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연구실 토론회
(사)어린이도서연구회
미운 오리와 우리의 책 읽기
(미운 오리 새끼《어른을 위한 안데르센 동화전집》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사)
•때 : 2017년 9월 29일 금요일 이른 10시
•곳 : 대방동 여성플라자 NGO마당
•누가 : 연구실 화요연구 모둠
(사)어린이도서연구회
미운 오리와 우리의 책 읽기
(미운 오리 새끼《어른을 위한 안데르센 동화전집》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사)
화요연구 모둠
1. 우리의 책 읽기 과정
모둠에서 안데르센 동화를 깊이 보기로 하였다. 모둠원들은 이미 보았던 작품이라 해도 다시 읽고 글을 써 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품에서 얻게 되는 실마리를 가지고 처음 우리가 ‘쉽게’ 써 왔던 글들은 얕은 감상에 머물러 있거나, 추상적인 개념들이 어지러이 떠다니거나, 문장의 묘사나 표현을 찬양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쓰는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글을 보다가 “문학을 왜 읽는가?”라는 본래적인 질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로 돌아와 보면 문학이 나에게 힘을 주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돌이켜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문학으로부터 위로받고 살아갈 힘도 얻으며 어린이 문학을 읽게 되면서 비로소 나는 ‘나’를 찾았다고 말하고 싶다. 문학을 왜 읽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누구나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학의 본래적인 역할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작품 속 문장과 표현을 하나하나 파헤쳐 분석하고 의미를 찾아내어 독자에게 지식을 주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학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야 있지만 그것은 문학을 감상하면서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우리는 작품을 볼 때 표현과 구성과 주제와 풍자와 그 밖의 여러 이념들이 떠오를 지라도 그것들의 의미를 해석하기에 앞서 순수한 자기 감상에 몸을 맡기기로 하였다.
어떤 날은 한 사람의 글 한 줄에 하루 모임 시간을 다 보내기도 했다. 글쓴이는 모둠원들과 나눈 이야기를 참고하기도 하고, 때로는 발판으로 삼아 다시 자신의 글로 다듬어 다음 모임에서 또 이야기 나누고, 또 조금 부끄러워지고, 또 울고 웃었다. 그 한 줄의 감상이 비롯된 연원을 찾아서 들어가고 더 들어가 보았다. 그 깊은 곳에 ‘자기’가 있었다.
무심코 툭 내뱉듯이 나온 한 줄의 감상에서 시작한 토론과 글쓰기의 되풀이는 때로 지난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어떤 모둠원은 개인적 감상은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글을 내보일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럴 때 마다 우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문학을 왜 읽는가?’에 대한 질문에 마주서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감상에서 비롯하여 오랜 생각 끝에 찾은 한 줄의 깨달음은 그 어떤 말보다 진실하다는 것, 그 어떤 유려한 수사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말이다.
2. 그곳에 ‘자기’가 있었다
내 안에 있는 참모습
아기 오리는 알에서 나올 때부터도 늦게 나오고, 크고 못생긴 미운오리 새끼였다. 오리들은 칠면조도 아니고 자신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겨서 이상하다고 여기며 아기 오리랑 어울리기 싫어하며 흉측하다고 괴롭힌다. 그러나 오리 엄마는 아기 오리가 헤엄칠 때 다리를 잘 사용하고 몸가짐이 곧음을 보고 안심한다. 아기 오리는 마음은 착하고 다른 오리들보다 헤엄은 잘 치지만 너무 크고 예쁘지 않아서 다른 오리들과 닭들에게 물어뜯기고 발에 채이고 놀림을 당한다.
‘내가 못생겨서 모두들 날 싫어하는 거야.’ (246쪽)
아기 오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울타리를 넘어 무작정 멀리 날아가지만 들오리도 기러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운 오리 새끼의 태어나면서부터 이 여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외모로 겉모습으로 따돌림 시키는 다른 동물들을 비난하는 것일까? 아니면 못생겼다고 놀리고 괴롭히는 것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아기오리의 성장 이야기일까?
이미 알고 있었던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가 이번에는 새롭게 나에게 질문을 던지며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말을 잘 못했다. 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겉으로 나오는 말은 더듬더듬 거리고 목소리도 작게 떨려서 손들고 하는 발표를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 반에는 거침없이 유창하게 발표 잘하는 친구들이 유난히 많았다. 자신감 있게 손을 번쩍 드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귀 기울여 들어보면 내용은 부실하고 목소리만 큰 아이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난 발표만 잘하는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았고 선생님의 질문에 손은 들지 않고 속으로 말을 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에게 책과 음악은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친구였다. 내 둘레에 있는 말만 잘하는 아이들이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 혼자 있는 나에게 유일한 무기는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책과 혼자 듣는 마이마이 카세트뿐이었다. 중학교가 있는 시내에서 주말이면 오던 시골집 다락방 ‘구석’에서 듣던 음악이 생각난다.
아기 오리는 위험한 들판에서 개조차 물지 않을 정도로 못생겨서 목숨을 부지 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농가로 가서 고양이와 암탉을 만난다. 고양이와 암탉은 알을 낳을 수 있고 가르랑 거리는 자신들이 이 세상의 절반이라고 믿고 나머지 절반도 자신들보다 못났다고 생각한다. 아기오리는 자신이 잘하는 물에서 헤엄 치고 물속으로 잠수 할 때의 근사함과 상쾌함을 이해 못하는 고양이와 암탉이 있는 농가도 떠난다.
