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소망.신념을 주는 신앙(2220.2023.12.3)
빌레몬서1:8-22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2월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지난 일년을 돌아보면서 반성을 해 봅니다. 반성을 해 보면서 실망과 낙심을 가질 때가 있기도 하고 잘했다라고 자기 자신을 칭찬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을 칭찬할 만한 일을 하셨습니까? 여러분 세상은 혼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혼자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어떤 영향을 주든지 나쁜 영향을 주든지 살게 됩니다. 때로는 용기를 얻을 때도 있고 좌절을 맛볼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지난 일년을 돌아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살아왔는지 또 앞으로는 이 설교를 듣고 난 다음에 어떤 영향을 주면서 살기를 원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새벽기도 시간에 말씀을 증거 하다가 제가 너무 은혜를 받은 말씀이라서 메모를 해 두었다가 증거 합니다. 골로새서에 있는 빌레몬에게 바울이 보낸 사적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3차전도 여행 때 3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에베소에 머물면서 선교했습니다. 이 때 에베소 근처 골로새에 살고 있던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에베소에 다니러 왔다가 바울의 전도를 받게 됐습니다. 그 이후 저가 예수를 믿었을 뿐 아니라 예수를 위해 헌신하게 됐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골로새 교회입니다. 이 골로새 교회는 점점 부흥했습니다. 그래서 별도의 예배 처소를 마련했고, 바울이 파송한 에바브라를 목회자로 모시게 됐습니다. 그 후 골로새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됐습니다. 빌레몬은 바로 이 골로새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몬1:1절에서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주인의 돈을 훔쳐 멀리 로마까지 도망치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지내다 돈이 다 떨어지고 생활이 어려워지게 됐습니다. 마침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있을 때 귀 너머로 들어서 알고 있던 바울이 로마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오네시모는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게 됐고, 예수를 영접하게 됐습니다. 이 때 오네시모가 자기의 과거를 털어놓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게 됐습니다. 그 후 오네시모는 바울을 주인 섬기듯 헌신적으로 바울의 옥중 생활을 뒷바라지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대로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네시모가 엄연히 법적으로 빌레몬의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재산 상 손해를 끼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빌레몬의 용서를 받게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자기 곁에서 자기를 돕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멀리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이 때 빌레몬의 선처를 기대하면서 오네시모에게 들려 보낸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빌레몬서는 ‘사면 추천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짧은 편지 안에서 바울이 영적 제자요 아들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사랑의 부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담긴 사랑의 부탁입니다. 빌레몬의 사랑의 선처를 기대하는 사랑의 부탁입니다. 우리는 이 바울이 빌레몬에게 전하는 사랑의 부탁 안에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의 부탁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부탁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기대하는 사랑의 부탁입니다.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의 사연은 그 집에서 종으로 있던 오네시모가 주인집의 금과 돈을 가지고 로마로 도주를 했습니다. 로마에 와서 바울을 만나게 되고 바울을 따라 다니며 신앙을 얻게 되어서 완전히 인격이 변화되어서 바울의 사랑을 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로마 옥에 갇히게 되어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편지를 써주며 빌레몬에게 다시 보냅니다. 오네시모는 그 편지를 가지고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받고 삶의 변화가 일어났기에 그 편지를 가지고 주인인 빌레몬에게 전달해 줍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오네시모가 과거에 실수가 많고 죄가 많지만 그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기에 용서 해 주라고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에는 3종류의 사람이 사람이 나옵니다. 빌레몬은 나쁜 손해를 보았지만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네시모는 나쁜 영향만 끼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소망을 주며 격려 해주는 사람입니다. 이 세사람을 보면서 세상에서 남의 약점을 발견하면 그것을 헐뜯고 삶을 저하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의 일에 대해서 너무너무 캐묻지 말아야 합니다.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와 소망과 신념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용기와 소망과 신념은 무엇이겠습니까?
