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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LIFE AND DEATH)
동양의 위대한 대스승, H.P.B., 올코트 대령 그리고 인도인 사이의 대화
블라바츠키 여사가 전달
가여운 바부과 매우 열띤 논의 가운데에서 나라얀이 타쿠르에게 말했다: “대스승님,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가 말하는 것을 혐오하지 않고 들을 수 있을까요? 그는 사람이 죽은 후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하며, 하지만 그 사람의 체가 단순히 그것의 구성 요소들로 용해되어, 우리가 혼(soul)이라고 부르는 그것, 그리고 그가 일시적인 의식으로 부르는 그것이 자체를 분리시켜서, 뜨거운 물의 증기처럼 식으면서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대는 이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대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바부는 차르바카이고[1] 그는 다른 모든 차르바카들이 그대에게 말했을 것만 그대에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차르바카들은 잘못 알고 있습니다. 실재 인간(real man)은 그의 신체적 덮개가 아니라, 의식의 자리에, 마인드 속에 거주한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 의식이 죽음 후에 혼을 떠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다.” 타쿠르가 조용히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말하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나라얀은 타쿠르에게 놀랍고 심지어 겁에 질린 표정을 던졌으며, 바부—타쿠르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약간의 자제를 느꼈다—는 승리를 거둔 미소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라얀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이렇게 되나요?” “베단타는 영의 영(spirit of the spirit)이 불멸이라고 우리를 가르치며, 사람의 혼은 파라브라흐만 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예외가 있나요?”
“영적인 세계의 근본적인 법칙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맹인을 위한 법칙과 보는 사람을 위한 법칙이 있다.”
“저는 이것을 이해하지만, 이 경우에, 제가 이미 그에게 말했듯이, 그의 온전하고 최종적인 의식의 소멸이 단지 눈먼 사람의 일탈일 뿐이며, 태양을 보지 못하면서,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항상 그는 죽은 후에 그의 영적인 시력으로 태양을 볼 것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대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태양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무덤의 다른 쪽에서 그것을 볼 수가 없다.”
나라얀이 다소 언짢아 보인 것을 보면서, 그리고 심지어 우리, 대령과 나조차도 좀 더 확실한 대답을 기대하면서 그를 응시하였기에, 타쿠르는 마지못해 계속 이어갔다:
“그대는 영의 영(spirit of the spirit), 즉 아트마(Atma)에 대하여 말하고, 이 영(spirit)을 인간의 혼(soul), 마나스(Manas)와 혼동하고 있다. 그 영은 의심할 여지없이 불멸이다. 왜냐하면 시작이 없기에 그것은 끝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대화에서 관련되는 것은 영이 아니다. 인간의 자의식적인 혼이다. 그대는 그것을 전자와 혼동하고, 바부는 하나와 다른 것, 혼과 영을 부정하며, 그래서 그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는 그를 이해합니다.” 나라얀이 말했다.
“하지만 그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스승께서 끼어들었다. “내가 더 명확하게 말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대가 알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의식과 자기-느낌(self-feeling)의 완전한 상실이 사후에 가능한지, 심지어 확증된 물질주의자의 경우에도. 그것이지 않은가?”
나라얀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게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인 모든 것을, 우리가 굳게 믿는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좋다.” 대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대답할 것이며, 그것이 두 생 사이의 기간을 단지 일시적이라고 지정하는 우리의 가르침을 그대가 확고하게 믿듯이 내가 믿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이 막간이 환영의 삶의 두 가지 막 사이에서 1년 혹은 100만년을 지속하든, 사후 상태는 근본적인 규칙들을 깨지 않은 채 매우 깊은 기절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의 상태와 완벽하게 유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부는 그의 개인적인 경우에 완벽하게 옳다.”