아기 오리는 남들 때문에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만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따돌림과 추위로 견디기 힘들지만 남의 흉내는 내지 않는다. 개개인의 감정과 사고는 가치 없다며 알을 낳고 가르랑 거리는 것만이 똑똑하다고 우쭐대는 고양이와 암탉 무리를 떠나는 아기 오리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기 오리는 언젠가 본, 기억 속에 존재하는 우아하고 눈부시게 하얀 깃털을 가진 백조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어쩌면 이 모습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기오리 안에 간직 되어있던 순수하고 고귀한 아기오리의 정신의 모습, 내면의 발견인지도 모르겠다.
“죽일 테면 죽여.” 가엾은 미운 오리 새끼는 서글프게 이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기다렸다. (251족)
<미운 오리 새끼> 에서 이 부분은 처음 읽어서 생소하게 다가왔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고 읽었던 축약본 책들에는 없었던 문장과 장면이다. 안데르센 작품뿐 아니라 모든 작품은 완역본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부분이다. 아기 오리는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아름다운 백조들을 발견하고, 냉대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죽느니 ‘저 새들에게 죽는 편이 나아’라고 생각하며 아름다운 백조들을 향해 헤엄쳐 나아간다.
죽음을 기다리던 아기오리는 맑은 물위에 비친 아름다운 백조의 모습이 자신임을 알고 깜짝 놀란다. 생명이 있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미운 오리 새끼가 아름다운 백조로 변한 것은 마녀의 요술이 아니라 아기 오리의 순수하고 고귀한 정신이 만들어낸 더 심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 자체도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게 만드는 태초 이전의 고요와 어둠이 존재하던 때를 더 내다볼 수 있는 존귀하고 순수함을 간직한 다른 마법.
아름다운 백조의 모습으로 우아한 백조들과 함께 있는 아기 오리, 아니 백조는 행복하지만 뽐내지는 않는다. 미운 오리 새끼 때에도 백조로 변한 다음에도 그것이 백조 안에 있는 내면의 참모습이라고 여겨진다.
사춘기 때 나는 깊은 소외감을 느끼긴 했지만 다른 아이들을 따라하거나 흉내 내지 않았다. 책 속이야기와 음악의 선율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외로움을 통해 배웠다.
<미운 오리 새끼>는 행복한 외로움을 느끼며 견딘 그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그 때에도 지금도 늘 내 안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 (권향란)
<미운 오리 새끼>와 내 끝없는 이야기
(1) 내 책 읽기 변화
내 생각에는 서평글과 감상글은 다른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이 둘은 같다고 말하는 회원이 있었다. 머리로 따지고 보면 같은 말인데, 나는 알게 모르게 이 둘을 나눠서 생각했다. 그리고 막연하게 서평글이 감상글 보다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감상글은 내 느낌을 말하면 되는데, 서평글은 텍스트에서 인용 하면서 나와는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고 들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려웠다. 토론 때, 내 이야기를 하면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작품에 집중해서 말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또, 회에서 비평가를 초빙해서 연강을 듣거나, 우리 회보 ‘책 이야기’가 ‘내가 읽은 책’보다는 선두에 둔 것이 서평글이 우위에 있다는 내 생각을 굳혔다. 나는 ‘잘’ 쓴다고 하는 선배들의 ‘책 이야기’를 보면서 서평글의 틀을 만들었다.
<미운 오리 새끼>를 읽으면서 어미 오리가 미운 오리 알을 품고 했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정말 지루하구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말이 내게 걸렸다. 그래서 작품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모둠에서는 걸리는 그 부분을 글로 막 써야한다고 했다. 그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들을 썼다. 그리고 그 글을 쓰면서 느껴지는 감정에 빠졌고,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일주일간 놓지 않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모둠원들이 말했던 것처럼, 어미 오리에게 걸리던 말들이 그 다음 주에 작품을 읽을 때는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미운 오리의 마음이 내 마음처럼 동일시되어, 미운 오리가 백조가 된 것에 기립박수를 치게 되었다.
한 작품을 통해 나는 몇 달을 울고 고민했다. 그 과정을 글로 썼고, 모둠원들은 같이 눈물 닦느라 얼굴에 휴지가 덕지덕지 붙었다. 내 글을 다 읽었을 때 모둠원들은 박수를 쳤다. 그리고 충분하다며, 토론 감상글로 내자고 했다.
그런데 나는 불편했다. 내 개인적인 감상이 어찌 토론글로 걸맞단 말인가? 텍스트에 집중해서 내 변화를 드러내야한다고 믿었다. 모둠원들은 내게 원론적인 질문을 계속 했다. ‘너는 왜 어린이 책을 읽냐?’고, 나는 ‘행복하고 싶어서,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모둠원들은 ‘그럼 그런 내용이 드러나야 좋은 글 아냐?’한다. 나는 '그래도…….‘라고 했다. 그러자 ‘너는 아이들의 글 중에서 어떤 글이 좋으냐고?’물었다. 나는 ‘그 아이의 삶이 드러나는 글’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연달아 말했다. 그래도 ‘묘사나, 공간이나, 대비’나 이런 것들을 짚어주면 좋지 않냐고 되물었다. 훌륭한 비평글은 그런 것들을 짚으면서도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고 했다. 그 훌륭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감상이 충분히 드러나고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작품이든 서평글이든, 감상글이든, 내게 ‘아!’ 하고 울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을 드러내고, 내 고민을 드러내는데 편해진 듯하다.
