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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하고 안 놀아
작가 : 현덕
엮음 : 원종찬, 그림 : 송진헌
발제 : 용회수
일시 : 2018.08.13.월요일
1. 작가소개
1-1. 그림 : 송진헌
[이렇게 키워요]그림책 `삐비이야기` 펴낸 송진헌씨
“10년 만에 사진 찍네요. 그만 찍으세요. 아이가 둘이니 집사람이랑 아이들 사진밖에 없대요.”
그림에 이야기까지 곁들이기는 첫 작품인 ‘삐비이야기’(창작과비평사)의 송진헌씨(41)는 카메라 앞에서 내내 땀을 닦았다. ‘삐비이야기’가 그랬다. “뭐, 이런 그림책이 다 있어”라고 미뤄뒀지만 빚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시 펼쳤고, 다시 보고 읽고 나서도 개운치 않았다. 마음 속에서 내내 땀을 흘리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구나 아스라한 기억 속에 ‘삐비’를 묻어두고 있지 않는가.
‘삐비이야기’는 무채색으로 바랜 어린시절, 나뭇가지로 머리를 때리며 숲 속을 혼자 돌아다니던 아이 삐비에 관한 추억이다. 자폐아인지 정신지체아인지 분명치 않으나 동네아이들과 ‘달랐다’. 아이들은 삐비를 피해다녔지만 화자인 ‘나’는 삐비가 신기해 삐비를 따라 숲 깊숙이 들어간다. 아이들은 나를 보고도 피해다닌다. 어느덧 학교에 들어간 나는 새 친구를 사귀게 되고 숲 속에서 삐비와 마주치지만 자신도 모르게 도망친다….
전북 군산 출신의 송씨는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자꾸 삐비가 생각났다”며 “몇 년 전 고향에 사시는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열서너살 때 실종돼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당시 종이공장에 딸린 측백나무 숲은 엄청나게 컸어요.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숲에는 종이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사택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아버지가 동력과장이셔서 우리가족도 사택에 살았지요. 그러나 종이회사가 망하면서 사택에서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제 기억 속에서 숲도, 삐비도 사라졌지요.”
그러나 숲에서 먼저 사라진 것은 송씨였다. 8남매의 여섯째였던 송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형과 함께 서울로 ‘유학’온다. 대학(홍익대 서양화과)에 들어가기 전 서울에서 송씨는 삐비처럼 늘 외톨이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삐비 생각은 나지 않았다.
“신체장애아에 대한 편견은 많이 사라졌지만 자폐아나 정신지체아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부족해요. 이같이 장애를 지닌 아이 뿐 아니라 또래집단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괭이부리말 아이들’ ‘너도 하늘말나리야’에 그림을 그린 송씨는 “처음으로 글까지 써 삐비에 대한 미안함, 아니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을 드러내 놓고 보니 그림만 그렸을 때와 달리 숨을 곳이 없다”며 “무엇을 확 바꾸겠다는 것은 아니고 아이들이 ‘그림이 예쁘다’ ‘삐비같은 친구도 있네’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책 앞 쪽 ‘사랑하는 강이에게’라는 헌사(獻辭)에서 ‘강이’가 누군지 궁금했다.
“열한살짜리 첫딸이에요. 몸이 아파요. 정신지체아예요… 일곱 살 때 걸었죠. 기적같았어요. 못 걸을 줄 알았습니다.”
송씨가 “커피를 마시자”며 고개를 돌렸고 기자는 그제야 커피가 ‘고프다’는 생각을 하고 자판기에 넣을 동전을 찾느라 허둥댔다.
<김진경기자 kjk9@donga.com>
2003.05.20.
수정 2009.10.10.
1-2. 글 : 현덕
[인천인물100人·30] 아동작가 현덕
좌익·월북에 묻혀진 동화속 순수함 60여년만에 '어린이품으로'
뛰어난 아동작가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를 냉전 이데올로기로 지난 70여년을 묻어 왔다. 작품의 모티브를 제공했던 인천도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세월동안 작가 현덕을 외면했다. 좌익과 월북 작가라는 미명하에 그의 작품을 장농 한 편에 숨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동화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현덕이라는 작가의 종적이 탐구되고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그의 인생 역정을 연구한 결과물이 최근 학계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또 '너하고 안놀아' 등 동화는 어린이들의 필독서로 큰 인기를 끌고 있고 연극 작품으로 재구성되기도 했다.
우리 동화에 '노마'라는 캐릭터를 처음으로 내놓은 현덕의 업적은 입이 닳도록 칭찬해도 아깝지 않다. 지난 1988년 정부가 월북 문인들에 대한 해금조치를 하기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현덕과 그의 작품을 금기의 영역에 가둬 놓았다. 그러나 지난 1990년대부터 카프 이후의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고 현덕의 아동문학 작품들이 새로 발굴 소개되면서 그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쌓여가고 있는 추세다.
