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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22권
5. 변업품⑤
5.5. 특히 10업도(業道)에 대하여[2]
7) 업도의 명의(名義)
이와 같이 10업도의 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업도라고 이름하게 된 것인지 이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 중의 세 가지는 오로지 [업의] 도(道)이며
일곱 가지는 업이고, 도이기 때문[에 업도]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10업도 중의 뒤의 세 가지(탐ㆍ진ㆍ사견)는 오로지 도(道)로서, 업의 길[道]이 되기 때문에 ‘업도(karma-patha)’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54) 즉 그것과 상응하는 사(思)를 설하여 ‘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사업은] 그것(탐 등의 의악행)이 일어나기[轉] 때문에 일어나며, 그것이 작용[行]하기 때문에 작용하니, 그것의 세력대로 조작(造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일곱 가지는 바로 업이니, 신업과 어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업의 길이 되기도 하니, 그것들은 바로 ‘사’가 노니는 곳이기 때문이다.55) 다시 말해 능히 신ㆍ어업을 등기(等起)시키는 ‘사’는 신ㆍ어업에 의탁하고 그것을 경계로 삼아 일어나기 때문에 [뒤의 일곱 가지 업도는] 업이면서 업의 길로서 업도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10업도)서의 ‘업도’라고 하는 말은 ‘업의 길’이라는 뜻과 ‘업이면서 업의 길’이라는 뜻을 모두 나타내니, 비록 동일한 종류[의 업]은 아닐지라도 한 가지를 다른 명칭으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 세간의 『기론(記論)』 중에서도 다 같이 잘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56) 혹은 업의 길이 되기 때문에 ‘업도’라고 이름한 것(뒤의 세 가지)이고, 역시 업이면서 역시 길이 되기 때문에 ‘업도’라고 이름한 것(앞의 일곱 가지)이어서 갖추어 말하자면 ‘업의 길[業道]’이며, ‘업이면서 길[業道]’이라고 해야 하지만, 한 가지를 다른 명칭으로 삼아 다만 업도라고 말한 것일 뿐이다.57)
그리고 선업도의 뜻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58)
[이것(근본업도)의] 가행과 후기도 마땅히 업도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사(思)는 그것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서도 역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치상으로는 [가행과 후기도] 역시 마땅히 업도라고 말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은 [가행은] 근본을 위해, [후기는] 근본에 의해 비로소 일어나기 때문이며, 앞에서 ‘거친 품류[麤品]를 업도라고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59) 또한 근본이 감소하고 증가함으로 말미암아 내외의 현상[物]도 감소하게 되고 증가하게 되지만,60) 두 가지의 상태(가행과 후기)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업도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8) 단선근(斷善根)과 업도
일체의 악업도는 모두 선법이 현기(現起)하는 것과는 상위한다. 그렇다면 온갖 선근은 어떠한 업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인가? 선근이 끊어지고[斷善根] 선근이 이어지는 것[續善根]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오로지 사견만이 선근을 끊으니
끊어지는 것은 욕계의 생득선(生得善)으로
인과를 부정하고 일체의 혹을 연으로 하는 사견에 의해
점진적으로 끊어지며, 두 가지(선근과 율의)는 함께 버려진다.
[선근이 끊어지는 곳은] 인취의 세 주로서, 남ㆍ여와
견행자(見行者)이고, 끊어짐의 본질은 비득(非得)이다.
선근이 이어지는 것은 의심과 ‘존재한다’는 견해 때문으로
단박에 현기하는데, 역죄(逆罪)를 지은 이는 제외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악업도 가운데 오로지 상품(上品)의 원만한 사견(즉 極上의 惡邪見)만이 능히 선근을 끊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본론(本論) 중에서
“무엇을 일컬어 온갖 상품의 불선근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온갖 불선근으로서 능히 선근을 끊는 것이다.
혹은 이욕(離欲)할 때 최초로 제거되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61)
불선근이 능히 사견을 인기하였기 때문이다. 즉 사견의 원인[事]이 그 같은 불선근에 있다고 헤아렸기 때문으로,62) 이를테면 불이 마을을 태웠을지라도 그 불은 도적들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도적들이 마을을 태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63)
그렇다면 이것(상품의 사견)에 의해 어떠한 선근이 끊어지는 것인가?
