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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천 남구만의 생애와 功績
성당제(문학박사, 전 성균관대 교수)
# 머리말
조선조 역사상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바로 숙종대(肅宗代)이다. 당시에 갑인환국·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이 차례로 단행되어, 서인에서 남인으로 다시 남인에서 서인으로 번갈아 정권이 교체되었고, 갑인환국 이후 남인은 탁남(濁南)과 청남(淸南)으로 갈려 서로 다투었으며, 경신환국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기 시작하여 갑술환국 이후에는 서로 갈등하고 대립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치열한 당쟁으로 인하여 많은 문신들이 사사(賜死)되고 귀양 가는 등 정국이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벼슬길에 올라 최고의 벼슬에 오르고 목숨을 온전히 보전한 위인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1629~1711) 선생이다.
약천 선생에 대해,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은 “박학다식하여 진실로 대적할 사람이 없는 불세출의 영웅호걸”이라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약천 선생을 “불세출의 위인”이라고 평하였다. 이렇게 약천 선생이 위대한 인물로 일컬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약천 선생은 효종·현종·숙종조에 관각의 중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국정 전반에 걸쳐 많은 공적을 쌓은 경륜가일 뿐만 아니라, 다수의 훌륭한 문학작품을 창작한 관료문인이다. 또한 정조(正祖)가 ‘남구만의 상소문은 관각의 나침반’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상소문에 뛰어났고, 국가 대사에 쓰는 반교문(頒敎文)과 책문(冊文) 등을 10여 편이나 찬술한 경세(經世)의 대문장가(大文章家)이다.
또한 약천 선생은 역사에도 해박하여 「동사변증(東史辨證)」이란 글을 남겨 후대에 영향을 끼쳤으며,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안진경(顔眞卿) 풍의 글씨에 뛰어났다. 그리고 문하에 100여 명의 제자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 영의정이 두 명이나 배출되었다. 생전에는 그의 헌신적인 기근 구제와 선정을 베푼 업적을 기리는 생사당(生祠堂)이 두 곳에나 세워졌고, 세상을 떠났을 때는 함경도 백성 7천여 명이 함흥에 모여 통곡했다고 한다. 대략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그에 대한 ‘불세출의 영웅호걸’이란 평가가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약천 선생이 용인(龍仁)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조부 남식(南烒)과 부친 남일성(南一星)의 묘소를 용인 화곡(花谷)에 쓰고부터이다. 그리고 약천 선생이 용인 비파담(琵琶潭)에 머물기 시작한 것은 58세(1686)부터이며, 이때부터 세상을 마칠 때까지 20년 넘게 용인에 거주하였다. 사후에도 용인 땅에 잠들어 있는 지 현재 300여 년이 되었고, 그 후손들도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용인은 약천 선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만큼 용인 시민들은 약천 선생의 훌륭한 점을 세상에 드러내 알려야 할 처지에 있다고 하겠다.
이에 용인문학회에서는 2009년 10월 처음으로 ‘약천문학제’를 열고 약천 선생에 대한 심포지엄을 실시하여, 약천 선생과 그의 문학 등을 간략히 세상에 알렸다. 그 뒤 2016년 11월 ‘약천문학제’를 개최하여 약천 선생을 기리고 문학 대담을 통해 ‘약천 선생의 뜨거운 나라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 알렸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약천 선생의 생애와 문학 등을 더 깊이 연구하여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서 ‘2017 약천 남구만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에 연구자들이 네 주제로 나누어 발표하기로 하였는바, 첫째 약천 선생의 생애와 공적(功績)을, 둘째 약천 선생의 문학 작품에 나타난 형상미(形象美)를, 셋째 상소문에 나타난 선비 의식을, 넷째 상소문과 기타 작품에 드러난 국방론(國防論)을 각각 고찰하기로 하였다.
이를 통해 학술대회에 참가자한 분들은 약천 선생의 생애와 벼슬길에 나아가 세운 공적을 자세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약천 문학의 진면목과 그의 위국 충정에서 우러나온 국방론을 깊이 이해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면 먼저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를 토대로 약천 선생의 생애와 공적을 고찰하여, 약천 선생의 집안과 성장 과정, 직무에 임했던 자세, 이룩한 공적을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 가계(家系)와 수학(修學)
약천 선생은 대내외적으로 혼란했던 임진왜란 이후 병자호란 이전 인조7년(己巳,1629) 음력 12월 3일 금성현령(金城縣令)을 지낸 부친 남일성(南一星:1611~1665)과 모친 권씨(權氏) 사이에서 1남 3녀 중 외아들로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 아래 누암(樓巖)에 있는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다.
약천 선생의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자(字)는 운로(雲路)이며 호(號)는 미재(美齋)·약천(藥泉)이고,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약천 선생이 광진(廣津)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있는 약수암(藥水巖) 근처에 집을 짓고 한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이로부터 제자들이 ‘약천 선생(藥泉先生)’이라 일컫게 되었다.
약천 선생의 10대조(代祖)는 조선 태조 때 영의정을 지낸 개국공신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이며, 8대조는 세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이다. 증조부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남타(南柁:1577~1639)이고, 조부(祖父)는 평강현감(平康縣監)을 지낸 남식(南烒:1589~1650)이다.
조부 남식은 연산 서씨(連山徐氏) 서주(徐澍:1544~1597)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금성현령을 지낸 남일성으로 약천 선생의 부친이고, 차남은 예조판서를 지낸 남이성(南二星:1625~1683)이다. 딸은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중국 심양(瀋陽)에 끌려가 처형당한 오달제(吳達濟:1609 ~1637)에게 출가하였다. 그러므로 오달제는 약천 선생의 고모부가 된다.
부친 남일성은 권업(權曗)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1남 3녀를 두었다. 1남은 바로 약천 선생이며, 장녀는 약천 선생의 손위누이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에게, 차녀인 손아래 누이는 이관성(李觀成)에게, 그 다음 손아래 누이는 이한익(李漢翼)에게 각각 출가했다.
이상의 사실에서, 약천 선생의 먼 조상은 현달한 명문 집안이었지만, 가까운 조상 증조·조부·부친은 미관말직에 그친 한미한 가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약천 선생은 동래 정씨(東萊鄭氏) 정수(鄭脩)의 장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학명(鶴鳴)으로 천거로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녀는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낸 조태상(趙泰相)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3남 1녀를 두었는데, 1남 학성(鶴聲)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2남 학청(鶴淸)은 평릉찰방(平陵察訪)을 지냈고, 3남 학정(鶴貞)은 장수찰방(長水察訪)을 지냈으며, 1녀는 이대곤(李岱坤)에게 출가하였다.