(2)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 새끼가 되고 싶다
이 작품으로 토론하고 글쓰기 시작한 지 3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한 작품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내 안에서 감지되는 것이 변했고, 토론 후 생각이 바뀌었다. 모둠원의 말에 왜? 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 의문의 시작점은 어딘지 찾고 싶었고, 변화된 근거를 찾아서 드러내고 싶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미운 오리 새끼> 이 작품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내가 느끼는 ‘감상’과 머리로 이해되는 ‘논리’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방향성을 갖고 있고,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다. 내 자신은 누구보다 강하다. 나는 근사한 사람임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작업이고, 이러한 힘을 주는 것이 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백조로 태어났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백조로 태어나 백조가 된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근사하다. 주변의 가치적 판단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백조로 태어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살아간다는 이야기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에서 자꾸 거부가 올라온다. 거부하지 않아야 글도 술술 써지고, 더 이상 헷갈리지 않고 마침표가 찍히는데 말이다.
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안정감과 자신에 대한 최선의 긍정을 선물 한다’, ‘성장의 과정에 있는 모든 이에게, 특히 어린 동무들에게 이 이야기를 꼭 읽어주고 싶습니다.’ 의견처럼 나도 진정으로 이걸 느끼고 싶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낀 것을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얘들아, 너도, 백조로 태어났어.”라고 말이다.
나는 내가 백조라는 것은 안다. 성인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많은 공부와 작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면 나는 당연히 내 어린 시절도 백조 새끼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서 턱 걸린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시절 나는 미.운.오.리.새.끼.였다. 언니보다 공부도 못했고, 그림도 못 그렸다. 지금은 내가 언니보다 잘하는 게 훨씬 많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언제나 미운 자식이었다. 왜 미운 자식이었을까? 공부 좀 못한다고 미운 자식은 아닐 텐데 말이다. 오빠가 태어나고, 언니가 태어났을 때 정말 공장이 잘됐다고 한다. 그러다가 내가 태어나서 잘 되던 공장에 불이 나서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단다. 동생 탁균이가 태어나서 좀 형편이 풀렸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하는 이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가 나를 밉다고 한 적은 없지만, 나는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곤로에 밥을 하고, 쌀뜨물로 아욱국을 끓이고, 뽀득뽀득 설거지를 했다. 미움 받지 않으려고, 나 때문에 집이 망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하고자 나는 애썼다. 돌아보니, 나는 엄마한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시댁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는 미움 받지 않으려고 애썼고, 미움받을까봐 겁났다. 이런 미운오리 새끼인 내가 백조가 되고 싶다.
오리와 백조를 우위 가리지 말자고 했던가? 아니, 아니. 나는 백조를 더 나은 족속으로 치고 싶다. 그리고 나는 백조가 될 거야. 그리고 뽐낼 거야. 자랑도 할 거야. 보상받고 싶다. 대가를 받고 싶다. 대가는 ‘백조’이다. 이것이 내 감상이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하다. 문학은 뭐라고 했더라. 보편성을 뛰어넘는 더 큰 가치를 지녀야한다고 했던가. 나……, 이 경험을 이 작품에서 하고 싶어. 미친 듯이……, 그러면 내가 백조새끼였음을, 내가 백조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논리로는 되는데, 내 감상은 이를 뒷받침 해주지 못하고 있어. 그래서 힘들어. (남경화)
미운 오리에서 아기 오리로
이 작품을 끌어안고 지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내 글에 등장하는 ‘미운 오리 새끼’는 그냥 ‘미운 오리’였다. ‘미운 오리 새끼’라고 하면 인물의 이름이 너무 긴 느낌이 들기도 해서 미운 오리라고 불렀다. 미운 오리가 백조가 되니까 그렇게. 그런데 미운 오리라고 부르면서 왠지 모르게 조금 불편했다. 왜 그럴까? 작품을 반복해서 읽고 동무들과 토론하면서 조금씩 미운 오리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왜 불편했는지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미운 오리가 농가에 머물고 있을 때 암탉은 말한다. ‘알을 낳든지 가르랑거리는 걸 빨리 배우든지’ 하라고. 그곳은 할머니가 주인이 아니라 고양이 암탉이 주인이다. 나름대로 그들의 세계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었다. 알을 낳고 가르랑거리는 일. 그러나 이것은 미운 오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미운 오리가 게으르거나 염치가 없는 오리여서가 아니다. 미운 오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최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좀 들여다보면 암탉도 자신이 하는 일이 최고라는 생각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같다. 자기가 한 말에 대해 고양이에게 할머니에게 확인해 보라고 한다. 그만큼 확신이 없기에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모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세상이 그만큼인 것을 그들 또한 알지 못했다. 미운 오리에게 물에서 헤엄치고 잠수를 하는 일이 얼마나 근사한지 말이다. 암탉이 원하는 일을 못해 그것을 탓하고만 있지 물속의 미운 오리를 상상조차 못한다.