부평여자공업고등학교 원종찬 선생은 지난 10여년동안 현덕 복원 작업에 매달린 끝에 인하대학교 국문학과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그는 현덕이 그동안 남한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몇가지로 분석한다. 오랫동안 '레드 콤플렉스'의 덫이 그의 작품을 우리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았고 그 영향으로 연구가 전혀 이뤄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
또 남한에는 그의 연고자들이 거의 없어 지금까지 생애조차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아동문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했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우리 문단의 대립도 현덕을 지워버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최근 현덕에 대한 기념비를 인천에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부 작가들에 의해 거론됐으나 좌익과 월북이라는 그의 행적이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지역 문학계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무너진 21세기에 그의 전력보다는 작품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서울 출생이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인천에서 성장한 탓인지 그의 작품 배경은 인천이 주류를 이룬다. 때문에 현덕이 인천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지역 문인들의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현덕의 본명은 현경윤이다. 현덕이라는 이름은 그가 문학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쓰던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지난 1909년 2월15일 서울에서 아버지 현동철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현흥택은 민영익 수하의 무관으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친러시아파에 속했던 그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멸망한후 기록이 보이질 않는 점으로 보아 정치적으로 소외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현덕이 태어난 삼청동 별장은 조부 현흥택의 사교장소다. 때문에 현덕의 가계는 당시 상당한 재력을 축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업을 하다 가산을 모두 탕진한 그의 부친 때문에 현덕은 어렸을적 생활이 고달팠다. 위세가 당당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늘 자신을 밑바닥 인생으로 여기며 살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고 그의 문학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모친이 어렵게 생계를 이으면서 그는 어린시절 대부도와 인천 등의 친척집을 떠돌아야 했다. 대부도 당숙 집에서 보통학교를 다니고 서울 집으로 옮겨 제일고보를 다니면서도 그는 한동안 인천을 오갔다고 한다. 인천 부두를 배경으로 쓴 그의 대표작 '남생이'와 안산 일대가 보이는 대부도 근방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경칩'은 당숙의 집에서 살았던 체험과 관련이 있다. 제일고보를 중퇴한 그가 힘겨운 청년기를 보내면서 위안이 됐던 것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었다. 또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막노동을 하면서 떠돌던 때 김유정을 만나 문단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그는 지난 1927년 한 신문사 주최의 독자공모에 '달에서 떨어진 토끼'로 일등 당선한다.
현덕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남생이'가 일등 당선하면서부터다. 이후 1940년까지 그는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벌이며 뛰어난 단편소설과 동화 등을 세상에 내놓는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에 뛰어들어 진보적인 문학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대대적인 좌익 색출을 견디다 못한 그는 지하로 숨어들어 문학운동을 벌인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월북하게 되고 숙청당한 지난 1962년까지 북한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 사라진다. 지금도 현덕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덕은 식민지와 분단으로 말미암은 파행의 근대성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로 여전히 낯설다. 아직도 굳건한 이념의 틀이 현덕을 옥죄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근대 문학의 양대틀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합류 지점을 만들어낸 현덕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시점이다. 사회의 통합과 건강한 문학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
<이희동기자·dhlee@kyeongin.com>
2005.08.25.
경인일보
2. 책을 읽고
한창 마음이 바쁠 때에 이 책을 발제하겠다고 나서서는.. 쓱 검색했더니 책부터 도서관에 잘 없는데다 이번에도 역시 작가검색결과가 시원치 않아서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긴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길에 올라서야 비로서 책을 읽기 시작하여 완독하고 오는데 겨우 성공했다.
나름 꾀를 써서 ‘칠칠단의 비밀’처럼 일단 ‘너하고 안 놀아’만 먼저 읽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했는데, 한두편 읽다 이 책은 그럴 수 없는 책이란 걸 곧 깨닫고 좌절했다.
가끔은 아이에게 읽어주느라 목이 아팠는데 그 보다 더 힘든 건 반복된 어휘를 읽는 점이었다. 애고 어른이고 징징대거나 맥락없는 대화가 너무 싫은 나는, 그 반복된 어휘가 실제 아이들의 언어라는 사실에 짜증과 웃음이 동시에.. ㅋㅋㅋ
방정환선생님에 대해 공부할 때도 그 분이 아이들을 무척 소중히 하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현덕선생님 또한 그렇다는 걸 잘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둘 중 한명을 고르라면 나는 현덕선생님이 더 좋다. 방정환선생님께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느낌을 주신 반면, 현덕선생님은 조용히 지켜봐주시는 느낌이라서..
앞서 말했듯이 처음엔 반복된 어휘를 읽는게 짜증나다, 어느새 옛드라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버전으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라고만 말하기에는 사실 후반부로 갈수록 아이들이 점차 성장해 나갔는지 말투가 바뀌어서 읽는 것이 점점 수월해 졌다.
처음엔 그냥 시골 아이들의 맑은 하루 하루를 엿보는 느낌이기만 했는데, 마지막으로 도전한 구글검색에서 좀 더 작가에 대해 깊이 있는, 엮은이 원종찬선생님의 발표문을 읽고 나서 책을 다시 생각하니 맑기만한건 아닌 듯 했다.
다같이 사이좋게 지내라며 이야기가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얄미운 기동이가 아이들에게서 소외되면 소외되는 그 상태로 이야기가 끝나는 그런 식의 결말이 맘에 들었었는데.
설마 공산주의,사회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 뭐 이런 걸 대변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싶다. (월북한 친러시아인 입장에서는 미국같은 기동이가 당연히 얄밉지 않겠는가하는 의심을 떨치기 힘들긴 하다.)
신경림작가의 "카프 계열로부터는 그 완벽한 예술성 때문에, 예술지상주의로부터는 그 결연한 역사의식 때문에 경원당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듯 했고, (유명작가들은 정말 공부의 깊이가 장난 아니구나 싶었다. 괜히 유명작가가 되는게 아닌가봐! 하는 존경심과.. 내 입장에서 이름이나 겨우 들어본 신경림작가가, 잘 알려지지도 않은 거 같은 현덕선생님에 대해 저렇게 꽤뚫고 계시다니!)
민족이냐 계급이냐가 우문인 것처럼,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의 택일적 주문에서도 이젠 벗어나야 하겠다.
원종찬선생님의 이 말씀에, 깊이 고민하지 않고 그냥 마음가는대로 두기로 했다.
그림 그리신 송진헌선생님의 경우는,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생각보다 많이 할애했다. 이제와 고백인데, 나는 그림을 원종찬선생님이 그리신 것으로 착각했었다. ㅎㅎㅎ 현덕선생님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라, 이야기에 잘 어울리게 그림을 그려주셨네 착각하고 있었다는.
