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의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 또는 대한 독립 만세 운동(大韓獨立萬歲運動)은 일제강점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줄여서 기미운동(己未運動)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최근, 본 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고려해 3.1 혁명(三一革命)이라고 부르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 대표 33인으로 부르며, 이외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적,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 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 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 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 수가 106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900여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한편 신복룡 교수나 일본의 야마기 겐타로 약 50만 명 정도가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1][2] 1919년 3월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의 전체 인구는 1,678만 8천400명이었다.[1][1][2]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 중 2.76%에서 2.97%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 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 총독부는 민족 분열책인 일명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천주교는 흥선대원군의 탄압후유증(7천여명 천주교인 살해)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2. 배경
데라우치 마사타케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으로 계승된 무단 통치는 “3·1독립운동”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발생케 했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1918년 말부터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소요사태를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과 1919년 초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종 황제의 죽음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 절묘하게 기회를 포착하였다.
중국에 유학중이던 여운형과 신규식 등은 이 선언과 뒤이은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해 파리 강화 회의에 불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견하고, 조선쪽에는 일본어에 유능한 장덕수를 파견한다. 이러한 소식은 조선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을 상당히 고문하는 소식이었다.[3]
그리고 여운형 자신은 중국 길림 성으로 가서 활동하여 무오독립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 만주 지린(간도)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약연등과 만나서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원칙등 상황을 설명하였고, 이는 무오 독립선언에 영향을 주었다.[4]
1919년 출국 전 김규식은 상하이의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의 주문을 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6]
또한 때마침 발생한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역시 일본인들이 고종을 독살하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절묘하게 만세시위 확산에 기여하였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고종의 죽음 역시 국민적 감정을 자극해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이 왕세자와 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 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 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26일 일요일
3. 대표자/주도자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나, 만해 한용운이 보고는 너무 어려운 한문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 하여 다시 쓰기를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의 연합으로 만세 시위 계획과 장소가 결정되었다. 불교계의 대표로는 한용운 등이 참여하였다. 최남선의 초안에 춘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만해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
한편 윤치호는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이는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그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9]
준비 과정에 일어난 신철에 관한 일화가 있다.[8] 1919년 2월 하순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普成社)를 급습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 일명 申勝熙)은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보는 앞에서 윤전기를 멈추고 〈독립선언서〉를 빼내어 보았으나 그냥 돌아갔다. 이종일이 최린에게 보고하자 최린이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돈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3월 1일로 앞당겼다.
2월 28일경 손병희의 집에 모여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민족대표가 모일 장소는 태화관(泰和館)으로 바뀐다.