‘알을 낳든지 가르랑거리는 걸 빨리 배우든지’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그것에 맞추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해 주는 것이 갈등의 원인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참으면 주위가 조용할 거라는 생각을 했으며 그냥 그렇게 해주는 시늉이라도 하면 더 이상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로 다른 요구 사항들이 뒤따른 적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젠 내게 알을 낳고 가르랑거리라고 요구했던 그들에게 묻고 싶다. 물속에서 헤엄쳐보라고 잠수할 수 있겠냐고. 물이 얼어 더 이상 헤엄칠 공간이 없어질 때가지……. 물을 끔찍이도 싫어하며 태생적으로 접근 불가한 그들에게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들의 반응은 어떨까? 이런 질문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다. 왜 저래 하며 어리둥절해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더 크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럼 난 이런 불편한 상황이 싫어서 또 알을 낳고 가르랑거리는 시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리도 아닌 백조도 아닌 존재로 말이다. 그럼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운 오리는 암탉의 말을 듣고 농가를 떠난다. 순간의 갈등을 모면하기 위해서 알을 낳는 시늉도 가르랑거리는 시늉도 하지 않고 물에서 헤엄치는 일이 얼마나 근사한 일이지를 더 떠올리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이 차이다. 나와 미운 오리가 달랐던 점은. 내가 미운 오리라고 하면서 불편해 했던 까닭이. 난 결코 백조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난 백조가 아닌 걸. 오리의 삶도 괜찮아. 누구는 오리의 삶으로 누구는 백조의 삶으로 그렇게 살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백조가 될 수 없는 나를 위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가슴 속에서 무언가 몽글몽글 간질 간질거리며 올라오고 있었고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하고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으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지불식간의 일처럼 일어났다. 어디선가 “현영아, 넌 백조야.”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알을 낳고 가르랑거리는 흉내를 내면서 백조를 한껏 부럽게만 생각했던 나도 백조라고 말해준다.
미운 오리가 처음 백조를 만났을 때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태양이 서산을 넘어가려다 구름 사이로 마지막 찬란한 빛을 발하던 어느 저녁, 한 무리의 아름다운 새들이 수풀에서 나왔다. 미운 오리 새끼는 여태껏 그렇게 아름다운 새들을 본 적이 없었다. 우아하게 곡선을 이룬 목과 눈부시게 하얀 깃털을 가진 백조였다. (…중략…) 미운 오리 새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운 오리 새끼는 물속에서 몸을 바퀴처럼 몸을 빙글빙글 돌려보기도 하고 새 떼를 향해 목을 길게 늘려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새들처럼 소리를 내보기도 했다. 그렇게 아름답고 평온한 새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250쪽)
미운 오리는 다른 새들을 만날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을 받는다. 부럽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 새들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었고 무리에 끼워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미운 오리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묘한 기분에 빠져 몸을 돌려보기도 하고 소리를 흉내 내기도 한다. 암탉의 요구에는 요지부동하던 미운 오리의 태도와 사뭇 다르다. 새들은 미운 오리에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무엇이 미운 오리를 움직이게 했을까? 나에게 들렸던 말처럼 그 목소리가 들렸던 것은 아닐까? “미운 오리야 넌, 백조야!” 하고 말이다.
미운 오리도 백조가 되고 나도 백조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미운 오리가 아닌 ‘아기 오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기 오리야, 현영아, 참 잘했어.’ (배현영)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본래 모습 그대로’인 너에게!
<미운 오리 새끼>에서 이야기의 본질을 찾아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처음 이 작품을 만난 건 2011년이다. 그때 간단히 기록한 감상글이다.
“미운 오리야!
누구에게나 미운 오리 새끼의 시절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니가 백조가 되는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결말이라고 보여 진다. 그래서 네가 살아온 이야기가 나에게 절박하지도, 감동스럽지도, 그닥 크게 와 닿지도 않아. 운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능동적인 삶이라고 느껴지지도 않구 말이야. 그저, 니가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 기대감이 크다는 정도? 딱 그것뿐이야.”
왜 이런 글을 썼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기대감으로 책을 펼치긴 했으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한 것, 그리하여 더 이상 ‘흥미롭지도 궁금하지도 않게 되어버렸다는’것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다 아는, 다 읽은 작품이라고 외면해 버렸던 작품이 이 한 권뿐이겠는가?
이렇게 떠나보낸 <미운오리 새끼>를 2016년 12월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기오리가 안데르센 작가의 삶으로 다가왔다. ‘안데르센 전시’ 도슨트를 위해 읽었던 《안데르센 평전》때문이었다. 이 작품이 안데르센 자전적 동화로서 대표작품이라나, 뭐라나! 평전을 통해 알게 된 작가의 삶은 아기 오리와의 만남을 방해했다.
문학 작품을 작가의 삶과 별개로 감상 할 수 있으려면, 먼저 깊이 있는 책 읽기가 우선되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무엇과도 독서의 즐거움을 맞바꾸고 싶지 않다는 욕구만 남기고 더 깊이 있는 감상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2017년 7월 ‘작은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다시 아기 오리를 만났다. 이야기를 여러 번 읽고 그 감상을 함께 나누고 글로 정리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아기 오리와 단둘이만 마주하고 싶었다. 햇살이 눈부신 어느 아름다운 여름 날, 시골 풍경 속을 걷고 있던 ‘아기오리’와 ‘나’는 같은 세상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뚝 떨어진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는 아기 오리, 힘들게 타박타박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아기 오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용기 있게 자신의 모습을 지켜내는 아기 오리가 있었다.