이를테면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된] 욕계의 생득(生得)의 선근이 끊어지니, 색ㆍ무색계의 선근은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설족론』에서 “오로지 [이 같은 사견에 의해서만] 3계의 선근을 끊게 된다”고 말한 것은, 상계의 선근을 획득하는 일에서 더욱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64) 이 같은 [욕계의] 상속신은 더 이상 그것(상계의 선근)의 그릇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상품의 사견은]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된] 생득의 선근만을 끊는 것인가?
가행의 선근에서는 이전에 이미 물러났기 때문이다.65)
이같이 선근을 끊게 되는 것은 어떠한 원인, 어떠한 상태에서인가?
이를테면 어떤 한 생류가 먼저 지극히 포악한 의요(意樂,목적의식)의 수면(隨眠)을 성취한 후 간악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것이 더욱 증가하여 왕성해짐에 따라 선근이 감소하고 불선근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 후 그가 원인을 부정하고 결과를 부정하는 사견을 일으킬 때 일체의 선근이 모두 은몰(隱沒)하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상속신이 선근을 떠나 머물게 되니,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상태에서 모든 선근을 끊게 되는 것이다.
사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자계연(自界緣)과 타계연(他界緣)이 바로 그것이다. 혹은 유루연(有漏緣)과 무루연(無漏緣)이 바로 그것이다.66) 이 중의 무엇이 능히 선근을 끊는 것인가?
마땅히 그 모두가 능히 선근을 끊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67)
마치 견도(見道)가 견소단(見所斷)의 번뇌를 끊듯이, 9품의 선근도 [일 찰나의 사견에 의해] 단박에 끊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말하자면 점진적으로 끊어진다. 즉 9품의 사견과 9품의 선근은 순(順)ㆍ역(逆)으로 서로 마주하며 점차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으로, 마치 수도(修道)가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끊는 것과 같다.68) 그리고 이미 ‘수도가 수소단의 번뇌를 끊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치상 [9품의 선근을 점진적으로 끊는] 중간에 [그 같은 끊어짐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거나 [중단하여]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갖 율의의 과보는 가행의 선심으로부터 생겨나는 경우도 있고, [태어나면서 획득된] 생득의 선심으로부터 생겨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것의 원인(선심)을 버림에 따라 바로 그것(율의)도 버리게 된다.69)
어떠한 처소에 있어야 능히 선근을 끊을 수 있는 것인가?
인취(人趣)의 세 주(洲)로서, 악취에 있을 때에는 끊어지지 않으니, [악취 중에서는] 염오혜(慧)와 불염오혜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며, 천취에서도 역시 끊어지지 않으니, [천취 중에서는] 선악의 온갖 업의 과보가 바로 나타나기 때문이다.70) 그리고 인취의 세 주라는 말은 북구로주를 제외한 세 곳으로, 그곳(북구로주)에는 극악한 아세야(阿世耶,즉 意樂)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근을 끊게 되는 것은 어떠한 종류의 몸에 근거하여서인가?
오로지 남자와 여자의 몸에 근거하여서만 [선근을 끊게 되니], 의지가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행자(行者)가 능히 선근을 끊는 것인가?
오로지 견행자(見行者)만이 선근을 끊으며, 애행자(愛行者)는 끊지 않으니,71) 모든 견행자는 악한 아세야가 지극히 견고하며 깊기[堅深] 때문이며, 모든 애행자는 악한 아세야가 지극히 가벼이 움직이기[躁動] 때문이다. 이 같은 이치에 따라 선체(扇搋) 등이 [선근을 끊는 것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유형(애행자와 선체 등)의 인간은 악취의 경우와 동일하기 때문[에 능히 선근을 끊지 못하는 것]이다.72)
이같이 ‘선근이 끊어졌다’고 하는 사실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선근이 끊어졌다’는 것은 비득(非得)을 본질로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극중한 사견이 현전할 때, 능히 선근을 성취하게 하는 득(得)이 멸하고, 불성취의 득이 상속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선근이 끊어진 것’의 본질은 바로 비득으로서, 비득의 실유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성립시켰었다.73)
① 속선근(續善根)에 대하여
선근이 이미 끊어져 버렸다면, 무엇에 의해 다시 이어지게 되는 것인가?
의심과 ‘존재한다’는 견해에 의해 이어진다.74) 즉 선근을 잇게 되는 것은 원인의 힘(동류인의 힘, 즉 과거세에 익힌 내적 因力)에 의해서나, 혹은 선우(善友)에 의한 것으로,
어떤 이는 ‘[선ㆍ악행에 의해] 초래되는 후세는 과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여 인과에 대해 홀연히 다시 의심을 낳기도 하며,
어떤 이는 ‘후세는 결정코 존재한다. 이전의 주장은 바로 사견이다’라고 하여 인과에 대해 홀연히 정견을 낳기도 한다.