쉽게 검색하면, 현덕선생님은 지금 100세가 넘으신 분으로 나온다. 어이없기도 하고, 많이 안타깝다. 오래전에 숙청되셨다니 그 마지막은 죽음이였으리라 생각돼 그저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 북한에는 기록이 잘 남아있기를 바라고, 통일을 바라는 개인적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됐다.
3. 이야기 나누기
3-1. 전체적인 느낌에 대해 두서없이 나눠 봅시다.
3-2. ‘너하고 안 놀아’는 많은 단편들 중에서 엮은이가 임의로 뽑아 이번 책의 제목으로 정한 듯 합니다.
여러분이 제목으로 추천하고 싶은 다른 단편이 있다면?
3-3. 후속작으로 이야기가 더 있으면 좋겠다 싶은 단편이 있었다면..?
3-4. 이 아이들은 대체 몇 살일까요?
3-5. 권정생선생님, 방정환선생님, 현덕선생님에 대한 느낌이 어떤가요?
※ 내용은 구하지 못한,
김영순, 아동문학 선구자 현덕 - 생애와 업적 (동심넷 – 아동문학선구자기념관)
참고 자료가 하나 더 있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현덕 문학의 재조명
원종찬
1.머리말
현덕(玄德, 본명은 玄敬允, 1909-?))은 사람들에게 아직 낮선 작가이다. 그는 등단과 동시에 화려한 조명을 받았으나, 일제 시대에 겨우 이 년 남짓(1938-41) 작가 활동을 한 게 전부라서, 월북 이후론 크게 주목되지 못했다. 월북 문인들이 해금과 함께 활발하게 연구될 때에도 현덕에 대해서만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현덕 문학을 재조명하는 이 글의 문제의식을 제공해 줄 것이다.
첫째는 그가 카프에 소속된 작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월북 문인들에 대한 재조명은 주로 카프 문인들에 집중되었으니, 이는 80년대가 민족문학 또는 계급문학 운동의 고조기였음과 관련된다. 문학 연구와 비평이 밀접한 연관을 갖고 당대 문학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면서 현실 변혁에 대한 의지를 고무시킨 80년대 민족문학 운동은 그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카프와 비슷한 오류를 일부 반복한 점에서 냉정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둘째는 그가 해방 이후에도 뚜렷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 다시 한번 민족문학 운동이 고조되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카프 시기와 함께 이 시기 역시 관심의 초점이 되었는데, 카프 출신 문인들뿐 아니라 새로운 신진 작가들에 대해서도 주목하였으나, 현덕은 여기에조차 끼어들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문학가동맹의 출판부장이었다는 사실만 가끔 환기될 뿐이었다. 일제 시대의 작품 활동과 해방 이후의 행적에 관한 연속성을 파악하는 데에서 그 동안 합당한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 것에는 첫째 오류의 시각이 끼어 있다.
셋째는 그한테 장편소설이 없고 북한에서의 작가적 명성도 희박한 데다가, 남한에 연고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탓에 그의 생애조차 감감하다는 점이다. 과작(寡作)의 작가였던 만큼 그에 대한 연구가 시들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 또한 30년대 후반기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 동안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사실의 반영이다.
일찍이 신경림은 현덕에 대해, "카프 계열로부터는 그 완벽한 예술성 때문에, 예술지상주의로부터는 그 결연한 역사의식 때문에 경원당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대관절 이러한 모순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현덕의 작가 활동은 2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어도, 그 시기의 특수성이 오늘날 비상한 관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아동문학을 포함해 자못 왕성하게 활동한 결과물 대부분이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어, 민족문학사든 아동문학사든 그를 결코 빼놓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를 다시 주목하는 까닭은, 첫째로 그에 대한 그간의 미온한 문학사적 평가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고, 둘째로 그를 통해 30년대 후반기 문학의 성격을 잘 살피면 오늘의 시점에서 의미 있는 시사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이다. 현덕과 그의 문학에 대한 재조명이 그와 깊은 연고를 맺고 있는 인천에서 진행된다는 점에 남다른 감회가 있다.
2.현덕의 생애
현덕은 서울 삼청동의 한 별장에서 태어났다. 이는 구한말 궁궐의 수비대장으로서 종2품에까지 오른 그의 조부 현흥택(玄興澤, 1858-1924)의 위세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의 부친 현동철(玄東轍)은 금광에 손을 대다 가산을 탕진하고 밖으로 나돌았으며, 식구들은 각자도생으로 친적 집들을 돌며 살았다. 그는 당숙네인 대부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대부공립보통학교에서 2년 여 기간 공부하고 제일고보에 입학(1925)했으나 학비 때문에 1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다. 수원 발안 등지에서 막노동일을 했으며, 일본에도 건너가 온갖 잡일을 다해봤지만 몸이 쇠약해 결국은 돌아와서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고무신]이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이후 김유정과 깊은 친교를 맺는다. 서울 동대문 밖 낙산과 줄기를 같이하는 산동네에 유정과 현덕이 각각 경사면을 달리하여 살았다. 김유정을 통해 안회남도 알게 되는데, 안회남은 현덕의 등단과 문단 활동을 많이 도왔다. 김유정이 죽고난 뒤 인천의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소설 [남생이]를 쓴다. 그것이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생활을 하면서 [경칩](1938.4.), [두꺼비가 먹은 돈](1938.7), [골목](1939.3), [잣을 까는 집](1939.4), [녹성좌](1939.6-7), [군맹](1940.2)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한다. 1938년부터 39년에 걸쳐 {조선일보} 부록으로 매주 발행되던 {소년조선일보}에 잇달아 '노마' 시리즈 동화를 발표했고, 어린이 잡지 {소년}에는 주로 소년소설들을 발표하였다.