아기 오리는 주어진 현실을 피하지 않고 감당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 무리에 끼고 싶은 욕구,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를 단 한번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아기 오리가 불안하지 않았다. 아기 오리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가 들려주는 곳으로 몸과 마음을 향하는 모습은 자신의 삶을 귀히 여기는 것 같아서 좋다.
거기에 내 모습이 있었다. 그의 삶이 내가 간절히 바랐던 삶이고,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과도 닮아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했다. 할 수 없는 일은할 수 없다고 인정하지만 자괴감으로 자신을 내몰지 않았다. 내게 힘든 일이 찾아오거나 도망가고 싶은 일이 생길 때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것이 나를 지키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멋져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기 오리가 현실을 피하지 않고 감당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아기 오리를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는 이유를 가만 생각해보았다. 아기 오리의 모습은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고. 그의 삶의 방식은 내가 바라는 삶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기오리가 백조가 된 순간보다 그가 걸어온 여정에 마음이 간다.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지키려고 애쓰며 살아왔던 나의 삶과 많이 닮아있어서 그렇다. 모둠원들과 함께 한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기를 반복하면서 나도 몰랐던 '나'를 만났다. 이 감상은 위로나 감동이라는 표현보다는 ‘발견’이었다.
<미운 오리 새끼>가 녹록치 않았던 내 삶에 무한긍정과 무한인정을 보내주었다. 내가 아기 오리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곧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나에게 가치가 있다. 이야기의 본질 중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아기 오리를 통해 너, 나,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말을 걸어주었기 때문이다. 책을 펼쳐 아기 오리를 만나러 간다. 그러면 아기 오리는 이렇게 속삭인다.
'희진아, 넌 잘 살고 있어. 그리고 잘 살았어!'라고. (최희진)
3. 축약본 견주어 보기
[살펴 본 작품]
⦁미운 오리 새끼 (《안데르센 동화전집》, 윤후남 옮김, 현대지성사, 1999)
⦁못생긴 새끼오리 (《1학년이 꼭 읽어야 할 안데르센 동화》, 안데르센 지음, 엄기원 엮음, 효리원, 2007)
⦁미운 아기 오리 (《열세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 안데르센 동화집》, 안데르센 원작, 프리데룬 라이헨슈테터글, 질케 레플러 그림, 베틀•북, 2007)
(아래 글 본문에서는 이야기 제목 대신에 출판사 이름으로 표기하였음.)
우리 회는 어린이에게 외국 문학 작품의 축약본 보다 완역본을 권하고 있다. 축약과 재화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작품성 면에서 훌륭하고 아름다운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는 완역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원작을 그대로 번역한 완역본을 권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작가의 작품이 다른 사람에 의해 재화되었다면 이미 그 작품은 원작자의 손을 떠난 새로운 작품이 되는 것이므로 같은 작품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축약의 문제는 한두 가지로 말할 수 없지만 가장 큰 문제는 원작이 전하는 삶에 대한 본질적인 메시지가 사라져 버리고 얄팍한 교훈을 드러내는 데 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원작을 읽을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점이다. 축약본을 읽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작품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시 찾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원작에서 얻게 되는 사고의 확장과 미적 가치들을 아예 접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된다.
우리나라 출판사들은 유독 외국 문학 작품을 축약하여 내는 경우가 많다. 안데르센 작품은 특히 더 많은 축약본을 찾을 수 있다. 출판사마다 경쟁하듯이 축약본을 만들어 아이들 읽기책으로 내놓는 것은 완역본 읽기에 준비가 안 된 어린이들에게‘빨리’안데르센 작품을 ‘알게’하려는 학부모들과 출판사의 영리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행태로 보인다. 우리가 좋은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까닭을 다시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출판 관행은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미운 오리 새끼>는 우리 모둠원들 각자에게 다르지만 큰 울림을 준 작품이다. 현실의 삶을 잘 살고 있다는 안도감부터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까지 떠올리게 한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축약본을 살펴보면 전혀 그런 감상을 할 수가 없게 되어있다.
1) <못생긴 새끼 오리> (효리원)
<못생긴 새끼 오리>(효리원)를 읽고 감상을 물으면 아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러니까 친구들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돼요.”라고. 그렇다면 아이들의 이 말을 듣고 어른들은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른다. “이런 교훈을 아이들 스스로 얻을 수 있다면 좋은 작품 아닌가요?”
문제는 아이들의 그 말이 작품을 읽고 저절로 우러나와서 한 말인가 아닌가에 있다. 어른들의 의도된 질문을 받는 것이 익숙해진 아이라면 어른이 질문하기 전이라 해도 교훈을 뽑아내어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어른이 원하는 ‘정답’인 줄 이미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본 내용 앞에 ‘선생님과 학부모님께’ 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실어 놓았다.
“이 이야기는 안데르센의 자전적인 작품입니다. (…중략…) 어린이에게, 겉모습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교훈과 기쁨을 주는 이야기이지요.”
