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많은 고뇌와 고민끝에 이렇게 그냥 오다가다
친구들의 눈길이나 기대하면서 몇 자 적으려고 글을 올린다.
사실은 지난 해 1월 초부터 온두라스에서의 생할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올리려다보니 그곳에 가기 전 상황도 드라마틱하다고 해야하나 그냥 혼자 그냥 넘어 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북촌에서의 생활부터 글을 올리고 싶다.
그러니까 2015년 3월 초부터 나는 종로구 가회동 북촌 한옥 마을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신축공사 현장에서 공사 감독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일당 10만원받는 잡부로 넉 달 동안 집 근처와 구리시 갈매동에 자가용을 가지고 다니면서 연립주택 신축공사 현장에서 쓰레기를 치우기도하고, 자재를 윗층으로 지고 올려가기도 하고, 작업자들이 공사를 마친 다음 남은 자재며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하던 차에 전직장인 한미글로벌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장으로 있는 광호형이 내 상황을 딱하게 여기던 차, 이 곳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신축공사 현장에 건축직 직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추천해 주었다.
급여와 근무조건에 대해 내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만, 한 달에 보름 정도 일을 하는 잡부 생활은 내게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정신적으로는 그리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옛날 고등학교와 대학 다닐 때 아르바이트로 해 본 일이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기에 이른 아침 나갈 때는 사실 부끄럽지 않았지만, 저녁에 옷에 온통 먼지로 뒤집어 씌고 신발도 지저분할 때는 이웃 사람들의 눈에 띄일까봐 걱정은 했다.
하지만 옛날과 달리 손이 붓고, 저녁마다 어깨와 허리를 아내의 부앙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세수를 하면 콧구멍에서 시커먼 먼지가 콧물과 함께 씻겨져 나왔다.
그렇게 한달 내내 했으면 그래도 할만했지만 평균 보름 밖에 일을 하지 못했고 그나마, 노임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두 달이상 밀리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는 막내 아들 녀석 등록금을 대야하는데 잡부로 벌어서는 턱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영종도에 있는 오피스텔을 월세에서 반전세로 돌리면서 학자금이 마련되었다. 우리 사무실에는 요르단 출신 소장이 있었고, 영국에서 유학을 한 아가씨와 필리핀 기사가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설비직이고 다른 한 명은 건축직이었지만 현장 경험이 부족하였다. 나는 현장 건축직 감독이었지만, 처음부터 업무에 제약이 많았다. 외국인 소장은 독실한 무슬림이어서 하루에도 다섯 번 이상 기도를 하였다. 하지만, 성격은 정말 불 같았다.
자기 외에 모든 사람은 저주의 대상이었고, 업무도 지난 문서는 보지 못하게 하고, 공사비와 관련된 것은 관여하지말라고 하고 시키는 일만 하라고 하였다. 어떤 면에서 정말 편했다.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여직원은 독신이고 나이가 40은 넘었다. 영국에서 인테리어와 상관없는 전공으로 공부를 하였으나, 어찌하다 국보디자인에서 근무한 경력이 인정되어 우리 현장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그 여직원 역시 자기가 보는 도면, 서류와 사소한 업무 협조에 부정적이었다. 모든 서류에 대한 History를 스스로 찾으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조직도 있구나 싶었다.
소장과 인테리어 담당 여직원은 거의 매일 티격태격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서로를 알기에 부딪히는 일이 거의 없고 조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 여직원은 대사관의 소개를 통해 근무를 하였는데, 현장 경험이 사실 하나도 없음에도, 능력에 과하게 업무를 맡다보니, 시공사에서 도면을 승인해 달라고 올라오면 실제 현장과 관련된 지적이 아니라, 글자크기, 도면 크기 등 기술적이지 않은 지적으로 도면을 거부하고 있었다. 시공사 담당자도 그 여직원으로 인해 상당히 고통을 겪고 있었고 현장소장과 다투었지만, 쉽게 정리해고가 되지 않았다.
시공사는 우리나라 대기업 중의 하나로 초기에 계약서를 확인해 보니 많이 잘못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계약 방법이 발주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부와 시공사인 건설회사의 의견이 달랐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부는 본 공사는 실시공물량 정산 방식이고, 시공사는 Lump sum 방식으로 이 두 계약 방식은 시공사에게 많이 불리하게 되어있었다. 아울러, 초기에 내가 없어서 모르지만, 인허가 관련하여 도면을 누가 제출하여야 하는 것으로도 갈등이 있었고, 인허가는 시공사에서 받아야 하나 허가도면은 발주처가 줘야했다. 하지만, 발주처가 준 도면으로는 허가도, 공사도 할수 없었다. 답답한 시공사가 시공와 허가를 위한 도면을 국내 설계업체를 통해 완료하였다.
더불어, 토목 굴착시 예상치 못한 암석이 나와서 공사기간 및 공사비용이 추가된 것이라던지 겨울에 동절기 공사를 하기 위해 보양을 하는데 들어간 비용등에 대해 서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였다.
내가 오기 전에 전기직으로 인도 직원이 있었는데 요르단 소장의 강압과 스트레스에 못어겨 사표를 낸다고 말하고 본사로 복귀하였다고 필리핀 친구한테 이야기를 들었는데, 요르단 소장의 말은 달랐다. 평소 본사에서 파견되었다는 것을 내세워 소장과 갈등을 겪었고 무엇보다 시공사와 업체와 많은 유착관계를 가져, 이로 인해 소장의 보고로 본사로 호출되었단다. 요르단 소장은 정말 최악이었다. 무조건 윽박지르고 서류를 집어 던지고 화를 내면 조절이 안되었다. 가장 고통이 큰 사람은 비서 겸 사무직 여직원이었다. 전기직으로 한국 사람을 채용했지만, 보름도 못가서 두 명이나 바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회의를 하는데,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여직원이 핸드폰을 책상위에 놓고 자꾸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앉았던 내가 왜 그런가하고 화면을 보니 녹음을 하고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나는 소장에게 인테리어 담당여직원이 녹취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사무실에가서 그 여직원을 직원회의 내용을 몰래 녹취하는 것은 불법행위라고 다그쳤다. 그 여직원은 당황하였고, 나는 곧 경찰인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타인의 동의 없이 녹취가 불법이냐고 물어보았다. 그 친구 이야기로는 불법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녹취한 것을 근거로 피해를 주었을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여직원으로 인해 우리보다 시공사가 더욱 일을 하기 힘들었고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내부적으로도 정말 힘이 들었다. 그런 성격의 직원과 30년 직장 생활 동안 한 번 더 경험이 있었다. 포항제철에서 였는데, 나보다 두 살이나 많았다.
그 두사람의 공통 점은 정말 똑똑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엉뚱한 것으로 시공사와 직원을 괴롭혔다. 거의 정신 병자 수준이었다. 결국 소장은 여러가지 사유를 들어 해고 통보를 하게 되었다. 그 여직원도 별다른 이의없이 해고통지에 대해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필리핀 업무 보조도 사우디아라비아로 복귀를 하였고, 설비직과 아가씨와 나만 남게 되었다. 시공사 입장에서도 그 아가씨가 나간 뒤로 정말 앓던 이를 뽑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시공사가 더욱 심각하였다. 내가 현장에 온 지 한 달 정도 지나자 시공사에서 일곱 번 째 기성서류를 제출하였다. 그 동안 공사비 기성도 43% 정도 지급되었다. 어느 날 소장은 나에게 그 동안 관여하지 말라고 했던 기성서류를 주면서 검토해 보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