본디 몸이 허약한데다 유정처럼 그도 폐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중편소설 [녹성좌]와 [군맹]을 신문에 연재할 무렵에는 {소년조선일보}에 쓰던 '노마' 시리즈 동화를 아우 현재덕(玄在德, 1912-?)에게 넘겨준다. 곧이어 1년 여 동안 요양차 황해도 지방엘 갔다오는데, 당시 문단을 새롭게 주도해간 {인문평론}과 {문장}에 그가 단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못한 까닭가 여기에 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창작활동이 어렵게 된 시기에 그는 와카모도(若素) 제약회사의 조선출장소 광고부에서 일을 했다. 민족문학 작가회의에 소속되어 있는 전승묵(全承默) 시인이 당시 이 회사의 급사로 있으면서 현덕과 알고 지냈다는데, 전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 회사엔 이른바 불령선인들이 많았다. 다마야 고히찌(玉俗高一)라는 일본의 리버럴리스트 작가가 초대 출장소장을 맡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현덕은 함께 근무했던 화가 박기성(朴基星:해방 후의 행적으로 보아 월북했을 것이라 함)과 둘이서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화와 오장환이 자주 찾아 왔다고 하며, 특히 현덕보다 아홉 살 아래인 오장환은 길 건너편 광산 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던 관계로 가끔씩 시 원고 뭉치를 가져와 현덕에게 보여주곤 했다. 향토색 짙게 배인 오장환의 제3시집 {나 사는 곳}은 바로 이때 씌어진 것들을 해방 후에 묶어낸 것이다.
해방이 되자 현덕은 회사의 종업원관리위원장으로 추대된다. 좀체로 말이 없고 웃음으로 대답을 하는 성격이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군자로 통했다고 한다. 현덕은 관리위원회 사무를 거의 간섭하지 않았으며 문학가동맹의 일로만 바빴다고 전승묵 시인는 전한다.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위원이자 아동문학부 위원이었으며, 홍구에 이어 출판부장을 역임했다. 이 때 출간된 소설집 {남생이}에는, "병고를 무릅쓰고 문학운동과 문예공작에 종사하는 인간으로서 이 성실성이 반드시 문학적으로 결실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고 끝을 맺는 김남천의 발문이 실려 있는데, 이로써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 사업에 전념한 현덕이 소설을 쓰지 못한 이유가 설명된다. 문학가동맹 서울시지부의 소설부 위원장, 문학대중화위원회의 위원으로서도 활동했고, 정부 수립 후엔 보도연맹의 가입을 피해 지하로 숨어 지내며 쇼로홉의 {고요한 동}(제1권, 대학출판사, 1949)을 노어 전공자인 이홍종과 공동으로 번역 출간하였다. 6.25 전쟁이 나서 서울이 인공 치하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현덕은 밖으로 나온다. 동란 전에 월북한 문인들이 인공 점령하의 서울에 와서 조직한 남조선문학가동맹의 명단을 최근 입수해 보았더니, 안회남이 위원장을 맡았고, 현덕은 부위원장에 이름이 올라 있다. 감옥에서 나온 이용악과 이병철이 각각 선전부장과 사업부장인 것을 보면, 현덕은 보도연맹의 가입을 피한 경력이 대우받은 모양이다. 각종 전쟁기 회고물에서 현덕의 이름을 찾기 어렵고, 어쩌다 나타나더라도 뚜렷한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그의 조용한 성품 탓이 아닌가 한다. 현덕의 이름이 나오는 거의 유일한 다음의 글은 이런 사정을 어느정도 엿보게 해준다.
… 종로 네거리 한청빌딩에는 문학동맹과 연극동맹과 미술동맹이 판을 차리고 이른바 김일성의 노래와 소위 인민항쟁가가 귀를 아프게 했다. 문학동맹에는 형무소에서 소위 해방되어 나왔다는 이용악과 이병철이 창백한 얼굴에 도끼눈을 하고 있었고, 소위 지하에서 나왔다는 현덕이 앉아 있었고, 이북에서 넘어왔다는 안회남이가 위원장이 되어 호령을 하고 있었다.(강조 필자)
그는 9.28 서울 수복 때 월북을 한다. 호적엔 50년 9월 27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신고자는 아우의 처인 이계희).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아우 현재덕은 결혼신고(1950.1)가 되어 있으나, 현덕은 미혼인 채이다. 그는 결혼식을 하지 않고 동거 생활을 해왔다는데, 월북 당시 5살쯤 된 딸 아이와 갓난아이가 있었다니까 해방 뒤에 곧 동거를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모친과 처자식 모두 데리고 갔으며, 아우 현재덕도 함께 월북했다. 월북하지 않은 식구로 부친과 누이들은 남한에서 사망하였고, 현재덕의 처와 딸이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 현덕은 월북 후에 전쟁과 관련한 몇 편의 작품을 썼으나 대부분 자연주의 작풍으로 호되게 비판되었으며, 한동안 이름이 보이지 않다가 60년 전후에 다시 활동하여 {수확의 날}(1962)이라는 단편집을 한 권 낸다. 하지만 그 이후론 어떤 활동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북한 아동문학과 관련해서는 아우 현재덕의 이름만을 간혹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3.카프 해체 후 30년대 문학의 조건
한국의 근대문학은 20년대에는 민족과 계급의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사상적 구도는 30년대 들어 미학적 구도로 바뀌는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20년대 문학의 대립 구도가 고스란히 30년대 문학의 대립 구도로 수평 이동한 것은 아니다. 상대 비교를 전제로 할 때, 30년대 문학의 미학적 구도는 그 성격으로 보아 20년대 문학의 사상적 구도와 계기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30년대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단순히 대립 관계로만 파악하는 것은 역사적 계기를 무시한 형식 논리의 소치이다. 무엇보다 작품의 실상이 이와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20년대 문학 일반이 리얼리즘의 확립 도정이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 놓여 있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30년대의 리얼리즘은 20년대 리얼리즘의 단순 연장일 수 없음이 오히려 분명해진다.