세상에! 어린이가 이런 교훈을 주는 이야기에서 어떤 ‘기쁨’을 느낄지, 기쁨을 느끼기나 할 지 의문스럽다. 본 내용 뒤에는 <이해능력 레벨 업> 또는 <논술능력 레벨 업> 같은 제목을 달고 오리가 본래 어떤 동물인지 묻는 질문도 실었다. 책 표지에 ‘논리논술 대비 세계 명작’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놓았으니 놀랄 것도 없긴 하다. 풍문처럼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덴마크의 한 박물관은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된 안데르센 작품만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는데, 우리나라 책으로는 바로 이런 류의 논술대비 책이 전시돼 있다는 것이다. 사실일까? 제발 소문이기를 바랄 뿐이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면 심각성이 더 드러난다.
① 탄생
* 효리원: 마침내 나머지 한 마리도 엉금엉금 기어 나왔습니다. 머리가 크고 엉덩이가 튀어나온 것이 정말 볼품없었어요.
* 현대지성사: 드디어 그 큰 알이 깨지고 새끼가 “찍찍” 울며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정말 크고 못생긴 새끼였다.
현대지성사 완역에서 주인공 새끼오리의 외모를 표현한 말은 ‘정말 크고 못생긴’이다. 이 표현을 보면 주인공이 일반적인 오리 체구보다 훨씬 커서 못생겨 보이고 그로 인해 거부감을 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대중)’의 일반적인 모습과 아주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갖게 되는 거부감 같은 것이다. 크다는 표현 역시 물리적인 크기를 포함한 ‘우리’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한 개체에 대하여 갖는 대중들의 시선으로도 읽을 수 있다. 반면 효리원은 생김새에 대한 구체 묘사를 하여 독자에게 특정 체형을 떠올리게 하고, 그런 체형에 대한 반감 또는 편견을 갖게 한다. 이는 서술자의 외모 편향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힐 가능성이 크다.
⓶ 농가 마당: 멸시와 학대
* 효리원: ‘농가 마당’ 부분 없음
“저렇게 못생긴 아이가 우리의 형제라니, 창피한 일이야!” (…중략…) 물을 끼얹기도 하고, 부리로 콕콕 쪼아 대기도 하였으니까요. (…중략…) ‘아, 나는 왜 이렇게 못생긴 오리로 태어났을까?’ 못생긴 새끼오리는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식구들 모두가 소풍을 갔습니다. (…중략…) 못생긴 새끼오리가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니 아, 이게 웬일입니까! 식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습니다. 혼자만 남게 된 것이었어요.
* 현대지성사: 맨 나중에 알을 깨고 나온 미운 오리 새끼는 너무 못생겨서 다른 오리들과 닭들에게 물어뜯기고 발에 채이고 놀림을 당하였다. “쟤는 몸이 너무 커.”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중략…) 자기가 황제라고 믿는 수컷 칠면조가 있었다. 그 칠면조는 (…중략…) 깃털을 곤두세우고 뽐내면서 미운 오리 새끼에게 달려들었다. (…중략…) 그러나 날이 갈수록 놀림이 더 심해졌다. (…중략…)
오리들은 미운 오리 새끼를 물어뜯었고, 병아리들은 부리로 쪼아댔으며, 동물들에게 모이를 주는 여자 애도 발길로 찼다. 그래서 미운 오리 새끼는 울타리를 훌쩍 넘어 달아났다.
농가 마당은 미운오리가 태어나서 가족 이외에 처음으로 맞이한 사회이다. 아이가 엄마 품을 떠나 막 학교에 입학한 것과도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다. 그러나 미운 오리는 첫 발걸음을 떼자마자 기존에 있던 구성원 모두에게 배척당한다. 날이 갈수록 멸시와 학대가 심해지자 미운오리는 농가 마당을 ‘제발로’ 뛰쳐나온다. 이 부분은 주인공 인물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으로 빠지거나 왜곡되어 표현한다면 작품 감상 또한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축약본을 보면 이 부분이 완전히 빠져 있으며, 더욱 경악스러운 점은 유기를 의심하게 하는 가족소풍 부분(원작 어디에도 없는)을 넣었다는 점이다. 가족이 소풍간 날 혼자 놀다가 보니 온 가족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미운오리는 집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이는 독자의 온전한 작품 감상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부분이다.
2) <미운 아기 오리> (베틀.북)
이 책은 축약의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앞의 축약본이 외국 원작을 우리나라 작가가 특정한 교훈을 강조하고 학습을 위해 다시 쓴 것이라면 이 책은 외국 작가가 축약한 내용을 번역하였다는 점이 우선 다르고, ‘원작을 살리려고’ 애쓴 점이 보인다. 또한 그림에도 공을 들여 위의 학습을 위한 책 보다는 비교 우위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 작품을 읽어보면 보일 듯 말 듯 원작과는 다른 부분을 느낄 수 있고, 따라서 이 작품에서 문학의 아름다운 가치를 찾기는 어렵게 되어있다.
① 시작 부분
* 베틀북: 들판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여름이었지요. 밀은 황금빛으로 익어 갔고, 귀리는 초록빛으로 물결쳤답니다. 그 아래 넓은 들판에는 마른풀 더미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어요. 들판 뒤편에는 큰 숲이 있고 숲 속에는 깊은 호수들도 있었습니다. 정말 경치가 좋은 곳이었지요. 여기 볕이 잘 드는 곳에 오래된 집 한 채가 있었어요. 넓은 마당을 빙 둘러가며 도랑이 팬 커다란 집이었답니다. 이곳에 엄마오리 한 마리가 (…).