3.1 만세 운동의 첫 날 경성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 대표자 33인을 말한다. 여기에 박인호, 김홍규, 노헌용, 이경섭(이상 천도교), 김도태, 안세환, 함태영, 김원벽, 김세환(이상 기독교), 임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강기덕, 정노식, 김지환, 한병익 등을 합쳐 민족대표 48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밖에 3.1 운동 당시 참상을 사진으로 촬영,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에 알린 스코필드 역시 별도의 조선인 민족대표자로 보기도 한다
4. 3.1독립운동발발과 확산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김산은 자신이 3.1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그 후 독립운동가이자 혁명의 길로 걷게 했던 1910년대 학생시절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어린이들의 귀에도 이따끔씩 가까운 만주국경에서 일어나는 흥미 있는 사건에 관한 소식이 들려온다. "이틀 전에 10인조가 들어와서 왜놈을 여섯 놈이나 죽였대. 우리 편은 한 명밖에 죽지 않았대. 나머지는 국경을 넘어 멀리 사라져버렸대." (중략) 영웅에 대한 존경심으로 우리들의 마음은 불타올랐다. 그래서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독립군에 가담해서 침략자 왜놈들을 기습공격하기 위해 공격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오겠다고 새로이 결의를 다지곤 했다. (님웨일즈,1998<<아리랑>>, 동녘, p54.) 김산처럼 이 시기 청년 학생들은 일제 식민지 현실 속에서 시대적·민족적 고민을 하고 있었으며, 마침내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적 울분과 독립의 열망을 폭발적으로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1917년 후반에서 3·1 운동으로 이어지는 1919년 초의 시기는 우리 민족이 고난의 시절을 겪던 시기였다. 3·1 운동은 그 頂点(정점)에서 일어났다. 이 시기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인을 희생시키는 제국주의 본질을 드러냈고 식민지 지배의 모순과 수탈성이 민중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침으로써 한국인들의 분노와 조직적 저항을 분출시킨 3·1운동을 예고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1917년은 이러한 과정의 시발점이 된 해였다. 1918년에는 일본인의 미곡 투기에다 일본 정부까지 나서서 한국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자국의 쌀 소동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 한국 쌀값의 폭등 사태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 당국과 일본인에 대한 한국 민중들의 집단적 저항이 잇달았다. 이 시기 한국인의 집단적 저항 움직임이 보여주는 바는 민중들의 상황이 도화선만 있으면 폭발할 수 있는 상태였으며, 3·1 운동과 같은 대내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예고했던 것이다.
1919년 1월 21일 오전 1시 35분 광무황제가 뇌일혈을 일으켜 그날 오전 6시에 서거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하루를 늦추어 22일 오전 6시에 서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10년 전 경술국치 때 부친 유도발(柳道發)의 순절(殉節)을 지켜보아야 했던 안동의 유신영(1853~1919)은 광무황제의 서거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그가 남긴 유서가 독립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유서에서 당시 우리 국민들이 느낀 충격과 민족적 슬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나라가 없으나 임금은 있어 복국(나라를 되찾는 것) 될까 기다렸더니 시방은 상황 돌아감이 쓸 데 없으니 어찌 사노. 이러므로 인산날로 죽기 작정하니 세상은 하직이로다) <유신영 유서>독립 기념관 소장.
황제의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덕수궁 앞으로 애도의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모여 문 앞에서 펼쳐 깐 공석에서 하늘에 사무치게 통곡하는 소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각 조합기생들도 떼를 지어서 통곡하며 재배(再拜)를 하였다. 여인들도 다수 와서 공석에 엎드려 호곡하며 일어날 줄을 몰랐다. <每日新報>1919.1.24.
이 시기 황제의 장례식 도중에 소요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이야기들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윤치호는 1919년 1월 26일 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윤치호 일기>>김상태 편역. 2001. 역사비평사. 망국의 한과 설움이 이 풍문에 의해 증폭되었으며 한국민의 비극적 운명을 황제가 대변하는 느낌이 아닐 수 없었다. 광무황제는 서거 바로 직전까지 건강했는데 갑자기 서거했다는 사실이 이런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독살설'은 일반에게 퍼져 나갔다. 황실의 전의(典醫) 한상학과 종친 윤덕형이 식혜에 뭔가를 타서 광무황제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시종하던 두 궁녀도 그 직후 독살되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每日申報>는 1919.3.16자에서 함구를 위한 두 궁녀 독살설에 대한 해명 기사를 실었다). 3월 3일이 국장일로 결정되자(광무황제에서 장례식은 사망 42일째 되는 날이다. 40일을 전후하여 종친들의 택일에 의해 결정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보다 앞당겨 하기를 원했었다.) 2월 하순부터 황제의 국장을 참관하기 위해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광무황제의 서거는 망국의 비애와 함께 일제에 대한 공분(公憤)의 공감대(共感帶)가 형성되어 민중시위운동을 뒷받침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광무황제의 급서와 독살설은 무엇보다도 민족대표들의 중앙 3.1운동 주도체가 가진 조직적 역량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들은 서울의 만세시위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 독립신문 등의 유인물을 주의 깊게 간직하여 귀향했으며, 혹은 우편으로 친지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