여기엔 30년대의 새로운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본격적인 발흥이 이것과 대응한다. 리어리즘에 기반한 20년대 민족문학이 민족을 계급으로 조정하는 힘에 의해 현실에 대한 한층 심화된 인식에 도달했듯이, 30년대 민족문학은 리얼리즘을 모더니즘으로 조정하는 힘에 의해 비로소 문학에 대한 한층 심화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자에 카프가 존재했다면 후자엔 구인회가 존재할 터이다. 결국은, 민족과 계급이 모두 근대성이라는 한 몸의 두 얼굴인 것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도 함께 근대성의 두 얼굴인 것을 옳게 파악하는 데서 민족문학 또는 근대문학에 대한 논의가 바루어질 것이라 판단한다.
카프 시기와는 다른 문제 의식을 갖고 출발한 30년대 신진 작가들을 평가함에 그동안 보이지 않는 두 개의 통념이 작용해왔다.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이다(그 역의 시각도 존재한다).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이라는 언표가 이 현상을 요약한다. 그런데 30년대의 실상을 잘 들여다보면 사정이 그리 만만치 않다. 우선 이 시기 모더니즘의 발흥은 안으로 카프 시기의 문학적 한계와 맞물려 있고, 밖으로 새로운 근대적 풍경과 맞물려 있다. 뿐 아니라 파시즘의 진군이라는 시대의 폭력도 걸쳐 있다. 우리에게 모더니즘은, 소박한 반영론으로서 속류 사회학주의에 경사된 카프식 리얼리즘을 쇄신하는 역사성에다 식민지 자본주의라는 특수성까지 겹쳐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모더니즘의 외연이 무한히 확장되어 하나의 개념으로선 공허한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시기의 모더니즘을 '역사적 모더니즘'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
한편, 30년대 후반기는 식민지 자본주의가 본격화함에 따라 도시화가 진전되고, 농촌의 피폐화, 도시 세궁민과 실업자의 증가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파시즘의 강화에 따른 정치 사상 운동의 퇴조, 카프의 와해와 전향 등 지식인에겐 환멸과 암흑의 시기였다. 임화는 이 시기 소설의 딜레마를 시대 현실의 중압을 들어 설명한다. "작가의 희망을 살리려면 리얼리즘 대신 로맨티시즘을 취"하지 않을 수 없고 "현실을 있는 대로 그리면… 오히려 암담한 절망을 얻게 되"는 현실, 곧 "작가의 생각을 살리려면 작품의 사실성을 죽이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려면 작가의 생각을 버리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소설이 이른바 "세태소설과 내성소설로 분열"해간 현상 역시 "시대의 이상과 현실이 너무나 큰 거리로 떨어져 있는 현실 자체의 분열상의 반영"(347-8쪽)일 터였다. 따라서 30년대 문학은 "말할려는 것과 그릴려는 것과의 분열"(346쪽)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혼돈과 방황, 암흑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전래의 리얼리즘은 이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아이디얼리즘으로 증발하느냐, 아니면 자연주의로 포복하느냐의 갈림길에 처한 것이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표현된 '최초의 문단 좌우합작노선'은 기실 30년대 후반기의 이러한 조건 위에서 그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파시즘이 강화되고 카프가 와해된 이후부터
뚜렷한 이념적 구심이 없었다든가, 코민테른 노선으로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고려할 순 있겠지만, 그보다는 카프(리얼리즘) 쪽과 모더니즘 쪽의 상호 반성에서 사상적·미학적 합류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의 비평가 임화와 김기림의 글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30년대 후반기의 문단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일보} 출판부와 {조광}, 일제 말 가장 유력했던 {문장}과 {인문평론}을 꼼꼼히 살펴보더라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30년대 후반기의 작품들이 그 점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4.현덕의 소설
30년대 소설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20년대 소설의 '현실'과 비견되는 '일상'이 하나의 문제적 범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둘은 단절이 아니라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는 만큼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 할 수 있다. 현실보다 일상이 문제로 된다는 것은 '낡은 것이 사라졌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이념적 위기와 과도적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층 겹으로 에워쌓인 새로운 현실 앞에서 작가들이 그것을 포획할 새로운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30년대엔 '지식인의 자의식'이라는 새로운 글쓰기 수법이 등장하여 수많은 내성과 세태 소설을 낳는다. 이상과 박태원이 선두에 섰고, 최명익, 유항림, 허준 등 많은 신진 작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의 소설을 리얼리즘과 대립적인 의미의 모더니즘으로만 파악할 때 그 내용은 대단히 협소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문제는 여전히 '현실'로서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30년대 소설의 일상성 탐구는 새로운 방법의 고민과 함께 작품의 육체성을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현덕의 소설에는 위의 작가들만큼 지식인의 자의식이 드러나 있지 않다. 이것은 그의 소설이 주로 농촌과 도시 변두리의 하층민 세계를 다루고 있는 데에서 비롯한다. 지식인의 자의식 대신 현덕의 소설엔 나이 어린 '노마'가 등장한다. 이 노마의 존재는 그의 소설을 가장 매력적이게 하는 동시에, 그동안 그의 소설의 한계로 지적되어 온 요인이다. 노마의 순진성은 향수의 매력을 지니되 결국은 현실에 대한 순진한 시각의 반영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덕 소설의 중층 구조를 간과한 것으로, 그 판단에는 분명히 카프식 리얼리즘의 시각이 배어 있다. "향토색 짙은 모더니즘적 기법이 바로 현덕의 미학적 감성대… 인조 보석을 연상하리만큼 치밀한 구성력… 숨겨진 토착어를 채광하여 가장 적절한 위치에다 정렬시키는 깔끔한 장인 의식… 그러나 오히려 이런 치밀성 때문에 민중적 친근감이나 구수한 흙 냄새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동심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자체가 순수성의 한계 때문에 사회와 삶의 근본적인 갈등과 모순에 이르지 못함을 예시한다." "소작인이 소작인의 적대 관계인 상태로 접어들어 농민 조합 운동의 분위기는 그림자도 없이 되어 버린다." "갈등은 못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구조를 취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주관을 살리자면 작품의 사실성이 죽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자면 주관이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던 임화의 말을 상기해보지 않을 수 없다. 현덕이 일제 말기에 작품 활동을 했으면서도 아이디얼리즘과 자연주의라는 두 개의 함정을 피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노마의 존재가 관건이 된다.