아들 남학명은 이민서(李敏敍)의 딸과 결혼했지만 그 아내가 후손 없이 일찍 세상을 등지자, 다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손자인 이시현(李時顯)의 딸을 아내로 맞아 3남 2녀를 두었다. 1남 극관(克寬)은 생원(生員)으로 요절하였고, 2남 처관(處寬)은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으며, 3남 오관(五寬)은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두 딸은 각각 정랑 이창원(李昌元)과 지평 이광의(李匡誼)에게 출가하였다.
약천 선생의 조상(祖上)이 결성(結城: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에 살기 시작한 것은 증조부 남타(南柁) 때부터이다. 약천 선생이 태어나기 1년 전(1628)에 조부 남식이 홍성(洪城) 결성(結成)에 있는 구산(龜山)에 전려(田廬)를 지었는데, 인조16년(1638)에 조부가 용안현감을 그만두고 돌아와 증조부 남타(南柁)를 봉양하였다.
약천 선생은 출생지인 충주 누암에서 유아기를 보내고 5세 때 서울 정릉 소동(小洞)으로 가서 7세까지 살았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8세 때 부친을 따라 전북 익산 용안(龍安)으로 피난 가 있다가 10세 때 어버이를 따라 결성으로 갔다. 결성에서 살다가 14세에 충주 외가로 가서 1년 정도 있었고, 증조부를 장사지내기 위해 다시 결성으로 돌아와서 살다가 18세 때 관례를 행하고 서울로 올라가 공부하였다.
약천 선생이 유·소년기 때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결성인데 이곳에서 8년 정도를 살았다. 그러므로 결성은 약천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약천 선생은 벼슬길에 오른 뒤에도 모친을 뵈러 말미를 받아 결성으로 내려가거나, 임금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때나 유배지에서 돌아왔을 때, 또 파직을 당하거나 증조고의 묘지에 성묘하기 위해 내려가기도 하는 등 78세(1706)까지 결성을 계속 왕래했다.
약천 선생에게는 두 아우가 있었는데 모두 요사(夭死)했으므로 모친께서는 약천 선생을 매우 아끼셨다. 그렇지만 학업을 독촉하실 때는 지극히 엄하시어, 약천 선생이 책을 덮고 글을 외울 때 익숙하지 못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쳐서 피가 흐를 정도였다고 하니, 훌륭한 아들 뒤에 훌륭한 어머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약천 선생은 어렸을 때,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달한 진외조모(陳外祖母) 이씨(李氏)에게 여러 해 동안 가르침을 받았고, 숙부 남이성과 함께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도 했으며,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세에 관례를 행하고 서울로 올라온 뒤, 20세에 결혼하고 처가(妻家)에 거처하면서 학업을 닦았다.
약천 선생은 젊었을 때부터 글재주가 있었고, 학문도 출중한 데다 글씨까지 잘 썼으므로 명성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글이 잘 말해준다.
공(公)의 젊었을 때의 집은 호서(湖西)의 결성인데 10여 세에 서울로 왔다. 서울의 여러 명사들이 모두 공(公)의 학문과 문식(文識)에 탄복하였으며, 이에 명성이 날로 퍼지게 되었다.
남구만은 국초의 상신(相臣) 남재(南在)의 후손인데, 중간에 형세가 기울어 세력을 떨치지 못하여 호서(湖西)의 결성에 우거(寓居)하였다. 남구만은 젊어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었고 필법도 또한 공교(工巧)하고 아름다웠다. 서울에 유학하여 김익희(金益熙)에게 의탁하였는데, 김익희는 바로 그의 내외종(內外從) 근친(近親)이었다. 김익희가 그를 사랑하여 그의 자질(子姪)과 같이 공부하도록 하였고, 이에 이민적(李敏迪) 형제와 서로 사귀며 사이좋게 지냈다. 김(金)·이(李) 두 집안이 서로 칭찬하여 추천하고 좋은 평판을 널리 퍼뜨리니, 저절로 유림(儒林)의 우두머리에 있게 되어 명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약천 선생은 서울로 올라와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인 창주(滄洲) 김익희(金益熙:1610~1656)에 의탁하고, 김익희의 아들·조카와 함께 수학하면서 이민적(李敏迪) 형제와 서로 사귀며 사이좋게 지냈다. 김익희는 약천 선생의 부친 남일성(南一星)과 이종사촌간이며, 김익희의 부친 김반(金槃)은 약천 선생의 조부 남식(南烒)과 동서간이고 이들의 장인은 서주(徐澍)이다. 김익희의 아들과 조카는 김만균(金萬均:1631~1675)과 김만기(金萬基:1633~1687)이다. 이민적 형제는 이민적(李敏迪:1625~1673)과 뒤에 약천 선생의 사돈이 된 이민서(李敏敍:1633~1688)를 가리키며, 이들의 생부(生父)가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1585~1657)이다.
위 인용문에서 ‘김익희에게 의탁하였다’고 한 말은 약천 선생이 김익희를 스승으로 섬겨 그에게 배웠다는 뜻이다. 약천 선생은 영의정으로 있을 때 조정에 김익희의 시호(諡號)를 청하려고 올린 행장(行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公:金益熙)은 만력(萬曆) 경술년에 태어나, 문원공(文元公:金長生)에게 예(禮)를 수업했고 기암(畸菴) 정홍명(鄭弘溟)과 계곡(谿谷) 장유(張維)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 나[南九萬]는 공(公)에게 외당자제(外黨子弟)가 되며, 나이가 어릴 때부터 그 문하에 들어가 공(公)에게 공부를 배울 수 있었다. 공(公)의 재행(才行)과 지업(志業)은 진실로 이미 그 대략을 차례로 논술했다. 그 의모(儀貌)의 높고 맑음과 용모와 행동거지의 엄중함 같은 경우는 또한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남이 있었는데, 공(公)이 돌아가신 뒤로 나는 그분과 견줄만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김익희는 그의 조부인 김장생(金長生)에게 예학(禮學)을 공부했고 정홍명(鄭弘溟)과 장유(張維)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약천 선생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김익희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사실이 밝혀져 있다. 또한 김익희는 명망이 높고 맑으며 용모와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인물이라고 약천 선생은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김익희는 약천 선생이 벼슬길에 오르던 해에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그 후 약천 선생은 과거에 합격하여 28세에 벼슬길에 나가, 서연(書筵)에 출입하면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 1672)을 만나 그를 스승으로 섬기게 된다. 동춘당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에게 수학하였으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학문적 경향이 같은 성리학자로 예학(禮學)에 밝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학설을 지지했던 인물이다.
