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사도행전 9장1-9절 / 송태근 목사
오늘 주제는 ‘회심’ [돌아섬]이라는 주제입니다. 이것은 학문적인 분류도 또 논리적인 분류도 아니고, 오랜 세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접하는 가운데 회심의 종류에 한 3가지 정도로 구분을 할 수가 있더라고요. 첫 번째는, 오늘 이 본문의 사울처럼 아주 극단적인 경험을 통해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무슨 병을 통해서 돌아온다든지, 사업이 완전히 망해가지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돌아온다든지, 또 죄를 저지르고 국립 호텔에 갔는데 거기서 한 방에서 목사님을 만났다든지, 그런 경우들이 있어요.
그런데 또 한편에는 저 같은 케이스가 많지요. “언제 구원을 받았냐?” 그러면 “글쎄 잘 모르겠어요. 확실치가 않아요. 구원이 확실치가 아닌 게 아니고, ‘내가 언제 구원받았지?’ 이게 분명 하질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구원 안 받은 건 아니거든요. 확신도 있고. 구원받은 사람인데, “언제 받았어?” 그러면 글쎄. 이렇게 대답 할 수밖에 없어요. 또한 종류는 ‘유사 회심’ 있어요. 자기도 구원받은 줄 알고 있는데, 깊이 오랜 세월 더듬어 보면 아니에요. ‘가짜 회심’이 있어요. 성경에도 ‘가짜 회심자’가 있어요. ‘유다 같은 사람들’ 그리고 ‘후메니오와 같은 사람들’ 이게 전부 가짜 회심자들입니다.
의외로 이런 종류가 교회 안에 참 많아요. 한때는 그 유행처럼 번졌던 파가 하나 있었습니다. ‘구원파’라고 들어보셨나요? 구원파는 뭐냐 하면, “예수 믿었습니까?” “네! 예수 믿는데요.”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글쎄요” 그러면 “당신의 구원은 가짜입니다.” “어떻게 출생하지 않은 삶이 있을 수 있으며, 구원 받은 날짜도 모르고 어떻게 구원이 임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의 구원은 다시 점검해 봐야 됩니다.” 이래가지고 많은 젊은이들을 헷갈리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보세요. 내가 언제 태어났느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너는 4월 28일날 태어났단다.” 알려 주니까 “오, 나 그날 태어났구나!” 듣고 아는 거 아니에요. 그지요? 그런데 내가 태어날 때 “아! 이날이 4월 28일이구나” 이렇게 알고 내가 태어나지 않잖아요. 그래서 ‘구원의 확신’ 이라는 것은 굉장히 신중하게 접근을 해야 됩니다. ‘구원이 정확히 언제 나에게 임 했느냐?’ 그건 모를 수 있어요. 저도 잘 모르지요. 부모님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다면 알 수가 없지요. 슬그머니 믿게 된 경우도 있겠지요. 오늘 바울의 경우는 전자에 경우입니다. 아주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회심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도대체 이 회심의 사건이 나 개인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주는가?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자! 우선 9장을 좀 볼까요?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치려고 여전히 위협과 살기를 내뿜으며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의 회당들에 가져갈 편지를 그에게 요청하니 이것은 그가 이 길에 속한 사람을 만나면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그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더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나와 그를 둘러 비추더라. 4. 그가 땅에 쓰러져 들으매 한 음성이 있어 그에게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그가 이르되, [주]여, 누구시나이까?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거늘 6. 그가 떨며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 하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도시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듣게 되리라, 하시니라. 7. 그와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음성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한 채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도 보지 못하므로 그들이 손으로 그를 인도하여 다마스쿠스로 데려가더라. 9. 그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더라.”(KJV)
자! 여기 보시면,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쫓아가요. 이 다마스쿠스는 북쪽 국경 지역입니다. 넘어가면 이제 시리아 쪽이 나오는 거예요. 이 거리가 무려 240km입니다. 우리나라 부산 절반이면, 대전쯤 그 정도 거리에요. 그 당시 교통 형편으로 한 6일쯤 열심히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거기를 병력을 대동해서 대제사장에게 영장을 발부받아서, 외국에 도피해 있는 그리스도인들 잡아서 소환하려고 간 겁니다. 거의 다 왔어요. 고지가 눈앞입니다. 이 일만 끝내면 바울에게는 개인적으로 엄청난 인생의 족적을 남기는 거면서 동시에 종교 지도자로서 큰 획을 긋는 사건입니다. 그 정점이 눈앞에 있어요. 그런데 그 언덕을 오르다가 그만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개입에 붙들리게 되지요.