올콧 대령이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그렇습니까?”라고 말했다; “불멸의 규칙은 당신께서 말씀하셨듯이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경우에서만 인정된다. 그대 자신처럼 만두키야 우파니샤드와 베단차 사라를 공부해온 사람은 그런 질문들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대스승께서 책망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하지만 정확하게 만두키야 우파니샤드에서 붓디(Buddhi)와 마나스(Manas) 사이에서, 이쉬바라(Ishvara)와 프라그냐(Prajna) 사이처럼, 숲과 그곳의 나무처럼, 호수와 그곳의 물처럼 사실상 더 이상 차이가 없다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나라얀이 소심하게 말하였다.
“완벽하게 맞다.” 대스승께서 말씀하였다. “왜냐하면 활기 있는 수액을 잃어버린 혹은 심지어 뿌리가 뽑힌 한 그루 혹은 심지어 백 그루 나무들은 숲이 숲으로 남아있는 것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라얀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붓디(Buddhi)가 숲이고, 마나스 타이자시(Manas Taijasi)는 나무이며, 만약 전자가 불멸이라면, 그러면 어떻게 붓디와 같은 마나스 타이자시가 새로운 화신 전에 의식을 잃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것이 저의 어려움이 있는 곳입니다.”
“그대는 어떤 어려움을 겪을 일이 없다.” 대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그대가 전체의 추상적인 생각을 그것의 격의 없는 형태의 변화와 혼동하지 않으려고 애쓴다면 그렇다. 붓디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불멸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나스에 대해서, 혹은 타이자시에 대해서 똑같이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전자(마나스)나 후자(타이자시)도 신성한 혼(Divine Soul)과 분리된 어떤 존재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지상의 개성의 속성이고, 두 번째는 첫 번째와 동일하지만 추가적으로 그 속에 붓디의 반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붓디는 이런 요소가 없다면 비개성적(impersonal) 영으로, 그것이 인간의 혼으로부터 빌려와서 그것을 조건화시키고 그것에서 인간의 화신 모든 주기 동안에 보편 혼(Universal Soul)과 분리된 모습을 가진 어떤 것을 만든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붓디-마나스가 죽을 수 없으며, 영원 속에서 혹은 일시적인 중단 기간 동안에도 의식을 잃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완전하게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 공리를 붓디-마나스의 특질들에 적용하는 것은 마치 올코트 대령의 혼이 불멸이듯이, 그의 뺨에 있는 붉은 색도 불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는 실재(reality), 사트(Sat)와 그것의 현현을 혼동한 것이 분명하다. 불멸성과 인간의 지상의 개성의 사후 의식이 조건적인 특질로 되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자체가 창조한 조건들과 신념들에 따라서, 그대는 마나스에만 결합된 채, 타이자시의 발광(광휘)은 시간의 문제가 된다는 것을 잊었다. 카르마는 멈춤 없이 작용하고, 우리는 다음 세계에서 우리 자신이 이번 생에서 뿌린 그것의 결실을 거둔다.”
“그런데 만약 나의 자아(Ego)가 나의 체의 파괴 후에 완전한 무의식 상태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러면 내가 일생 동안 저지른 죄들에 대한 처벌은 어디에 있나요?”라고 대령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우리의 철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라고 타쿠르는 대답하였다. “처벌은 다음 화신에서만 자아에게 도달하며, 우리의 죽음 직후에 우리는 지상의 삶의 고통, 우리가 합당하게 받지 않아야 하는 고통들에 대한 보상만을 만난다. 그래서, 보다시피, 처벌의 전체는 보상의 부재 속에, 행복과 휴식이라는 의식의 완전히 상실 속에 있다. 카르마는 지상의 자아의 아이이며, 그의 가시적인 개성의 행위들의 과실, 심지어 영적인 나(I)의 생각들과 의도들의 과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온화한 어머니로, 이 자아를 때리고 그에게 새로운 것들을 주기 전에 이전 생에서 받은 상처들을 치유한다. 인간의 삶에서 그의 이전 화신에서 저지른 죄의 결실이자 직접적인 결과가 아닌 불상사나 슬픔은 없다; 그러나 그의 현재 삶에서 그것에 대한 조금의 기억도 보존하지 않은 채, 그리고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다고 느끼기에, 그가 무덤의 다른 쪽에서 위로와 온전한 휴식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의 영적인 자아(Ego)에게 죽음은 항상 구원자이자 친구이다. 그것은 아기의 평화로운 잠이거나, 지복의 꿈과 환상으로 가득 찬 잠이다.”