등단작 [남생이](1938.1)와 곧이어 발표한 [경칩](1938.4)은 노마의 존재가 매우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는 작품들로서, 내용상으론 [경칩]에서 [남생이]로 이어지는 연작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후로 계속해서 [두꺼비가 먹은 돈](1938.7), [골목](1939.3), [잣을 까는 집](1939.4), [녹성좌](1939.6-7), [군맹](1940.2) 등이 발표되는데 농촌에서 도시로 옮아가는 이들 소설의 작품현실은 '식민지 자본주의화의 모순'(신경림)과 정확히 조응한다.
중요한 것은 [남생이]나 [경칩]에서 노마는 일관된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고,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노마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의 세계는 그것대로 당대의 실상과 삶의 모순을 리얼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노마는 당대 삶의 파탄 구조와 타락상을 극명한 대조 효과로 부각시키는 존재이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과연 현덕의 소설이 동심이란 순수성의 한계 때문에 사회와 삶의 근본적인 갈등과 모순을 그려내지 못했고, 하층민들끼리 물고뜯는 구조에 지나지 않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사회와 삶의 근본적인 갈등과 모순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은 동심적 시각 때문에 계급 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남생이]에서 노마 아버지는 "지주가 보는 앞에서 마름 김오장의 멱살"(44쪽)을 잡아쥔 까닭에 소작을 잃고 부두의 자유노동자가 된다. [경칩]에서 홍서네는 병들어 땅을 부칠 가망이 없는 노마네 소작에 마음이 끌려 지주집 안주인한테 달걀 꾸러미를 들고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소작만으론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없어 개펄로 부두로 날품 일을 나가야 했던 노마네나 홍서네였다. [뚜꺼비가 먹은 돈]에서 노마가 잃어버린 돈은 농촌 계몽 사업과 관련해 감옥에 갇힌 노마의 아버지와 연결되고 있다. 물론 이런 계급적 갈등은 이들 소설의 중심 내용은 아니다. 그렇게 하자니 사실이 희생될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신에 작가는 농민의 생활고와 이농민의 현실, 그들이 도시 변두리로 자리하면서 겪는 여러 문제들을 주목하였다. [잣을 까는 집] [골목] [군맹]은 도시 변두리 산동네, 특히 세궁민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잣을 까는 집]은 일자리를 잃은 석공네의 비참한 살림 형편을, [골목]은 실업자 지식인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다룬 작품이고(주인공은 허영기 그득한 아내의 성화에 날마다 시달리는데, 자기가 순사 시험에 떨어질 체격임을 알고서야 시험을 보기로 한다), [군맹]은 무허가 토막 철거를 둘러싼 주민들의 집단적 대응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녹성좌]는 사회주의 문화운동을 지향하는 이들의 고민과 좌절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모두 떠나더라도 끝내 자리를 지키려는 주인공의 발언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현덕은 일정하게 각성한 주인공들을 작품 속에 포함하고 있으며, 농민, 도시 빈민, 실업자 지식인, 사회주의 문화운동가 등 당대 민중의 피폐해진 삶을 통해 시대 현실에 접근하여 했음이 밝혀진다. 모두 전형적인 상황에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리얼리즘 정신을 드높이고 있다.
둘째로 하층민들끼리 물고뜯는다는 구조에 대해 생각해보자. [남생이]는 우선 30년대 인천항 부두의 생태에 관한 정밀한 보고서이다.
배와 육지를 잇는 연육교를 중심으로 볏섬이나 소금 따위를 져나르는 부두의 자유노동자들과, 그들을 상대로 하는 무허가 이발사, 들병 장수, 그밖에도 그곳 마당지기 앞잡이에서부터 낙정미를 주워 모으는 사람들까지, 이른바 '선창 벌이'의 생활을 한 폭에 담아내었다. 작가는 이들의 생태를 단지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또렷한 인상과 개성을 부여함으로써 당대 삶의 추이를 정확하게 해부해나간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노마는 유일하게 성장의 주인공이다. 아버지가 죽던 날, 노마는 그렇게도 오르려 하나 못 오르던 나무에 기어올라 세상을 거꾸로 바라다본다. 원래 나무에 오르면 기차와 선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자기는 돈을 벌어 병든 아버지와 밖으로 나도는 어머니를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노마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털보와 눈이 맞아 아버지를 배반했고, 부친상을 당했어도 나오지 않는 눈물 때문에 갖게 되는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은 동무 영이에 대한 보살핌의 감정으로 옮아간다. 바로 여기에서 이 작품은 도저한 암흑 속에서도 일말의 생기를 내뿜는 것이니, 이것은 최원식 교수가 김유정의 작품에서 주목한 바의 새로운 층위에 값한다.