동춘당은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 ~1570)을 매우 존중했는데, 그 까닭은 동춘당의 장인이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이며 서로 사제지간이었던 사실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약천 선생은 율곡과 퇴계의 학풍을 모두 이어받은 셈이다. 실제로 약천 선생은 퇴계를 공경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약천 선생이 남긴 시 「진천객사차퇴도시(鎭川客舍次退陶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약천 선생은 어렸을 때 여러 사람에게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젊어서는 창주 김익희와 동춘당 송준길을 스승으로 섬겼다. 이 두 스승의 학문적 경향을 살펴볼 때, 약천 선생은 엄연히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학문적 성향은, 그의 문집에 실린 글들을 통해 볼 때 성리학적 측면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대부분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러한 점은 다음의 두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公)께서는 집안에 거처할 때 청렴하고 검소하셨다. 성격이 학문을 좋아하여 연로(年老)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경사(經史)를 꿰뚫어 실용(實用)을 이루기에 힘쓰셨다. 문장을 쓰면 섬위(贍蔚)하고 전후(典厚)하였으며, 그 소(疏)·주(奏)·의(議)·론(論)은 반드시 경전(經傳)의 전훈(典訓)에 근거하여 썼기 때문에 찬란하여 볼만했다.
공(公)께서는 평소 천인성명(天人性命)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하루 종일 독서하고 침잠하셨으며, 오로지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셨다. 뜻을 확립하여 몸을 단속하신 것을 상고해보면 부지런히 일하느라 파리하고 청결(簡潔)로써 스스로를 지키셨으며, 비록 작은 일이라도 잘잘못이 적었으니, 타고난 자질이 도(道)에 가까울 뿐만이 아니셨다.
앞의 인용문에서는 약천 선생이 경서(經書)와 역사서(歷史書)를 꿰뚫어 실용(實用)을 이루기에 힘썼다고 하였다. 뒤의 인용문에서는 약천 선생이 평소 천인성명(天人性命), 즉 성리학(性理學)을 말하지 않고 실천궁행(實踐躬行)과 마음으로 터득함을 급선무로 여겼다고 했다. 그러므로 약천 선생은 성리학보다는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했던 인물이라고 하겠다.
# 경륜(經綸)과 공적(功績)
약천 선생은 효종2년(23세,165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효종7년(28세,1656)에 별시(別試)에 합격하여 가주서(假注書)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로부터 세상을 떠나기 4년에 전 79세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이후로도 나라에 큰 일이 있어 조정에서 자문을 구해오면 정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국가에 거의 다 바친 셈이다.
약천 선생은 한미한 가문에서 벼슬길에 올라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특출한 재식(才識)으로 청요직에 천거되었고, 요직을 두루 거쳐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렇다고 그의 벼슬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벼슬길에 있을 때, 현종조에는 기해예송(己亥禮訟:1659)과 갑인예송(甲寅禮訟:1674년 7월)이 있었고, 숙종조에는 갑인환국(1674년12월)·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 등 네 차례의 환국이 있었으며, 장희재(張希載) 사건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정적(政敵)을 배척하는 일도 일어났으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당쟁이 치열하여 정국이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로 인하여 약천 선생도 네 차례나 유배를 가야했다.
효종8년(29세,1657) 약천 선생이 시강원(侍講院)의 사서(司書)와 문학(文學)에 제수되어 세자(世子:현종)를 보필하고 인도하였다. 이 때 동춘당 송준길이 약천 선생과 함께 서연(書筵)에 참여했는데, 동춘당은 약천 선생이 어질면서도 문식(文識)이 있음을 보고 높이 평가했고, 약천 선생도 이때부터 동춘당을 존경하여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이듬해 지평(持平)으로 옮겼을 때, 효종이 동생 인평대군의 상(喪)에 참석하려고 하자, 여러 신하들이 나라의 예법이 아니라고 간쟁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약천 선생이 잇따라 상소를 올려 이를 중지시켰다. 이로 인해 이조의 홍문록(弘文錄)에 천거되어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곧바로 교리(校理)에 제배(除拜)되었다고 한다.
현종 3년(34세, 1662)에는 영남진휼어사로 나가 영남 지방의 기근을 잘 진휼(賑恤)하고 돌아왔다. 이때 곽태재(郭泰載)·하홍도(河弘度) 등을 방문한 일과 안동(安東)·영천(榮川)·의성(義城) 등의 지리와 유적 등을 기록한 「영남잡록(嶺南雜錄)」을 남겼다.
현종 4년(1663) 집의(執義)로 근무할 때, 왕조실록(王朝實錄)의 사신(史臣)은 “남구만이 임금의 마음을 돌릴 생각으로, 오시부터 신시에 이르기까지 매우 적절한 표현을 구사하며 누누이 수백 마디의 말을 전달 드렸으니, 참으로 극간지사(極諫之士)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여, 약천 선생을 극간지사로 일컬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남한산성 반고어사(反庫御史)로 나가 군량미를 검열하다가 병이 났을 때, 현종이 내의원을 보내 치료하도록 명하여, 현종의 특은(特恩)을 입기도 하였다.
다음해(1664) 약천 선생이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을 때, 관리들이 사악하고 정치가 피폐했으므로 건의하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간혹 하루에도 임금에게 요청하는 일이 수 십 건에 달했지만, 현종은 대부분 약천 선생의 요청을 따랐다고 하니, 여기서 약천 선생이 부지런히 정사를 처리하고 또 현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현종10년(41세,1669)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사습(士習)을 감독하여 바로잡고 유생들의 경학(經學) 실력을 부지런히 평가했다. 또한 명망 있는 관원으로 학직(學職)을 겸임시키고 학제(學制)를 정하여 스승과 학생이 한 달에 세 번 모여 강론하기를 청하고, 큰 건물을 세워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려고 했으나, 마침 직책이 바뀌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현종 11년에 외직(外職)을 청해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나가, 목민관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여 헌신적으로 기근(飢饉)을 구제하였다. 이때 연속적으로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약천 선생은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진휼할 일을 강구하고, 조정에 상소를 올려 곡식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내려 받은 곡식으로 10여 곳에 장소를 마련하여 백성들에게 죽을 쑤어 먹이고, 원근(遠近)의 떠도는 거지들을 모두 구제하여 먹였으며, 절약하여 남긴 봉급을 매우 궁핍한 백성들에게 무료로 주었다. 이렇게 백방으로 기근을 구제하니 온전히 살아남은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자 청주 백성들이 모두 “대부인께서는 오래오래 사소서.”란 글을 나무에 새겨 송축(頌祝)했다고 한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기근을 잘 구제했기 때문에, 나중에 청주 지역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약천 선생의 공적을 기렸던 것이다. 생사당은 백성이 감사나 수령의 선정을 찬양하는 표시로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백성들이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약천 선생은 현종12년(43세,1671) 함경도관찰사에 발탁되어 많은 공적을 쌓았다. 기근이 들어 백성이 굶어죽게 되자,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려 임금의 윤허를 받아 강원도·평안도의 곡식과 영남지방의 쌀을 얻어다 백성들을 구제했다. 또한 유학(儒學)을 일으키고 무술(武術)을 장려하였으며 함흥성을 개축하고, 변방의 궁벽한 곳에 위치한 성(城)과 보루를 두루 돌며 상황을 묻고 이를 손수 지도로 제작했다. 그리고 이 지도와 함께 상소를 올려,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하고 갑산(甲山)·길주(吉州) 간 도로를 뚫어 폐지된 사군(四郡)을 회복할 것을 임금께 건의했다. 이에 현종은 경연(經筵)에 임하여 이 지도를 중신(重臣)들에게 펼쳐 보이고, 사람을 시켜 약천 선생의 상소문을 읽게 하고는 “재주와 정성은 진실로 미치기 어렵다.”고 감탄하였다.
