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 머물렀다. 밤낮 없이 두 달 여 간이나 가만히 들어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골방은 점점 작아져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안방 옆 구석진 곳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방이지만 한쪽 벽면 쪽으로 창이 나있어 햇빛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하루쯤 쉬려고 들어갔다. 조용한 방에 혼자 있으니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슬픔이 꼬리를 물고 끌려 나왔다. 골방에 들어가기전에는 이렇게 힘들어 할 줄 미처 몰랐었다. 마냥 차올랐다 스러지는 내 마음을 그냥 바라만 보았다.
삼십여 년 전.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온 집안을 흔들어 놓았다. 아버지가 금방 돌아가셨다고 했다. 입은 옷 그대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오랜 바깥 생활에 많이 지쳐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가실 줄은 몰랐다.
‘그만 돌아오세요. 제발.’
숨이 금방 끊어진 아버지에게 나는 처음으로 부탁을 했다. 이렇게 일찍 갈 것 같으면 차라리 아버지가 다니던 그 길에서 돌아오지나 말지. 목구멍 까지 차올라 오는 말들을 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 아버지에게 하는 말들을 배우지 못해서 가슴이 터지도록 속으로만 삼켰다.
길에서 길을 옮겨 다니면서 하던 장사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였다. 아버지의 얼굴은 명절 때나 되어야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서로 무심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온 가족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내게 다가와 말 붙여볼 기회도 없었다. 내게 아버지란 어머니가 정성 드려 차려놓은 밥상과 겨울이면 이불속에 묻어둔 밥그릇이었다.
크면서 한창 예민할 때는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태어난 사실을 잊어버렸나’ 아주 가끔 깊이 잠든 나를 깨워서 아버지의 저녁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그러면 나는 그것마저도 좋아서 숟가락을 들고 졸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는, 결혼을 해서 십년을 다른 곳에서 살다가 친정과 시집이 있는 안동으로 이사를 와 있었다. 오일장도 다니지 않고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어머니는 조금씩 하소연도 하고 목소리가 커져갔다. 아직도 성격은 팔팔 하여 어머니의 말소리를 막으려고 숟가락으로 밥상을 ‘탁’ 하고 내리쳤다. 나는 그냥 무심히 쳐다만 볼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소한 모습에 매우 놀랐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가까이서 오래 바라보기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일장을 다니지 않으니 무료한 듯 조금만 기운이 빠져도 몇 날을 집안에만 있었다. 그리고 반찬이 입에 맞지 않으면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며칠을 아랫목에 가만 드러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밥 한 그릇하고 곰탕국물을 한 그릇 다 비웠다. 그러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그 자리에 누워서 입으로 불을 불듯 ‘푸푸’ 하면서 단잠을 자고 산책을 나갔다. 며칠 그렇게 누워 있다가 또 일어날 줄 알았다. 하루, 이틀, 이번에는 훌훌 털고 일어나는 시간이 더 늦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텃밭에서 가꾼 부추를 다듬어서 자전거에 실어 우리 집에 갖다 주었다. 어머니가 보내서 온 심부름이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많이 변해 있었다. 집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현관에 놓고 그냥 돌아갔다. 아버지도 나도 처음 나누는 정이라 어색했다. 잠깐 나를 바라보면서 미소만 지웠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도 하고 여린 나를 걱정하는 듯 했다. 나는 부추를 냉장고에 넣다가 말고 문을 열고 뛰어 내려갔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아버지 우리 집에 들어 오셔요’ 나는 처음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우리 집에서 가까운 안동의료원이었다. 나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할 장을 보러 다녔다. 빈소에는 사촌오빠, 언니들이 지키고 나는 계속 밖으로만 나돌았다. 염하는 것을 보러 오라고 할 때도 가지 않았다. 왠지 모를 억울함과 그리고 불현듯 드는 무서움을 이겨 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한창 커가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모든 일에 자신감을 키우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 없고 다소곳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불평과 불만만이 그득하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커갔다. 내가 먼저 손 내밀 줄도 몰랐고, 상처 받을 가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힘든 일이 생기면 내 스스로 해결할 생각을 안 하고 골방에 들어앉아 버렸다.