1.큰 죄를 범했어도 그리스도가 용서했으니 우리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큰 죄를 범했습니다. 15절‘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잠시 떠났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도망친 것을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지금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됐기 때문에 과격한 표현을 피한 것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18절‘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오네시모가 도망칠 때 빌레몬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입혔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아마도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돈을 도둑질한 것 같습니다. 결국 오네시모는 종 곧 노예로서 주인의 돈을 가지고 도망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법으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노예가 도망칠 경우 당시 사회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운다는 차원에서 죽일 수 있게 했습니다. 게다가 오네시모처럼 돈을 가지고 도망칠 경우 그 죄질이 나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죽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죽여 마땅한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탁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무리한 부탁입니다. 어떻게 죽여야 할 사람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고 또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은 채 용서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을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 가운데 원수같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까지는 용서못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값있는 용서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같은 죄인을 용서 했다는 믿음이 있으면 나도 타인을 용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12월이 다 가기전에 용서할 것 용서하고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몬1:17-19절에 바울은 그의 관용과 용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동무로 알진대’라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자기와 빌레몬의 관계를 담보로 해서 오네시모를 용서라하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용서를 해 주면 동무의 관계가 지속되거니와 그렇치 않으면 그 관계가 손상될 것이라는 애절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대신 빛을 갚아줄테니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네 자신으로 내게 빛진 것을 말하지 아니 하노라’고 했는데 이것은 네가 내게 지고 있는 사랑의 빛은 따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에게 지고 있는 어떤 댓가도 탕감해 주겠다는 조건입니다. 이토록 값비싼 용서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네시모의 죄가 너무 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노예는 주인의 예속물로서 물건과 같이 취급이 되었고 생사권은 주인에게 있었으며 조그만 일에도 가차없이 죽이곤 했습니다. 엄격한 노예제도 하에서 도망간다는 것은 이해 될 수도 없고 용서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입니다. 오네시모 같은 경우는 주인의 귀중품을 훔쳐서 가지고 갔으니 잡히기만 하면 이중적인 죄값을 받아야 합니다. 아마 빌레몬은 잡기만 하면 극형에 처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바울은 간곡하게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엡4:32절‘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들은 용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용서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신 것처럼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받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대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라는 말은 한자로 ‘그릇에 담을’ 용(容)자에 ‘헤아려 동정할’ 서(恕)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먼저 마음으로 받아들여주고 그 처지와 입장을 헤아려서 동정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용서라는 말은 영어로는 forgive입니다. ‘위한다’는 ‘for’와 ‘주다’라는 ‘give’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 그냥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먼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마음으로 용납해주시고 그 아들을 주셨기에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온전히 죄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부탁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과 같이 있을 때에 용서를 했고 그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유익한 사람이 되었기에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있던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노예로서가 아니라 주님안에서 같은 형제로서 맞이해 주어서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오네시모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소망을 가졌습니다. 신념을 가졌습니다.
기독교회사에 보면 그후 50년만에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의 용서로 오네시모는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도망자요 전과자요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교회의 훌륭한 감독이 된 것은 바로 바울과 빌레몬의 용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운명까지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용서에 대해서 너무 인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기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합리화 하면서 남의 실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계산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삶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예수님도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또 실천도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용서를 받고 격려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삭개오도 역시 용서받고 격려와 용기를 얻어서 구원이 그 가정에 임했습니다. 우리가 용서하면 용기를 가지고 살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용서해 주지 않아서 기를 펴지 못하고 좌절하며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살펴보시고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용서가 우리에게 부은 바 되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셔서 삶의 변화를 받았으니 용서못할 일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 용서하고 받아들이시면 그는 용기와 소망과 신념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2.