약천 선생의 건의에 따라 무산부(茂山府)와 후주진(厚州鎭)이 설치되었으며, 임기가 만료되었지만 현종이 1년 유임(留任)을 명하여 변방의 일을 더 다스렸다. 약천 선생의 성실한 근무 자세와 재주, 그리고 나라를 위한 남다른 충정(忠情)을 엿볼 수 있다.
약천 선생이 함경도에서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온 뒤, 함경도 백성들이 약천 선생의 선정(善政)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세웠으며, 훗날 약천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함경도 백성 7천여 명이 함흥에 모여 통곡했다고 하니, 약천 선생이 함경도 백성들을 얼마나 잘 보살펴 주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숙종 즉위년(46세,1674) 약천 선생은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조정에 돌아와, 얼마 있다가 이조참판에 제배되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다. 이해 11월 다시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는데, 12월에 갑인환국이 단행되면서 당시 대신(臺臣)들이 고(故) 송준길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도록 임금께 청한 일이 있었다. 이에 약천 선생은 의리상 어진 사람을 상해(傷害)하고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무리와 조정에 함께 설 수 없다며 사직 상소를 올리고 향곡(鄕曲)으로 물러나, 사제간(師弟間)의 의리를 지키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숙종이 새로 즉위하면서, 종인(宗人) 이정(李楨)과 이남(李柟)이 숙종의 은혜를 믿고 교만 방자하게 굴었다. 이에 약천 선생은 숙종에게 그들이 결국 자신을 해치고 나라도 흉하게 만들 것이라고 진언(進言)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좋아하지 않고 체직(遞職)을 명했으므로, 모친을 모시고 결성으로 내려갔다.
약천 선생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제수된 그 이듬해(51세,1679) 대사헌 윤휴(尹鑴:1617~1680)가 중신(重臣)의 자리에 있으면서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간악한 짓을 하고 횡포를 부리자, 약천 선생은 이들을 조사하여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약천 선생은 도리어 그들에게 비방을 당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곧 남해(南海)로 옮겨, 6개월 정도 귀양살이를 하다가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 상소에 대해 왕조실록에는 “역적 윤휴와 허견의 흉악한 모략을 내리 꺾다가 자신이 비록 찬척(竄斥)되었으나 종사(宗社)에 힘입음이 있었다.”라 하여, 약천 선생의 상소가 나라에 힘이 되었다고 칭송했다. 이때 우암 송시열도 거제도로 유배되었는데, 약천 선생은 평소 편당을 지어 도와주는 사람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우암을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약천 선생이 편당 짓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고 또 얼마나 강직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숙종 6년(1680)에 남인(南人)들이 물러나고 서인(西人)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경신환국이 단행되었는데, 이 때 약천 선생은 도승지(都承旨)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허견(許堅)과 이정(李楨)·이남(李柟)이 역모죄로 주살되고, 윤휴(尹鑴)도 허견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사사(賜死)당했다. 이로부터 얼마 있다가 약천 선생은 대제학에 올라 「경신토역후반교문(庚申討逆後頒敎文)」을 지어 올렸다.
숙종8년(54세,1682) 8월 병조판서(兵曹判書)에 발탁되어 병조(兵曹)를 잘 다스렸는데, 이에 대해 왕조실록의 사관(史官)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남구만을 병조판서로 삼았다. 남구만은 관직을 맡으면 직분을 다하여 있는 곳마다 대단히 성과가 있었다. 병조판서에 제수되자 허지(許墀)를 불러와 낭관(郞官)으로 삼았다. 숨어 있는 간신과 오래 된 좀벌레 같은 자를 정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비용을 지출할 때는 규제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1년도 되지 않아 곳간이 가득 차 여분의 베[布]가 15만 필이나 쌓이게 되었다. 또 무사들을 거두어 모았는데 채용하고 버리는 것이 공명정대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의논이 대단히 칭송하였으니, 근년에 병조를 다스리는 자들이 미칠 수 없었다.
사관은 약천 선생이 맡는 관직마다 직분에 충실하여 큰 성과가 있으며, 사람을 채용하는 데도 공명정대하고,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을 정도로 병조를 잘 다스렸다며, 약천 선생의 탁월한 직무 수행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병조판서로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고 있을 때, 약천 선생은 문체(文體)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거론하기도 했다.
지경연사 남구만이 말하길, “신(臣)이 지난번 시관(試官)에 끼어 과거 보는 자들의 글을 보니, 문체(文體)가 전에 비해 크게 변하였습니다. 보통 쓰는 문자들을 기필코 신기(新奇)하게 쓰려고 애쓰며 ······ 어려운 글자와 궁벽한 말로 문장을 엮어 만들어, 반드시 남들로 하여금 알아볼 수 없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또 그 중에는 어록체(語錄體)를 많이 섞어 쓰는 것이 있었으니, 상규(常規)에서 벗어난 기괴함을 따르려는 습성은 진실로 매우 놀랄 일입니다. 지난날에 강필주(姜弼周)가 어록체를 대책문(對策文)에 써서 과거에 올랐고, 근래에 조종저(趙宗著)도 과제[科製:과거의 시험 과목의 하나인 제술(製述) 시험]에 기벽한 말들을 즐겨 써서 여러 차례 높은 등위에 들었습니다. 이를 그대로 모방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져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문체(文體)의 변이(變易)는 진실로 세상의 성쇠(盛衰)와 관계되는 것이오니, 이러한 체재(體裁)는 반드시 엄히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이 뜻을 중외(中外)에 알리시어 일체 금지하게 하소서.”라 하니, 임금께서 해당 관아에 명하여 과거시험규정[科擧事目]에 넣어 중외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문체(文體)의 변역은 세상의 성쇠(盛衰)와 관계되므로 신기(新奇)한 글자를 쓰고 궁벽한 말을 구사한 문장을 일체 엄금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하고 있다. 여기서 약천 선생이 전아(典雅)하고 순정(醇正)한 문체를 중시했으며, 당시에도 과문(科文)에 어록체를 구사하여 문체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체의 변화는 훗날 정조(正祖) 때에도 문제가 되었던 바, 약천 선생이 문체 변화를 언급한 것은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과 맥락이 닿는다고 하겠다.
