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깊고 어두운 밤(夜)
모든 것이 황금(黃金)이다.
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오십 보(步) 걸어야 맞은편 벽에 당도할 수 있는 너른 방은 네모난 황금판에 뒤덮여 있었다. 그 덕에 천장에 박히어 있는 야광주(夜光珠)의 빛이 번뜩거릴 때마다 방 안은 황금빛으로 타오르게 된다.
호화찬란하기 이를 데 없는 황금의 방.
악마동맹의 무사라면 이 방에 들어오는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여기게 된다.
서열 백 위 안에 이르지 못한 인물이라면 이 방에 들어올 수가 없게 된다.
꾀죄죄한 옷을 걸치고 있는 초로의 노인 하나.
그는 일각(一刻) 전에 네 명의 시비들의 풍만한 둔부가 바로 앞에서 묘한 암내를 풍기며 흔들리는 것을 묘한 기분으로 감상하면서 이곳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무공과는 거리가 먼 학자(學者)로, 악마동맹의 포악한 무사들에 의해 늘 절간의 쥐처럼 쪼달리며 지내 온 처지였다.
악마동맹은 무위(武威)를 숭상하는 집단인지라, 노인이 비록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악마동맹에서는 높은 지위로 올라서지 못한 것이다.
인생의 구 할 가량을 묵향(墨香) 가운데에서 보내 온 노인. 그는 과거 원황실에서 서기(書記) 노릇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해외변황(海外邊荒)의 기록을 담당하고 있었는지라, 해외변황에 대해서는 지극히 해박하게 알고 있었다.
해천옹(海天翁).
그는 악마동맹의 의전당(儀典堂) 소속 마학사(魔學士)가 된 지 처음으로 악마동맹의 최상위자를 보게 된 것이다.
사엽풍(史葉風).
스스로를 북원마제(北元魔帝)라 부르고 있는 인물이며, 당세에서 인물은 주홍무(朱洪武)와 자기 자신뿐이라고 말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대세력을 일으켜 일단 강호(江湖)를 정복하고, 그 기세를 몰아서 대륙을 정복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으나… 사실은 악마십화(惡魔十花)의 세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거대한 기업을 이룩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본시 악마동맹은 잠룡비전에서 자라난 초옥린(楚玉鱗)을 소주(少主)로 섬겨야 하는데, 그는 철저히 제거된 상태였다.
'무슨 일로 노부를 부른 것일까?'
해천옹은 긴장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보라! 허공에 은은한 혈화(血花)가 피어나고, 온갖 향기로운 냄새가 황금전을 가득 메우는 가운데 칠현금과 옥소 소리가 한데 어울려 화음을 이룩하는 것을…….
그르르르릉-!
우레치는 소리와 더불어 황금의 바닥이 쩌억 갈라지며, 십여 개의 괴영이 검은 안개처럼 피어 올랐다.
십이영위(十二影衛).
사엽풍 둘레를 엄밀히 지키는 무사들이다.
벙어리이기에 비밀을 본다 하더라도 말을 하지 못하며… 무(武)에는 천재(天才)들이되, 문(文)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의 문맹(文盲)들인지라… 글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지도 못한다.
악마십이영은 사엽풍을 가장 가까운 데에서 보호하는 무사들이었다.
악마십이영이 검세를 펼치고 난 후에야, 기관장치로 인해 벌어진 암굴에서부터 단(檀) 하나가 치솟아 올랐다.
끼이이익-!
쇳소리가 나며, 자단목으로부터 된 단이 솟아올랐다.
그 위, 하나의 태사의가 안치되어 있으며… 안색이 초췌한 중년인 하나가 팔짱을 낀 채 머물러 있었다.
그가 바로 사엽풍이었다.
그는 소문과는 달리 묘한 공포 속에 머물러 있는 듯, 그의 낯빛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해천옹은 이마를 바닥에 대고 있기에, 사엽풍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가 고개를 든다 거나 이상한 동작을 취한다면 악마 십이영은 무조건 그를 베어 버릴 것이다.
