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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6일 아산 UBF 주일메시지(사도행전 제 7 강)
예수님을 따라 순교한 스데반
요절 / 사도행전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처음 제가 우리 모임에 와서 교회 내부를 둘러보다가 게시판에 밀알 요회라는 푯말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를 초대하신 분에게 저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분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여기 계속 와도 괜찮겠구나” 생각하였고, 이 생각이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은 초대 교회에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스데반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의 순교는 기독교 박해의 신호탄이자 예수님의 복음이 온 세계로 퍼져 나가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따라 우리 신앙의 본질이신 예수님께 주목하고 생명의 열매맺는 밀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6장 8절을 보십시오. 초대교회에 집사로 세워진 일곱 사람 중 스데반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교회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가는 곳마다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은혜가 충만했다”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넘쳤다는 뜻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기쁨이 됩니다. 김헌기 선교사가 와서 환하게 웃으며 아름다운 플룻 연주를 해주니 큰 감동과 기쁨이 있지 않았습니까? 또한 성령이 주시는 권능을 입을 때, 사람이 늘 해오던대로 뻔한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 지방사립대라는 한계에 갇혀 겨우겨우 먹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 미국도 가고 일본에도 가서 어려운 학문을 정복할 뿐 아니라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루시는 은혜와 권능의 역사 뒤에는 이를 방해받는 일들도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하였습니다. 여기서 자유민들은 BC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유대가 정복당하면서 노예가 되었다가 풀려나 자유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지만 헬라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습니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가정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배우고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자기 조상들의 터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하였습니다. 자유민이 되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스데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배경을 가진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스데반과 같이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수의 유대인들은 율법 중심,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고집하였습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는 줄로 착각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과의 충돌로 이어졌는데 그들은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을 당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하였습니까?
11절에서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였습니다.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 말하게 하였습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공회에 세웠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이 이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며 고발하였습니다. 그가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자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성전과 율법입니다. 이를 모독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될 만큼 큰 죄였습니다. 이 문제로 고발당하여 판결권을 가진 사람들 앞에 섰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성경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기록합니다. 스데반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억울함이나 분노도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편안하였고 그의 얼굴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에게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7장 1절을 보십시오. 대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하며 본격적으로 스데반을 심문하였습니다. 2절부터 53절까지는 이에 대한 스데반의 변론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은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하였습니다. 자기를 거짓증거로 몰아세우는 유대인들이지만 스데반은 그들을 여전히 형제들이요 어른들로 여겼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그에게는 동족들을 향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이 열렬히 사모하는 율법과 성전보다 위에 계신 하나님, 그의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전해주고자 힘썼습니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있다가 그 아버지 데라가 죽으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발붙일 만큼의 작은 땅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율법도 성전도 없던 시대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한사람의 믿음이 이스라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또 그 후손이 다른 땅 이집트에서 나그네가 되어 종살이하며 400년 동안 고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이집트를 심판하시고 그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이 가나안 땅으로 나와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아들 이삭을 낳아 팔일 만에 언약의 징표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이스라엘 열두 조상을 낳았습니다. 그들에게 할례가 이어져 내려왔지만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징표로 할례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이 율법보다 먼저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세우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임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시작인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조상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요셉을 시기하였고 애굽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스데반은 요셉과 유대인의 조상을 구분해서 말합니다. 혈통과 율법에 집착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을 구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조상들이 아니라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요셉을 건져내사 이집트를 다스리는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전 세계가 기근에 처했을 때 요셉을 쓰셔서 이집트와 온 세계와 가나안의 자기 형제들과 그 후손들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노예로 팔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요셉은 자기 힘으로는 이 지독한 불행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요셉을 누가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능력주시고 이집트 총리가 되게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요셉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구원과 축복은 율법과 행위를 통해 사람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에 메이지 말고 약속의 말씀을 믿는 자가 됩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요셉을 거쳐 모세에게로 이어졌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게 번성하였습니다. 이집트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조가 세워졌습니다. 