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사무엘하 제7강
말씀 : 사무엘하 15:1-17:29절
요절 : 사무엘하 16:12절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사무엘하 13장부터 19장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윗과 압살롬의 이야기입니다. ‘권력은 아들과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왕좌를 두고 칼을 겨누는 장면은 사무엘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선왕조만 따져봐도,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냈고 인조는 소현세자를 독살했고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였습니다. 다윗의 권력다툼이 그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통해 다툼을 해석하느냐 사람만 보느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압살롬의 반역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압살롬은 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암논이 사라진 지금, 왕자 서열1위는 압살롬입니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왕좌를 물려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왜 굳이 반란을 일으킨 것일까! 아버지 다윗이 너무 건강하여 100세까지 왕좌에 앉아있을 것 같아 조급해진 것일까! 아니면 자기를 패싱하고 아래로 내려갈 것으로 의심했던 것일까! 아무튼 아버지는 살인자를 용서하고 아들로 받아주었는데, 아들은 아버지 심장에 칼을 겨눕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탁월할지라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15:2절을 보십시오. 압살롬은 예루살렘 성문 곁에 서서 왕의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영접합니다. 왕의 재판을 받으러 예루살렘까지 왔다는 것은 정말 심각하고 정말 다툼이 치열한 송사임에 틀림없습니다. 압살롬은 그들에게 ‘다윗왕은 너같은 사람의 송사에는 관심이 없다’며 불평을 심습니다.(3) 대신 내가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여 뜨겁게 껴안아줍니다.(4,5) 일국의 왕자가 성문에 서서 자기들을 환영해주고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니, 당연히 그들은 열렬한 ‘압사모’가 되었을 것입니다.(6) 그렇게 4년 동안 이스라엘 곳곳에 수많은 압사모들을 만들었고, 그들은 압살롬 지지 여론을 주도했습니다.
때가 되자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갑니다.(7-9) 헤브론은 다윗이 유다지파의 왕으로 추대되었을 때 수도로 삼은 곳입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을 통일한 후에는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당연히 헤브론 사람들의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을 무시했다’, 헤브론 홀대론, 지역차별론이 설득력을 얻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원망의 냄새가 피어오르는 그곳을 반역의 시발점으로 삼았습니다.(10) 그때 왕국의 고위 관료 200명을 대동하고 헤브론을 방문했는데, 그들 대부분 압살롬의 반역을 눈치채지 못하고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입니다.(11) 자기도 모르게 얼떨결에 반역의 열차에 올라탔고, 그렇게 올라탄 반역의 열차에서 발을 빼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다음에는 최고의 전략가 아히도벨을 영입합니다.(12) 압살롬의 쿠데타는 ‘서울의 봄’처럼 주도면밀하고 과감했습니다. 압살롬은 반역의 총성을 울린 그 순간부터 파죽지세로 다윗의 왕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전령이 와서 급보를 전합니다. “반역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백성이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다윗은 천혜의 요새 예루살렘의 지형적 유리함만으로는 반란군을 대항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고위관료와 백성들가운데 압살롬 편에 선 자들이 많으니, 예루살렘에서 안팎으로 협공을 당하면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이에 결심하고 명을 내립니다. “일어나 도망하자”(14)
왕이 궁을 비우고 도망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자식에게 쫓겨 궁을 비우는 것은 정말 치욕적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특이한 점은 가족들을 다 데려가면서도 후궁 열 명을 남겨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후궁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왕궁을 지키게 한 것입니까! 후궁을 거느리는 것은 왕권의 상징입니다. 후궁을 남겨 둔 것은 왕위를 남겨 두었음을 상징합니다. 절대로 왕위를 빼앗길 수 없다는 마음으로 피난길을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잃으면 잃으리라’, 하나님의 주권에 온전히 맡기고 피난길을 시작한 것입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 가드에 망명했을 때부터 함께 했던 용사 600명이 변함없이 다윗을 호위했습니다.(17,18)
19-37절에서는 다윗편에 선 대표적인 3사람이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분류해보면, 15장에서는 다윗을 따르는 3사람, 16장에는 다윗을 따르지 않는 3사람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다윗편에서 선 세 사람은 누구입니까! 첫 번째는 블레셋 가드에서 망명 온 잇대였습니다.(19-23) 다윗은 ‘당신은 망명객이니 새로운 왕이 건들지 않을 것이다. 괜히 나를 따라 정처없는 피난길을 갈 필요가 없다’며 말렸습니다. 외국인 신분이니까 ‘굿이나 보며 떡이자 먹자, 이기는 쪽이 우리 편’이라는 심정으로 조용히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잇대는 말합니다. 21절입니다.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이방인 블레셋 사람인대도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은혜를 알고 의지를 지킵니다. 이스라엘 관리들과 백성들은 압살롬의 꼬임에 넘어가 변절했는데, 이방인 잇대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22,23)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다윗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사독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들이었습니다.(24-29) 그들은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는 언약궤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아닙니다. 압살롬 통치 아래에서도 언약궤는 안전합니다. 언약궤를 메고 따라 나선 것은 다윗에게 유리한 명분을 안겨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편이다’, 그러나 다윗은 도로 메어가라고 명합니다. 언약궤를 명분 싸움의 도구로 이용하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자기에게 맞추어 이용하기보다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맞추고자 결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국의 중심이며, 다윗을 세울 수도 있고 폐할 수도 있는 분이심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셋째는 후새입니다.(30-37) 30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머리를 가리며 맨발로 울며 피난길을 떠나자, 함께 가는 백성들도 다윗을 따라 머리를 가리며 울며 갑니다. 정말 가슴이 찡하도록 슬픈 장면입니다. 누가 다윗의 고통을 알아줄까요! 어느 때보다도 친구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두 친구, 아히도벨과 후새가 대조됩니다. 다윗의 친구 아히도벨은 다윗을 죽이려는 반란군 편으로 가버렸습니다. 다윗을 잘 아는 친구이기에 몇 배의 고통으로 다윗에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반면 친구 후새는 다윗의 고난에 마음으로 동참합니다. 그는 옷을 찢으며 다윗을 맞으러 옵니다. 다윗의 스파이 역할을 하기 위해 기꺼이 변절자의 오명을 쓰며 예루살렘에 남습니다. 들키면 죽고 들키지 않으면 변절자로 남는 것입니다. 진짜 친구입니다.