“제가 기억하는 한, 수트라트마(Sutratma)의[2] 주기적인 화신들이 우파니샤드에서 잠 속에서 그리고 깨어남 속에서, 한 기간 한 기간, 보낸 지상의 삶에 비유됩니다. 그것이 그런가요?” 나는 나라얀의 첫 번째 질문을 다시 던지고 싶어서 물었다.
“그렇다; 그것이 매우 좋은 비유이다.”
“저는 그것이 좋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합니다. 깨어난 후에, 그 사람은 단지 새로운 날을 시작할 뿐이지만, 그의 혼은 물론 그의 체도 어제와 같습니다; 반면에 모든 새로운 화신에서는, 그의 겉모습, 성, 그리고 심지어 개성뿐만 아니라, 제가 보기에, 그의 모든 도덕적 특질들도 완전히 바뀝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은 깨어난 후에, 그들이 어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뿐만 아니라, 많은 날들, 몇 달들, 심지어 수년 전에 하고 있던 것을 기억하며, 반면에 그들의 현재의 화신에서, 그들은 무엇이건, 과거 생에 대한 조금의 기억도 간직하지 못하는 데, 어떻게 이 비교가 진실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요? 물론 사람들이 깨어난 후에, 그가 그의 꿈 속에서 본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그가 자고 있었다는 것과 그가 잠자는 동안에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전 생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가 살았다는 것조차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어떤 것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쿠르는 내 질문에 단도직입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수수께끼처럼 대답했다.
내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저는 이 점에 대하여 어떤 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의 인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직 삼마 삼붓다(Samma Sambuddha)에[3] 이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이런 비교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우리가 잠(sleep)으로 부르는 세 종류의 특이성을 더 잘 이해할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대령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생리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이 질문에 너무 얽혀서 그것이 더욱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착수하지 못할 일을 맡았기 때문이고,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심리학자의 의무이며, 그대의 유럽 과학자들 중에는 거의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서구의 심리학자는 생리학자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며, 차이점은 그들이 한층 더 물질적인 원리들에 대하여 연구한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모슬리의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은 그들이 혼의 존재를 믿지 않은 채 멘탈 질병을 치료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우리 질문의 원래 목적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타쿠르 사히브, 당신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분명히 하기를 꺼려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당신이 바부의 이론을 확인하고 심지어 격려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우리의 과거 지상의 삶에 대하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확히, 사후의 삶, 죽음 후의 삶을 불신하고 어떤 종류의 의식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기억하시죠.”
“나는 바부는 차르바카이고, 그가 배운 것을 반복하기만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하겠다. 내가 확인하고 격려하는 것은 물질주의자들의 체계가 아니라, 사후에 그의 개성의 상태에 관련한 것에서 바부의 의견의 진실이다.”
“그러면 바부 같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규칙에서 제외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전혀 그렇지 않다. 잠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지상의 피조물에게 일반적이고 불변의 법칙이지만, 다양한 잠들과 한층 더 다양한 꿈들이 있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는 것은 사후의 삶과 그것의 꿈만이 아닙니다. 그는 그 자신의 영(spirit)의 불멸뿐만 아니라, 불멸의 삶을 전면적으로 부정합니다.”