* 현대지성사: 햇살이 눈부신 어느 아름다운 여름날, 황새들이 길고 붉은 다리로 왔다갔다하면서 이집트 말을 종알거렸다. 얼마 전에 엄마 새에게서 배운 말이었다. 들판의 옥수수는 황금빛으로 물들고, 귀리는 녹색으로 일렁이고, 초원에는 건초 더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중략…) 깊은 강 옆으로는 보기좋은 오래 된 농장이 햇살을 받고 서 있었는데, 농장에서 강가까지는 커다란 우엉이 자라고 있었다. 우엉 잎은 어찌나 크던지 큰 잎 아래서 아이들이 똑바로 설 수 있을 정도였다. 우엉 잎이 무성한 곳은 우거진 숲 한가운데처럼 뒤엉켜 있었다. 바로 이 곳에 오리 한 마리가 (…).
이야기의 시작 부분은 작품 전체의 인상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현대지성사 본을 볼 때 마다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카메라는 한가로운 여름날의 풍경을 먼 거리에서 비추다가 점점 한 곳을 향해 가까워지며 마침내 주인공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준다. 그런데 베틀.북 본을 보면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렵다. 여름 풍경을 애써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넓은 들판에 마른 풀 더미가 ‘가지런히 쌓여’ 있는 풍경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그림이다. 서술자가 한 눈에 넓은 들판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먼 거리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마른풀 더미가 가지런히 쌓인 모습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확인이 가능하지 않나? 굳이 뜯어보자면 그렇단 얘기다. 더구나 엄마 새에게서 배운 이집트 말을 종알거리던 길고 붉은 다리의 황새와, 아이들을 밑에 세울 수 있을 만큼 큰 우엉 잎은 아예 흔적조차 없다. 4학년 어린이에게 완역본을 읽어주었는데 시작 부분의 묘사를 처음 들었다며 우엉 잎이 뭔지 신기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② 농가 마당: 멸시와 학대
* 베틀.북: “아유, 지금도 오리 식구들이 너무 많아 살기가 힘든데 또 한 가족이 생겼군. 게다가 저 못생긴 녀석은 또 뭐야?”
오리 한 마리가 ‘푸드덕’ 뛰어와 못생긴 아기오리의 목을 꽉 물었습니다.
“얼른 놓지 못해! 우리 애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엄마오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오리들은 모두 이 미운 아기오리를 물고 쪼고 놀려 댔어요. 닭들과 칠면조까지도 아기오리를 괴롭혔지요.
“쟤는 너무 커!” 다들 외쳤습니다.
불쌍한 아기오리는 늘 쫓겨다니느라, 도대체 어디에 있어야 할지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날이 갈수록 아기오리는 더욱 미움을 받았어요. 이제 친형제들까지 아기 오리를 미워했습니다.
“너같이 못생긴 건 고양이나 와서 물어 갔으면 좋겠다!” (…중략…) 날마다 쪼이고 물리고 모이 주는 아이에게 발길질까지 당했지요. 더는 견딜수가 없게 된 아기오리는 어느 날 울타리를 뛰어넘었습니다.
* 현대지성사: “저기 또 오리 가족이 오네. 우리만도 충분한데 말야.” “한데 저 오리 새끼 좀 봐. 정말 이상하게 생겼네. 저 오리하고는 함께 어울리기 싫은걸.” 한 오리가 이렇게 말하고는 나는 듯이 달려와 미운 오리 새끼의 목을 물었다.
“그만두지 못해. 걔는 아무도 해치지 않아.” 어미 오리가 꾸짖었다.
“그래도 너무 크고 흉측해. 그러니 쫓아 버려야 해.” 목을 물었던 오리가 악의에 차서 말했다.
“새끼들이 정말 예쁘군. 하나만 빼고 말이야. 저 새끼는 어미가 잘 돌봐 줘야겠어.” 다리에 헝겊을 감은 할미 오리가 말했다. (…중략…)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맨 나중에 알을 깨고 나온 미운 오리 새끼는 너무 못생겨서 다른 오리들과 닭들에게 물어뜯기고 발에 채기고 놀림을 당하였다.
“쟤는 몸이 너무 커.”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며느리발톱을 달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가 황제라고 믿는 수컷 칠면조가 있었다. 그 칠면조는 돛을 활짝 펴고 전속력으로 항해하는 범선처럼 깃털을 곤두세우고 뽐내면서 미운 오리 새끼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달려드는 칠면조를 본 미운 오리 새끼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가엾은 미운 오리 새끼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농가 마당에서 웃음거리가 된 것이 몹시 슬펐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놀림이 더 심해졌다. 가엾은 오리 새끼는 모두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형제 자매들까지도 매몰차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야, 못난아, 고양이가 널 잡아가 버리면 좋겠다.” (…중략…) 오리들은 미운 오리 새끼를 물어뜯었고, 병아리들은 부리로 쪼아댔으며, 동물들에게 모이를 주는 여자 애도 발길로 찼다. 그래서 미운 오리 새끼는 울타리를 훌쩍 넘어 달아났다.