사엽풍은 그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강호거상의 등장으로 인해, 그의 기반이 와해되기 시작하며, 사엽풍은 극도의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지하비궁에 숨어 지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가 적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몸을 숨겼다는 것은, 일급호법이라도 알지 못하는 비밀로 유지되고 있었다.
흐릿한 눈빛.
사엽풍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해천옹을 바라봤다.
'내부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자라고 하기에, 은밀히 불렀는데… 몰골이 형편없군. 저러한 자가 나의 고민을 해결할 방도를 알고 있을는지…….‘
사엽풍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기실, 그가 해천옹을 부른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었다.
강호거상.
그의 거보(巨步)는 악마화의 기둥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를 막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붕괴되고 만다.
사엽풍은 그것을 알고 있기에, 최근 들어 공포에 휘어 감긴 것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해천옹을 은밀히 부른 것이다.
짙은 향기가 감미롭다. 오랫동안 그것을 들이마시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단잠에 빠져들 것만 같다.
해천옹은 긴장된 가운데 드디어 사엽풍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거만했다.
오랫동안 지존의 지위에 올라 있는 강호거인(江湖巨人) 특유의 웅휘로움은 없었으며, 어딘지 모르게 사악하고 잔혹하게 들렸다.
"아는 것이 많다던데?"
"주워 들은 것이 많을 뿐입니다."
"흠……!"
"……."
"해외무림계의 계보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해박하다던데?“
"과거 황실에서 만든 해외무림비사록(海外武林秘史錄)을 편찬하는 가운데, 알게 된 것이 태반입니다. 그 안에는 해외무림… 일컬어 오해무림(五海武林)이라 불리우는 변황무림의 방파, 인물, 특징이 모조리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책은 지극히 방대하여 모조리 외울 수는 없었으되, 대체적인 것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책이 명황실(明皇室)로 접수된 것은 몹시 애석한 일입니다.“
해천옹은 몹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엽풍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다가 입술을 떼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본맹은 난항에 처해 있다."
"으음……!"
"기실, 많은 실패를 했다. 특히 최근에 들어……."
"……."
"물론, 본맹에 사람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많은 무사들이 있고, 어떠한 문제라도 능히 해결할 수가 있다. 하나 모두 연공 중인지라, 당장에 있어서는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인물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실로 어려운 문제.
몹시 완곡한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바로 강호거상의 처단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 일에 대해 해결 방안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은밀히 부른 것이다.“
그의 말이 느릿느릿 이어지다가 멈추었다.
해천옹은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는 실로 긴장된 표정을 지었으며, 꽤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그는 몹시 두려운 어조로 이렇게 운을 떼었다.
"속하라면 그들을 청(請)하겠습니다. 지금 즉시!"
"그들……?"
"빠르고, 날카로운 자들이 있습니다."
"아……!"
"그들은 부르는 데 비싼 대가가 들며 연락을 취하기도 힘듭니다. 하나 그들이면 혹, 그 일을 해결할지도…….“
"누구인가, 그들은?"
"부풍십일랑(扶風十一郞)입니다. 신풍(神風)의 살인자들, 그들은 이 년 전에 중토로 접어든 바 있으며… 다시 신풍도(神風島)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알기에, 그들은 하나의 절대인자(絶代忍者)를 길렀다 합니다. 그를 부른다면……!“
부풍십일랑.
대륙무림인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있으되, 그들이 이제까지 무패전승이라는 것만은 부정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들이 힘을 다해 하나의 절대인자를 길렀다면, 아마도 그는 하늘 위로 숨어 들어가 신(神)이라도 암살할 수 있는 인술(忍術)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 날 이후, 해천옹을 본 사람은 없다.
대체 그가 어디로 갔는지, 그와 더불어 차(茶)를 나누어 마시던 학자들은 도대체 알지 못할 표정을 지었다.
그가 사엽풍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은 당사자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는지라, 그의 실종을 사엽풍과 연루하여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그 날, 악마곡(惡魔谷)의 깊고 검푸른 호수 속으로 목에 구멍이 뚫린 늙은 학자의 시체가 내던져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해천옹, 그는 무엇인가를 말했고… 그 후, 살해당했다.