"첫 번째 경우에 그는 우리의 오감의 경험에 근거한, 현대 유럽 과학의 규범에 따라서 행동한다. 이것에서 그는 그의 의견을 간직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유죄이다. 두 번째 경우에도 그는 전적으로 옳다. 이전의 내면의 의식과 혼의 불멸에 대한 믿음 없이, 혼은 붓디 타이자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마나스로 남을 것이다.[4] 그러나 마나스 혼자로는 불멸이 없다. 무덤의 다른 쪽에 있는 세계에서 의식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그는 이 지상의 삶에서, 그 세계에 대한 믿음을 얻었어야 한다. 이것들은 오컬트 과학의 두 가지 금언으로, 그것들 위에 혼의 사후 의식과 불멸에 관한 우리의 모든 철학이 세워진다. 수트라트마는 그것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만 얻는다. 육체의 파괴 후에 수트라트마가 온전한 각성의 기간, 혹은 혼란스러운 잠, 혹은 꿈이나 환상이 없는 잠을 시작한다. 꿈과의 인과성을 깨어있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인 준비에서 찾은 그대의 생리학자들을 따르면서, 우리는 왜 사후의 꿈들에 관하여 똑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아야 하는가? 나는 베단타 사라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죽음은 잠이다. 죽음 후에, 우리의 영적인 눈 앞에서 우리의 생에서 우리가 배운 프로그램의 표상이 시작되며, 우리의 진정한 믿음들의 혹은 우리 자신이 창조한 환영들의 실제적인 실현이 때로는 발명되기도 하였다. 이것들은 생명의 나무의 사후적인 결실이다. 물론 의식적인 불멸의 사실에 대한 믿음 혹은 불신이 일단 그것이 존재하면 그 사실 자체의 무조건적인 실제성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그러나 별개의 개성들의 믿음 혹은 불신이 그런 개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이 사실의 영향을 조건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나는 그대가 이해하기를 바란다.”
“저는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물질주의자들은 그들의 오감과 소위 과학적 이성으로 통제될 수 없는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서 그리고 모든 영적인 현상을 부정하면서, 지상의 존재를 유일한 의식적인 존재로 지적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만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개성적인 나(I)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깨어남이 일어날 때까지 무의식적인 잠을 잘 것입니다. 제가 올바르게 이해하였는지요?”
“거의 이해하였다. 그대는 여기에 베단틴들은 두 종류의 의식적인 존재, 즉 지상의 존재와 영적인 존재를 인정하면서, 오직 후자를 의심할 여지없는 실재로 가리킨다는 것을 덧붙일 수도 있다. 지상의 삶에 대하여, 그것의 변화성과 단기성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감각들의 환상에 불과하다. 영적인 영역에서의 우리의 삶이 실제로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끝없는, 변하지 않는 불멸의 나(I), 수트라트마가 사는 곳이 바로 거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모든 새로운 화신에서 그것은 완전히 다른 개성, 일시적이고 짧은 생의 개성을 입으며, 그 속에서 그것의 영적인 원형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파괴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례합니다, 타쿠르. 저의 개성, 저의 지상의 의식적인 나(I)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가능한가요?”
“우리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것은 사라질 뿐만 아니라, 붓디와 결합된 채 순전히 영적으로 되었으며 이제 분리될 수 없는 전체를 형성하는 그 속에 있는 이 원리를 제외하고, 그것 전체로 사라져야만 한다. 그러나 굳어진 물질주의자의 경우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것의 개성적인 나(I) 어떤 것도 붓디 속으로 침투한 적이 없을 수 있다. 붓디는 그런 지상의 개성의 어떤 원자도 영원 속으로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영적인 나(I)는 불멸이지만, 그대의 현재 개성으로부터 그것은 불멸을 받을 자격이 있는 그것만, 즉 죽음으로 베어진 꽃들의 아로마만을 가져갈 것이다.”
“그러면 그 꽃 자체, 지상의 나(I)는요?”
