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을 자기충만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입으로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입으로 많이 말하기만 하면 자기가 성령충만한 사람인줄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삶에서는 진짜 성령 충만한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자기들은 성령충만한 사람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방언을 할 줄 알면 자기가 성령 충만한 사람인줄 알고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소리로 막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입신을 하면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입신이 무엇인지 아세요? 조금 전에 보았던 비데오에서 나오는 사람들 처럼 하는 행동들입니다. 정신을 잃고 까무라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다니며 거품을 품어내는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잘못된 이단 종교에서 속한 사람들을 보면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발광을 합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깔깔대며 30분이나 한시간 동안 바닥을 굴러 다니며 웃어댑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다는 말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인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가지고 있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와서 당신은 이런 것을 할 줄 모르기에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가짜 예수꾼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반문 할건가요?
물론 어떤 사람은 특별한 능력이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열광적으로 기도에 몰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들이 성령 충만한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동들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아닌 잘못된 영을 받은 이단이나 다른 종교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이상한 행동이 성령 충만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령충만이란 어떤 것일까요? 성령충만하다는 말은 예수의 영으로 채움 받는 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수의 영에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의 영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예수의 영은 성령님 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영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말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믿는 자들이 예수를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마음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해 주시는 분이 십니다. 그러기에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 분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강제로 순종 하도록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속에 거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하라는 대로 순종하며 따를 때 성령의 충만한 모습으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을까요? 그거야 당연히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요? 방언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성령께서 믿는 자의 마음에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가는 그 시간까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는 자들은 누구나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를 믿을 때 성령 세례를 한번 받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은 우리 속에 오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 분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은 한번 받지만 성령의 충만함은 계속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의 욕심과 세상에 대한 욕망과 편견으로 가득차 있기에 성령의 충만함이 저절로 생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것을 버리고 성령께 온전히 우리의 영혼이 붙잡힐 때 성령의 충만한 상태가 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신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여러분들 마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로 가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에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님은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말씀에 기초해서 믿는 자들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말씀이 아닌 즉 진리가 아닌 곳에는 역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올바른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그는 여러분들과 같은 평신도입니다. 그는 집사로 뽑혀 주님을 열심히 섬기던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그가 말씀에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이론적으로만 성경을 안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달달 외운 성경 지식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실천하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 7장을 읽어 보세요. 평신도였던 스데반 집사가 회중들에게 전한 메시지가 나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성경책이 없었던 시대입니다. 두루마리로 회당에만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성경이 희귀하던 시대인가요. 단지 서기관들이 읽어주는 것을 듣고 배울 수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 집사가 그처럼 성경 전체를 관통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말씀을 많이 듣고 배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얼마나 성경이 흔한 시대인가요? 그런데 성경을 읽지 않고 성경의 지식에는 무지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이 어떻고 하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대인가요?
믿는 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자기 충만으로 성령충만한 것같이 산다해도 진정한 성령충만함이 아니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정한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며 살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아는 사람은 아는 만큼 하나님께 충성합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지금 이 시대는 이단들이 무성하게 나오는 것일까요? 말씀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모르니까 교회를 오래 다녀도 잘모릅니다. 그러다 자기가 모르는 이상한 말을 해 주면 그것이 진리라고 쫒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모두 말씀으로 충만한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읽어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게 됩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지 말고 열심을 다해 말씀에 충만함을 입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되어 성령충만함을 입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성령충만을 입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이 자기에게 충만케 해 주시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이 자기를 충만케 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가만이 있을 때 충만해 지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충만케 됩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의 얼굴에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반면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세요. 마치 3일 동안 죽도 못먹은 사람처럼 비실비실 하며 기쁨이 없습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이 먼저 채워져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해서 행동으로 옮길 때 성령의 충만을 입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생동안 교회를 다닌다 해도 말로만 이렇게 주님을 섬길껄...저렇게 주님을 섬길껄하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일까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입니다.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결단 내린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와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싶으면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는 자기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면 성령의 충만한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 앞에 간 모든 신앙의 선배들을 보세요? 그냥 가만히 있을 때 성령 충만함을 입었는지... 아닙니다. 말씀을 행동으로 옮길 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교회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구제하는 일로 인해 분재이 생겼습니다. 이때 사도들은 믿음이 좋고 성령 충만한 사람들 일곱을 뽑아 집사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집사로 세움을 받은 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집사로 뽑혀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행동으로 옮길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하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부임한 날 사랑에 관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자기 아들을 보내서 죄를 담당하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믿는 사람들에게 넣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사랑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관한 그 설교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음 주에 무슨 설교를 할까 사람들은 기다렸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하시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듣다보니 지난 주의 설교와 똑같은 것입니다. 뭐가 잘못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마치자 한 성도가 "목사님 이번 주 설교는 지난 주 하고 똑 같네요. 은혜받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다른걸 하시겠지." 다음 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또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 보면서 웃었습니다. 또 똑같은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년이 계속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같은 소리만 하니 자기들을 우롱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 모두가 불평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목사님에게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는 아무 말도 없이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고별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솔직히 목사가 그렇게 금새 떠날줄 몰랐습니다. 약간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 마지막 설교를 경청했습니다. 목사님은 강대상에 올라갔습니다. 과연 마지막 설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설교도 "사랑하라"였습니다. 사람들은 묵묵히 들었습니다. 저 목사님이 왜 저래야 하는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모두 눈물이 자꾸 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가는 날까지 저러랴! 얼마나 우리가 사랑을 안하면 저러랴. 이러다보니 교회당이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을 목사님에게 달려갔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데 안했습니다. 제발 용서하시고 가지 마십시오. 계속 사랑하라는 설교만 해주십시오. 그것만 듣겠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님은 남게 되었고 주일이 돌아 왔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라는 설교를 들으러 모였습니다. 설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십일조 하라"는 주제였습니다. 사랑하라는 설교는 더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고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면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주일 전교인이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만약 십일조를 안하면 일년 내내 십일조하라는 설교만 나올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주에는 어떤 설교가 나왔을까요? 교회봉사하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봉사를 자원했습니다. 주일학교, 성가대를 비롯해서 교회 청소하는 것까지 모두가 자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교회는 말씀대로 행동하는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는 그때부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말씀대로 삶의 질서가 잡히고 성장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는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은 절대 말씀을 떠나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 바로 그곳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며 사는 삶인지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복종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시다면 이제는 회개하고 주님께 복종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