그리스도가 인정했으니 우리도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오네시모를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11절‘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전에는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무익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오네시모는 자기의 훌륭한 주인을 배신했습니다. 돈을 훔쳐 달아나 버렸습니다. 오네시모는 남에게 손해를 끼친 종이었습니다. 무익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곁에서 충성스럽게 뒷바라지를 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믿어주었습니다. 인정해 주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내게 유익한 것처럼 너에게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빌레몬에게 그 종 오네시모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이 전에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유익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눈가림을 했을 것입니다. 마음속에는 돈을 훔쳐서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그의 주인 빌레몬을 위해서 충성할 것입니다.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대인관계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만일에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무익한 그런 존재들이었더라도 예수 믿은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인격도, 생활도, 삶도, 가치관도 예수 믿은 후에는 변하고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여기 오네시모는 그랬습니다. 전에는 무익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익한 종으로 변화된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어둠에 있던 사람이 빛의 사람으로!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으로! 남에게 손해를 주는 무익한 사람이 남을 이롭게 하는 유익한 사람으로! 깡패가 전도사가 되고! 절망한 사람이 희망적인 사람으로!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고 믿어주고 칭찬해 주고 관용을 베풀어주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사랑했습니다. 오네시모도 사랑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그리고 주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손해를 끼치고 마음을 아프게 했던 여러분의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오네시모가 전에는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익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도 사랑을 받고 복음으로 변화된다면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로 변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믿어주고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했으면 귀중한 용서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인정합니다. 몬1:12절‘저는 내 심복이라’, 몬1:10절‘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귀중하게 여겨 주었습니까?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내 아들이라고 하고 내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심복이라는 것은 내 심장, 내 간, 내 폐와 같다는 뜻입니다. 이토록 오네시모를 귀중하게 인정해 주는 바울의 사랑을 애타게 표현한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어떤 사람에게나 장점이 있고 단점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 장점을 발견하고 인정해 줄 때 그 사람은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신념을 가지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13절‘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지금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냅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부탁을 합니다. 우선 오네시모의 모든 죄와 잘못을 용서하라는 부탁입니다. 다음으로 저를 사랑받는 형제로 세우라는 부탁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빌레몬을 대신하여 정식으로 자기에게 파송하여 보내라는 것입니다. 정성스럽게 뒷바라지 하여 오네시모를 바울에게로 사명을 주어 파송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탁은 무리한 부탁입니다. 또한 염치없는 부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특별한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다른 은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명에 맞게 그리고 그 은사에 맞게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간청하며 부탁하고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사랑의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우선 용서의 부탁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 우리에게 죄를 진 사람 그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저들을 친구로 형제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서 저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은사와 사명을 살펴서 주를 위해 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뒷바라지 하여 주의 일을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다 키워 보셨으니 알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우상을 만들거나 과잉보호를 하지 말고 귀중하게 키워야 합니다. 속담에도 귀중하게 키운 딸이 시집을 가서도 귀중하게 여김을 받고 잘 산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인정을 받는 자녀들이 밖에 나가서도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훌륭하게 될 수 있는 신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합니다. 자식을 귀중하게 여기고 키우면 나중에 그 자녀들로부터 귀중함을 받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귀중하게 여겨야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가 있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모든 남성은 여성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자 하는 숨은 동기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알고 있는 어느여인은 부부싸움을 자주하고 매를 맞고 삽니다. 그러면서 목사인 제게 와서 못살겠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대화중에 그 이유를 알아보니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눈꼽만큼도 없다는 것입니다. ‘괜히 시집왔다. 그때 그사람한테 시집을 갈걸, 이런 남자를 만나니 내 인생이 한심하다, 입만 열면 이혼하자’하는 말을 수없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남편을 만나고 함께 앉은자리에서 여집사님을 야단을 쳤습니다. 집사가 아니라 잡사역활을 했어요. 허구헌날 이혼하자구 하니 남편이 정말 이혼서류를 꾸며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신나게 두들긴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밤 11시쯤에 그 집에 찾아가서 이제부터는 검사처럼 살지말고 변호사 처럼 사시오 하면서 처방을 주면서 그날밤에 꼭 사랑을 나누고 내일 새벽기도에 오세요. 그럼 화해된 것으로 알겠습니다라고 하고 왔는데 그 다음날 새벽기도회에 둘이 나란히 앉았습니다. 당시에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여러분 귀중하게 여겨주어야 귀중함을 받는 것입니다. ‘당신 없이도 나는 얼마든지 살 수 있어’가 아니라 ‘당신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하고 존경해 보세요. 부인에게 존경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존경받지 못할뿐 아니라 주먹을 휘들러서라도 존경을 받을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를 만든 것은 서로가 귀중하다는 원리인 것입니다. 