바로 이때 선근을 성취하는 득(得)이 다시 생기하고, 불성취의 득이 멸하니, 이를 일컬어 속선근(續善根), 즉 ‘선근을 잇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9품의 선근은 단박에 이어지지만[頓續] [후시에] 점차로 생기[漸起]하니, 마치 병을 단박에 제거하고서 기력이 점차로 증대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현재의 몸[現身] 중에서 능히 선근을 이을 수 있는 것인가, 이을 수 없는 것인가?
역시 능히 이을 수 있지만, 역죄(逆罪)를 지은 이는 제외된다.75) 그런데 유여사는 “단견(斷見)이 증가한 자 역시 능히 현세에 선근을 이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같은 두 부류의 인간(역죄를 지은 이와 단견이 증가한 이)에 대해 경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그들은 결정코 현법에서 능히 선근을 이을 수가 없으니, 그 같은 이들은 결정코 장차 지옥으로부터 몰(沒)하려고 하거나, 혹은 그곳에서 장차 생을 받으려고 할 때 능히 선근을 이을 수 있고, 그 밖의 상태에서는 이을 수 없기 때문이다.”76)
여기서 ‘장차 지옥에 태어나려고 할 때’란 이를테면 중유를 말하며, ‘몰하려고 하는 때’란 이를테면 그가 장차 지옥에서 죽으려고 하는 때를 말한다. 따라서 만약 그가 인력(因力, 내적 원인의 힘)에 의해 선근을 끊었다면 장차 [지옥에서] 죽으려고 할 때에 선근을 이을 것이며, 만약 그가 연력(緣力, 외적 조건의 힘)에 의해 선근을 끊었다면 장차 지옥에 태어나려고 할 때에 선근을 이을 것으로,77) 자신의 힘과 타인의 힘에 의해 선근을 끊었을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의요(意樂)는 허물어졌지만 가행이 허물어지지 않은 단선근자라면, 이러한 이는 능히 현세에 선근을 이을 수 있다. 그러나 의요도 허물어지고 가행도 역시 허물어진 단선근자라면, 요컨대 소의신이 허물어진 뒤에 비로소 선근을 잇게 된다.78) 그리고 견(見)과 계(戒)가 서로 대응하는 관계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79)
그러나 겁(劫)이 장차 허물어지려고 할 때와 겁이 처음으로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단선근자가 존재하지 않으니, 상속이 윤택하기 때문이다.80) 또한 묘행(妙行)을 행하는 자도 선근을 끊지 않으니, 마음이 견고할뿐더러 그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선근을 끊는 자와 사정취(邪定趣)에 떨어지는 자의 관계에 대해 4구(句)의 차별이 있다. 즉 선근을 끊고 사견을 지니고 승가를 파괴하고 망어를 행하는 것은 결정코 무간의 이숙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81)
9) 업도와 사(思)심소의 구전(俱轉)관계
뜻에 따라 선근을 끊는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다시 근본업도에 대해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설한 선ㆍ악의 두 가지 업도 중에서 몇 가지가 함께 생겨나 사(思)와 더불어 구전(俱轉,즉 찰나등기)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사(思)와 구전하는 업도의 수는
불선의 경우 한 가지에서 여덟 가지이며
선의 경우 전체적으로 설하면 열 가지에 이르지만
개별적으로 설하면 한 가지ㆍ여덟 가지ㆍ다섯 가지는 제외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사(思)와 구전(俱轉)하는 온갖 업도 중에서, 바야흐로 불선업도는 한 가지로부터 오로지 여덟 가지에 이르기까지 ‘사’와 구전한다.
한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그 밖의 다른 악업도를 떠나 탐 등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현기(現起)할 때와, 혹은 이전에 가행에 의해 지어진 악업 중 어느 하나가 탐 등과는 다른 그 밖의 염오심이나 불염오심이 현재전할 때 구경에 이르는 경우를 말한다.82)
두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욕사행을 행하거나, 혹은 스스로 살생ㆍ투도ㆍ잡예어를 행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보내어 그(살생ㆍ투도ㆍ잡예어) 중의 한 가지를 성취하는 상태에서 탐ㆍ진ㆍ사견 중의 하나가 현전할 때, 혹은 이전에 가행에 의해 지어진 악업 중의 두 가지가 탐 등과는 다른 그 밖의 염오심이나 불염오심이 현재전할 때 구경에 이르는 경우를 말한다.