이제 그 자세한 부분은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우선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이런 물음을 던져야 되겠어요. “사울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려고 했을까요? 실제 했고 다마스쿠스에 가기까지는 스데반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었죠. ‘이참에 씨를 말리자.’ 해서 다마스쿠스까지 쫓아간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신앙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는 유대교 신봉자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실 메시아를 굳건하게 기다리고 있는 종교적 체계를 갖고 있어요. 그리고 그 신앙은 한 번도 흔들렸던 적이 없어요. 그리고 ‘반드시 그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렛 출신의 허름한 청년 하나가 일어나더니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 메시아다.” 이러고 돌아다니고, 선동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모든 당시 사람들의 재앙의 상징이요, 저주의 대상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유대교 신자들이 꿈꾸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절대 될 수가 없어요. 유대교 신자들이 꿈꾸던 메시아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돼요. 저주와 재앙의 상징인 십자가에 메시아가 죽다니? 그렇게 비굴하고 비참한 모습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건 유대교 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신성모독이 벌어진 거예요. 그리고 그 신성모독 죄로 죽어 간 자를 뭐 부활했다고 떠들고 다니더니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무리들이 쫓아다니는 거예요. 이걸 사울의 입장에서는 간과할 수가 없는 거요. 두고 볼 수가 없는 거요. 그래서 씨를 말리기로 그의 신앙을 가지고 열심을 낸 겁니다.
여러분! 바로 이거예요. 저는 요즘 한국교회 이렇게 정황을 마음 아프게 보면서 정말 한국교회가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원형의 교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가?’ ‘그런 교회가 만들어지고 있는가?’ 놓고 볼 때, “아니라”는 생각이 훨씬 많이 들어요. 이런 현상들은, 이건 성경에서 의도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데 훨씬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한 번도 틀렸을 것이라고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때 유대교 신자들이 그랬어요. 한 번도 자기들이 틀렸을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 확신에 찬 열심의 신앙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줄도 몰랐어요. 틀렸다고 생각을, 상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도 신앙생활 오래 하다 보면 그런 어떤 도그마 에 빠져서 그런 식의 기독교를, 나름대로 자기네들이 만들어 놓은 기독교를 따로 믿을 수가 있어요. 얼마든지 역사 속에 그런 일이 가능해요. 카톨릭이 그 실수를 했고, 지금 교회가 똑같은 실수를 밟고 있어요.
자! 그런데 이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사울은 어떤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가? [3절]을 보십시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나와 그를 둘러 비추더라.” 여러분! 앞을 보세요. 다마스쿠스 언덕을 향해서 가고 있는데 이제 손에 거의 다 잡혔어요. 그런데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빛이 조용히 조명을 합니다. 이게 뭘까요? 이것은 유대교 신자들에게는 그리 낯선 그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유대교 신자들은 구약성경을 철저히 외우고, 공부하고, 알고 있어요. 구약성경에는 구원과 종말을 암시하는 묵시 문학 형태의 글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글이 [다니엘서, 에스겔서, 이사야서]
이런 책들은 그 글의 형태가 ‘묵시 문학 형태’로 돼 있어요. 묵시 문학이라는 것은 간단해요.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구원과 종말을 설명할 때’ 하나의 그림 언어로 묵시 문학으로 글을 쓰는 방법을 얘기합니다. 거기에 계시적 사건을 얘기할 때, 신의 현현이든지, 주의 사자의 나타남이든지, 선지자의 조명이든지 이런 어떤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하나님의 현현을 설명할 때, 계시적 사건을 말할 때, 진리의 계시를 얘기할 때, “빛이 하늘로부터 임한다.”는 툴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러한 그림은 유대 교 신봉자들에게는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울이 바로 엎드립니다.
성경을 보세요. [4절] “그가 땅에 쓰러져 들으매” 땅에 쓰러졌지요? 여러분! 왜 땅에 엎드려질까요? 성경에 보면 수많은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서게 될 때, 공통적인 태도가 ‘땅에 엎드리는 거’였어요. 왜 엎드리지요? 그냥 존경합니다. 그런 의미로 엎드리는 걸까요? 아닙니다. 땅은 누구의 출처입니까? 땅은 누구의 출처에요? ‘우리 인간의 출처가 땅’이에요. 우린 어디로부터 채취된 존재들이지요? 흙으로부터 빚어진 존재들입니다. 원래 ‘흙’이라는 말은 ‘티끌, 먼지’라는 뜻이에요. 우리 인간이 간단해요. 코에 호흡이 끊어지면 바로 썩어서 흙 됩니다. 얼마 안 걸려요. 그게 우리에요. 그게 인간의 물리적 본질이에요.
