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한국전쟁 때 극비 유물피란작전을 아십니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2.07.11ㅣ주간경향 1485호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25일이었습니다. 북한군의 공세에 낙동강 전선까지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국립박물관 경주분관(현 국립경주박물관)에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 대령(1914~2001)이 찾아옵니다.
“경주 분관 소장 유물을 소개(疏開·분산 이동)하라는 대통령의 긴급 지령으로 왔습니다.”
북한군이 이미 국립박물관 서울본관은 물론 개성·부여·공주분관까지 접수했거든요. 남은 곳은 경주분관뿐이었습니다. 박물관 측은 즉시 유물 선별작업에 들어갔습니다.
1950년 7월 25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 대령이 찾아와 “경주분관 소장 유물들을 소개(疏開), 즉 분산 이동시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전했다. 한국전쟁 당시 해외(미국) 피란유물로 선정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국보급 유물들. 금관총 금관과 허리띠 등 139점이 낙점되었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미국으로 피란 간 국보급 유물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비롯한 금관총 출토품(1921) 등 국보급 유물 총 139점이 낙점됐습니다.
선택된 유물들은 대구 한국은행으로 이송됐습니다. 당시 대구에는 한국은행 소장 금괴가 피란하고 있었는데요. 이 두가지 보물(문화유산+금괴)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로 긴급 공수됩니다.
미국 피란 유물의 소식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4월 무렵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피란길에 오른 유물 등을 포함해 한국문화유산의 ‘미국전시’가 추진된 겁니다. 마침내 1957~1958년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하며 열린 최초의 해외전시(<한국국보전>)가 열리고요. 그런 뒤 미국 피란 유물 139점은 다른 전시품과 함께 9년(1959) 만에 귀환합니다.
그럼 국립박물관 서울본관의 사정은 어땠을까요. 당시 초대 박물관장이던 김재원 박사 등 박물관 직원들은 전원 잔류하고 있다가 북한군을 맞이했답니다. 6월 29일쯤 북한 내각 직속인 ‘조선 물질문화 유물조사보존위원회’ 소속인 김용태가 국립박물관을 장악했습니다.
목숨을 건 지연작전
3개월 천하였습니다. 전세는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으로 역전됩니다. 다급해진 북한 측은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유물 그리고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소장품 등을 모두 포장하라고 지시합니다. 무엇보다 “국보급 유물을 선별해 시 외곽으로 분산하라”고 지시했는데요.
이때부터 유물을 지키겠다는 박물관 직원들의 암묵적인 지연작전이 펼쳐집니다. 이들은 “종묘가 가장 안전한 장소다. 그 안에 방공 지하실을 구축해 특급 유물들을 보관하자”고 주장합니다. 지하실을 구축할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습니다.
도자기를 포장하면서 “아차! 크기를 재지 않았다”라고 다시 풀었다가 다시 싸는 일은 기본이었고요. “그림은 습기가 들면 큰일이다”, “불상은 머리 부분이 약하다”, “유물을 넣을 궤짝의 판자를 구해야 한다, 목수를 불러야 한다, 못을 사와야 한다”는 등의 갖가지 핑계를 댔습니다.
결국 9월 24일 미군의 포격과 공습에 놀란 북한 측 보존위원회 요원들이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유물을 지켜낸 박물관 직원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답니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만인 1950년 7월 25일 국보급 유물의 미국 피란 계획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뱅크 오브 아메리카’로 건너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소장유물들. 1921년 조사된 금관총 출토유물과 1942년 경주 황복사터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금제여래좌상과 금제여래입상 등 국보 유물이 선택됐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복궁에 터진 6발의 포탄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북한군이 도주한 바로 그날(24일) 연희고지 능선(안산과 연희동 104고지 사이)을 점령한 아군이 도심탈환을 위해 화력을 집중합니다. 1963년 국립박물관이 작성한 문건(‘첩보조사지시보고’)은 “1950년 9월 24일 경복궁 경내에 6발 이상의 폭탄이 공중에서 투하됐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포격(혹은 공습)으로 경복궁 경내에 있던 지광국사 현묘탑(국보)이 무려 1만2000여편으로 조각났고요.
각종 유물이 보관돼 있던 만춘전은 직격탄을 맞아 괴멸됐습니다. 활자와 각종 무기를 보관하던 만춘전 회랑도 대파됐습니다.