약천 선생은 숙종으로부터 문재(文才)를 인정받아 대제학(大提學)이 아닌데도 숙종의 지시에 따라 「현종대왕행장(顯宗大王行狀)」을 지어 바쳤다. 얼마 있다가 대제학을 겸임하여 「태조태종가상시호후반교문(太祖太宗加上諡號後頒敎文)」과 「태조대왕가상호책문(太祖大王加上號冊文)」을 지어 올렸다. 그리고 숙종이 천연두에 걸렸다가 건강을 회복하게 되자, 종묘와 사직에 경사스런 일을 고하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린다는 내용의 「대전두환평복후반교문(大殿痘患平復後頒敎文)」을 찬술하였다. 이처럼 약천 선생이 관각문인으로서의 문장 실력을 인정받아 국가 대사에 쓰는 여러 편의 문장을 계속 찬술했다는 것은 바로 그가 대문장가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약천 선생은 해방(海防)을 염려하여 임진·병자년에 나라가 순식간에 경복(傾覆)된 경우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미리 해안을 방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숙종 10년(56세,1684) 1월 약천 선생은 우의정에 올라 함경도의 친기위(親騎衛)를 단속하여 대오(隊伍)를 만들 것을 아뢰어 시행토록 하였다. 그리고 「명성왕후애책문(明聖王后哀冊文)」을 지어 바쳤으며, 명경과(明經科)의 과거 방식을 고쳐 오로지 소리 내어 외우는 구송(口誦)만으로 취재(取才)하지 말고 유생들이 경전의 뜻을 이해하도록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임금께 건의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사은사로 연경에 갔다가 숙종 11년(57세, 1685) 4월에 돌아와 「갑자연행잡록(甲子燕行雜錄)」을 남겼다.
숙종 11년 약천 선생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혼전(魂殿)인 영소전(永昭殿)의 제사에 음악을 쓸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다. 이때 약천 선생은 다음과 같이 악장(樂章)에 대한 입장을 밝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좌의정 남구만이 말하길, “······ 음악은 본래 공적(功績)을 표상(表象)하여 만드는 것이기에 후비(后妃)의 지위에는 무악(武樂)을 쓸 수가 없으므로 지금에 와서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미안(未安)합니다. 열성(列聖)들의 악장(樂章)이 미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먼저 영소전(永昭殿)의 대악(大樂)을 만드는 것도 미안하니, 이러한 절목(節目)은 충분히 논의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다시 대신과 유신(儒臣)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뒤에 유신들의 의논에 따라, 다시 상찬(常饌)을 쓰고 아악(雅樂)은 쓰지 않도록 하였다.
약천 선생은 음악이란 공적을 표상하는 것이므로 후비(后妃)에게 무악(武樂)을 써서는 안 되며, 또 열성(列聖)들에 대한 악장(樂章)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궁중에서 사용하는 아악(雅樂)인 대악(大樂)을 먼저 영소전에 쓰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악장에 대한 원칙을 중시하고 있다. 이로부터 11년 뒤에도 약천 선생은 묘악(廟樂), 즉 종묘의 제전 때 연주하는 아악에 대한 견해를 차자(箚子)로 올리기도 했다. 이로 볼 때, 약천 선생은 악(樂)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해에 약천 선생이 함경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건의하여 설치하게 된 후주진을, 대신들이 월경(越境) 문제 때문에 혁파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그는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진(鎭)의 중요성을 강변하여 이를 무산시켰다. 그러나 이듬해 약천 선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주진은 결국 혁파되고 말았다.
약천 선생은 언로(言路)를 중시하여 이를 막지 말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하였다.
남구만이 진언(進言)하길, “······ 언로(言路)는 국가에 있어 마치 사람의 혈맥과 같으므로 혈맥이 막히면 사람이 병이 들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망합니다. 신이 일찍이 효종․현종 두 왕조를 섬겼거니와, 나이 젊고 기질은 날카로운데 대각에 있게 되면 어찌 지나친 말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간혹 축출도 당하였지만 곧바로 불러 들였습니다.
근래 조정에 언론이 분리되고 심지가 서로 막혀서, 말로써 거슬림을 받으면 해를 넘기며 죄를 받고 버림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신(臣)과 같은 자는 스스로 높은 자리를 만들어 규찰하여 탄핵할 자가 곁에 없으니, 사사로운 계책은 얻었다 하겠으나 국가의 일이 어찌 되겠습니까?”
약천 선생은 사람이 혈맥이 막히면 병이 나듯이, 언로는 국가에 대해 혈맥과 같으므로 이를 막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간신들이 간언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 죄를 받고 버려지기 때문에 언로가 막히게 되므로, 간언하다 임금의 뜻을 거스른 간신(諫臣)을 즉시 불러들여서 언로를 막지 말 것을 건의하고 있다.
약천 선생은 숙종 12년 두 번째로 사은사의 정사(正使)로 연경을 다녀와 「병인연행잡록(丙寅燕行雜錄)」을 남겼다. 그리고 연경으로 떠나기에 앞서 서북(西北:평안도와 함경도) 지방 사람들을 거두어 쓰지 않는 것은 오늘날 옳은 처사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듭 서북방인(西北方人)을 등용해 쓸 것을 임금께 진달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숙종 13년(59세,1687) 7월 약천 선생은 영의정에 제배(除拜)되었는데, 사람됨이 강직한 데다 정사(政事)를 논하느라 직간(直諫)으로 더욱 임금의 안색을 범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신(大臣:政丞)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야 한다.”면서 이러한 자세를 한결같이 굳게 지켜, 당장 재앙과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다스린 행적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공(公)은 영상(領相)이 되어, 법을 받들고 사사로움을 없애고 몸소 솔선수범하기에 힘썼으며, 편당 짓는 것을 심한 병폐로 여겼다. 취사선택에는 공론을 따르고 형벌과 시상을 심사하여 체통을 엄격히 하였으며, 관서의 잘못된 제도를 고쳤다. 또한 민사(民事)를 매우 중시하여 서울에 있는 모든 중앙 관아에서 백성을 해치는 관리가 있으면 비록 중신(重臣)이라도 반드시 처벌하였다. 이 때문에 전후(前後)로 일을 본 지가 채 2년도 안되었는데, 그가 자리에 있을 때는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위 글에서 약천 선생이 “편당 짓는 것을 심한 병폐로 여겼다.”고 했는데, 이는 앞서 그가 우암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특히 백성을 해치는 관리는 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라 할지라도 반드시 처벌했다는 데서 약천 선생의 남다른 애민정신과 강직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궁가(宮家)가 국가로부터 논밭이나 결세(結稅:土地稅) 등을 떼어 받는 절수(折受)가 임진왜란 이후부터 시행되었다. 