그런데 그 물리적 존재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갈 때, 하나님의 기운이 연결될 때 산 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땅에 쓰러져 들으매’는 말은 보통 행동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신적인 엄위하신 존재 앞에 누구냐?” 이것을 온몸으로 설명하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땅에 엎드려집니다. 어쨌건 이 고요히 내리쪼이는 계시의 빛 앞에 그는 신적인 존재 현현을 염두에 두고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엎드립니다. 그리고 그다음 절을 보십시다. 엎드려져 들음에 소리가 있어요. “사울아, 사울아” 자! 한번 따라서 해 보십시다. “사울아, 사울아” 여러분! 성경을 한번 쭉 머리에다가 들었던 것만이라도 스케치를 해보세요.
하나님이 어떤 역사의 물줄기를 틀 때, 어떤 장면을 바꾸게 할 때, 어떤 분기점을 넘어가게 할 때, 중요한 시점마다 하나님의 종들을 불러서 사용하시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두 번 부르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예를 하나 들까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독자 이삭에게 손대지 말아라. 이제야 내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겠다. 그리고 짐승 하나를 준비하셨다가 독자를 대신해서 번제 단에 잡아 희생물로 드리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구약]에서 특별히 ‘굉장히 중요한 암시적 그림’을 안고 있어요.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준비하시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 제단에 제물로 내어놓겠다는 하나님의 확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그 그림은” 그래서 아브람을 두 번 불러요. 거기서 구속의 씨를 심는 거예요. 언약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메시아는 올 것이다.”
한 장면으로 렌즈를 옮겨 볼까요?
야곱,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대국의 총리가 되어 아버지를 지금 초청하고 있어요. 믿겨지지 않아요. 꿈을 꾸는 건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돼요. 근데 여기서 야곱이 머뭇거립니다. 놀라운 일이죠. 이제는 옛날 야곱이 아니에요. 사람의 감정적인, 육적인 소욕대로, 충동대로 움직이는 야곱이 아니에요. 파란만장한 생애의 고난을 겪으면서, 꿈결처럼 아들이 살아 있다한들 거기가 정말 내가 가야 할 땅 일까? 머뭇거리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두 번 불러요. “야곱아, 야곱아, 염려하지 말고 내려가라” 그래서 70명의 가족을 끌고 내려갑니다.
무얼 얘기할까요? 그때까지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체계가 형성되어 있지도 않고, 그럴 수 있는 형편도 안 됐어요. 달랑 70명인데, 그런데 그 대국에다가 이 칠십 명을 심어서 어마어마한 민족을 이루어 내요. 이게 중요한 역사의 분기점마다 하나님이 인물들을 부르시는데 반드시 두 번을 불러요.
400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구를 역사 앞에 불러 세우십니까? 모세!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 모세가 섭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때도 두 번을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국가의 체계를 이루고, 이제 몰락해 갈 때, 사사기 말 시대쯤에, 이 민족을 다시 말씀으로 일으키기 위해서 사무엘을 부를 때 몇 번 부릅니까? “사무엘아, 사무엘아” 그러면 여기 사울은 뭐예요? 이제 이 복음의 유대 땅을 넘어서, 하나님의 계획과 꿈처럼, 땅 끝까지 이방 땅에 외쳐져 가기 위해서 사울이라는 그릇을 택하는 엄숙한 장면이에요. 그래서 두 번 부릅니다. “사울아, 사울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이 두 번의 거듭된 하나님의 소명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 하나님의 소명에 확실성! 그래서 ‘2’라는 숫자는 ‘증거의 수(數)’입니다. 틀림없는 하나님의 소명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긴박성’입니다. 그 소명에 담겨진 메시지 ‘긴박성’ 그만큼 지금 하나님이 그 고통 가득한 세상을 향해서 긴박한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전 우리 삼일교회 청년들이, 젊은이들이, 매일 예배 시간에 말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긴급히 호명하시고, 부르시는 소명 앞에 눈뜨고 일어서는 우리 삼일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다음을 보십시다. “4. 그가 땅에 쓰러져 들으매 한 음성이 있어 그에게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여러분! 놀랍게도 사울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박해했던 적이 있나요?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정확하게 “왜 너 나를 박해하느냐?” 묻습니다. “왜 너 나를 박해하느냐? 지금 사울이 박해하는 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내 몸이 아프다. 왜 너 나를 박해하느냐?”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새로운 경지를 열어야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부패한 한가운데에는 중요한 아픔이 하나 있어요. 너무 지나치게 ‘개체교회 주의’에 빠져 있다는 거예요. 그들만의 리그에 도취 되어 있다는 겁니다. “뭐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되지” 천만에요. 저 시리아 중동지역 폭염 속에 부들, 부들 떨고 있는 저 그리스도인들도 누구의 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60년 넘는 세월 동안 지하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광명의 날만을 기다리는 북녘에 지하의 교회, 그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맞지요? 저 아프리카 이름 모를 어느 나라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원칙적으로 하나요.