그가 죽은 이유는 오직 하나, 사엽풍의 약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고… 사엽풍이 내부의 힘을 의심한 나머지, 외부에 살인청부(殺人請負)를 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신풍(神風).
그들은 대륙무림계를 혐오하고 있다.
일생에 오직 한 번, 패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는 신풍의 인자들.
그들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곤 한다.
죽이거나, 죽거나!
다시 말해, 그들에게 살인을 청부한다는 것은 그 일이 어떠한 일이든 간에 완전한 비밀로 엄수된다는 것임에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 무렵, 한월평(閑月坪)에서는 실로 가공스러운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항차 대륙무림을 혈풍에 휘어감아 버릴 음모(陰謀).
그리고 가장 철저한 야망(野望)이…….
농막(農幕) 구석진 곳이다.
이 날 밤에도 그는 하나의 목검을 매만지고 있었다. 실로 오랫동안 그는 적송나무 가지를 다듬었으며, 그것은 검자루에 마두(魔頭)가 양각된 귀목검(鬼木劍)으로 화하고 있었다.
언제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식어 버린 눈빛.
그를 보고 폐인이라 부르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지난 이 년 내내, 그는 한월평 안에서만 살아왔으며, 그를 감시하는 자들이 보기에는 단 한 사람과도 말을 하지 않은 듯이 보였다.
하나 그는 세 평도 아니 되는 움막 가운데에서 천하를 뒤흔들, 엄청난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창 너머의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다.
보라! 달빛이 핏빛으로 물드는 것을.
핏빛의 달무리가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슷- 슷- 슷-!
초옥린의 손길에는 일정한 박자감이 있었다.
그의 손동작은 거의 기계적이었다. 벌써 이 년 내내 그는 귀목검을 깎고 있는 것이다.
농막 내부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 초옥린은 벌써 꽤 오랫동안 지둔술(地遁術)을 써서 잠입한 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실정이었다.
"강호거상의 출현으로 인해 거사일(據事日)이 단축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뜻하지 않은 행운입니다. 악마무후는 강호거상을 견제하느라 내부 단속을 허술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호거상이 잇따라 승리를 거두자, 이제까지 악마무후를 신(神)처럼 떠받들었던 자들이 악마무후에 대해 반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훗훗… 강호거상, 나는 그 자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 자가 내가 생각하는 그 자라면, 악마무후의 아성(牙城)은 적어도 반년 안에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천마후(天魔侯)시여! 지금 속도라면, 악마동맹의 중원 기반이 깨어지는 데에는 반년도 걸리지않을 것입니다. 강호거상은 의화검맹마저 얻었습니다.“
"의화검맹마저?"
"그 일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달리 적어 갖고 왔습니다. 대체적인 내용만 말씀드리자면 이러합니다.“
지하 이 장 되는 곳에 숨어 말하는 자.
그는 악마무후가 알지 못하고 있는 초옥린의 휘하세력 가운데 대표자가 되는 자였다.
그는 지난 이 년 내내 초옥린에게 강호계의 제반사에 대해 세세히 이야기하였으며, 초옥린의 마검도(魔劍道)가 완성할 수 있게끔 영단(靈丹)과 비급을 무수히 전했다.
다시 말해, 초옥린은 지난 이 년을 허송세월 한 것이 아니라 잠룡비전에서 다하지 못했던 초인수업(超人修業)을 완전무결하게 계속하였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폐인처럼 지내는 가운데, 이십육 개(個)에 달하는 거대세력(巨大勢力)을 하나로 뭉치는 기적을 발휘했다.
팔황신마령(八荒神魔令), 그리고 천마십팔번(天魔十八幡).
모두 막북(莫北)의 세력이며, 과거 원(元)의 영광을 다시 찾고자 하는 야망을 갖고 있는 무림세력들이다.
그들은 초옥린을 천마후로 섬기리라 맹세를 하였으며, 악마무후의 세력을 능가하는 거대세력을 지난 이 년에 걸쳐 치밀하게 구축을 한 것이었다.
일컬어 천마맹(天魔盟).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마도의 제자들이었다.
초옥린은 천천히 달라지고 있었다.