그런데 당시에 이 절수가 점차 민전(民田)을 침탈하고 국방을 저해하는 등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그동안 수차례 절수의 혁파를 임금께 건의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에 약천 선생이 강력히 건의하여 절수를 혁파시켰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숙종 14년(1688), 숙종의 장귀인(張貴人)에 대한 총애가 극에 달하고, 종인(宗人)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로 임명되는 전례 없는 특별한 은권(恩眷)을 입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조판서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가 차자(箚子)를 올리자, 숙종은 노하여 그를 물리쳤다. 이에 약천 선생이 박세채를 비호하니, 숙종이 대노(大怒)하여 그를 경흥(慶興)에 유배시키도록 명하였다. 그 후 여러 달 만에 석방되어 용인 비파담으로 돌아왔다. 여기서도 임금의 대노(大怒)를 두려워하지 않고 간언하는 강직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숙종 15년(61세,1689) 1월 약천 선생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기사환국이 단행되어 서인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다시 남인이 들어왔다.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도 폐비되고 우암 송시열도 사사(賜死)되었다. 그리고 약천 선생도 4월에 삭탈관직(削奪官職)과 문외출송(門外出送)을 당하고, 다시 강원도 강릉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4월 석방되어 비파담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약천 선생은 5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후, 숙종 20년(66세,1694) 4월 1일 갑술환국이 단행되면서 다시 영의정으로 조정에 복귀했다. 얼마 뒤 인현왕후도 복위되었는데, 이를 투기하는 희빈(禧嬪) 장씨(張氏)와 희빈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가 인현왕후를 해치려는 모의가 발각되어 장희재가 사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천 선생은 그가 죽게 되면 희빈 장씨가 위태로워져 결국 세자까지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장희재는 사형을 면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약천 선생은 계속해서 노론 측으로부터 역적 장희재를 비호한다는 비방을 받아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약천 선생은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지 않고, 누차 사직하기를 청했지만 임금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종묘사직을 굳건히 하려는 약천 선생의 깊은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약천 선생이 장희재의 죽을죄를 면해준 일에 대하여,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장희재의 죽을 죄를 면해준 것은 법 밖으로 벗어났기 때문에, 비록 평소에 공(公)을 흠모하는 자라 할지라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비방을 받으며 마침내 쓰러지고 넘어져도 후회하지 않았는데,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뭇 사람과는 다른 충성을 품고 종묘사직을 위해 깊이 근심하고 과다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유(丁酉:숙종43년, 1717) 7월의 일이 있게 됨에 미쳐 사람들은 비로소 공(公)의 행위는 미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약천 선생이 장희재의 죽을죄를 면해준 것은, 바로 나라의 장래를 위해 특출한 충성심을 품고 세자를 보호하여 종묘 직을 편안히 하려는 남다른 조치였으며, 여러 사람의 비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결코 굽히지 않았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약천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6년 만에 이른바 정유독대(丁酉獨對)가 이루어져, 세자(世子:景宗)를 세제(世弟:英祖)로 교체하려는 일이 있고 나서야, 사람들이 비로소 약천 선생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고 했다. 약천 선생의 지극한 위국충정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의지를 결코 굽히지 않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숙종19년(1693) 겨울,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가 안용복(安龍福) 사건을 계기로 해서, 엄연히 조선 영토인 독도(獨島)를 차지하기 위한 간교한 계략으로, 독도를 죽도(竹島)라고 달리 표기하고 죽도는 왜(倭)의 땅이니 그곳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해 달라는 서계(書契)를 우리 조정에 보내왔다. 이에 예조(禮曹)에서 온건한 내용의 서계로 회답해 주었다.
그러자 대마도 도주는 우리가 보낸 서계 가운데 “우리나라의 울릉도”라고 한 말이 그의 간교한 계략에 방해가 되었으므로, 숙종20년(1694) 2월 23일 서계에서 그 말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조정은 숙종 20년 4월 1일 갑술환국이 단행되어, 남인 정권에서 서인 정권으로 바뀌면서 약천 선생이 다시 영의정이 되어 조정으로 복귀하게 된다. 바로 이해 여름에 약천 선생은 다음과 같이 숙종에게 강력하게 건의했다.
전일 왜인에게 회답한 서계가 매우 모호했으니, 마땅히 접위관을 보내 전일의 서계를 되찾아 와서 그들이 남의 의사를 무시하고 방자하게 구는 일을 바로 책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지금 왜인들로 하여금 거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조종의 강토를 또한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숙종은 약천 선생의 건의에 따라 전에 보냈던 서계를 회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약천 선생은 지난 해 자신이 조정에 없을 때 보냈던 온건한 내용의 서계와는 달리, ‘울릉도와 독도는 엄연히 조선 땅이므로 다시는 이곳에 귀국 사람들이 침범하지 말도록 하라’는 강경하고도 당당한 내용의 서계를 다시 써 보냈다.
그 후 숙종 21년 6월 20일 대마도 도주는 다시 서계를 고쳐 달라고 청해왔으나, 약천 선생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뒤 숙종 23년(1697) 3월 27일 조정에서 나라의 허락도 없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안용복을 주살(誅殺)하려 할 때, 약천 선생은 ‘안용복이 왜인(倭人)의 기를 꺾어 자복(自服)시킨 공로가 있다’고 여겨 그의 사형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안용복은 죽음을 면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약천 선생은 시종 조국 강토를 결코 남에게 줄 수 없다는 확고한 국토의식을 견지하고 강경하고도 당당한 외교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약천 선생의 나이 68세(숙종22년, 1696), 이 해 4월 장희재의 부친 묘에서 흉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남인들이 서인을 몰아내기 위한 저주 음모이며 장희재가 꾸민 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노론 측에서 국문(鞫問)을 청했으나, 역시 약천 선생은 화(禍)가 세자에게 미친다며 이를 저지했다. 이 때문에 약천 선생은 노른 측에게 역적을 비호한다는 탄핵을 받고 면직을 청했으나, 숙종은 그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약천 선생은 이를 고사(固辭)하며 벼슬을 내놓고 고향 결성으로 돌아가 머물러 있었다. 이 때 숙종은 약천 선생에게 다음과 같은 시(詩)를 보냈다.