현대지성사 본에는 미운 오리가 농가 마당에서 겪는 학대가 절절하다. 현대지성사의 미운 오리는 ‘어쩔 줄 몰라’ 했고, 자신이 웃음거리가 된 것이 몹시 슬프기도 했지만, 베틀.북의 미운오리는 계속 관찰대상으로 남게 된다. 미운오리가 농가 마당을 떠나는 부분도 느낌이 다르다. 현대지성사에서는 미운오리가 울타리를 넘어 달아나는 것이 앞의 설명(농가 마당의 모든 존재들에게 미움 받는) 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베틀.북에서는 미운 오리가 ‘더는 견딜 수가 없게’ 되자 생각 끝에 ‘어느 날’ 울타리를 넘는 것처럼 읽힌다. 이 부분을 완역으로 볼 때는 지금까지 누적된 상황이 그 순간 폭발하여 자기도 모르게 무작정(미래에 대한 어떤 작정을 하지 못한 채) 울타리를 뛰어넘게 되는 것으로 미운 오리의 상황에 공감하며 읽었었다. 베틀.북 본에서는 미운 오리가 심각한 상황 앞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다가 고심 끝에 떠나는 것처럼 읽힌다.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4. 어린이와 함께 즐기기
미운 오리 새끼 완역본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25분 정도이다. 읽어주기 전에 이 작품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80% 정도가 집에 책이 있거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손을 들었다. 그런데도 막상 읽어주니 재미있다고 잘 들어주었다.
3학년 시온(남)이는 열 번이나 읽었다고 하면서 내가 가져간 두꺼운 책을 보더니, “아빠가 선생님과 똑같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는 말까지 하였다. 내가 “아빠가 읽어주신 책이랑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서 재미없었어?” 하고 물으니, 아주 작은 소리로 “딱 하나 다른 거 있긴 있었어요.”하면서 “미운 오리가 백조에게 “죽일 테면 죽여.”라고 말한 걸 듣고 깜짝 놀랐다는 말을 해 주었다.
2학년 인아(여)는 “선생님이 방금 말한 이야기가 더 재밌었어요.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랑 달랐는데 제가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도 있었어요. 재밌었어요. 집에 있는 책에는 농부 아내가 아주 심술궂었어요. 근데 이 책에는 맨 처음에 착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 오리가 도망치다가 막 버터 통에 들왔다 나왔다 해가지고 아줌마를 화나게 만들어가지고 그런 거예요. 아줌마가 착하게 나온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오리가 맨 처음에는 못생겼는데 다음에 아주 아름다워져가지고 자기가 뿌듯하다고 생각해요.” 하면서 속사포처럼 자기 생각을 말해 주었다.
2학년 현준(남)이도 “오리가 불쌍했어요. 얼어 죽을 뻔 했잖아요. 그리고 처음에 운이 안 좋게 크게 태어나고 물어뜯기고 막 그랬잖아요. 사람들이 놀리고 막. 근데 안 울잖아요. 안 울고 있으니까 용감해요. 하느님이 운 안 좋게 태어났으니까 하느님이 너무 착해서 백조가 되게 해 준 거 아니에요?” 라는 말을 해주었다.
아이들은 문학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를 분명히 좋아한다. 글의 길이는 아이들에게 문제 될 것이 없다. 장편 동화도 “더, 더, 더” 읽어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이들이다. 길어서 아이들이 집중하지 못할까 봐 축약하는 것은 명백하게 어른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만나고 아이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도덕적 가치 판단을 잘 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작품 속에 교훈을 날 것 그대로 심지 않아도 아이들 스스로 좋은 글 속에서 느끼고 이해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먼저 답이 정해진 의도된 질문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신 안에 문학 경험들이 쌓여 가면서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오혜경)
5. 오늘 여기에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우리 회에 들어오기 전에는 안데르센 동화를 완역 그대로 읽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출판된 책들의 대다수는 원작을 축약하여 다시 쓴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축약하고 재화된 책을 읽고도 우리는 안데르센 동화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어떤 책에 대해 ‘알고’ 있다고 여기면 이후 그 작품을 스스로 잘 찾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안데르센 동화는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서’ 혹은 언젠가 ‘읽은 것 같아서’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모둠에서 안데르센 작품을 반복하여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동안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왔다. 토론을 반복 하면서 이야기가 주는 힘을 느끼게 되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외롭고 부끄러웠던 기억, 움츠렸던 기억이 마구 올라왔다. 이제껏 꽤 오랜 시간 문학을 읽어왔지만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모임 시간이 우리에게 작품을 확장시키는 또 하나의 즐거운 독서 시간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안데르센 동화의 아름다운 가치는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이유와 근거를 들어 밝히는 일에는 게을리 해 왔다. 화요연구 모둠에서 한 작품으로 읽기와 토론, 글쓰기를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문학이 한 개인에게 주는 크고 작은 영향 같은 것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텍스트에 집중하여 구성과 문장과 표현 등을 살펴 쓴 감상글은 매우 세련되게 보인다. 반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듭된 사고 끝에 나온, 삶에 대한 통찰의 한 줄은 얼핏 주관적으로 보이며 다소 투박하고 촌스럽다. 그러나 문학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관점 차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나, 우리는 작품을 구성하는 외적 장치들은 훌륭한 작품에 따라 오는 요소이며, 삶에 대한 통찰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문학의 진정한 모습이라 깨달았다. 연구실 회원들과 함께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를 나누며 더 재미나고 귀한 경험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