또 도자기와 나무공예품을 보관하던 사정전(편전)과 각종 귀중품과 발굴품이 있던 사정전 회랑, 발굴품과 접수품을 넣어뒀던 자경전(대비전)과 신창고 및 본관 창고 등도 크게 부서졌습니다. 그렇게 파괴된 유물 정리 작업은 휴전(1953년 7월) 후 10년 이상 계속됐답니다. 최종 집계된 ‘전쟁으로 사라진 국립박물관 소장품’은 7109점에 달합니다.(‘첩보조사지시보고’)
기막힌 일이 있습니다. 국보급 핵심유물을 시 외곽으로 분산하라는 북한 측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로 옮긴 박물관원들의 판단이 ‘신의 한수’가 됐다는 겁니다. 덕수궁 석조전 역시 피격했지만 미술관 지하창고는 멀쩡했던 겁니다. 만약 서봉총·금령총 금관과 2구의 국보 반가사유상 등 같은 국보 유물을 옮기지 않았다면 어찌 됐겠습니까. 모골이 송연하죠.
어느 미국인의 귀띔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문화유산은 10월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또다시 고비를 맞게 됩니다. 11월 말이 되자 김재원 관장은 주한 미국대사관의 부산 공보원장을 맡고 있던 유진 크네즈(1916~2010)에게서 “박물관 소장품들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김 관장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 장관(1895~1985)을 찾아가 “유물의 부산 피란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마침내 대통령의 재가를 얻게 되는데요. 이 유물수송은 정식공문이 아니라 문교부 장관이 박물관장에게 보내는 영문 편지 형식으로 승인됩니다. 차관도 몰랐는데요. 정식공문이 문교부 관리들을 통해 내려가면 어찌 되겠습니까.
정부 차원에서 박물관 유물을 몽땅 피란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시민들이 또 한 번 충격과 공포에 빠지겠죠.
그렇게 유물의 피란 계획을 세웠지만 큰 난관이 봉착하게 되죠. 유물을 무엇으로 수송한단 말입니까.
발을 동동 구르던 김 관장은 중국군의 개입 사실을 알려준 크네즈 미 공보원장을 찾았습니다.
미군의 공습을 받아 1만2000여 편으로 산산조각 난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오른쪽은 복원된 모습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파고다맨’의 선의
크네즈야말로 해방 후 한국 문화유산의 조사와 보존, 수호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크네즈는 해방 후 미군정청의 교화국장(역사 문화유산 담당)으로 근무한 미군 대위였는데요. 교화국장 시절 해방 후 한국인의 손으로 처음 조사한 호우총 발굴을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미군정청의 본부가 있는 도쿄(東京) 맥아더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냈고요. 발굴비용까지 확보해주었답니다. 덕분에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卯年 國岡上 廣開土地好太王 壺?十)’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그릇을 발굴했습니다.
경주 신라무덤에서 고구려 정복왕이었던 광개토대왕의 유물이 발견된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크네즈가 1946년 2월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을 지나가다가 탑신의 윗부분 3층이 해체돼 땅 위에 방치돼 있던 탑(원각사 10층 석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가 일본 반출을 위해 뜯었다가 무위에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죠. 크네즈는 곧바로 미 공병대를 투입, 원래대로 복원해놓았는데요. 그는 “복원한 이 탑을 우호의 의미로 한국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크네즈에게 ‘파고다맨’이라는 애칭이 붙었습니다.
부산행 빈 열차를 구하라!
이런 인물이었기에 김재원 관장이 다시 한 번 손을 내민 겁니다.
크네즈는 퇴역 후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담당직원을 거쳐 부산의 미 문화공보원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돕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만약 미국대사관 인사가 한국유물의 피란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서울이 공산군에게 재함락될 것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셈이 되겠죠.
크네즈는 망설인 끝에 김 관장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만약 다시 공산 치하에 들어간다면 더는 유물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고, 박물관 직원들의 지연작전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운송수단도 해결합니다. 군용열차가 서울에 군수품을 실어나른 뒤 부산까지 빈 차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주목한 겁니다. 크네즈는 담당 미군 장교에게 부산행 열차편을 요청했습니다. 또 미군 수송부를 설득해 덕수궁미술관~서울역 사이를 오가며 소장품을 옮길 트럭도 마련했습니다. 크네즈는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서울 시내의 검문검색을 해결해줬습니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이 유물들을 따로 포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유물들이 적 치하에서 북한의 명령을 받고 포장해놓은 채 보관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려준 이는 주한 미공보원장인 유진 크네즈(왼쪽)였다. 크네즈는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에게 “아무래도 박물관 소장품을 피란시키는 게 좋겠다”고 귀띔해준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4일간의 극비 유물수송작전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50년 12월 7일부터 서울역에서 부산행 극비 유물수송작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졌습니다.