결혼을 하니 자상하신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와 시누이 네 명에게 얼마나 다정한지 나는 처음에는 놀랐다. 한 번도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지를 못하고 컸으니까. 남편도 시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서 나는 당혹스런 마음이 들었다. 이것이 어떤 색깔의 감정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하고 십년이 지난 그때는 벌써 시집의 정서에 많이 젖어갔다. 아이들도 잘 커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편의 아이들에게 보내는 관심과 사랑은 거의 매일 나를 놀라게 했다. 남편은 속으로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며 겉으로는 말이 별로 없으면서 늘 온화했다. 내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하지 않았으며 네 자매 속에서 커서 익살스럽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 남편은 내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삼십 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골방에 들어앉았다. 이번에는 여기서 다시 나가지 못할 것 같다. 이번의 골방은 아주 작아서 그 크기를 가늠 할 길이 없었다. 골방은 내 마음속에 있으니까.
내개 골방은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숨구멍도 없는 골방에서 이제는 나올 길이 없었다. 나의 결혼생활의 숨구멍은 시어머니였다. 이제는 내가 힘들어 하는 것을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며칠 전 늦은 오후였다. 시어머니가 갑자기 상태가 안 좋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남편에게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고, 올해로 구십 세살인 시어머니는 이 고비만 잘 넘기면 건강해서 백 살은 넘긴다고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임종을 지키는 것도 한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저녁 아홉시쯤 전화가 와서 남편이 ‘가셨다’고 했다.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다.
열두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임종을 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안동으로 출발했다. 며칠 동안 춥던 한파도 끝나고, 포근한 날씨에 하늘은 맑았다. 조용한 고속도로에는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 따라왔다. 별이 이렇게 많이 있었네. 어딘가 여행을 하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안동에 도착하니 새벽 세 시였다.
가족끼리 치르는 장례식은 조용했다. ‘에~ 에~’ 시어머니의 앓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 했다. 앓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으니 그 소리가 얼마나 컸었는지 서울로 모시고 와서 몇 년을 들어서 환청을 느꼈다. ‘어머니 앓는 소리 좀 그만 내세요.’ 하면 내가 또 앓는 소리를 냈구나 하면서 웃었다. 힘이 빠지시고 부터는 앓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때는 또 그렇게 듣기 싫던 소리가 안 들리니 내 마음이 불안 했다.
장례식 마지막 날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이른 시간에 가족들이 모두 밥을 먹고 있었다. 무엇이 바빠서 이렇게 일찍 밥을 먹고 있지, 이시간이 지나면 시어머니는 결혼하고 처음 살았던 곳 고향 오름실로 돌아가는데. 나는 불현 듯 심통이 났다. ‘집사 권삼조’로 쓰여 있는 위패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어미야!~ 맏며느리가 자~ 알~ 한다, 교회는 다녀가지고 집안을 망하게 하고’
장례식장이 떠나가도록 쩌렁 쩌렁 소리 질러 버렸다. 나의 며느리인 복덩이는 놀라서 눈이 동그라졌다. 형님은 일어나서 여기서 왜 이러냐고 야단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친 사람 쳐다보듯 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몇 십년동안 들어온 말이었다. 막내 시누이가 전도사가 되고 시어머니가 교회를 나가면서 부터 그 말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었다. 보다 못한 시아버지는 종교의 자유를 말했다.
영정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시어머니는 잘했다 그러시는 듯 웃고 계셨다. 이상하게 마음이 너무 허전했다. 무엇 때문에 그 긴 시간을 힘들게 살았는지. 시어머니를 고향 오름실 시아버지 곁에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도 때도 없이 머물렀던 골방은 점점 작아져 사라지고 어디에도 없었다. 무심히 바라만 보았던 골방은 내 마음속에 들어앉았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바뀐 것이 아니었다. 사소하고 작은 변화들이 모여 서서히 진행되었다.
마음에 들어온 골방을 나는 천천히 그림 그리듯 그려야겠다. 나만의 골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