“그 꽃 자체는, 똑 같은 뿌리, 붓디의 아이, 수트라트마, 똑 같은 모계 가지 위에서 꽃을 피웠고 그 후에 꽃을 피울 모든 과거와 미래의 꽃들처럼, 먼지가 될 것입니다. 그대의 실재 나(I)는 그대가 자신을 알듯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대의 체도 아니고, 그대의 마나스 수트라트마도 아니며, 그대의 수트라트마-붓디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왜 우리의 사후의 삶이 불멸로, 끝없는 것으로, 그리고 실재라고 말하는지, 그리고 지상의 삶을 단순한 그림자라고 말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당신의 가르침에 따르면, 심지어 우리의 사후의 삶에도 한계를 가지며, 지상의 삶보다 더 길더라도, 여전히 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확실하게 그렇다. 인간의 영적인 자아는 삶과 죽음의 시간들 사이의 팬줄럼처럼 영원 속에서 움직이지만, 만약 이런 시간들, 지상의 삶과 사후 삶의 시간들이 그것의 지속성에서 제한이 있고, 심지어 잠과 깨어남, 환영과 실재 사이의 영원 속에서 그런 단절(휴식)의 수도 그것의 시작뿐만 아니라 끝을 가지고 있지만, 영적인 순례자(Pilgrim) 자신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가 진실과 마주보고 서서 그의 지상의 존재들의 단명한 신기루들이 그가 결코 아니라는 베일이 벗겨질 때, 그의 사후 삶의 시간들이 우리의 개념에서 유일한 실재를 구성하거나 차지한다. 그런 단절(휴식)들은, 그것들이 유한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수트라트마에게 이중의 봉사를 하며, 수트라트마는 자신을 꾸준히 완벽하게 하면서, 매우 느리지만, 동요 없이, 그것의 마지막 변형으로 이끄는 길을 따르며, 마침내 그것의 목표에 도달할 때, 그것은 신성한 대존재(Divine Being)로 된다. 그런 단절들은 이런 목표에 닿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이런 유한한 단절들이 없다면 수트라트마-붓디가 그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수트라트마는 배우이고, 그것의 수많은 다른 화신들은 배우의 역할들이다. 나는 그대가 이런 역할들에 몰두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것들의 의상들, 개성의 기간에 훨씬 덜 몰두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배우처럼, 혼은 파라니르바나의 바로 그 문지방에 이르기까지 재탄생의 주기 동안에, 종종 그것에 불쾌한 그런 많은 역할들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벌처럼, 모든 꽃에서 그것의 꿀을 모으고, 나머지는 땅의 벌레들을 먹이기 위해서 남겨놓듯이, 우리의 영적인 개체성(individuality), 수트라트마는 카르마에 의해서 강제되어 그것이 입어야 하는 지상의 모든 개성으로부터 도덕적인 특질들과 의식의 넥타르만 모으면서, 마침내 이 모든 특질들을 하나 속에 통합하여, 완전한 존재, 디얀 초한이 된다. 그것이 지상의 개성들로부터 아무것도 수집할 수 없는 그런 지상의 개성들은 훨씬 더 심각하다. 물론, 그런 개성들은 의식적으로 그들의 지상의 존재보다 오래 살 수가 없다.”
“그러면 지상의 개성의 불멸은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있으며, 심지어 그 불멸성조차도 무조건적인 것이 아닌 것이죠?”
“아니다, 그대는 나를 오해하고 있다.” 대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불멸은 비-존재하는 것(non-existing)을 망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트(Sat)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그 기원을 사트 속에 갖는 모든 것은 불멸뿐만 아니라 무한성도 무조건적이다. 물라프라크리티는 파라브라흐만의 반대편이지만, 그것들은 하나이고 동일하다. 이 모든 것의 본질, 즉 영(spirit), 힘(force), 그리고 물질(matter)은 끝도 시작도 없지만, 그것의 화신 동안에 이런 삼중의 통일성으로 획득한 형상은, 말하자면 그것의 외형은, 개성적인 개념의 단순한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이 우리가 사후의 삶이 유일한 실재이고, 지상의 삶, 개성 자체를 포함해서, 상상에 불과하다고 부르는 이유이다.”