국립박물관 소장품 83상자와 덕수궁미술관 소장품 155상자, 그리고 서울대도서관 소장 <승정원일기> 3045책 등 규장각 도서가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유물을 실은 열차는 10일 부산에 도착했는데요.
이 과정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중요 임무를 수행하는 다른 열차에 수시로 길을 양보해야 했고, 공산군의 공격이 염려될 때는 몇시간씩 멈춰서곤 했습니다. 이때 크네즈가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크네즈는 모든 검문소마다 전화를 걸어 유물열차의 통과를 알림으로써 안전이동을 확인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직접 군용기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와 유물의 무사 도착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답니다. 유물은 일단 부산 미국공보원(현 부산근대역사관 청사)의 창고에 임시보관했고요. 이후 부산 광복동의 경남도청 관재국 건물로 무사히 옮겼답니다.
“유물 1만8883점, 무사히 도착!”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아직 남아 있는 중요유물이 더 있었는데요. 바로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6~1948)가 중앙아시아에서 수집·약탈한 360여건 1500여점의 유물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오타니 컬렉션’이라 하지만 ‘오타니 약탈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 중앙아시아 유물의 핵심은 60여점에 달하는 벽화였는데요. 1차 수송 때는 가져올 엄두도 내지 못했죠. 수백에서 1000년 이상 흙벽 위에 그린 그림이잖아요. 트럭 및 열차 수송 중 충격을 받는다면 파손될 위험이 농후했죠.
김재원 관장의 뇌리에는 두고 온 중앙아시아 유물들의 잔상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국립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이 1950년 10월 5일 김재원 관장 명의로 경무대 경찰서장에게 보낸 ‘박물관 소장 진열품 수호 보관에 관한 문건’. 북한 치하에서 박물관 요원들이 “박물관 유물을 모두 포장하라” “중요유물은 외곽으로 소개하라”는 북한 물질문화보존연구위원회의 지시를 갖가지 이유로 지연시킨 사연을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 관장은 결국 박물관 직원인 최순우(1916~1984·훗날 국립중앙박물관장)와 덕수궁미술관장인 이규필 등을 서울로 보냈습니다. 두 사람은 1951년 1·14 후퇴 후에도 박물관에 남아 있던 수위 문억석과 함께 4주에 걸쳐 벽화를 뜯어 포장했습니다.
크네즈는 이때의 유물수송에도 간여했는데요. 서울에 있던 동료인 찰스 먼스키 대령(1897~1985)에게 “유물 포장과 수송을 맡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답니다. 덕분에 공산군의 서울 재점령 위험에 처한 그 급박한 시기에도 미군 트럭 3대가 제공됐습니다.
마침내 4월 25일 잘 포장된 중앙아시아 유물 등이 화물열차를 통해 부산에 도착하는데요. 이런 극비 유물수송작전을 통해 서울의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에 보관돼 있던 430상자분 1만8883점이 무사히 피란하게 된 겁니다.
“미국 침략자들이 한국유물을 감쪽같이 약탈했다”
얼마 후 동독 동베를린의 영화관에서 방영된 구소련 측 뉴스는 경복궁 내 국립박물관 진열실의 텅 빈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국의 침략자들이 한국의 국보 유물을 송두리째 약탈했다”고 맹비난했습니다. 그만큼 유물수송작전이 감쪽같고 완벽했다는 얘기죠.
김재원 관장은 훗날 “내 일생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일이 있다면 우리 직원들과 함께 동산 문화재 거의 전부를 전쟁의 와중에서 무사히 보관할 수 있었다는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포격과 폭격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박물관원들은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유물을 포장했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트럭에 열차에 실었습니다.
뭐 그분들은 한국인이라 그렇다 칩시다. 미국인 크네즈는 또 어떻습니까.
“유물수송에 문제가 생기면 심각한 징계 조치를 당할 판이었지만 비밀리에 도와주기로 했다…. 비행기로 부산에 가서 유물이 무사히 도착한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남의 나라 일인데, 제집 일인 양 처음부터 끝까지 처리한 뒤 확인작업까지 마치고 안도했답니다. 세상에 이런 외국인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