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정읍은 축복받은 해였습니다.
첫째는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훼철되지 않았던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합격되었다.
전국의 8개 서원이 공동 등재 되었지만 정읍의 무성서원은 옛 모습을 증축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했고, 민가에 가까이 있어 서민 친화적이라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무성서원은 이제 전 세계 인류의 공동재산 지정된 유산으로 국제적 차원에서 보존·복구 등 특별 관리되고 있는 문화 및 자연유산의 목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뒤로 단체 관광객이 버스로 많이 와서, 정읍 쌍화차(雙和茶) 거리를 2차 코스로 들르는 시너지효과를 낳았습니다.
무성서원 견학 후 입구에 조선시대 사설 출판물인 태인방각본 고서(古書) 박물관에 들려, 영인본(影印本)이지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정읍 고부출신 백운화상 스님이 쓰신 ‘직지심경’ 을 구해다 놓아 볼 수 있습니다.
직지심경 부연설명을 조금 더하자면 원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인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80년을 앞서서 금속활자를 만들었지만 세계 최초를 직지심경에 주지 않는 이유는, 서양에서는 성경을 대량인쇄해서 루터의 종교개혁 하는 원동력이 되어 서구인들의 무지를 깨우치는 데 공헌을 했지만, 직지심경은 조금 인쇄 했고 많이 했더라도 한문이라 어려워 서민은 읽지 못해 무지를 깨우치는데 공헌이 적었으므로 세계 최초 타이틀은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단순한 불교서적 요약본이 아니라, 아무 매개(媒介: 석가, 공자, 예수 등 위인들)를 통하지 말고 혼자 스스로 자기마음을 직지(直指: 스스로 참선하여 똑바로 깨달아라! ) 하는 선(禪)불교에 가까운 훌륭한 독창적 사상인데, 한글창제 이전 고려때라 한글로 쉽게 많이 인쇄했으면 민중의 무지를 깨우치는데 공헌을 많이 해서 세계최초가 되었을 터인데 아쉽습니다.
어찌보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와 데카르트가 한말 “나는 생각 한다 고로 존재한다.” 등과 비슷한 훌륭한 사상인데 성경말씀 외에 딴소리하면 목숨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중세에 서양 철학자들이 한말들은 목숨 걸고 한 말이고, 쉬운 글이라 파급력이 좋았지만, 직지심경 말씀은 전부 한문이라 너무 어려워서 전달이 안되어, 파급력이 적어 세계 최초 명예를 인정받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사설 출판한 방각본으로 인쇄문화가 발달된 정읍민중들이 많이 깨우쳐 동학혁명의 사상적 원동력이되어 동학혁명기록물도 세계기록문화 유산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동학혁명(東學革命) 기념일을 가지고 50년 넘게 기념식 하던 정읍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동안 무관심하던 전주와 부안 고창 등 여러 곳에서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논리를 만들어, 수년째 자기들 고장이 주장한 날짜가 맞다고 주도권을 잡으려 논쟁을 하니, 동학혁명 후손들이 “우리 조상님들 제삿날 좀 제발 빨리 정해 주십시오.”하고 하소연하던 것을 정읍이 주장한 농민군 최초의 승리일 5월11일로 제정된 것이고,
셋째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 과 태조 ‘어진’(御眞)을 정읍 선비 안의와 손홍록 두 분이 본인들 가솔과 자비를 들여 내장산으로 이안(移安)한 날 6월 22일을 전국의 수많은 후보지를 압도하고 ‘문화제 지킴이의 날’로 선정되어 정읍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실록’을 지킨일은 ‘문화제 지킴이의 전국적 모범’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록은 경복궁 내 춘추관,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 충청도 충주 4곳에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피신하자 왕이 백성을 지키지 않고 도망갔다고 경복궁내 실록은 백성들이 태워버렸다.
경상도 성주와 충청도 충주 실록도 왜구가 점령 후 정보를 뺏길까봐 백성들이 태워버리고, 전라도 바다는 이순신이, 육지는 금산에서 의병장 조헌(趙憲)과 700명의 의병이 전라도에 들어오는 왜병을 막아내어, 전주사고만 안전하게 감출잔소를 찾던중, 내장산용굴內藏山龍屈: 로 결정했습니다. 조상님들이 실록과 어진을 감출지 알고 선견지명으로 지으신 이름 같습니다. 안내(內) 감출장(藏) 내장산에 용은 왕을 상징하니 용굴에 이안하여 보존하였다.
