 채순자 할머니 만나 보시겠어요? 지금 P요양원에 계시는데….”
윤 화백은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본명 강종홍(姜宗弘). 진주 출생. 진주사범 졸업
1958년 소설 영문(嶺文) 추천. 2009년 수필 수필문학 추천.
1990년 하늘소산악회 회장(현재)
저서 : 하늘소들의 백두대간답사기 2권, 왕위계승 삼국사기, 섬진기행. 국토기행 등
수상 : 세계문학상 본상(아버지의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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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토리에 비해 길군요
사진이 보이지 않군요
남구씨
어쩌자고 이렇게 길게 썼어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
머리가 핑 돈다
4페이지에서 6페이지로 늘렸는데
편집회의에서 짜르게 되더라도 양해해주셔요
안병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