바람이 불면 알곡은 남고 쭉정이는 날라간다고 했습니다. 고난의 시간이 불어 닥치니 누가 다윗의 진정한 동역자이며, 누가 그렇지 아니한가를 드러냅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을 때에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달려들던 사람들이 권력을 잃고 나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권력의 힘이 사람을 모이게 한 것이었는데, 사람을 보고 모인 것처럼 스스로도 속고 세상도 속는 것입니다. 밤이 와야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듯이, 고난은 사람의 참모습과 가치를 새롭게 드러내고 발견하게 합니다. 그런 발견을 할 수 있다면, 그에게 닥친 고난은 새로운 축복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15장은 다윗 편에 선 사람들을 기록했다면, 16장은 다윗의 위기를 파고드는 3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시바입니다. 16장1절을 보십시오.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두 마리의 나귀에 떡과 건포도와 포도주를 잔뜩 싣고 다윗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피난길에 제일 급한 것이 식량입니다. 그것을 들고 왔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2) 그런데 므비보셋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시바가 거짓 보고합니다.(3) “저희 주인은 다윗의 나라가 끝나고 사울 왕조가 다시 부활할 것이라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오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다윗은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돌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4) 경솔한 행동이었습니다. 조금만 차분히 사건을 바라보았다면, 시바의 보고에서 의문점을 찾았을 것입니다. 평소 므비보셋과 어울리지 않은 언행입니다. 더군다나 므비보셋에게 돌아갈 정치적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바의 말만 믿고 결정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을 불러 대질신문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서 1장19절 말씀처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하는데, 환난에 쫓기다보니 간교한 자의 꼼수를 분별할 여유를 잃고 말았습니다.
둘째는 시므이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그는 시바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윗을 향해 사나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너는 지금 그 핏값을 치루는 것이다.”(7,8) 한번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산비탈을 따라 계속 따라오면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고 먼지를 날렸습니다.(13) 정말 악의적인 저주입니다. 다윗이 환난을 견디게 하는 근원적인 힘,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려는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너, 하나님으로부터 전부 용서받은 줄 알았지? 아니야 이제부터 죄값을 치루는거야!! 그런데 죽을 때까지 못치룰거야” 환난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찾아오는 사탄의 고소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9) ‘아무리 피난길이 급하더라도 시므이만큼은 죽이자’, 아비새가 오더를 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단칼에 거절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셨다는 시므이의 말을 인정합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의미로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10절 말씀의 핵심은 저주로 다가올 만큼 뼈아픈 사건인 것은 맞는데, 그 안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11) 압살롬 탓, 아히도벨 탓, 무지한 백성들 탓으로 책임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또한 시므이의 입을 막아 고통을 줄이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친자식 압살롬도 아버지의 사랑을 믿지 못해 칼을 들고 달려드는 판인데, 태생적으로 라이벌 관계가 있는 베냐민 시므이가 신이 나서 저주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11)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라배리 선교사는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모욕을 당할 때에 이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크게 보아야 모욕을 당하는 시간속에서도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마땅히 들어야 할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시므이의 저주는 다윗에게 원통한 일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두 번이나 참았으며 오랜 시간 광야에서 떠돌았습니다. 사울을 죽인 것, 또한 다윗이 아니라 블레셋 군대입니다. 사울 가문의 몰락이 다윗 때문이 아니라 사울의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시므이가 사울 가문의 피를 다윗의 책임으로 돌리며 저주한 것처럼, 압살롬의 반역을 다윗의 책임으로 돌리는 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압살롬이 괜히 반역했겠어? 다윗이 오죽 했으면 그리했을까!” 압살롬 편에 선 자들은 진리처럼 받아들였겠지만, 다윗에게는 원통한 해석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살인자를 아들로 받아주고 왕자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는 아버지가 빨리 받아주어서, 끝까지 훈련하지 않아 압살롬을 망쳤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압살롬을 빨리 받아주지 않아 쓴뿌리를 키워 망쳤다고 합니다. 반역의 본질은 압살롬의 불신과 탐욕, 그것을 부추기는 자들의 욕망인데, 모든 책임을 다윗에게 돌리며 저주합니다.
