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철의 찬송가 에세이 <35>
제420장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흑인영가 편곡 버리이 해리 택커(1866-1949)
흑인 출신으로 미국의 음악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음악가가 버레이 해리 택커 박사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도주 노예였던 만큼 어려서부터 고생하며 성장할수 밖에 없었다. 소년시절 신문팔이를 했고 가정집의 허드레 일을 하는 사동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그레이트 호수의 여객선 갑판 선원으로도 일했다. 그는 1866년12월2일 펜실베니아주 이리(Erie)에서 태어났다. 이리는 미국의 오대호의 하나인 이리호반의 항만공업도시이다.
타고난 재질로 인해 16세부터 주일이면 돈을 벌기 위해 이리시의 성 바울 대성당 성가대원으로 노래했으며 토요일에는 유대교 회당에서도 노래했다.
닥치는 대로 돈벌기에 나선 그는 1892년 26세때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뉴욕 내셔날 음악학교의 장학금을 받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그가 음악가로서의 일생을 시작하는 기회가 되었다. 2학년 재학중에 대음악가 안톤 드볼작을 만나 그로부터 음악을 배울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드볼작에게 대명곡을 낳게 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는 드볼작에게 흑인영가를 불러 주었다. 드볼작은 그를 만날 때 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려 달라고 했다. 그것은 드볼작으로 하여금 그의 여러 작품에 흑인의 정서를 반영시킬수 있었다. 드볼작은 첵코 출신의 유명음악가이다. 1892년 뉴욕에 창설된 국민음악원의 설립자인 자네트 터버의 초청으로 도미한 그는 3년 동안 그곳 원장으로 재직했다.
그때 아메리카 대륙에서 받은 강한 인상을 교향곡9번 “신세계에서”(1893년)와 현악4중주곡 “아메리카”(1893년) 그리고 가장 인기가 높은 104번 첼로협주곡(1894-5년)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흑인의 민족음악 특성을 담아 넣으면서 고국에 대한 억누를수 없는 향수를 엮어내는데 있다. 까닭없이 향수에 젖고 한이 많은 한국인의 정서에 적합한 때문이었을까. 이들 세작품은 몇년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곡으로 꼽힌바 있다. 이처럼 드볼작의 버레이와의 만남이 명작을 낳을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버레이는 여러해 모교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성 조지 감독파교회 성가대의 바리톤 독창자로 흑인 신분으로 60명의 지원자중에 선발되어 52년간 충실히 봉사할수 있었다. 1925년 부터는 뉴욕 템플 유대교 임마누엘 교회의 독창자로도 일했다. 감독파교회는 감리교회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파생 미국 남부에 분포해 있는 한 교파이다.
버레이는 미국내에서만 활동한 것도 아니다. 유럽에 건너가서도 콘서트 가수로 활약했으며 영국왕 에드워드 7세등 유럽의 여러 왕 앞에서도 노래했다. 그의 레퍼토리는 영어와 히브리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태리어등 매우 다양했다. 에드워드7세는 빅토리아 영국여왕의 장남으로서 제1차대전 전야 긴장의 국제정세 완화에 기여한 주인공이다.
그는 30년 이상 음악출판사의 매우 영향력 있는 음악편집인이었다. 그는 100곡 이상을 작곡 또는 편곡했으며 250편 이상의 성가를 작곡했는데 특히 흑인영가 분야를 주로 다루었다. 흑인영가는 미국에서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던 아프리카 흑인들이 신앙을 통해 위로와 안식을 얻고자 부른 성가이다.
수만리 타국에 사슬에 묶여 끌려와 피부가 검다는 이유 하나로 짐승 처럼 온갖 수모와 학대를 당해야 했던 흑인들의 한을 표현하고 있는 흑인영가는 정상적인 노래라고 하기 보다 하나의 울부짖음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기에 흑인영가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흑인영가는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함으로서 대개 작사 작곡자를 모른다. 그러나 흑인영가 찬송가 420장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는 다행히 편곡자가 분명하다. 이 구전의 흑인영가를 흑인가수이며 작곡자인 버레이 박사가 편곡한 것이다. 흑인들의 고통과 아픔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아시며 위로자 되심을 이 찬송가는 강조하고 있다.
아틀란타 대학은 버레이에게 명예 음악석사를 하버드 대학은 음악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그는 미국의 작곡자 작사자 출판인협회 창립위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