이걸 우리는 보통 ‘유니버셜 처치’라고 그래요. 우주적 교회, 이 우주적 교회는 교회가 이 땅의 생긴 이래로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어요. 어느 곳에 있든지, 어느 세대에 있든지 인파와 국경과 종파를 색깔을 넘어서 하나의 교회입니다. 우리 삼일교회가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의 구조를 가지려면 그런 처참한 선교지의 현장마다 그 통증이 우리에게로 가슴 깊숙이 느끼고 들어와야 돼요. 그 아픔이 느껴져야 돼요. 그래야 그 몸이 살아 있는 몸이고, 건강한 몸이 되는 거예요. 그 고통이 무감각하다면 그 몸은 병든 몸입니다. 문제가 생긴 겁니다. 맞지요?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이것이 선교적 제자로서의 삶을 실현해 내는 교회의 건강한 의식구조예요. 왜 나를 박해하느냐? 고통 받고 있는 그 당시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자기가 아프다고 얘기합니다. “너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 똑같은 이치와 똑같은 원리와 똑같은 감각과 똑같은 정신과 똑같은 가치와 똑같은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돼요. “아, 그냥 우리 기회만 잘되면 되지 뭐” 아니에요. 1,800개의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잘 되어야 돼요. 북녘의 지하에 고통 받는 교회들이 속히 광명의 날을 맞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믿습니까? 저 상가의 지하에 햇빛 보지 못하고 예배드리는 그 어수선하고 조그만, 우리 눈에 볼 때는 교회 같지도 않은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믿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때 우리는 역사상 가장 어려운 본문에 봉착을 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5절을 한번 같이 읽어 보십시다. ➤[5절] “5 그가 이르되, [주]여, 누구시나이까?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거늘” 아멘! 자, 여러분! 모든 국내외 신학자들이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애썼던 어려운 본문 중에 하나가, 오늘 여러분들이 읽으신 5절이에요. 그래서 1부, 2부, 3부, 4부 때에도 이 본문을 설명하는 데 거의 다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어요. 성도들은 잘 알아들으리라고 믿습니다.
이 [5절]에 보면 이런 말로 시작이 되죠? “대답하되 주여, 누구십니까?” 자! 여기를 보세요. 그러면 이 “주여 누구십니까?”는 지금 누가 하고 있는 말입니까? 사울! 자! 거기까진 어려움이 없어요. 그런데 사울이 누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까? 문맥적으로 볼 때. 뻔 한 답을 얘기하면 틀릴 확률이 거의 많고, 뭔가 여기 함정이 있을 것 같다. 눈치 빠른 분들은 그런 쪽으로 감을 잡으셨을 거예요. 문맥으로 보면 사울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아! 보세요. 4-5절 읽습니다. ➤“4. 그가 땅에 쓰러져 들으매 한 음성이 있어 그에게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그가 이르되, [주]여, 누구시나이까?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거늘” 문맥으로 보면 예수님하고 사울하고 주고받는 대화처럼 보여요? 그래서 이 부문의 난해하고 어려운 점이 여기 있어요. 그러면 일단 이 본문 두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상식적인 얘기 하나 할게요. 요 순간까지 사울이라는 청년은 유대교 신봉자로서, 예수님을 한 번도 주라고 생각을 가졌거나 말한 적 있나요?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 [주]가 예수님이겠습니까? 문제가? 그러면 예수님에게 ‘주여’라고 한 것이 아니라면 이 주여!는 술 주(酒)자를 얘기 하느냐? 뭘까요? 이제부터 설명을 한 꺼풀 접어서 좀 들으십시오. 방금 전 제가 이런 얘길 드렸어요. 다마스쿠스 도상에 계시와 진리의 비처럼 고요히 내리 쪼였던 이 초자연적인 빛은 유대인들에게 낯익은 풍경이라 그랬습니까, 생소한 풍경이라 그랬습니까? 낯익은 풍경이라고 했어요. 적어도 구약의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것이 무슨 뜻인지 다 알아요. 이것은 묵시 문학에 나타난 형태로써 뭐예요? 신의 계시나 또는 진리의 계시나 주의 특별한 사자에 나타남에 또 다른 하나의 표현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까?
