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인생에서 참 소망을 품다. / 2016년 12월 18일 주일 예배
본문 / 시편 39:1-13
사람들은 그 인생의 무상함을 꿈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고사성어에는 그런 표현들이 많은 데 일장춘몽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생은 한 바탕의 봄꿈처럼 덧없다는 말입니다. 이사야서에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다’ 말씀합니다.
타락한 인생들은 그 허기진 정욕과 탐심의 배를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와 영광으로 두둑하게 채우길 원하지만 결코 그것은 만족시킬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마치 그것은 꿈을 꾸고 난 후에는 여전히 허무함만을 남겨 놓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도 인생의 허무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고 노래합니다. 어떤 가수가 이렇게 인생을 노래합니다. ‘세상에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여러분도 한 번 쯤은 들어 보셔서 아실만한 노래입니다. 정말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이 세월은 흘러 인생은 덧없이 흘러가고 뭔가 잡으려고 달려 왔지만 무엇을 얻었는지 알 수 없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이제 그 떠나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나 그것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이제 세상을 떠나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길 없는 인생이 그 불안과 두려움을 노래하는 사람에게 유일한 위로는 인생의 허무함을 안주삼아 마시는 쓰디쓴 술 한 잔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나 봅니다. 저도 술이 어떤 맛인지는 압니다. 그것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닙니다. 목마름이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잠시 나마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시는 것입니다.
잠언 31장에서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깨고 나면 허전한 것처럼 술에서 깨어나면 여전히 인생은 그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본문 시편 39편은 다윗이 임종직전에 저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나그네 인생의 여정의 종착역에 거의 다 이르렀다 직감한 다윗은 그 마음에서 하나님 앞에 무엇을 토해 내었을까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 세상의 삶이 올해뿐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인생 중에 있었던 어떤 특정한 범죄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의 모든 삶에 대하여 참회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고백합니다. 다윗은 세상에 보내진 인생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난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 타락한 인생은 정욕과 탐심이라는 이기적 욕망으로 만족하기 위해 인생을 불태우는 어리석은 사람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시고 신정왕국의 왕으로 세우시고 수많은 대적과 원수들로부터 지켜주시고 인도하시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 인생을 참회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인생길의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요?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오니, 걸음마다 자욱마다 다-죄뿐입니다, 쓰리고 아픈 마음 가눌 길-없어서, 골고다 언덕길을 지금 찾아옵니다. 나 같은 못난 인간 주께서 살리시려, 하늘의 영광보좌 모두 다 버리시고, 천하 디 천한종의 형상을 입으셨네, 아-아 주의 사랑 어디에 견주리까’
본문에서 다윗은 죄와 질고의 삶을 살다 마침내 죽어 그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 인생의 허망함에 대한 깊은 절망을 토로합니다. 본문 4절과 5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앞에서 인생을 노래하는 어떤 가수의 그 노랫말이 정말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하였는데 만약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면 공감이 아니라 진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생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그 노래가 정말 공감이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생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운전을 하는 데 노래가 나옵니다. ‘세상에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 잔하면서. 이게 뭐야 무슨 말이야. 인생을 노래할 때는 100% 공감이 갔는데 그 해답을 제시하는 곳에서는 흥이 딱 떨어졌습니다.
아~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들은 그들이 가는 길을 알 수 없구나.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거기까지는 정말 공감이 가는 데 술이나 한 잔하면서 세상 시름 잊고 그냥 살다 가라는 데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던져진 인생은 왜 허무할까요? 어떤 시인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말합니다. 시인은 곁에 사랑하는 그 어떤 존재를 두고도 여전히 그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 없어 외롭다고 합니다. 저는 시인의 그 탄식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의 실존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사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원하는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욕과 탐심에 일시적인 만족은 줄 수 있지만 영혼에 참 된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시인이 말한 그대가 여자라면 여러 명의 그대를 곁에 두면 외롭지 않을까요? 큰 권력과 명예와 인기와 물질을 곁에 둔다면 그 마음을 꽉 채울 수 있을까요?
