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우물
나무 그림자 일렁이는 우물에
작은 새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간다
희미한 낮달도 얼굴 비쳐보다 간다
이제 아무도 두레박질을 하지 않는 우물을
하늘이 언제나 내려다본다
내가 들여다보면
나무 그림자와 안 보이는
새 그림자와 지워진 낮달이 나를 쳐다본다
흐르는 구름에 내 얼굴이 포개진다
옛날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던 물맛이
괸 물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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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소요逍遙
한밤중의 적막을 흔들어 깨우는
슈베르트의 현악 오중주,
어둠 속에 누워 눈을 감는다
공기의 입자들이 미동하고
나는 포근한 숨길을 나선다
알래그로 마 논 트로포,
꿈결을 비몽사몽 헤엄치는 동안
지나온 길들이 일어서며 다가온다
잊었던 슬픔들이 얼굴을 내민다
아다지오에서 프레스토로
불현듯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따금 끼어드는 뿔피리 소리,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미지의 신비 속으로 든다
첼로 소리가 문득 뛰어오르듯
바이올린의 음역에까지 올라간다
그 소리처럼 나도 공중에 뜬다
알레그레토-날개가 돋은
내가 천장까지 오르내린다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내가 나를 벗어나기도 한다
그 심연 속에서 나는
어둠을 흔들며 솟구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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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 대한 몽상
별들이 또 마음 흔든다
나는 저 별의 작은 부스러기일까
왜 별을 향해 팔을 뻗게 되는 걸까
옛 동방박사들은 빛나는 별을 따라나서
갓 태어난 아기 성자를 알현하면서
경배를 했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뜬금없는 생각을 할까
하늘에 별들이 없었다면 어떠할까
시인들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꿈을 꿀 수 있었을까
보리수나무도 골고다 언덕도
이토록 신비와 경이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처도 없이 헤매야만 하는지,
하나의 꿈이 속절없이 스러지고 나면
또 다른 꿈이 허공을 떠돌다 말 뿐
어둠이 짙어질수록 왜 이리 자꾸만
별들을 향해 팔을 뻗게 되는 것일까
내가 작은 별의 부스러기여서
별을 자꾸만 끌어당기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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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썽이다
물방울 속으로 들어간다
물방울이 된 나는
물방울 속에서 내다본다
투명하고 영롱하게
담백하고 정갈하게
풀잎에 글썽이는 아침 이슬
이슬방울로 잠깐
나도 햇살 받으며 ㅠ글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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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다리며
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다 간다
비행기 한 대가 아득히 멀어진다
어느 하늘 아래 떠돌고 있는지
돌아올 수 없어서 그런지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간다
나는 다가오다 말고 되돌아간다
허공에 멀겋게 떠 있는 낮달
해가 서산 위에 기울어도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참다못해 찾아 나서 보아도
끝내 내가 나를 만나지 못하면
그대로 되돌아오라는 것인지
나를 목마르게 불러 봐도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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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마琢磨
썼다가는 지운다
지웠다가 되살려 쓰고
고쳐서 다시 들여다본다
처음 떠올린 마음을 되짚으면서
바뀐 마음도 들여다본다
잘못 바뀐 것 같기도 해
주저하다 초심으로 되돌아간다
지웠던 마음 되살아나고
또다시 바뀌는 마음이
그 위에 포개진다
몇 번이나 지웠다가 살리고
고쳐서 다시 또 들여다본다
챗바퀴 돌리는 다람쥐 같이
같은 궤도만 맴돌았던 말들
그나마 둥글어지긴 했는지
깎인 모서리를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