이것을 구약의 대학자요, 능통한 성경학자인 사울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그래서 여기에서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것은 예수님에게 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물었던 질문이에요. 이해가 돼요? 자! 그런데 하나님에게 물었던 질문인데 그 질문에 예수님이 바로 뭐라고 대답을 하냐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까? 그런데 사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안 했어요? 꿈에도 생각을 안 했어요. 사울은 누구한테 물었고 하나님한테 물었고, 대답은 누가 했어요? 예수님이 대답을 했어요.
자~ 이 간격을 이제 오늘 없애는 거예요. 그러자 예수님이 이런 대답을 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바로 이 순간이 사울의 모든 신학과 신앙의 체계가 한꺼번에 붕괴하는 내적인 충격을 받는 현장이에요. 모든 것이 무너져요. 마치 저 굴 끝에서 굴을 파들어 오고, 이쪽 굴 끝에서 굴을 파 들어가다가, 어느 중간지점엔가는 만나겠죠? 뚫어져서 드디어 어느 중간지점에 ‘펑’하고 굴이 뚫어지는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을 몰아내고 저 굴 끝에서 빛 한 줄기가 새로운 공기를 끌어안고, 쏴악~ 들어와요. 굴이 관통되는 순간이에요.
지금 사울은 내적으로 모든 신학과 신앙의 사상이 무너지면서 그런 충격을 받는 순간이에요. ‘이게 뭘까? 아니, 우리가 그토록 언약의 말씀을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올 것이다. 반드시 온다. 확정하고 기다렸던 그 메시아가 우리가 십자가의 저주의 상징으로 매달아 죽였던 그 예수가 이 메시아라니?’ 도저히 이렇게 연결을 할 수가 없었다고요. 그런데 지금 이 다마스쿠스에서 계시의 빛을 통해서 그것이 마치 터널이 뚫어지듯이 신약과 구약이 만나는 관통의 순간이 온 거예요. 이게 얼마나 사울에게 내적인 충격이었고, 그 말씀을 기초로 한 충격이 없겠습니까? 아, 이게 적합한 예는 안 되겠으나 여러분들이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어느 회사의 전문 경영인 CEO 사장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보니까 회장은 오래전에 외국에 나가서 얼굴을 볼 수가 없고 모르겠어요. 한날 허름한 말단 직원 하나가 뭐 이 사람은 이제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하고, 그런 사람이에요. 직원 하나가 들어 오거에요. 그런데 직원이 들어올 때부터 정서적으로 맞질 않아요. 말 잘 안 들어요. 자기 원칙이 있고, 자기 고집이 고 사장 말을 호락, 호락 잘 안 들어요. ‘저 친구가 왜 저러나 저거’ 기다렸는데 태도 변화가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직원들은 이 사람을 좋아해요. “안 되겠다 ‘추석 전에 잘라야 되겠다.” 그래서 마음에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다가 사장실로 불렀어요.
“아무개 그 직원이 오라 그래” 데리고 왔어요. 비서가 “자네, 들어올 때부터 삐닥 하더니 왜 이렇게 말 안 듣나? ”사장이 하라면 하는 거지. 자기 고집을 내세워?“ 생각은 내가 하고, 결정은 내가 하는 거야. 자넨 하기만 하면 돼. 뭐 이렇게 사사건건 이론이 많고, 이유가 많아? 그러니까 이 허름한 친구가 있다가 조용히 그 말을 듣더니, ”사실은 제가 해외에 나가 있던 사장입니다. 회장입니다.” 이랬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게 막장 드라마가 되지요. [시청률 제왕] 개콘 코너에 그런 게 있더군요. “사실은 내가 네 애비다.” 뭐 이러면서 그거보다 더 큰 충격이에요.