차디차게 식어 버린 눈빛이 기이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번쩍-!
가히 마왕(魔王)의 눈(眼).
그는 강호거상의 최근 활약에 대한 것을 듣고는 표정을 차갑게 경직시키는 것이었다.
"그 놈은 위대한 혼(魂)을 지니고 있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적수는 악마무후가 아니라 바로 그 놈이다.“
"예에?"
"훗훗… 그 놈은 야망이 없는 놈이다. 그러나 늘 그 놈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무사(武士)가 될 재목도 아니다. 외유내강(外柔內强)한 성격이며, 지극히 온화하다. 그러한 놈이 악마무후를 향해 거인(巨人)처럼 도전한 이유는, 악마무후로 인해 그의 복수심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초옥린의 손은 앙상히 말랐다.
그의 손은 얼음으로 깎아 만든 손처럼 차가와 보였다.
"놈은… 당세에서 나의 적수가 될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하오나, 그는 머지않아 소리 없이 제거될 것입니다."
"제거?"
"악마무후는 강호거상에게 농락당하다 못해, 외부에 살인청부(殺人請負)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청부?"
"순찰부(巡察府)에 스며든 자에 의해 밝혀진 것인데, 악마무후는 강호거상의 죽음을 거금(巨金) 천만 냥(兩)으로 청부하였다는 것입니다.“
"으음……!"
"바로 신풍도(神風島)에! 신풍도의 인자(忍者)들은 가문을 일으키기 위한 군자금이 필요한지라, 거금 일천만 냥 정도라면 아마도… 살인청부에 응할 것이라는 분석이 이미 내려졌습니다. 다시 말해, 신풍도의 초인자(超忍者)가 강호거상을 찾을 것이며… 적어도 보름 안에 강호거상이라는 이름은 무림사(武林史)에서 영원히 지워지게 될 것입니다.“
지하에 머문 자가 자신 있게 말할 때.
"천만에, 신풍도의 인자들 따위로 제거될 녀석이 아니다. 나는 그 녀석을 잘 안다!“
"아……!"
"훗훗… 사실 그 놈이야말로 천하제일의 자객(刺客)이다. 놈은 극한무관(克限武關)을 가장 빠른 속도로 돌파하였으며, 당시만 하더라도, 내가 도저히 이룩하지 못할 살인무학(殺人武學)을 완성시켰다.“
"그럴 리가? 그는 마도살인술을 쓰지 않는다는데? 그가 그러한 마도고수란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사용하기 싫어 쓰지 않고 있을 뿐이리라. 사실 그 놈이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발휘한다면, 누구도 그를 막지 못한다. 그 놈을 완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만 무사(武士)가 고립된 장소에서 놈을 포위 공격해야만 한다.“
"으음……!"
"놈은 전투에 있어서는 신에 가까운 놈이다. 지금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만으로 놈을 평가해서는 아니 된다. 모름지기 놈은 자신의 능력 가운데 삼 할(割) 정도만 쓰고 있을 것이다.
놈은 그 정도만으로도 능히 천하에 군림(君臨)할 놈이다. 하나 놈은 군림하지 않을 것이며, 낭인(浪人)이 될 것이다. 어쨌든 그 놈은 천마맹의 회천대업(回天大業)에 가장 큰 장애가 될 놈이다. 놈이 사라져야만 한다. 아마도 놈이 나의 존재와 능력을 알게 된다면, 천하무림계에서 발을 빼낼지도 모른다.“
초옥린은 천천히 목검을 세웠다.
그는 검을 곧추세운 채 전면을 바라봤다.
농막 한 구석, 등신대(等身大)의 철상(鐵像)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때 묻고 더러운 철상이나, 깎은 모양은 상당히 훌륭했다.
초옥린의 목검은 철상을 향해 흔들렸다.
우우웅……!
실낱같이 가는 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허공에 기괴한 영상이 떠오른다.
입을 따악 벌리고 웃는 악마의 얼굴.
대천마영(大天魔影).
천마의 얼굴이 일순 허공을 휘어 감는 가운데, 둔탁한 소리가 잇따라 터져 나오며 철상이 뽑혀 떠올랐다.