[경칩]에서는 노마 아버지의 친구 홍서가 주인공격이 되어 '그러지 않으려도 그렇게 되고마는 안간힘의 밀려남'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곧 이 작품은 홍서가 노마네 소작권을 차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을 홍서의 내밀한 심리 추적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서의 배신은 단순한 배신이 아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이따금씩 밭두덩을 뛰어다니며 등장하는 노마와 그의 또래 친구들을 근거리 또는 원거리 묘사로 적절하게 구사하여 파멸하는 농촌 풍경을 한층 고적하게 만드는 한편, 시대의 우수로 가득한 향토적 서정을 촉발해낸다. 그리고 회생할 가망이 없는 친구 논을 차지한 데 대한 홍서의 연민이라든지 미안한 감정과, 땅에 대한 농민의 육친적 애정을 진하게 교차시킨다. 여기서 노마의 존재는 홍서의 배반을 개인의 악덕으로 치
부하지 않게 해주는 해학의 장치로서 결정적이다. 홍서가 노마네 땅을 밟고 서서 온갖 감정에 빠져 있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노마가 나타나 말을 건다.
"우랭이 잡우?"
"응, 우랭이 잡어."
홍서는 짐짓 작대기를 짚고 물 속 논바닥을 구부려 들여다 본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우랭이가 있으리요, 실은 실없는 말로 들리기 전에 먼저 당황해지고 만다. 어린이에게 완전히 속을 뽑히고 만 감이었다. 홍서는 등줄기가 꼿꼿해지는 자세로 서서 만사를 한갓 침묵으로 때우려든다.
"거짓부렁야, 우랭이두 없는데."(37쪽)
그런데, [남생이]에서도 그랬지만, 이 작품의 해학성은 거꾸로 가슴을 저미는 통증과 고독감, 연민의 정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파멸은 정작 노마네가 맞이하는 내적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아무것도 모르고 노마가 멀리서 홍서를 향해 막대기 총을 쏘는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홍서는 무심결에 되돌아가는 노마를 불러 백동전을 하나 건네 준다.
담배를 사려고 넣어 두었던 돈이다. 그에겐 적은 돈이 아니로되 아까운 줄을 모르는 홍서였다. 허나 무슨 뜻으로 그 노마에게 돈을 준 것인지는 또 좀 몰랐다. 다만 보리밭 사잇길로 둔덕을 넘어가는 노마의 검정 바지 저고리를 입은 작은 뒷모양이 무한 측은했다. 조금 후 둔덕을 넘어 맞은편 언덕길에 노마를 선두로 조랑조랑 기동이 형제가 뒤를 따라 이리 꾸불 저리 꾸불 멀어 가는 모양이 보일 때 홍서는 좀더 마음이 애련했다.
점점 그 모양은 졸아지며 언덕 너머로 사라지자 홍서는 자기 한 몸만 천리 만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듯한 외로움에 사무친다.(38쪽)
끝 장면에서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홍서는 친구 노마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홍서 자신이 노마 아버지만큼 귀 뒤에 살이 여위든, 아니면 노마 아버지 자신이 홍서만큼 귀 뒤에 살이 오르든"(같은곳) 하지 않고서는 "골수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거듭 짙은 외로움에 휩싸인다. 인물의 내면을 꿰뚫고 시대의 본질로 다가서는 이런 대목은 신경향파 작품 이상으로 당대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노마를 통해 개척한 현덕 소설의 새로운 층위는 무엇보다 당대 현실 속에서 살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 말기로 갈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으니, 현덕의 문학도 흔들리다가 마침내 두 방향의 분열을 겪는다. [두꺼비가 먹은 돈]은 노마를 더욱 전경화한 바람에 그야말로 순진성의 세계로 떨어졌고, 가장 적극적인 주인공을 내세운 중편소설 [녹성좌]는 구성과 인물을 장악하는 힘이 현저히 약해서 작품성을 결하고 있다(김남천은 {남생이} 발문에서, 자신이 퍽 주목한 이 작품이 "중단"되고 말았다고 밝힌 바 있으나, 신문 연재물에선 완결된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장편으로 구상했던 것을 건강상의 이유로 서둘러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마지막 작품 [군맹]은 새로운 도시개발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성문 밖 토막촌 사람들의 운명과 생태를 다각도로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철거민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이 지도자의 매수로 실패하고, 남은 인물들은 "자기 앞에 가로막힌 컴컴한 어둠을 자각"(224쪽)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결국 현덕은 시대의 한계 때문인지, 희망 없는 현실의 암흑을 그리는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30년대 모더니즘과 함께 연마된, 인물의 내밀한 행동심리를 수반하는 풍부하고도 정밀한 묘사력과, 이를 바탕으로 시대의 본질을 일상성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30년대 후반기 리얼리즘 소설의 특질이 그의 모든 작품을 관류하고 있다.
5.현덕의 아동문학
현실의 암흑을 그리는 것 말고 달리 방도가 없었을 때, 현덕이 무엇보다 많이 힘을 쏟아부은 대상이 바로 아동문학이다. [남생이]와 [경칩] 이후, 그러니까 38년 중반부터 현덕은 소설과 함께 동화와 소년소설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의 동화는 노마를 원래 성격 그대로 등장시킨 일종의 짧은 연작으로서 유년의 세계를 다루었고, 소년소설은 졸업을 앞둔 보통학교 상급생이나 중학생 가량 소년의 세계를 다룬 것으로, 이 둘의 장르 특성까지도 아주 분명하게 구별된다. 인물을 또랑또랑하게 살려내는 현덕의 작가정신이 아동문학에서는 더욱 빛을 발한다. 리얼리즘 유년동화와 소년소설의 개척자로서 현덕은 우리 아동문학사에 우뚝 선 존재이다.