세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일찍이 가행에 의해 지어진 악업 중의 두 가지가 탐 등이 일어날 때 구경에 이르는 경우와, 혹은 한 명의 사자를 보내어 살생 등의 한 가지 악업도를 짓게 하고, 스스로는 사음 등을 행하여 동시에 구경에 이르는 경우와, 혹은 스스로 두 가지 [악업]을 짓는 경우를 말하니,83) [이에 대해]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은 일찍이 가행에 의해 지어진 악업 중의 세 가지가 탐 등과는 다른 그 밖의 염오심이나 불염오심이 현재전할 때 구경에 이르거나, 혹은 탐 등과는 다른 그 밖의 염오심을 일으킬 때 스스로는 이간어와 허광어를 포섭하는 어업 등을 성취하면서 다른 이로 하여금 한 가지의 업 등을 짓게 하는 경우를 말하니, [이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네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다른 이를 괴멸시키고자 하여 허광어 혹은 추악어를 설할 때를 말하니, 이때 한 가지의 의(意)업도와 세 가지의 어(語)업도가 함께 일어난다.84)
혹은 두 명의 사자를 보내어 [살생 등의 두 가지 악업도를 짓게 하고] 스스로는 사음 등을 행하거나, 혹은 일찍이 가행에 의해 지어진 악업 중의 세 가지가 탐 등이 현기할 때 구경에 이르는 경우를 말하니, 이와 같은 등의 종류를 예(例)에 의거하여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ㆍ여섯 가지ㆍ일곱 가지의 업도가 구전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85)
여덟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일찍이 가행으로서 여섯 가지 악업(욕사행을 제외한 신ㆍ어업)을 짓고(다시 말해 일찍이 여섯 명의 사자를 보내 여섯 가지 악업을 짓게 하고), 스스로는 욕사행을 행하여 동시에 구경에 이르는 경우를 말하니,86) 그 밖의 다른 예로써도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뒤의 세 가지 업도는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아홉 가지 업도 내지 열 가지 업도가 구전(俱轉)하는 일은 없다.87)
이와 같이 ‘사’와 구전하는 불선업도의 수가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사(思)’와 구전하는 선업도의 수는 전체적으로 모두 열거하면 열 가지에 이르지만, 개별적으로 드러난 것[顯相]에 근거할 경우 한가지ㆍ여덟 가지ㆍ다섯 가지가 구전하는 것은 제외된다.88)
두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선한 5식(識)과, 아울러 무색정에 근거하여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가 현재전할 때를 말하는데, 이때 산심(散心)의 일곱 가지 선업도(세 가지 신업과 네 가지 어업)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 같은 5식과 상응하는 혜는 ‘견(見)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며, 무색정에는 다 같이 율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89)
세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정견과 상응하는 의식이 현재전하는 때로서, 일곱 가지의 선한 색업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90)
네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악ㆍ무기심이 현전하는 상태에서 근주ㆍ근사ㆍ근책율의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91)
여섯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선한 5식이 현재전할 때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계(戒,근주ㆍ근사ㆍ근책율의)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92)
일곱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수심전의 색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선한 의식이 정견과 상응하여 현재전할 때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계(戒)를 획득하는 경우, 혹은 악ㆍ무기심이 현전할 때 필추 계(戒)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93)
아홉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선한 5식이 [현재전할 때]와, 무색정에 근거하여 진지와 무생지가 현재전할 때 필추 계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 혹은 정려율의에 포섭되는 진지ㆍ무생지와 상응하는 의식이 현재전할 때를 말한다.