호현(浩然)히 고향으로 돌아가 머문 지 한 달
浩然歸臥浹三旬
맑은 꿈속에선 응당 궁궐 가까이 있는 줄 알았소
淸夢應知近紫宸
나라 체통 세움에 정성 깊어 오직 법만 받들었고
體國誠深惟奉法
시세(時勢) 걱정에 힘 지쳐도 스스로 몸을 잊었소
憂時力瘁自忘身
주가(周家)가 바로 많은 위난을 만난 시기와 같고
周家正屬多難日
한실(漢室)이 한창 보좌할 현신을 생각할 때와 같다오
漢室方思碩輔辰
의당 정녕 겸허히 기다리는 뜻에 부응하여
宜副丁寧虛佇意
조정에 나오면 필시 태평성세 이루리라
造朝須趂載陽春
숙종이 얼마나 약천 선생을 중하게 여겼으면 꿈에 나타났을까? 숙종은 약천 선생이 나라 체통 세우느라 정성을 다했고 오로지 법령을 받들어 시행했으며, 자신의 몸도 잊은 채 시세 걱정하느라 힘을 다했다고 약천 선생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다. 미련(尾聯)에는 국난에 임하여 약천 선생이 조정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숙종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약천 선생은 70세(1698)가 되자, 계속해서 치사상소(致仕上疏)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치사 요청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때 단종(端宗)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의논을 아뢰고 「단종대왕시책문(端宗大王施策文)」을 지어 올렸다. 이듬해에도 계속해서 치사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숙종 27년(1701, 73세) 8월 인현왕후가 승하하였는데, 이때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듬해 다시 약천 선생을 원망하는 자가 장희재의 일을 가지고 그를 유배 보내기를 청했다. 이로 인해 결국 약천 선생은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가 6개월 후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을 받고, 얼마 후 사면되어 고향 결성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갑술환국(1694, 66세) 이후로 약천 선생은 줄곧 노론 측의 비방과 탄핵을 감내하면서 세자를 보호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숙종으로부터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약천 선생을 아산(牙山)으로 유배를 보낸 것도 그를 비방하는 노론 측의 핍박 때문이었지 숙종의 본심은 아니었다.
숙종 31년(77세, 1705) 6월 노론 측에서 약선 선생에게 역적 장희재를 감쌌다는 죄목을 가하여 죽이려고 할 때, 영의정 최석정은 제자로서 스승이 모욕당할 때 벼슬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사직을 청하면서 ‘약천 선생이 장희재의 사형을 면해주고 유배를 보낸 것은 세자를 안정시키려는 계책 때문이었는데, 이는 모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아뢰었다. 이에 숙종은 온화한 비답(批答)으로 위로하고 타일러 달랬다.
이후로 약천 선생은 다시 서용(敍用)과 파직을 거듭한 끝에, 숙종 33년(79세, 1707) 비로소 치사(致仕)를 허락받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약천 선생은 숙종 37년(83세, 1711) 1월 봉조하로서 80세가 넘은 사람에게 하사하는 은전(恩典)으로 옷감과 음식물을 받았다. 이해 3월 숙종은 약천 선생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의원을 보내 간호하도록 했다. 그러나 약천 선생은 다음과 같이 「야우절필(夜雨絶筆)」이란 시 한 수를 남기고 음력 3월 17일 마침내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몽롱히 낮에 누웠을 땐 산 것 같지 않더니
昏昏晝臥若無生
밤 되자 비로소 처마의 빗소리가 들리는구나
入夜初聞簷有聲
초(楚)나라 풍속 답청 놀이는 마음 밖의 일이요
楚俗踏靑心外事
예경(禮敬)의 경(敬)을 생각함이 병중의 마음이로다
禮經思敬病中情
소생시키고 윤택케 함 하늘의 은택임을 알더라도
雖知穌潤由天澤
이루었다 이지러짐 또한 사물의 이치임을 어찌하랴
其柰成虧亦物程
없애려 특별히 은하수를 쏟아 붓지만 않는다면
除不別垂銀漢水
누가 진군(晉君) 영(嬰)을 침몰시켜 죽이겠는가
誰能沈殺晉君嬰
죽음을 앞둔 약천 선생의 의연한 자세가 나타나 있다.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경(敬)으로써 자신을 삼가겠다는 의지와,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천지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초연히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마음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미련(尾聯)에는 끝까지 세자를 보호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약천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자, 숙종은 “이제 원로(元老)를 잃었으니, 몹시 슬퍼함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라 하고 매우 슬퍼하였으며, 궁궐에서 쓰는 관곽(棺槨)을 보내고 3년간의 녹봉을 주도록 명을 내렸다.
지금까지 약천 선생이 벼슬에 나아가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면서 이룬 공적에 대해 살펴보았다. 약천 선생은 맡는 관직마다 직분을 다하여 여러 방면으로 대단한 성과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임금의 안색을 범하며 극간(極諫)을 하거나 부지런히 상소를 올려 왕정(王政)을 보필하였고,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는 헌신적으로 기근을 구제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살려내고 국방을 튼튼히 하는 등 많은 공적을 쌓았다. 또한 말년에는 귀양까지 가면서 끝까지 세자를 보호한 큰 공로 때문에 숙종은 약천 선생을 매우 의지하고 각별하게 대우해 주었던 것이다.
# 사후(死後)의 평가
약천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11년 뒤, 경종 2년(1722)에 약천 선생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숙종(肅宗)의 묘정(廟廷)에 제1위로 배향되었다.
시호는 어떤 사람이 세상을 등졌을 때, 조정(朝廷)에서 그의 행실과 공적을 평가하고 한 글자 내지 두 글자로 내린 인물평이다. 그러므로 시호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략 알 수가 있다. ‘문충(文忠)’은 ‘문(文)’과 ‘충(忠)’의 의미가 합쳐진 것으로, 이들 글자에는 각각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약천연보에 따르면 ‘문(文)’은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다.[勤學好問曰文]”는 뜻이며, ‘충(忠)’은 “청렴하고 반듯하며 공정하고 바르다[廉方公正曰忠]”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약천 선생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청렴 정직하고 공정한 인물’로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약천 선생이 숙종 묘정에 배향될 때의 교서(敎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남구만은 산하(山河)의 드문 기질이요, 금옥(金玉)의 뛰어난 재기를 모았다. 한 평생 곧은 절개와 청렴한 명망[直節淸名]을 드날렸으니 문장은 그의 나머지 일이었으며, 만년의 깊은 근심과 원대한 생각으로 종사[宗祊]는 그의 순성(純誠)에 힘입었다.
대개 한결같은 절조는 이험(夷險)을 가리지 않았으니, 조처하고 결단함에 정채(精彩)가 드러났다. 그러므로 천 년 만에 계합(契合)하여 (숙종의) 예우(禮遇)가 처음부터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 조정에서 주선(周旋)할 때는 가모(嘉謨)와 가유(嘉猷)에 힘썼고, 강호(江湖)에 염퇴(斂退)하여서는 어찰(御札)과 어시(御詩)가 빈번하였다. 마음을 안다는 온화한 윤음(綸音)을 내렸으니, 진실로 같은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원보(元輔:領議政)였도다.
약천 선생의 뛰어난 기질과 재기, 곧은 절개와 청렴한 명망, 문장의 뛰어남, 국가에의 헌신과 공적, 한결같은 절조, 숙종의 예우 등 약천 선생의 전모가 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약천 선생에게 내린 시호의 의미와도 통하는 글이다. 인용문 윗단락 말미에 “만년의 깊은 근심과 원대한 생각으로 종사[宗祊]는 그의 순성(純誠)에 힘입었다.”는 말은 세자를 보호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공적을 가리킨다.