실록의 가치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오백년의 긴 역사를 왕의 간섭 없이 왕의 말을 모두 정직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는 황제의 눈치를 보고 써서 값어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폭군 왕이라도 “내가 무서울 게 하나도 없는데 사관이 제일 무섭다” 라고 하듯이 자정작용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처럼, 전주 경기전(慶基殿)에서 금산사(金山寺)를 거쳐 태인 동헌(東軒)과 호남제일정 피향정(披香亭)을 보고, 다음 인현왕후와 조선의 최고 행운의 신데렐라왕비 최숙빈이 만난 대각교(大脚橋)도 보고. 조선최고 비운의 단종왕비 ‘정순왕후’가 태어난 칠보의 비각(碑閣)을 본 다음 볼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소 (임실 옥정호의 물을 동굴을 파서 낙차가 큰 칠보산으로 옮겨서 만드는 방식) 를 민간인도 견학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으므로 들어가 볼만합니다.
그다음 풍수가 좋은 산외 지네 명당에 지은 조선시대 99칸 김명관 고택을 보고, 주변에 옥녀직금, 평사낙안, 갈마음수, 군신봉조형 등 전국에서 명당이 많다고 소문이나서 땅을 볼 줄 아는 분들은 산외로 많이 이사 오셨다고합니다.
맛았는 산외 쇠고기로 점심을 포식한 후 수청리 저수지 밑의 유상곡수(流觴曲水)터를 보고 (유상곡수: 경주 포석정(鮑石亭)은 돌로 다듬어서 술잔을 돌리며 시를 지으며 즐겼지만, 원래 시냇물의 물길을 동그랗게 돌려서 중국 왕희지 시인들이 놀던 것을 최치원님이 보고 수청리 저수지 밑 동네에서 풍류를 즐기셔서, 동네에 이름만 남아있던 것을 현재는 칠보 물놀이장에 만들어 놓았다) 내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내장 저수지 밑에는 농업박물관과 시립박물관을 볼 수 있고, 음악분수와 어린이 실내 첨단시설 놀이터가 있고, 자동차 캠핑장이 축구장크기만 한 잔디와 조경에 시냇가에 잘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돌면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과 동상이 있어 그때 함성이 들리는듯하고, 조금 더 가면 임대 캠핑장이 하나 더 있고 순창 갈재를 넘으면 산림 박물관이 있는데, 정읍과 순창 박물관들은 다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내장산 매표소에서 내장사까지 버스가 운행되니 내장사에서 왼쪽으로 걸어가면 실록 보관 장소였던 용굴까지 걸어가 볼 수 있고, 힘이 남는 사람들은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고창고인돌 유적지를 보러 가고 람사르 습지도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지역’ 중 핵심지역이라 할 해변이라니고창까지 가는 길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여 ‘유네스코 탐방길’ 이라 명명하면 좋을듯합니다.
고창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5관왕인 도시다 유형문화제 고인돌, 람사르습지, 지질공원외에 무형문화제 판소리, 고창농악 등이있고 원형이 잘 보존된 모양성(城) 과 석정온천 선운사 장어에 복분자 술 등이 있어 고창군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도시입니다.
전 세계 고인돌 60%가 한반도에 있는데 호남지방에 70%가있고 고창같이 밀집된 곳에 잘 보존된 곳은 세계적으로 없다 한다.
고인돌 밀집지역을 자세히 보면 여성의 자궁의 위치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지형이 여자가 두 다리를 벌린 형국인 것을 보면 조상님들의 죽은 자가 어서 ‘다시 태어나십시오.’ 하는 환생설을 믿는 기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인돌 무덤보다 다음 세대의 발전된 무덤 형식인 백제귀족들의 독특한 돌방무덤도 영원면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다.
유네스코 유적지를 가까운 곳에서 한 번에 일곱개나 볼 수 있는 이렇게 유서깊은 관광자원 길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이런 길을 개발해서 걸어보고 전 세계에 홍보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넘어서는 관광코스가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