다윗은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을 때에도 모두가 진실로 허사뿐이라고 탄식합니다. 든든히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과 인생의 연약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재산이 불어날수록 인생은 더 든든하게 세워지고 사람들은 그들의 날이 세상에서 원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욥은 고백하기를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두며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하였다”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 방이면 훅 간다는 말을 합니다. 아무리 든든하게 인생의 집을 지어도 훅 가는 데에는 하나님의 손가락 하나도 필요치 않습니다. 허사의 히브리어 ‘헤벨’은 신기루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타락한 인간의 그 삶이 신기루를 쫓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갈증에 허덕이는 여행자들에게 신기루는 일시적인 희망을 줍니다. 지치고 힘든 여행자들은 앞에 펼쳐진 시원한 호수를 향해 걷고 또 걸어 보지만 그 호수의 물을 절대로 마실 순 없습니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을 잃은 여행자들은 신기루를 따라가다 죽고 맙니다.
지금 인생들의 삶이 잡을 수도 없고 만족할 수도 없는 신기루와 같은 허상을 추격하는 허사가 아닙니까? 사실 세상의 불신자나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들의 삶이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성도들은 그 허상을 쫓는 일에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진리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성도는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더 분명한 믿음과 영의 눈으로 진리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결코 다시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성도들을 향하여 부족함이 없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기도합니다. 왜 다윗은 하나님, 내 인생을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내 연약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강한 척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세상은 힘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은 인생들에게 숭배의 대상이지만 하나님을 만난 성도에게 그 힘은 타락한 인간의 교만이며 죄악이며 결국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허사일 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40년 가까이 통치해 오고 있습니다.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토를 획득하고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를 거두는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인생을 달려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아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삶의 끝자락에서 인생의 연약함을 깨닫기 원합니다. 은사가 강하게 나타나면 그 하나님의 능력을 자칫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큰 권능을 행하는 자들이 교만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지금 대통령도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자기 권력으로 사유화하여 국정을 농단하고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닙니까? 나의 본분은 국민의 한 사람에 불과하며 이 권력은 국민이 잠시 내게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사용하라고 맡긴 것임을 알았다면 권력에 취해 무책임하고 망령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권력과 권세, 명예와 명성 즉 부귀영화의 정점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는 능력과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정치적으로는 존경받는 왕이며 종교적으로도 제사장과 선지자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윗의 축복을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넣고 그저 하나님 앞에 한 인생, 한 영혼으로 서기 원합니다. 왕도 아닙니다. 용맹한 장수도 아닙니다. 예언자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한 연약한 인생일 뿐입니다. 주님 앞에 내 인생이 한 뼘 길이와 같다 고백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던지시고 그 인생을 살게 하셨는데 그 길이가 한 뼘같이 아주 짧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없는 것 같다는 겁니다. 다윗의 인생에 대한 탄식은 그 삶의 길이가 세상을 살기에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인생이란 연약함 그 자체라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서 인생을 살다가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인 것입니다.
참 인생이라 것이 희한합니다. 10여전 전에도 젊다는 소리를 들으면 살짝 짜증이 났습니다. 누가 젊은 목사님이네 하면 기분이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젊다는 말이 듣기 좋으니 말입니다. 젊어서는 어리다는 소리가 듣기 싫고 나이 들어서는 늙었다는 말이 기분 나쁘니 이래저래 인생은 그 육체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나 봅니다. 지나고 보니 젊다는 소리를 들을 때도 한 때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증언합니다. 칠십을 살던 팔십을 살던 백 이십을 살던 인생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신속히 날아가고 빠른 것도 모자라 수고와 슬픔의 짐을 지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오직 연약한 한 인생과 한 영혼으로 설 것입니다. 