열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수심전의 색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선한 의식이 정견과 상응하여 현재전할 때 필추계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하니, 모든 이가 가행의 선심으로도 산심(散心)의 율의를 받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 같은 일반적인 논설[通說]을 짓게 된 것이다.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체의 수심전의 색이 존재하고, 또한 정견과 상응하는 마음이 바로 일어나는 상태를 말한다.94)
개별적으로 드러난 상[顯相], 즉 율의에 근거하여 논의할 경우 제외되는 것은 이와 같지만, 감추어진 상[隱相, 비율의비불율의]과 드러난 상 모두에 의거하여 논의할 경우 제외되는 것이 없다. 이를테면 율의만이 아니라면 한 가지ㆍ여덟 가지ㆍ다섯 가지의 [선]업도(이는 율의업도가 아니라 처중의 선업도)도 함께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악ㆍ무기심이 현재전할 때 한 가지 [악업도] 갈래[支]의 원리(遠離)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섯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수심전의 색이 없이 선한 의식이 정견과 상응하여 현재전할 때 두 가지 [악업도] 갈래의 원리를 획득하는 등의 경우를 말한다. 여덟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바로 그와 같은 의식이 현재전할 때 다섯 가지 [악업도] 갈래의 원리를 획득하는 등의 경우를 말한다.95)
10) 3계 5취에서의 업도의 성취와 현행
선ㆍ악의 업도는 어떠한 계(界)ㆍ취(趣)의 처소에서 오로지 몇 가지가 성취되며, 또한 역시 몇 가지가 두루 현행하는 것인가?96)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선의 경우, 지옥 중의
추악ㆍ잡예ㆍ진에는 두 가지 모두와 통하고
탐과 사견은 성취될 뿐이며
북구로주에서는 뒤의 세 가지를 성취하고
잡예어는 현행과 성취에 통하며
그 밖의 욕계에서의 열 가지는 두 가지 모두와 통한다.
선의 경우, 모든 처소에 존재하는
뒤의 세 가지는 현행과 성취에 통하고
무색계와 무상천에서의
앞의 일곱 가지 업도는 오로지 성취될 뿐이고
그 밖의 처소의 그것은 성취와 현행에 통하지만
지옥과 북구로주는 제외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불선의 10업도 가운데, 나락가(那落迦,지옥)에서의 세 가지 업도는 두 종류와 모두 통하니, 이를테면 추악어와 잡예어와 진에의 세 종류는 모두 다 현행할 수 있고 성취될 수 있다. 즉 거기에는 괴로움이 핍박하여 서로를 꾸짖기 때문에 추악어가 존재하는 것이며, 원한에 사무쳐 비탄하고 절규하기 때문에 잡예어가 존재하는 것이며, 몸과 마음이 거칠게 강하고 사나워 조화되지 않아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기 때문에 진에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탐과 사견은 성취될 뿐 현행하지 않으니, 거기에는 애착할 만한 경계가 없기 때문이며, 업의 과보를 바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서는 서로를 해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다만 업이 다함으로 말미암아 죽기 때문에 살생의 업도도 존재하지 않으며,
재물이나 여인을 갖는 일도 없기 때문에 투도와 사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별도로 추구할 것이 없어 속이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에 허광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허광어는 다른 이의 생각을 전도시키는 것인데, 그곳에서의 생각은 항상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허광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마음은 항상 서로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에, 혹은 [별도로 추구할 것이 없어 이간질하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간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북구로주(北俱盧洲)에서 탐ㆍ진ㆍ사견은 모두 결정코 성취되지만 현행하지 않으니, 그곳에서는 나의 것[我所]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며, 몸과 마음이 유연하여 다른 이를 괴롭히고 해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악의 의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잡예어만이 현행하고 성취될 뿐이니, 그곳의 유정은 때에 따라 염오심에서 노래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수명의 양(길이)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살생이 존재하지 않으며,97) 재물이나 여인을 소유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불여취와 욕사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별도로 추구할 것이 없어 다른 이를] 속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혹은 [속이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에 허광어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항상 화목하기 때문에 이간어도 없고, 말이 깨끗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추악어도 없다.
나아가 앞에서 언급한 지옥과 북구로주를 제외한 그 밖의 욕계 중에서의 10악업도는 두 가지와 모두 통하니, 이를테면 욕계 천취와 아귀와 방생, 그리고 인취의 세 주에서는 10악업도가 모두 현행하고 성취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차별이 있으니, 이를테면 천취와 아귀와 방생에는 앞의 일곱 가지 업도(세 가지 신업과 네 가지 어업) 중 오로지 처중(處中)에 포섭되는 업도만이 존재할 뿐이며, 불율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취의 세 주 중에는 두 가지 종류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불선업도에 대해 이미 다 논설하였다.