정조 14년(1790) 3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충청도 해미현(海美縣)에 잠시 유배된 적이 있었다. 이 때 다산은 해미현 지역에 있는 약천 선생의 사당에 들러 초상화를 보고 시를 읊었다. 다산은 이 시에서 “약천이 젊었을 때 상공(相公) 오시수(吳始壽:1632~1681)의 죽음을 구제했고, 만년에는 세자(世子)를 보호하였다.”고 하여, 두 가지 일을 들어 약천 선생을 칭송했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난 뒤, 다시 약천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당화(黨禍)가 일어난 이래, 묘당(廟堂)의 위에 단정하게 앉아서 균축(勻軸)을 잡아 권형(權衡)을 조정하던 이는, 그 입심(立心)과 지론(持論)이 대부분 편파적으로 기울어져서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유독 약천(藥泉) 상공(相公) 남구만(南九萬)만은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간관(諫官)이 된 때부터 그 배격하는 것이나 구제하는 것에 있어서 공정(公正)을 잃지 않았다.
재상이 되자, 시고 짠 것[酸鹹]을 조절하여 이리저리 유지해 나간 것이 또한 여러 사람의 마음을 굴복시키고 나라의 명맥을 보호하였다. 그가 지닌 소신은 뚜렷하였으나, 위언(危言)이나 격론(激論)을 일찍이 한 적이 없었다. 바라볼 때 손안에 들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억지로는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같은 장수도 끝내 그의 소신을 빼앗지 못하였다. 지극히 어려운 때에 처하여, 끝내 청절(淸節)로써 이름을 완전히 보존하고 생애를 마쳤으니, 불세출(不世出)의 위인(偉人)이다.
그의 봉소(封疏)와 주의(奏議)는 모두 책에 갖추어져 있어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보는 것이지만, 공은 또 우리 집안의 외손(外孫)이기 때문에 집에서 가정 일을 처리한 것 또한 부형이나 어른들에게 전해 들어 마음속으로 일찍부터 그를 사모하였다.
경술년(정조14,1790) 봄에 나는 한림(翰林)으로서 해미(海美)로 귀양 갔는데, 해미 지방에 공(公)의 사당이 있었다. 유상(遺像)이 엄연하였고 세시(歲時)로 향화(香火)를 올렸다. 나는 그 유상(遺像)을 보고 그 풍채(風采)를 상상해 보면서, 옛날부터 사모하던 마음을 품고 돌아와 이렇게 기(記)를 짓는다.
다산은 당쟁 이후로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이 편파적으로 기울었지만, 약천 선생만은 정사(政事)를 다스릴 때 공정성과 뚜렷한 소신을 갖고 일을 처리하여 나라의 명맥을 보호하였고, 위언(危言)이나 격론(激論)을 한 적이 없었으며, 끝내 청렴과 절개로서 생애를 마친 ‘불세출(不世出)의 위인(偉人)’이라고 했다.
이어서 약천 선생이 남긴 봉소(封疏)와 주의(奏議), 즉 상소문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으며, 다산 자신도 약천 선생을 우러러 사모한다고 했다. 다산의 약천 선생에 대한 성대한 칭송과 지극한 공경이다. 여기서 약천 선생이 그토록 혼란스런 시기에 오랫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큰 탈 없이 영의정까지 오르고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약천 선생은 조정으로부터 부지런히 공부하고 청렴 정직하고 공정한 인물로 평가되어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았고, 세자를 보호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공로도 인정받았다. 그리고 다산은 약천 선생을 ‘불세출의 위인’이라고 칭송하였다.
# 맺음말
약천 선생은 한미한 가문에서 벼슬길에 올라 이끌어 주는 사람 없이 특출한 재능과 식견으로 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젊어서부터 글재주가 있었고 학문도 출중한 데다 글씨까지 잘 썼기 때문에 명성이 드러났다. 성격은 근면성실한 데다 치밀하고 강직했으며, 학문적 성향은 실용적이고 실천적이었다.
약천 선생이 환로(宦路)에 있을 때는 조선조 역사상 당쟁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이로 인해 비록 네 차례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최고의 관직에 오르고 몸을 온전히 보존하여 천수까지 누렸던 것은, 청렴하고 곧은 절개로 바르게 처신한 데다 남달리 우국애민 정신이 투철했고 나라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후에 ‘부지런히 공부하고 청렴 정직하며 공정한 인물’이란 의미의 시호를 받게 되었고, 다산 정약용도 ‘청렴과 절개로서 생애를 마친 불세출의 위인’이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약천 선생은 조정에서 극간지사로서 열성을 다해 왕정(王政)을 보좌하였다. 때로는 임금의 안색을 범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듭 상소문을 올려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관직을 맡으면 직분을 다하여 있는 곳마다 대단히 성과가 있었다.
함경감사로 재직할 때는 무술을 장려하고 함흥성을 개축하였고, 변방 상황을 손수 지도로 그려 상소를 올리는 등 국방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남달리 우국애민 정신이 투철했기에 ‘조국의 강토를 결코 남에게 줄 수 없다’는 확고한 국토 수호 의지를 가지고 당당한 외교를 펼치기도 하였다.
한편 청주와 함흥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헌신적으로 기근을 구제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살려냈다. 때문에 청주와 함흥 두 곳에서 약천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을 세웠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함흥 백성 7천여 명이 함흥에 모여 통곡했던 것이다.
약천 선생은 말년에 노론 측으로부터 역적 장희재를 비호한다는 비방을 계속 받고 유배를 당하면서까지 세자를 보호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 종묘사직을 편안히 하려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숙종으로부터 지우(知遇)를 받기도 했고 숙종 묘정에 제1위로 배향되었던 것이다.
약천 선생의 곧은 절개와 청렴, 근면 성실한 근무 자세, 헌신적인 애국과 우민(憂民), 실천적인 국토애와 확고한 국토수호 의지, 임금에 대한 극간(極諫), 당당한 외교자세 등은 오늘날 우리 정부의 고위관료나 정치지도자들이 반드시 귀감으로 삼아야 할 점이다.
이번에 다시 ‘2017 약천 남구만 학술대회’가 개최되어, 약천 선생의 문학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앞으로 더욱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약천 선생의 뛰어난 문학과 빛나는 공적이 세상에 더욱더 널리 드러나길 기대해 본다.
※ 참고문헌
南九萬, 藥泉集, 韓國文集叢刊 131·132권, 民族文化推進會 影印本, 1996.
藥泉年譜, 국립중앙도서관 및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朝鮮王朝實錄, 국사편찬위원회, 1957.
南鶴鳴, 晦隱集, 韓國歷代文集叢書 2389권, 景仁文化社, 1994.
崔錫鼎, 明谷集, 한국문집총간 153·154권.
崔昌大, 昆侖集, 한국문집총간 183권.
국역 동춘당집, 민족문화추진회, 1997
국역 약천집(성백효 옮김), 민족문화추진회, 2004.
성당제, 약천 남구만 문학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2, 동방미디어,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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