어느 나라의 국민도, 어느 지방의 사람도, 어느 부모의 자녀도, 어느 누구의 부모도, 어떤 직업도, 어떤 교단이나 교회도, 어떤 직분이나 은사도 아닌 오직 연약한 한 인생 말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혈과 육에 매인 인생을 살면 안 됩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본문 11절에서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입니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결국 인생이란 그 모든 일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잡을 수 없는 신기루를 쫓아가는 인생이 그 짧은 인생을 살다가면서도 그 종말과 연한도 모르니 더더욱 인생은 연약하고 헛될 뿐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도 전도서를 통해 인생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세상에서 인생들이 행하는 모든 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자신은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으로 즐겁게 해보았으나 그것도 헛되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가치 있게 평가하고 그것이 후대에도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윗 같이 인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에 아무리 큰 이정표 남긴다한들 그것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 인생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평가 받는 것이 죽어 세상을 떠난 인생에게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다윗은 본문 6절에서 인생들의 역사에 대해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증언합니다. 그림자의 히브리어 ‘첼렘’은 허상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인생들의 세상의 삶은 실체가 없는 유령 같은 삶을 살다가는 것입니다. 그 유령 들이 뭔가 세상에 족적을 남기기 위해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실상은 아무 의미 없고 가치가 없는 허사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는 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믿음으로 인하여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인생들의 역사적인 판단과 평가로 인해 그가 기뻐하고 그의 영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오직 자신의 전 인생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연약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욥을 연단하셨습니까? 욥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축복을 의지한 것은 아닐까요? 그 헛된 것을 말입니다. 알몸으로 온 인생이 세상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옷을 입고 자신을 과시하며 역사의 주인으로 살려합니다. 그 타락한 인생이 다시 주님 앞에 가려면 알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욥을 다시 알몸으로 만드신 것도 그런 것 때문이 아닙니까? 욥아 너는 알몸 즉 내가 빚어 만든 티끌이며 진흙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욥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너무 많은 옷을 입으려 합니다. 옷장에는 일 년에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하는 옷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목회자의 이력은 너무 많습니다. 세계~, 국제~, 한국~, 학교~, 교단~ 그리고 마지막에 어느 교회 담임목사, 그 많은 옷들이 그를 하나님 앞에서 영화롭게 할까요?
야곱은 자기 옷이 많았어도 아버지께 축복을 받으러 갈 때에는 그 옷 다 쓸모없고 오직 장자의 옷을 입고 갔습니다. 자기 옷을 입고 가면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갈 때에 성도가 입을 수 있는 옷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은혜와 믿음으로 입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이 있는 성도는 세상에서 그 인생으로 정말 그 옷 하나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옷 저 옷 많이 챙겨서 세상에 자랑하는 인생들을 보면 저 인간이 참 소망이 있는 성도인지 의심이 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의 연약함을 깨닫기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란 죄인으로 세상에 와서 그 죄를 먹고 살다가 멸망 길로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죄인 된 인생들이 세상에 배설해 내는 모든 일들이 다 헛될 뿐이며 그 헛됨을 인생들도 알기에 아무리 어떤 큰 업적을 세우고 공로를 인정받는다 해도 그 허무함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입니다” 말씀합니다.
설교자의 인간적인 로망이 있다면 많은 회중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설교해 보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오 십 명의 청중을 오백 명으로 세뇌를 시킵니다. 현실 부정을 믿음으로 오해합니다. 많은 성도들 앞에서 하는 설교가 흥분은 되지만 그 흥분은 설교를 마치고 나면 곧 허무함으로 식어버립니다. 사람들에게 나 설교 잘하지 능력 있지 인정받고 싶어 쇼를 하고 싶은 겁니다. 연예인들은 쇼가 클수록 끝나면 말 할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온다고 합니다.
성도는 무대를 즐기면 안 됩니다. 때가 되면 무대는 막을 내리고 철거됩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인생의 무대를 세팅하시고 철거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을 즐겨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상의 많은 축복으로 울타리를 둘러 주셨지만 결국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서 알몸으로 서기 원합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질고를 지고 인생을 살다 이제 주님의 부름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죄를 지었으나 이제 내 인생을 돌아보니 모두 죄 뿐입니다. 결국 노년의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연약한 인생과 죄인으로 드러났습니다.
본문 8절로부터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주의 징벌을 내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고백합니다.
성도는 연약한 인생으로 죄악 된 세상에서 죄인들에 휩싸여 살아갑니다. 본인도 연약한 죄인이지만 주변의 형제도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죄로 인해 곤고함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웃이 자신에게 범하는 죄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됩니다. 더욱이 그들이 조롱하며 그 죄를 자랑까지 한다면 성도의 그 고통은 견디기 힘듭니다.