회심의 8가지 단계
구약의 그 오시겠다. 약속했던 메시아가 우리가 그토록 박해하던 이 [예수]였다니?” “내가 바로 그 예수다.” 이렇게 된 겁니다. 이거는 사울에 모든 것이 한꺼번에 업사이드 다운되는, 뒤집어 퍼지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설교자로서 유명한 <폴 워셔 목사님>이 ‘회심’ 이라는 책을 썼어요. 그분이 쓴 책에 보니까 회심의 8가지 단계를 앞부분에 설명을 했어요. 우리 오늘 결론 겸 그 부분을 같이 나누고 말씀을 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 진정한 회심은 생각이 변화된다.
‘진정한 회심’이라는 것은 뭐가 변화 돼야 된다? 여기 ’생각‘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사실은 ‘가치관’입니다. 내가 철석같이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믿고 붙들고 있었던 ‘가치관’이 붕괴하는 경험을 해야 돼요. 이게 ‘회심’의 시작이에요. 그래서 ‘회심’이라는 건 뭐냐면, “인정하고 변화된다.” 그 말이에요. 이 두 가지 단어가 합해진 게 사실은 ‘회심’이에요.
성경을 한번 읽어볼까요? ➤[에베소서 4장 17-18]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방인들이 그들의 헛된 생각 속에서 걷는 것 같이 걷지 말라. 18. 그들은 지각이 어두워졌으며 그들 속에 있는 무지함과 그들 마음의 눈먼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
여기에 주목할 단어가 있어요. “그들은 지각(知覺)이 어두워졌으며” 우리는 진리의 빛이 찾아와 계시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지혜가 진리를 볼 수 없는 체계를 갖고 있었다고요. 죽어 있었어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개입해 오신 계시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가 눈이 생기고, 감각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사고에 엄청난 내상을 입고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2. 진정한 회심은 죄를 슬퍼한다.
➤[시편 51편 4절] “4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죄를 짓고 주의 눈앞에서 이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로써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판단하실 때에 깨끗 하리다.” 진정한 회심은 [죄]를 슬퍼한다.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마는 것이 회개가 아니에요. 그 죄에 대해서 슬픔을 가져야 돼요. 이 시를 누가 썼는가 하면 밧세바 사건과 살인을 동시에 저질렀던 다윗이 이 글을 씁니다.
나단의 지적 앞에 무너지는 경험을 해요. 꿈에도 그 주인공이 자기일 줄을 몰랐어요. 그래서 다윗은 온 밤을 지새우고 통곡을 하면서 눈물로 침대를 띄웠다고 그래요. 죄란 진정한 슬픔을 갖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이 무얼 좋아하느냐가 신앙생활에 첫 단계가 아니고, 하나님이 무얼 싫어하느냐? 싫어하는 것을 안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하지 마세요. 아멘! 그게 죄에 대한 슬픔에 중요한 표시입니다.
3. 진정한 회심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다.
➤[요한1서 1장 8-10] “8.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9.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면 우리가 그분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며 또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에서 다 걸려요. 사람들이 [인정] 안 해요. 고백 안 해요. 그건 진정한 회개 아닙니다. 죄를 지었고, 그게 잘못됐다는 것 알았고, 거기에 대해서 깊은 내적으로 충격을 받았다면 반드시 인정해야 돼요. 고백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죄 덩어리인데 다 가 고집이 있어서, 고집이 죄입니다. 여러분! 인정하지 않아요. 그 사소한 부부싸움 해 놓고도 남자들이 알량하게 그 자존심 때문에 “잘못했다”는 말을 그렇게 못해요. 겨우 문자로 “미안해” 그것도 나은 편이지요? 그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죄는 인정하고 고백하는 겁니다.
우리 [8-9절] 읽어요? ➤“8.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9.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자백하면, 인정하면 어떻게 하실 것이요?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죄는 깨닫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 슬픔을 갖는 것이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4. 진정한 회심은 ‘죄에서 돌이킨다.’
돌이키는 거예요.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겁니다. “아, 이거 아니다.” 성경 읽읍시다. ➤[에스겔 14장6절] “6 ¶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회개하고 너희 자신을 돌이켜 너희 우상들을 떠나라. 너희의 모든 가증한 것에서 너희 얼굴을 돌리라.” “마음을 돌리고, 얼굴을 돌려라.” 돌이키는 거예요. 가던 길에서 돌아서요.
