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안인숙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동그라미를 그리며 더듬거렸다. 다른 것을 만나 웃는 듯 퍼졌다. 멀어져가던 빗방울 발자국은 안방 빗물받이로 놓은 노란 양은 대야 속으로 들어갔다. 대야 속에도 물결이 일렁였다. 동그라미가 마음밭 언저리를 툭 건드려 기억 조각들이 튀어나왔다.
안방과 건넌방, 부엌이 일자형을 이루는 작은 기와집이다. 섬돌 위에 여러 가지 크기의 신발들이 가지런하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돌멩이로 테를 두른 작은 화단이 있다. 트럼펫을 불며 아침을 알리는 나팔꽃, 땅에 붙어 투명한 꽃잎조차 겸손해 보이는 채송화, 손톱을 붉게 물들이던 봉숭아, 저녁 지을 시간을 알려주던 수줍은 분꽃 등이 소박하고 다정하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새하얀 기저귀가 햇살에 눈 부시다.
안방과 건넌방을 가로지르는 미닫이문 위에 형광등이 걸려 있다. 흐린 불빛 아래, 환한 미소를 띤 엄마가 갓난아기를 보며 누워 있다. 엄마는 여덟 아이에게 목숨을 나누어주었다. 새 생명을 낳고 키우는 동안, 콩을 모두 내어준 콩깍지처럼 시들어 쪼그라들었다. 세월의 물결이 고단한 육신에 스며들어, 침대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애써 울지 않으려는 듯 참았던 찌뿌드드한 하늘이 조금씩 더 굵은 비를 내렸다. 짐짓 빗장을 질러 걸어 두었던 마음자리에도 비가 내렸다. 생소한 것이 닿은 듯 울렁거렸다. 우겨 눌러두었던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엄마 침대가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나와 있다. 보호자가 간이침대로 쓰는 긴 의자도 없다. 삭막하고 건조한 병실을 비추는 햇빛도 병든 듯 희미했다. 가랑잎같이 바스락거리던 엄마는 나뭇등걸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병마에 지쳐 그만 죽게 내버려 두라던 웅얼거림도 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아직 귀는 닫히지 않았으니 작별인사를 하라고 하셨다. 누군가 다가가서 인사말을 건넸다. 구석에 서 있던 나는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무겁고 텁텁한 공기가 찍어 눌렀다. 침대는 어느새 병실 문을 나서고 있었다.
마지막 새 옷을 입고 새 신을 신으셨다. 머리를 곱게 빗어넘기고 화장하고 향수도 뿌렸다. 주변을 하얀 꽃으로 단장했다. 좁은 뜨락이라도 꽃을 피워 내시더니, 이제는 장례도우미가 챙겨온 국화꽃다발을 묵연히 받고 있다. 저 꽃이 내가 서천 꽃밭에서 얻어온 뼈살이꽃, 살살이꽃, 숨살이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받기만 했지 뭐 하나 해 드린 것이 없어, 서걱거리는 가슴에 비안개 자욱이 쌓였다.
엄마는 아버지가 입대한 이후, 간장 몇 바가지를 팔아 월세방을 얻어,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분가했다. 유복한 집안에 장녀로 태어났지만, 6·25동란으로 집안은 가뭇없이 스러졌다. 그 이후 오랫동안 생활고가 검질기게 따라붙었다. 사과 광주리장사도 하고 부업도 끊임없이 했지만, 애옥한 살림살이는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엄마의 보살핌으로 가난이 절박하지는 않았다. 밥을 해도, 꼬들꼬들한 밥을 좋아하는 자식에게는 윗밥을 주고, 보통 밥을 좋아하는 자식에게는 아랫밥을 주었다. 좋지 않은 밥은 엄마가 헹궈서 드셨다. 밥이 부족하면 엄마는 굶었다. 그나마 아버지가 “엄마가 먼저 갈 줄 알았어. 젊었을 때 많이 굶었어.”라고 말씀하셔서 알았다. 부족한 것, 좋지 않은 것은 늘 엄마의 차지였다. 우렁이처럼 몸과 마음을 모두 내어주고 품어서, 자식들이 비빌 수 있는 언덕이 되었다.
빗방울이 수면에서 높이 뛰어올라 여러 갈래로 퍼져 왕관 모양을 만들었다. 떨어지는 물방울마다 자매들 얼굴이 맺혔다. 빗방울이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왕관을 만들어 엄마에게 씌워드리려는 것만 같다.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합쳐서 다시 한 줄기가 되었다. 조금씩 다른 우리 자매도 엄마가 내어놓은 물줄기를 따라 흘렀다.
새 신을 신고 흰 국화꽃을 밟으며 본향 꽃밭으로 떠난 엄마가 자식들을 못 잊어 비가 되어 내리는 것 같다. 육십이 넘었는데도 다시 아기가 되어 빗물받이 놓인 옛집에 눕고 싶다. 애틋한 눈길로 엄마는 생명수인 하얀 젖을 먹일 것이다. 마당에는 여전히 기저귀가 나부끼고, 나는 사랑에 겨운 나른한 하품을 할 것이다.
어린 시절에도 내렸던 비가 기억을 어루만진다. 그리운 얼굴이 하늘에서 흘러내린다. ‘하늘나라에서는 더는 아프지도 않고 편안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이며 위로한다. 살아가며 일이 생길 때마다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엄마 손을 가만히 잡을 수 있다면…….
목마른 가슴을 적시는 빗줄기를 따라 올라가 엄마가 계신 하늘에 닿고 싶다.
출처 : 글로벌경제신문(http://www.getnews.co.kr)
첫댓글 축하합니다.
감각적인 표현으로 어머니의 그리움과 슬픔을 묘사하셨죠.
어머니는 우리의 고향,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시죠.
마음으로 다가 갈 수 있는 먼 곳.
언젠가 우리도 갈 그곳을 기리며 지금 여기에서 열심히 살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