동화에는 노마, 기동이, 똘똘이, 영이가 계속 등장한다. 이들 중 기동이 하나만은 부잣집 아이로서 다른 아이들과 자주 마찰을 빚는다. 그것은 기동이가 가게에서 돈 주고 산 장난감이나 과자 따위로 아이들 앞에서 곧잘 으시대는 탓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사이 좋은 한 동네의 천덕꾸러기들이다. 기동이한테 간혹 부여되는 벌이란 아이들이 저들끼리만 알고 기동이에게는 안 가르쳐 준다든지, 기차놀이에서 손님으로 태워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정도이고, 함께 놀 때에도 기동이에겐 끝에 가서 당하고야 마는 배역('쥐와 고양이 놀이'에서 고양이, '토끼 삼형제 놀이'에서 늑대)을 정해 준다는 것이다. 어쨌든 기동이가 가지고 오는 먹을 것이나 장난감들은 가난한 아이들에겐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여기서 노마의 총명함이 발휘된다. 그는 장난감 없이도 각종 놀이를 주도해 나가며, 궁리 끝에 손수 장난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천진하면서도 용기와 지혜를 함께 갖춘 노마의 형상엔 다음 세대를 향한 작가의 의식과 소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소년소설 가운데 대표작 [나비를 잡는 아버지]를 보면, 마름과 소작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 구조이면서도 마름집 눈치를 보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현실을 바우가 온몸으로 깨닫고 껴앉는 것으로 끝이 난다. 소년소설에서는 청소년기의 특성대로 우정과 양심, 의리, 연민의 세계를 주로 다루었다.
같은 시기에 쓴 것들인데도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과 아동문학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이렇듯 다르게 나타난다. 하지만, 동화의 세계에서나 소년소설의 세계에서나 현덕은 확고한 리얼리즘의 정신 아래 작품을 썼다. 더욱이 '계급모순 환원성'을 특징으로 하는 카프 아동문학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 현덕은 자리한다. 아동문학에서 그는, 어린이의 심리 특성과 독자의 연령을 옳게 파악하고 수용한 일급 작가였다.
6.맺음말
현덕의 문학은 30년대의 새로운 현실과 30년대의 새로운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그 핵심이 드러난다. 특히 [남생이]와 [경칩]은 '아이디얼리즘'과 '자연주의'를 피하기 위해 고투한 결과로서 30년대 리얼리즘의 한 특질을 보여준다. 이로써 리얼리즘의 문제의식을 떠나 30년대 신진 작가들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고, 또한 카프식 리얼리즘의 관점에서는 그들 세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현덕의 소설을 '탈정치적, 탈사회적, 탈이념적'이라 평가하는 관점은 30년대 후반기 문학과 현덕 소설의 구조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덕의 아동문학을 순전히 "계급문학의 도식"에 갇혀 있다고 파악하는 관점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현덕의 해방 후 행적을 한갓 돌발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작가의 생애를 비롯해 우리 문학사의 계기적 발전과 연속성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결과이다.
민족문학 전체의 유산으로서 20년대 경향문학의 충격과 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충격을 정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할 필요가 있다. 30년대 중반부터 이념적·미학적 대립이 해소되고 문단의 통일적 기운이 무르녹아 있었음을 우리는 현덕의 삶과 문학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30년대 후반기 문학을 살핌에는, 새로운 현실의 도래와 더불어 카프 시기의 낭만적 충동은 거의 소멸했음에도, 당시 모더니즘이 창작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최명익, 허준, 유항림 같은 작가에게서도 발견되지만, 백석, 이용악, 오장환 같은 시인에게서도 발견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철저한 리얼리즘 정신에 바탕하지 않고서는 정비석 류의 감각적 통속문학, 김동리나 이효석 류의 신비주의 문학으로 미끌어져 들어가기 또한 쉬운 일이었다.
이제 30년대 문학의 세련도를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으로 파악하는 시각의 문제점을 다시 돌아보자. 30년대 문학의 세련도가 정치 사상성의 후퇴를 반영한다는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냐 할 때는 또 사정이 다르다. 30년대 문학의 세련도는 현실의 단순 재현이라는 속류 사회학주의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현실을 포획하려는 문학적 대응의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30년대 문학을 바라볼 때는 '파시즘의 대두에 따른 시대의 한계'와 그 속에서도 진행되었던 '한 점 빛을 향하는 힘겨운 고투'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30년대 후반기의 신진 작가들뿐 아니라, 흔히 카프와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구인회에 속한 작가와 시인들, 예컨대 이태준, 정지용, 이상, 박태원, 김유정 등의 문학을 오늘날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서 비롯한다.
통상 모더니즘 계열이라 일컫는 작품들을 대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형식과 기법에만 눈을 돌려 바닥에 흐르는 저류를 보지 못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현실과 무매개적인 자립적 기호 체계로서 모더니즘의 기법만 따지는 일은 충분히 경계되어야 한다. 한편, 카프식 리얼리즘은 현실의 발전을 역동성 속에서 그려내고자 했을 때에도 본질적으론 권선징악의 구도에 지나치게 강박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앞으로 전형의 문제도 다시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민족이냐 계급이냐가 우문인 것처럼,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의 택일적 주문에서도 이젠 벗어나야 하겠다. 페리 앤더슨이 지적한 바대로 새로운 시간의 흐름만을 구성하는 모더니즘의 개념 자체는 매우 공허하지만, 모더니즘은 새로운 문명의 충격에 대한 응수를 형식면에서 탐구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민족문학은, 리얼리즘을 가장 뚜렷한 미학적 원리로 인정하되 현실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모더니즘(모더니티)을 흡수 지양함으로써 자기를 갱신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민예총 인천지회 주관 제4회 인천민족문학제 발표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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