다윗도 본시의 서두에서 악인들의 죄로 인하여 고통스럽다고 하소연합니다. 다윗은 악인들의 그 죄악으로 인한 고통에서 자신의 입에 재갈을 먹이는 심정으로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잠잠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가 입을 다물고 인내할수록 마음의 고통은 커져만 갑니다. 그리고 다윗은 마침내 입을 열고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토로합니다. 나의 죄와 악인들의 죄로부터 연약한 인생을 도우시고 구원하실 부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악인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연약한 인생과 죄인으로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도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오! 주님 나는 약한 나그네로 이 슬픈 세상을 삽니다. 나의 죄 너희 죄로 인하여 고통 받는 인생이오나 그 연약함과 절망 중에서 건져주시는 주님께 소망을 둡니다. 이제 나는 수고도 병도 죄가 없어 더 이상 어떤 고통도 방황도 없는 주님을 향해 갑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갈 때 그 은혜로 넉넉히 받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 연약하고 비참한 죄인으로의 죽음은 곧 성도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내가 목이 마르다 하시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은 곧 성도의 연약한 인생을 말합니다. 성도는 그가 가는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를수록 연약한 인생과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아! 나는 믿음으로 제대로 살았다 할 성도가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제대로 살아 보겠다고 몸부림도 안칠뿐더러 설령 그런다 하더라도 결국 성도는 연약한 인생이며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누가 내게 죄를 지었다고 그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피난할 때 시므이의 저주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말하며 다윗은 연약한 인생과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였습니다. 연약한 인생과 죄인임을 깨달아가는 길이 성도가 가야하는 인생의 길이며 믿음의 길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름으로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이 다가옴을 알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빨리 내게로 오라 편지를 보냅니다. 저는 디모데서를 읽으면 디모데를 보고 싶어 하는 바울의 애절한 마음에 눈물이 납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절하고 모진 고문과 고통을 참아내며 믿음을 지키다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마시고 싶다’ 였습니다.
저는 그 순교자가 남긴 마지막 말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 그도 연약한 인생이었구나. 못에 찔리면 아프고 뜨거운 인두로 지지면 그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기절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목이 마르다 십자가에서 외치신 주님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생으로 고통을 받을 실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연약한 인생의 실존은 죄로 타락한 결과가 아닙니까?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인생을 통하여 죄를 배설하며 사는 존재로 드러날 때 말할 수 없이 절망하지만 그 뜨거운 절망과 절규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소망이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가슴을 찢으며 울다가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웃게 됩니다. 시편 30편에서 다윗이 이르길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더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연약한 인생과 죄인으로 몰고 가시는 것은 그 절망으로 인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참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결국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만족도 얻을 수 없는 존재이며 인생의 만족은 그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뿐임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은 본문 7절에서 하나님께 단호하게 외칩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리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을 통해서 이 믿음의 고백을 뽐아 내기위해 그의 인생을 몰아가셨습니다. 목자가 푸른 초장과 쉴 말한 물가로 그 양을 인도하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이끄는 것은 그 양으로 하여금 분명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본문의 시를 쓰기위해 이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생을 살았던 겁니다. 그리고 인생의 그 끝자락에서 결국 하나님, 인생은 허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세상에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그 일이 나를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 하나님 없는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생이 절망뿐임을 배웠습니다. 연약한 인생과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허망한 인생에서 참 소망을 품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윗과 같은 믿음의 고백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도로 부르심은 결코 후회함이 없는 은사(선물)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지금 우리는 주와 함께 가는 나그네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육체의 욕망은 성도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서러움과 고통과 외로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난 까지도 믿음을 만들어 내는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세상에 보낸 것은 그가 세상에 나가 아버지를 떠난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탕자의 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탕자의 인생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고 성도들의 삶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옥중에서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더욱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아름다워 보입니다’ 라는 글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망도 없는 개고생을 하다 멸망 길로 가지만 영원한 소망이 있는 성도는 개고생을 통해 믿음을 배우고 소망을 더욱 키워나가니 그 개고생도 하나님의 주신 사랑이며 영광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연약한 인생과 죄인임을 깨닫고 그 허망한 인생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시는 주님께만 참 소망을 두는 믿음의 사람으로 든든하게 세워져 가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