직후 육중하기 이를 데 없는 철상은 물이 바위틈으로 스미어 들 듯이, 거의 파공성을 내지 않고 땅바닥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강호거상에게 전해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철상은 땅 속으로 푸욱 파고들었다.
"그리고 전 휘하제자들에게 연락하라. 결단(決斷)의 날은… 칠야(漆夜)라고!“
"결단의 날! 오오, 드디어… 지난 이 년 내내 학수고대 기다리던 결단의 날이 된 것입니까?“
"달빛이 사라지는 그 날, 악마동맹은 완파(完破)당한다. 그리고 항차 대륙을 지배할 천마맹이 일어날 것이다.“
초옥린은 차디차게 말하는데, 입술은 여전히 굳게 다물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입술을 다문 채 말을 건넨 것이다.
초옥린은 천천히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달빛이 피의 장막에 감추어져 뿌옇기만 하다.
그의 눈빛은 달무리에 던져졌다.
"너를 좋아한다. 조운, 진심으로……."
초옥린은 쓸쓸한 눈빛으로 화해 갔다.
'하나, 야망을 위해 너를 베어야만 한다면… 나는 너를 벨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너는 나를 베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보다 뛰어난 점은 바로 그 점이다. 그리고 내게는 너를 제거할 비장의 방법이 있다. 아아, 내가 그 방법을 쓰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초옥린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창 너머에서 그를 본다면, 피로에 지친 나머지 앉아서 잠이 든 폐인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 밤, 강호는 이 밤을 기억해야만 한다.
유월(六月) 십구 일(日).
새벽이 되며 태행산(太行山)의 준험하고 장쾌(壯快)한 산령이 아스라한 안개 속에서 날아오르듯이 떠올랐다.
천 리(里)에 달한다는 산령은 한 마리 거룡(巨龍)이 비늘을 세우고 승천(昇天)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대저 북방의 산맥이란, 남방의 산맥에 비할 수 없이 힘차고 굳강한 기세로 쭈욱쭉 뻗어 나가고 있다.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는 여명(黎明).
태행산은 만 년 넘게 새벽이면 새벽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나곤 했다.
거산(巨山) 위이다.
언제 나타났을까?
산정 위에 세 사람이 머물러 있었으며, 그들의 뒤쪽에는 금탑(金塔)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거대한 금탑.
아아, 그것은 살아 있는 한 마리 금색신붕(金色神鵬)이 아닌가?
그것은 천하거상 석대숭의 애조(愛鳥)이며, 능조운에게 전해진 석대숭의 유산 가운데 가장 값진 유산이었다.
팔짱을 낀 미청년, 그는 허름한 유삼을 걸친 채 서 있으며… 그의 좌측에는 그와 대조적으
로 체격이 장대한 거한 하나가 두 다리를 쩌억 벌린 채 서 있었다.
그는 어깨에 장봉(長棒)을 떠메고 있는데… 말이 봉이지, 그것은 무쇠 기둥에 가까워 보였다.
무게가 사백 관(貫), 재질은 자금사(紫金砂)에 설화빈철(雪花賓鐵)을 반 섞어 만들었다.
일컬어 항마철장(降魔鐵杖)이라는 것으로, 당세에서 그것을 젓가락처럼 휘둘러 강룡십팔장법(强龍十八杖法)을 시전해 낼 수 있는 사람은 금강거협(金剛巨俠) 철거(鐵巨)에 불과할 것이다.
미청년의 우측에는 아주 냉철하고 이지적으로 생긴 서생 하나가 서 있는데, 그는 두루 마리 한 장을 쫘악 펼치고 있었다.
냉소서생(冷笑書生) 여불군(呂不君).
그는 능조운을 폭풍맹주(暴風盟主)로 섬기리라 맹세하였으며, 자칭 능조운의 군사(軍師)이며 우비위(右臂衛)였다.
본시 묘묘도 함께 올 예정이었으나, 그녀는 능조운에게 뭉그러지고 불타 버린 얼굴을 보인 것이 괴로운 듯…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나서 낙안애(落雁崖)로 돌아갔다.