5. 진정한 회심은 ‘자기 의와 행위를 부정한다.’
➤[로마서 11장6절]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오늘날 잘못된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이렇게 구원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는 아니겠으나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은 물론 태어날 때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모든 행동의 변화, 삶의 결단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해야 되는 문제입니다.”라고 설교를 합니다. 일면 맞는 부분도 있어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위험합니다. 해보니까 돼요? 우리는 열 번 넘어져서 겨우 하나 깨닫는 게 뭐지요? “난 또 넘어진다.” 이거 자기가 알고 일어나요.
그래서 구원도 하나님의 100% 은혜이어야 되지만, 성화라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총체적인 과정이 누구의 손에 붙들려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거예요. 야곱의 일생을 보지 않습니까? 구원 받고도 그는 계속 자기의 욕심을 떨어내지를 못해요. 하나님이 만들잖아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해서 바다 건너서, “음부에 네가 자리를 펼지라도 내가 너와 함께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게 우리 아버지의 성실하신 사랑이에요. 믿습니까?
6. 진정한 회심은 ‘하나님께로 돌아선다.’
➤[이사야 55장 6-7절] “6.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찾으라. 7.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KJV]
여러분! 돌이키고, 돌아서는 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지요? 돌아서는 것은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먼 이방 땅에 돼지 쥐엄 열매를 우릿간에서 먹으면서 “내가 미쳤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리 아버지 집에는 품꾼도 많은데 나는 죄 받아 마땅해, 싸!” 후회하고 눈물 흘리고 가슴을 쳐요. 그거 회개 아니에요. 회개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놓고 새롭게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진짜 목적이 뭔지 아세요?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고쳐놓는 게 목적이 아니라 집 떠난 아들이 내 집에 돌아와서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는 행복을 보시는 게 아버지의 목적이에요. 아멘!
그래서 여기 ‘돌아 선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귀로의 걸음을 얘기합니다. 주일 날마다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 매일 이런 귀로의 행열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목적이어야 해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은 종말적 시각을 갖고 있어요. 그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세상의 끝은 망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거기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이 부르시기로 작정한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서 아버지 앞에 돌아오게 만들어야 돼요. 그것이 이 땅에 경고의 나팔을 가진 교회가 감당해야 될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주일마다 예배의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순종적 제자의 삶을 통해서 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귀로의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7. 진정한 회심은 ‘복종 한다.’
➤[마태복음 3장10절] “10. 이제 또한 도끼가 나무들의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정말 그 안에 생명의 회심의 씨가 정확하게, 제대로 심어졌다면 만드시 뭐가 나와야 돼요? 열매가 나와야 돼요. 열매가 없다는 것은 씨가 잘못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도 열매가 목적이 아니라 열매로 나무를 알아보겠다고 그랬어요. 바른 회심, 바른 회개는 거기 열매가 바르게 나와야 됩니다. 이런 사람이 있지요? 교회는 꾸준히 다니는데 계속 죄짓고, 그 죄가 반복이 되고, 무감각 해지고, 그 사람은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가 많습니다. 진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슴 밑바닥에 전인적으로 경험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에요.
돌아보셔야 됩니다. ➤“10. 이제 또한 도끼가 나무들의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이 말은 열매 맺어라. 거기에 초점이 있지 않아요. “열매로 네가 진짜 나무인지, 가짜 나무인지 내가 알아보겠다.” 그 뜻이에요. 여러분에게 일어난 구원의 사건, 회심의 사건은 정말입니까? 삶에 열매가 있습니까?
8. 진정한 회심은 ‘회심이 지속적으로 깊어진다.’
➤[이사야 66장 2절] “그 모든 것들을 내 손이 만들었으므로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해 왔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오직 나는 가난하고 통회하는 영을 가진 자, 내 말에 떠는 자를 보살피느니라.”
진짜 구원 받고,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은 그 회심의 열매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계속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개인적으로 이런 [회심]의 역사가,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속지마세요! 숫자가 늘어나는 게 부흥이 아니에요. 숫자를 목적으로 하는 건 부흥이 아니에요. 한 개인의 영혼 한복판에서 정말 모든 인생의 가치가 뒤집어지고, 새로워지는 그것을 우리는 부흥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온 힘을 다해서, 모든 것을 걸 수가 있어요. 믿습니까? 그런 진정한 부흥이 여러분 가슴 속에서부터 지켜지는 기적이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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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