다윗이 원통함을 감정적으로 풀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므이의 욕설에 뒤따라오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원통하게 저주받는 너의 고통을 내가 알고 있다.” 하나님은 원통하게 저주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 또한 십자가에서 그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 분이 죄인중의 죄인으로 몰려 조롱과 멸시를 받고 채찍에 맞았습니다. ‘신성모독했다. 무능하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원통한 오명을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죽기까지 참았습니다. 원통함을 뒤집어쓴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3일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온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새 길을 열었습니다. 다윗이 거기까지 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통함을 감찰하시며 선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은 확실합니다.
내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쓴맛 단맛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즐거움도 주고 원통함도 줍니다. 마음을 많이 주고 사랑을 많이 쏟아 부은 대상이기에 더 큰 원통함을 되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선거철이 다가오니 진영간의 다툼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상대진영을 향해 저주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같은 진영 안에서도 공천에 탈락한 자들이 동지들을 향해 살벌한 저주를 쏟아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진영논리에 따라 혹은 자기 유익을 좇아 얼마든지 말을 바꾸고 되돌려차기에 익숙합니다. 반면 뼈아픈 소리에는 귀를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통만 생각한다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나 홀로 사는 것이 안전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갈등과 비난을 어둡게만 볼 것이 아닙니다. 갈등과 충돌이 있기에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의 시간이 없다면 더 단단해질 수 없고 더 새롭게 업그레이드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이 본문에 대해 이런 설교를 달았습니다. “속초에서 활어를 차에 싣고 서울까지 오면 차멀미 때문에 대부분의 물고기들이 죽거나 힘을 쓰지 못해요. 그런데 그 물고기들 속에 오징어 한두 마리를 넣어 두면 오징어가 물고기들을 잡어 먹으려고 괴롭혀요. 물고기들은 오징어를 피하려고 정신을 바짝 차려요. 서울까지 왔는데도 물고기들은 싱싱해요. 오징어가 있어서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징어 때문에 싱싱한 활어로 살 수 있어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들을 ‘오징어’로 생각한다면 싱싱한 삶을 살 수 있어요” 어떤 목자는 “나를 깨어있도록 보낸 하나님의 사자”로 본다고 했습니다.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 기도가 간절해지고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겸손히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한 점을 겁도 없이 정확히 지적해주기에 자기 발견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지 말고 뼈아픈 이야기에도 귀를 열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의 저주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그런 비밀을 가진 자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는 아히도벨입니다. 아히도벨은 신공지능으로 알려질 정도로 탁월한 전략가였습니다.(23) 그는 압살롬에게 아버지의 후궁들과 백주에 동침하게 만듭니다.(20-22)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마디로 ‘미움전략’입니다. 다윗과 압살롬의 화해할 길이 사라졌으니, 압살롬 편에 선 사람들은 절박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살 길은 죽기 살기로 싸워 다윗을 죽이고 압살롬을 세우는 것이다.’(21) 한편으로는 압살롬의 반역을 정당화하는 선전효과도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패륜이 아니라 밧세바와 간통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하는 것이라는 선전입니다.
아히도벨의 두 번째 전략을 제시합니다. 기동타격대를 야간에 이동시켜 다윗을 쉼 없이 몰아부쳐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7장) 시간이 지날수록 꼼수로 끌어올린 압살롬의 거품 인기는 꺼져갈 것이며, 오랜 시간 쌓아놓은 다윗의 인맥과 인품은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의 전략은 후새로 말미암아 실행되지 못합니다. 후새는 다른 전략을 내놓습니다. ‘맹수는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맹수인 것처럼, 다윗은 그냥 다윗이 아니다, 괜히 섣불리 공격했다가 1패라고 당하면 기세가 꺾인다’, 그러므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스라엘 전역에서 병사를 끌어 모은 후에 숫자로 밀어붙이자고 건의합니다. 둘 다 일리 있지만, 아히도벨은 신의 지혜를 가진 자로 검증되었습니다. 당연히 아히도벨 손을 들어야 하는데, 후새의 계략을 채택합니다. 17장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아히도벨은 절망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윗의 내공은 빛을 발할 것이며, 압살롬의 거품은 꺼지고 말 것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파멸을 보려고 우정을 배신하고 압살롬 편에 섰는데, 다윗의 회복을 보며 고통당할 그 날을 생각하니 절망스러웠습니다. 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23) 가장 똑똑한 사람의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측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의 계산이 아무리 정확하여도 세상일은 그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보이는 것 너머에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대로 행동하지 말고 여호와의 선하신 주권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잠언 16장3절은 말씀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우리 각 사람이 압살롬의 길이 아닌 다윗의 길을 가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윗처럼 문제를 바라보고 다윗처럼 견딤으로 다윗처럼 회복되고 다윗처럼 승리하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