“왜 이 경우에 우리는 실재(reality)를 잠이라고 부르고, 환상을 깨어 있다고 불러야 하나요?”"
“이런 비교는 그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가 한 것이다. 그대의 지상의 개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완벽하게 정확하다.”
“당신은 사후의 삶이 완벽한 정의의 토대에 기초하고, 모든 지상의 비애에 대한 당연한 보상에 기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수트라트마가 여러 화신들 각각 속에서 영적인 특질을 사용하는 가장 작은 기회를 확실히 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 바부의 영적인 개성, 아주 이상적으로 정직하고 고귀하며, 그의 모든 불신들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친절한 이 소년의 개성이 불멸에 이르지 않을 것이며, 메마른 꽃의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까?”
대스승께서 대답하였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 누가 그를 그런 운명에 처하게 만든 적이 있는가? 나는 바부를 그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으며, 나는 그의 경우에 수트라트마의 수확이 매우 풍부할 것이라고 완벽하게 확신한다. 비록 그의 무신론과 유물론이 가장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여전히 그는 그의 개체성의 충만한 상태에서 영원히 죽을 수가 없다.”
“그러나 타쿠르 사히브, 당신은 무덤 다른 쪽에서 그의 개성적인 상태에 대한 그의 생각의 청렴성을 스스로 확인하지 않았으며, 이 개념들이 그가 죽음 후에 의식의 모든 흔적이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확고한 믿음에 있지 않나요?”
“나는 그것들을 확인했고, 나는 그것들을 다시 확인한다.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기차가 많은 역들에 정차하는 동안에 그대가 잠잘 수 있고 줄곧 잠잘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깨어나는 역이 확실히 있을 것이며, 그대의 여행의 목적지에 온전한 의식으로 도착할 것이다. 그대는 내가 죽음을 잠에 비유하는 것에 불만이 있다고 말하지만, 가장 평범한 인간들은 세 가지 다른 종류의 꿈을 안다는 것을 기억하라—꿈 없는 잠,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꿈을 가진 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우 생생하고 선명한 꿈을 가진 잠으로 당분간 그것들이 잠자는 자에게 완전한 실재가 된다. 왜 그대는 정확하게 유사한 경우가 육체로부터 해방된 혼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야 하는가? 그들이 분리된 후에 혼에게, 그것의 공적에 따라서, 그리고 주로 그것의 믿음에 따라서, 완벽하게 의식적인 삶, 준-의식적인 삶, 혹은 비-존재의 상태와 동등한 꿈 없는 잠을 시작한다. 이것이 내가 말한 그 프로그램, 물질주의자가 이전에 발명하고 준비한 프로그램의 실현이다. 그러나 물질주의자들과 물질주의자들이 있다. 나쁜 사람 혹은 단순히 위대한 에고이스트(egoist)로, 그의 동료들에 대한 완벽한 무관심을 그의 충만한 불신에 추가하는 사람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그의 개성을 영원히 의심할 여지없이 떠나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수트라트마와 연결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그의 마지막 숨과 함께 영원히 끊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바부 같은 물질주의자들은 한 정거장만 잠을 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영원 속에서 알아볼 것이고, 그가 영원한 삶의 단 하루를 잃어버린 것을 후회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대의 반대를 이해한다—나는 그대가 수트라트마로 내내 살아온 수 백 수 천의 인간의 생들이 우리의 베단틴 개념에서 모든 개성의 완전한 소멸에 상응한다고 말할 것을 이해한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영원을 인간의 단 한 생과 비교해보라. 그 한 생은 수많은 날, 주, 월 그리고 해로 구성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노년에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는 그의 과거 삶의 모든 중요한 날이나 해를 쉽게 떠올릴 수 있으며, 심지어 그가 그것 중에 일부를 잊어버렸다고 해도, 그의 개성은 평생에 걸쳐서 하나이고 똑같지 않은가? 자아(Ego)에게, 모든 별개의 생은 한 사람의 삶에서 매일매일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새로운 삶을 위한 탄생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혹은 영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한층 더 낫지 않을까요?”