아웅다웅 하고 살지 말고요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습니까? 남자는 모자라도 무엇인가 하나 모자랍니다. 갈비뼈 하나 없는 등신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살짝 긁어주면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등신하고 사니까 상 등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잘 해주지 않으면 골라고 토라지고 밥상이 안올라 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서로가 귀중하게 여기며 남은생애는 서로가 칭찬하면서 대화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아내들에게! 여러분 남편들은 육체적으로는 다 컷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린애들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남편들에게! 아내가 얼굴에 주름살은 늘어가지만 마음이 소녀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귀중하게 여겨보세요. 이제부터 우리 상주감리교회 모든 성도들의 가정들은 서로가 귀하게 여겨주고 아껴주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라지요. 한 성도를 귀중하게 여기는 목회자, 한 임원을 귀중하게 여기는 목회자, 그리고 부족하지만 목회자의 심정을 이해 해주는 성도, 목회자의 사역을 귀중하게 여기는 임원들, 그래서 우리 목사님이 능력있는 목사님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성도들, 이런관계가 되어져야 성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서로가 귀중하게 여기고 인정해 주시면서 남은 생애는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3.그리스도가 신념을 주었으니 우리도 신념을 주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라는 부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6절‘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그러니까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주 안에서 형제로 대해 주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용서할 뿐 아니라 그를 사랑하여 형제로 친구로 세워주는 일은 더욱 힘 드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념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념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몬1:16절‘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몬1:11절‘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들은 이름값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이름값도 못하는 사람입니까? 저는 ‘성도’라는 이름값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약 인물들 중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을 꼽으라면 요셉을 들게 됩니다. 그의 성품 속에 예수님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품이 나타나는 말씀들 가운데 하나가 창45:5절‘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요셉은 미워하고 시기하던 형들 때문에 어린 시절 애굽에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험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긴 세월이 흘러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자기는 애굽의 총리가 됐고, 형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러 요셉 앞에 왔습니다. 요셉은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했습니다. 비록 형들이 자기를 미워해서 애굽에 종이 되어오게 했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자기 가문과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섭리가 있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도 깨달았습니다. 비록 형들이 밉지만 저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계속 형으로 세워주고 사랑하며 관계를 세워가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두려워말라’고 365번이나 기록했는데 ‘매일 자신감을 갖고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어려운 환경을 만나도 두려워 하지말고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면 신념을 가지고 승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감을 넣어주면 그 사람은 더욱더 능력이 개발되고 용기를 갖게 됩니다.
여러분 가정생활에도 아내가 남편들에게 IMF를 만나서 실직하고 살 맛이 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보따리 싸서 아예 집을 나가는 아내들도 있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아내들은 지쳐있는 남편들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어야 하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어야 남편들이 밖에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왜 돈도 못 벌어 오느냐? 왜 진급을 하지 못하느냐? 왜, 활동성이 없느냐고 구박하면 주눅이 들어서 더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들이 불평을 합니다. 아내가 교회에서는 설치고 집에 들어오면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남편을 무시해서 밥도 안주고 말도 안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잘못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칭찬해 주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희생하고 마음을 감화시키면 남편들이 교회에 저절로 나옵니다. ‘여보, 오늘 저와같이 교회에 같이 갑시다. 다른 부부들이 교회에 나란히 오는 것을 보면 부러워서 눈물이 날라고 해요’라고 부탁하면 목석같은 남편이라도 마음이 녹아지고 굴복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 아내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어도 나와 아이들이 있지 않느냐며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신념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비록 우리가 실수했어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실수하더라도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실수를 저질렀다고 골방에 처박혀 스스로를 저주하지 마십시오. 실패했다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실패자들이 가야 할 곳은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주님은 도망자 오네시모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해를 끼치던 그를,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제까지 실수했다 할지라도 아직 인생의 후반전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까지 인생의 경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 인생의 전성기는 이제부터라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실망되고 좌절 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는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여보, 왜그러시요’하고 물으니 아내가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죽었소’라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루터는 용기를 내서 ‘하나님이 죽다니, 이윔성에 기왓장과 같이 많은 마귀가 덤벼들어도 나는 가야 하리라’하고 종교개혁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아내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용기를 주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소망을 주시기 바랍니다. 신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신념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