선업도 중에서 무탐 등의 세 가지 업도는 3계 5취 중에서 두 가지 종류와 모두 통하니, 말하자면 성취되고 현행한다. 그러나 신ㆍ어업의 일곱 가지 업도는, 무색계와 무상천에서는 다만 성취될 수 있을 뿐 필시 현행하는 것이 아니다. 즉 성자의 유정으로서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과거ㆍ미래의 무루율의를 성취하며, 무상천의 유정은 반드시 과거ㆍ미래의 제4정려의 정려율의를 성취한다.98) 그런데 성자는 어떤 정려지에 근거하여 무루의 시라(尸羅)를 일찍이 일으키고 일찍이 소멸하였더라도 무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과거의 그것을 성취하며, 만약 미래세의 경우라면 6지(地)의 [소의신에 근거한 무루율의를] 모두 성취하게 된다.99)
그리고 [본송에서] ‘두 처소(무색계와 무상천)에서는 [신ㆍ어업의 일곱 가지 업도가] 현기(現起,현행)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100) 무색계에는 오로지 [색온을 제외한] 4온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무상천의 유정에게는 선정의 마음[定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율의는 반드시 대종과 선정의 마음에 근거하여야 하는데, 두 처소에는 그것들이 서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101) [신ㆍ어업의 일곱 가지 업도가] 현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 밖의 계(界)ㆍ취(趣)의 처소 중 지옥과 북구로주를 제외한 곳에서는 7선업도가 모두 현행하고 성취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약간의 차별이 있으니, 이를테면 아귀와 방생에는 율의를 떠나 처중(處中)의 업도만이 존재하고, 만약 색계의 경우라면 오로지 율의만이 존재하며, 인취의 세 주와 욕계천에는 두 가지 종류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아비달마장현종론 제23권
11) 업도에 의해 획득되는 과보
선ㆍ악업도에 의해 획득되는 결과는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 모두는 능히 이숙과와
등류과와 증상과를 초래하니
이는 다른 이를 괴롭게 하고
목숨을 끊고 위엄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먼저 10악업도가 각기 세 가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에 대해 분별하리라.
그 세 가지란 무엇인가?
이숙과(異熟果)와 등류과(等流果)와 증상과(增上果)의 차별을 말한다. 즉 열 가지 종류의 악업도를 혹은 익히고, 혹은 닦고, 혹은 많이 짓게 되면,1) 그 같은 힘으로 말미암아 날락가에 태어나니, 이것은 바로 이숙과이다.
또한 거기로부터 나온 다음 이 세간으로 와서 태어날지라도 인간의 동분 중에서 등류과를 받게 되는데, 이를테면 살생을 행한 자는 수명의 길이가 단축되고, 불여취를 행한 자는 자재와 물자가 모자라 궁핍해지고, 욕사행을 행한 자는 아내가 정숙하지 않게 되고, 허광어를 행한 자는 많은 비방에 시달리게 되고, 이간어를 행한 자는 친구와의 화목함이 깨어지게 되고, 추악어를 행한 자는 항상 좋지 못한 소리[惡聲]를 듣게 되고, 잡예어를 행한 자는 말에 위엄이 있거나 엄숙하지 않게 되고, 탐욕자는 탐욕이 치성하고, 진에자는 미워함이 증가하고, 사견자는 어리석음[癡]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살생업도와] 가까운[近] 증상과를 역시 등류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2)
이 같은 열 가지 악업도에 의해 초래되는 증상과란, 이를테면 외적 소유물로서 생활에 필요한 온갖 도구는 살생으로 말미암아 그 윤택함이 감소되고, 불여취로 말미암아 많은 서리와 우박을 만나게 되어 농사가 황폐하고 과실이 희소해지며, 욕사행으로 말미암아 온갖 진애(塵埃)가 많아진다. 허광어로 말미암아 온갖 악취(惡臭)의 더러움이 많아지고, 이간어로 말미암아 사는 곳이 험난해지며,3) 추악어로 말미암아 만지기 싫은 것[惡觸]이 많아질뿐더러 밭에는 가시나 자갈과 염분이 많아지며, 잡예어로 말미암아 시절ㆍ기후에 이변이 생겨난다. 그리고 탐욕으로 말미암아 과실이 작아지며, 진에로 말미암아 과실이 몹시 맵게 되며, 사견으로 말미암아 과실이 적게 달리거나 혹은 달리지 않게 되니, 이것이 바로 악업도의 증상과의 차별이다.
