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주 교수의 세계사여행]
제1차 세계대전( I ) 전쟁 발발의 원인
삼국동맹-삼국협상 간 갈등이 ‘화약고에 불’
사라예보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이 발단
오스트리아, 세르비아 침공 양 진영 ‘방아쇠’
전사자만 1000만 명…전문가 “주 책임은 독일”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한 가브릴로 프린치프(원내)가 현장에서 체포되는 모습이 담긴 당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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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거의 1세기 전인 1914년 8월 초에 유럽 열강들은 삼국동맹(Triple Alliance)과 삼국협상(Triple Entente)이라는 두 블록으로 나뉘어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한 대결이랄 수 있는 제1차 세계대전(the First World War)에 돌입했다. 세계대전이라는 말에 걸맞게 일본·인도·미국 등 다른 대륙 국가들까지 가세하면서 약 4년4개월 동안 지속된 전쟁은 당사국들에게 전사자 1000만 명, 부상자 2000만 명이라는 인적 손실과 2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액수의 물적 손실을 입혔다. 이처럼 당한 피해가 크다 보니 전후 패전국 독일에 대한 처리도 과도한 응징과 보복으로 귀결됐다. 제1차 대전의 영향으로 이후 세계는 대공황, 파시즘 및 볼셰비즘과 같은 전체주의의 출현, 그리고 또 다른 살육전인 제2차 세계대전을 겪게 됐다.
이처럼 20세기 초반을 피로 물들인 일명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전후처리 회담이 개최되면서부터 전쟁의 원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됐다. 전쟁 발발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보다 심각한 문제와 얽혀 있었기에 논쟁은 치열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대전의 원인에 대한 논의가 베르사유 회담이 열린 1920년대에, 더 나아가서는 1960년대 초반 점화된 이른바 ‘피셔 논쟁’ 때 일단락되지 못한 채, 대전 발발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불을 붙인 것은 1914년 6월 28일 남유럽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Sarajevo)에서 발생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이었다. 당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암살범의 배후에 세르비아 정부가 있다고 확신한 오스트리아는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이후 세르비아 정부의 미온적 태도에 발끈한 오스트리아군은 사건 발생 한 달 후인 7월 28일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복잡한 민족 구성을 갖고 있던 ‘만성적 화약고’ 발칸반도에서 양국 간에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그런데 두 나라 간에 충돌이 일어난 지 불과 1주일 안에 국지전은 러시아·독일·프랑스·영국 등 유럽 열강들 대부분을 포함한 세계대전으로 확대됐다.
대전의 발발과 관련해 크게 다음 두 가지 근원적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암살 사건이 왜 하필이면 유럽의 변두리에 있는 사라예보에서 일어났을까?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전쟁에 왜 유럽의 열강들이 가세하게 됐을까? 우선, 첫 번째 의문과 관련해서는 전통적으로 발칸지역에서 상존(常存)해온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간의 대립과 갈등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유럽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남유럽에서는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로 대변되는 ‘국수적 민족주의’가 극성을 부렸다.
원래 16세기 이래 오토만 제국(Ottoman Empire)의 점령 하에 있던 이 지역에 역사적으로 이해관계가 깊은 게르만족의 오스트리아와 슬라브족의 러시아가 19세기 중엽 이래 적극적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더구나 러터전쟁(1877)의 결과,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보스니아 지역을 독일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가 차지하면서 발칸지역의 슬라브족 맹주를 자처하던 세르비아의 불만이 고조됐다. 마침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울분은 1914년 6월 28일 황태자 암살로 표출됐고, 그동안 쌓여온 원한의 골이 너무 깊은 탓에 이 사건은 이전에 유럽에서 벌어졌던 다른 갈등들과는 달리 대화로 수습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양국의 분쟁에 왜 유럽 열강들이 앞다투어 가담하는 사태가 벌어졌을까? 단적으로 말해 대전 발발 직전 유럽 열강들은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과 삼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이라는 두 개의 적대 진영으로 분열돼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동맹에 속한 오스트리아와 삼국협상국인 러시아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 간에 충돌이 벌어지자 다른 국가들도 줄줄이 전쟁에 휘말렸던 것이다. 이러한 적대적 외교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형성돼 왔다. 즉 1871년 초 유럽 중앙부에 통일된 독일제국이 등장하면서 이후 독일의 외교정책 변화에 따라 유럽의 세력균형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통일 후 국내 통합을 위해 유럽의 평화가 절실했던 신흥 독일제국의 수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재임 1871~1890)는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화’를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정하고 이를 적극 추진했다. 1882년 오스트리아·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결성하고, 1887년에는 러시아와 재보장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세계정책’을 주창한 신임 황제 빌헬름 2세와 외교노선을 놓고 갈등을 빚은 비스마르크가 1890년 정치와 외교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유럽의 기존 국제질서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외교적으로 고립돼 있던 프랑스가 1894년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됐고, 여기에 영국까지 가세하면서 1907년에 삼국협상이 결성됐다. 이제 유럽 내에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이라는 두 개의 외교블록이 등장한 것이다. 이후 제2차 모로코 사건(1911)과 발칸전쟁(1912. 10~1913. 8) 등을 거치면서 양 진영 간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고조됐고, 급기야는 발칸반도의 사라예보에서 운명의 방아쇠가 당겨지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은 1914년 전쟁 발발과 관련해 독일이 주(主)책임을 져야 한다는 독일 역사가 피셔(Fritz Fischer)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당시 참전국들 각자의 책임 정도를 둘러싸고 여전히 이견(異見)이 존재한다. 역사학의 속성상 한 사건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은 불가피하게 주관성을 갖게 되며, 이에 더해 역사가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재’의 시대적 상황이 계속해서 변화하기에 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대전 원인에 대해 오늘 합의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곧 다음 날 벌어질 논쟁의 출발점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사에서, 무엇보다도 유럽인들의 역사에서 결코 망각될 수 없는 너무나 크고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Songs From a Secret Gar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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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Songs From a Secret Garden
Secret Garden 1995–present
No.1 - Noctu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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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Title: Songs From a Secret Garden - Secret Garden
Studio/Live Studio Mono/Stereo Stereo Audio CD (April 16, 1996) Label: Polygram Records / PHILIPS (P) 1995 PolyGram A/S Norway (C) 1996 Philips Classics Marketed in the UK by Philips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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