“이것이 실제로 그런 것이며, 나는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반대할 것이 없다. 단지 물질적인 삶에 대한 우리가 받아들인 관점으로, ‘살고 있다(live)’와 ‘존재한다(exist)’는 단어들은 죽음 후에 순전히 주관적인 조건에 적용될 수가 없다; 그리고 만약 그것들이 우리 철학에서 그것들의 의미에 대한 엄격한 정의 없이 사용된다면, 베단틴들은 영들이 그들 사이에서 그리고 인간들과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설교하는 미국의 심령가들 사이에서 우리 시대에 공동적인 개념들에 도달할 것이다.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아닌, 진실한 사람들 사이에서처럼, 베단틴들 사이에서도 그렇다—무덤의 다른 쪽에서 삶은 눈물도, 한숨도 없는 땅, 결혼도 없고 시집보내지도 않는 땅,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그들의 완전한 완벽함을 실현하는 땅이다.”
루시퍼(Lucifer), 1892년 10월.
* 역자주: 마나스-타이자사(Manas-taijasa) (산스크리스어)
[마나스로부터 마인드 + 타이자사로부터 눈부신(radiant), 방사하는(radiating)]
눈부신 마인드; 그 자신의 마나스 특이성 혹은 스바바바(svabhava)를 방사하는 마인드. 마나스가 붓디에 의해서 자극받을 때 이것이 변함없이 일어나기에, 그것은 마찬가지로 마나스와 붓디의 합일을 나타낸다. 혹은 인간 이성이 붓디 모나드의 불어넣는 불에 의해서 불이 붙여진다.
[1] 차르바카(Charvaka)는 뱅골의 물질주의 종파.
[2] 베단타에서, 붓디는 도덕적 특질들, 의식 그리고 그것이 화신한 개성들의 개념과 결합하여 수트라트마(Sutratma)로 불리며, 그것은 글자 그대로 “줄-혼(thread-soul)”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여러 생들의 전체 줄이 이 줄 위에 목걸이 진주들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나스(Manas)는 수트라트마와 결합될 때 영원 속에 도달하고 자신을 보기 위해서 타이자시(Taijasi)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종종 순전히 지상의 이성과의 연관성과 죄 때문에, 이런 광채가 완전히 사라진다.
[3] 사람의 과거 화신들의 지식. 오컬트 과학의 요기들과 초인들만이 가장 금욕적인 삶의 도움으로 이런 지식을 소유한다.
[4] 신성한 혼(Divine Soul)을 온전하게 흡수하지 않은 채, 마나스 혹은 지상의 혼은 영원 속에서 의식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 그것은 그것의 삶 동안 전반적인 성향들이 영적인 세계로 향하도록 이끌 경우에만 붓디-타이자시 혹은 붓디-마나스가 될 것이다. 그러면 본질로 가득 찬 채 그리고 신성한 혼의 빛으로 스며 들어가서, 마나스가 붓디 속에서 사라질 것이고, 자체를 붓디와 같이 흡수할 것이며, 여전히 지상의 개성의 영적인 의식을 보존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나스, 즉 인간 마인드는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들 위에 세워져서, 우리의 지상의 혹은 우리의 개성의 혼은 깨어남 없이, 꿈 없이, 의식 없이 새로운 재화신 때까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여기서 수트라트마가 나중에 상위 마나스(Higher Manas)로 불린 원리로 그리고 마나스는 나중에 하위 마나스(Lower Manas) 혹은 카마-마나스(Kama-Manas)로 불린 원리로 사용되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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