한 번의 살생업도가 지옥의 과보(즉 이숙과)를 초래하고 나서, 다시 [인취(人趣)에서의] 수명의 단축(즉 등류과)과 외적으로 나쁜 과보(즉 생활자구에 윤택함이 감소하는 증상과)를 초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4)
유여사는 말하기를,
“바로 한 번의 살생업도에 의해 먼저 [지옥의] 이숙과를 받고, 다음으로 [살생업도와] 가까운 증상과(즉 등류과)를, 마지막으로 [살생업도와] 먼 증상과를 받기 때문에 세 가지 과보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치상 실로 살생할 때, 죽임을 당하는 이로 하여금 괴로움을 받게 하고, 목숨이 끊어지게 하며, 위광(威光)을 상실하게 한다.5) 즉 다른 이로 하여금 괴로움을 받게 하였기 때문에 지옥에 태어나고, 다른 이의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인취 중에서 수명이 단축되는 것으로, 전자는 가행의 과보이며, 후자는 바로 근본의 과보이지만, 근본과 근분(近分)을 다 같이 살생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다른 이의 위광을 허물어뜨림으로 말미암아 좋지 못한 외적 자구(資具)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의] 살생업도에 의해 세 종류의 과보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밖의 악업도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치대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 선업도가 초래하는 세 가지 결과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에 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살생을 떠나는 것을 혹은 익히고, 혹은 닦고, 혹은 많이 짓게 되면, 이 같은 힘으로 말미암아 하늘 가운데 태어나는 이숙의 과보를 받게 된다. 또한 거기로부터 몰하고서 인취 중에 태어나 지극히 긴 목숨이라는 [이살생계(離殺生戒)와] 가까운 증상과를 받으며, 다시 이것(많이 짓게 되는 것, 즉 후기)에 의해 대위광(大威光)이라는 [이살생계와] 먼 증상과가 존재하여 외적인 온갖 자구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선업도의 세 가지 과보에 대해서도 악업도의 경우와 반대로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12) 방론―사명(邪命)을 사어(邪語)ㆍ사업(邪業)과는 별도로 설한 이유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8사지(邪支) 중의 색업은 세 가지로 분별되니,
이를테면 사어(邪語)ㆍ사업(邪業)ㆍ사명(邪命)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다.6)
사어와 사업을 떠나 사명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그것을 떠나 사명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별도로 설하게 된 이유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탐으로부터 생겨난 신ㆍ어업을
‘사명’이라 하니,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생활자구에 대한 탐에서 생겨났다는 주장은
경설과 모순되기 때문에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진에와 우치에 의해 생겨난 어(語)와 신(身)의 두 가지 업은 순서대로 오로지 사어(邪語)와 사업(邪業)이라고 이름할 뿐이지만, 탐으로부터 생겨난 신ㆍ어의 두 가지 업은 사어ㆍ사업이라고 이름할뿐더러 또한 역시 사명(邪命)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즉 그것은 제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두 가지 업과는 다른 별도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탐은 미세하여 능히 온갖 유정의 마음을 앗아갈뿐더러 지극히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업을] 금하고 방호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것을 [앞의] 두 가지에 비해 제거하기가 지극히 어렵다고 한 것으로, 재가자들은 수많은 길상(吉祥) 등에 대해 그릇되게 집착하기 때문에 사견(즉 우치)을 끊기 어렵지만, 출가자들은 사명을 제거하기가 어려우니, [세간에] 존재하는 생활의 방편[命緣]은 모두 다른 이들에게 소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정명(正命)을 은근하고 엄중히 닦게 하기 위해 앞의 것(즉 사어ㆍ사업)을 떠나 별도의 한 가지로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주장하기를,
“생활[命]의 자구를 대상으로 하는 탐욕에 의해 생겨난 신ㆍ어의 두 업만을 바야흐로 사명(邪命)이라고 이름할 뿐, 그 밖의 탐에 의해 생겨난 업은 사명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희락(戱樂)을 위해 노래하고 춤추는 등의 일은 생활을 자조(資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경설에 위배되는 것으로, 이치는 결정코 그렇지가 않다. 즉 『계온경(戒蘊經)』 중에서 코끼리 싸움을 구경하는 일 따위에 대해서도 세존께서는 역시 사명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으니, 그것은 외적 대상[外塵]을 그릇되게 향수하여 부질없이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7)
그리고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은 이와 반대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온갖 업도 중에서는 거칠고 미세함에 따라 신업을 먼저 설하고 어업을 뒤에 설한 것으로,
그래서 계경 중에서도
“찾아 살피고[尋伺] 나서 말을 발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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