새 왕은 번성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견제하기위해 이스라엘 백성 중 태어나는 남자아이는 모두 나일 강에 던져 죽게하였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살리사 이집트 공주의 양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 이집트의 왕자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신 동족인 이스라엘 편에 서서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동족들에게 버림받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세를 가시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서 만나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노예된 데에서 구원하는 일에 모세를 부르시고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조상,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을 40년 광야생활동안 먹이시고 입히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헷족속과 아모리족속과 가나안 족속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택한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유대 조상들은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며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겠다 하였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이방백성들의 우상들을 받들어 섬기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의 모습이 그들의 조상이 하던 것과 같습니다. 율법과 성전을 우상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주로 보내신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44-49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처럼 여기는 성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전의 원형을 보여주셨고,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의 그 양식을 따라 증거의 장막을 만들었습니다. 이 성막은 진짜가 아니라 모형일 뿐입니다. 다윗왕 때까지 성막의 형태로 있다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은 손으로 지은 성전을 우상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구별된 곳입니다. 성전은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는지, 하나님께 나오는 절차와 통로를 명시한 것입니다. 성전의 구조와 모양 자체가 하나님께로 나오는 길이며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통하여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구든지 마음껏 하나님께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거룩한 주의 자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성전이십니다. 진정한 성전이 오셨으므로 옛 성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은 건물로써 존재할 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건물인 성전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은 광야 길에서 금송아지를 부어서 만들고 그 앞에서 제사드리며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51에서 53절을 보십시오. 유대 조상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배척하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여 행하였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자기백성들에게 와서 장차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 전했지만 오히려 자기 백성들에게 고난 받고 죽임 당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조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여전히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우상으로 여깁니다. 구원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핍박하고 멸시합니다. 이들은 그 조상과 같이 교만하여 항상 성령을 거스를 뿐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유대 조상들의 죄를 열거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드러내었지만 이들은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마음을 찔리게하는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 있는 스데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55과 56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이를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보았고 이를 증거합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않았습니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순교당하는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무엇입니까?
59과 6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자기의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하며 예수님처럼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세상 법정에 서 있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 발 디디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이미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였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이날 현장에는 훗날 사도 바울로 변화되는 사울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고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히 알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서,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구원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사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도 스데반과 같이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악속을 믿고 예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이 사실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깁니다.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시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연애에도 실패하여 절망가운데 누워 있었습니다. 38년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지내던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나 자신의 죄와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누워있던 저를 일으켰습니다. 밝은 미래를 꿈꾸게 되었고 학과공부를 해나갈 힘도 생겼습니다. 성적은 수직 상승하였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인줄 알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소감을 쓰고 예배를 드리고 사람을 초청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나를 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성전에 집착한 유대인들처럼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잘 하였습니다. 사람을 살리겠다 하면서 내가 살 궁리가 앞섰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에는 참된 평안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천안에 와서도 어떻게 내가 좀 살아볼까가 먼저였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사람을 돕는 것은 이벤트처럼 하였습니다. 그럴 때 참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열심히 하는 것, 행위에 메이는 것의 한계인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내가 누구를 믿고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와 있는가 생각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저는 이 말씀을 믿고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전하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이 일은 나의 노력이나 계획이나 의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내 모든 것, 나의 생명까지도 내어 드릴 때 저의 삶 가운데 예수님께서 역사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을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 제가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맡기신 한 영혼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결단합니다. 천가지 만가지를 주어도 가장 아끼는 한 가지를 주지 않으면 진짜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실험 데이터가 있습니다. 아직 세상사람 아무도 모르고 연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데이터를 주께서 보내신 학생들과 공유하고 그들이 주저자가 되어 제가 지금까지 냈던 것보다 더 좋은 저널에 논문을 쓸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보내신 이들이 실력있는 연구자가 되고 빼어난 교수가 되어서 미국에 진출하고 유럽도 가고 전세계를 누빌 비전을 봅니다. 이를 위해서 나를 완전히 내어드려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주고 싶은 한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사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나의 삶이 거름이 되어 예수님이 증거되고 한 생명이 살아나는데 쓰임받는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제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만이 세세토록 영광받으실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나의 노력과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과 구원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우리 삶을 통해 지금 이 곳에서 놀라운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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