능조운은 그녀를 위로해 주는 일을 뒤로 미루고, 이전에 하던 일을 하기 위해 일단 태행산에 나타난 것이다.
"무모하다. 벌써 다섯 번 검토해 보았으나, 보름 사이에 육대화세(六大花勢)를 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 물론, 황금신붕이 네 소유라는 것을 감안하지 못했기에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것이기는 하나…….“
냉소서생은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능조운의 진정한 무공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능조운은 강호에 나온 이래, 자신의 진실된 무공을 펼쳐 본 경우가 단 한 번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내공의 삼 성(成)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일을 성사해 왔던 것이다.
"월하마궁(月下魔宮)을 치고 이어 천독곡(千毒谷), 구음혈전(九陰血殿), 빙하지곡(氷河之谷), 태극마번(太極魔幡), 그리고 마왕탑(魔王塔)…….“
여불군은 지도를 짚어 가며 고개를 저었다.
"훗훗… 사실 너희들이 나를 굳이 따라나선다고 하기에, 보다 느슨한 여정을 짠 것이다. 나 혼자 다녔더라면, 쉬는 시간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웃는 청년, 그는 바로 능조운이었다.
"혼자 다녔더라면, 더 빨리 움직였을 것이라고?"
여불군과 철거는 자지러지고 말았다.
"모든 것을 한시 빨리 처리해야 한다!"
능조운의 표정은 지극히 굳강했다.
잠룡비전의 시절, 그의 천재성과 더불어 그의 심약함을 알고 있던 여불군과 철거인지라…
그의 강인한 말에 상당한 놀라움을 표시했다.
한데, 능조운의 뒷말이 보다 놀라웠다.
"세 가지 이유로 인해, 나는 폭풍대장정을 한시 빨리 완수해야만 한다.“
"세 가지 이유?"
여불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첫째, 악마무후는 세력을 감추기 시작했다. 시기를 늦추다가는 때를 놓치게 된다.“
"으음, 그 이유는 일리가 있군. 그럼 두 번째 이유는?“
"훗훗… 악마십화세의 발호가 계속될 경우, 실로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나는 그 일을 방지해야만 한다.“
"무서운 일이라니?"
"진정한 초인(超人)이 있다. 자칫하다가는 그의 휘하세력이 강호계(江湖界)로 들어선다. 그러한 일이 벌어져서는 절대 아니 된다.“
"설마, 초옥린을 겁내는 것은 아니겠지?"
"옥린은 가공한 데가 많은 녀석이지. 하나,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람에 비한다면… 태양 앞의 샛별일 뿐이다. 나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아아, 그럼 혹시… 석대숭 대상황을 말하는 것이냐?"
"훗훗… 그분은 내가 모든 기반을 망가뜨린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시지 않을 분이시다.“
"그… 그럼……?"
여불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능조운이 말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능조운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누구를……?'
여불군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에 비해 지혜가 모자라는 철거가 의미심장한 대화 내용을 알아차리지 못하겠다는 듯 이렇게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그가… 홍무제(洪武帝)라도 된단 말이냐? 조운, 네가 두려워하게?“
그가 언성을 높일 때, 능조운은 그를 슬쩍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 네 말대로다!"
"아……?"
"으음, 그럼… 홍무제의 입김이 강호에 스미어들 수도 있단 말이냐?“
철거의 입이 따악 벌어졌으며, 가뜩이나 창백한 여불군의 살색이 보다 창백해졌다.
"훗훗… 팔천(八千)에 달하는 특급무장(特級武將)들이 있다. 일컬어 철혈팔기병(鐵血八騎兵)들이다. 그들이 나타나서는 아니 된다. 그들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겁을 내는 세력이다.“
능조운은 먼 곳을 바라봤다.
여불군과 철거의 눈에는 그야말로 거대한 산(山)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폭풍대장정을 빨리 마무리 짓고자 하는 진실된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지?"
"무엇이냐?"
여불군과 철거가 긴장된 표정을 지을 때.
"한시 빨리 강호(江湖)를 떠나고 싶다. 그뿐이다."
묘한 말이었다.
달관한 듯, 그리고 염세적으로 보이는 말투이다.
그러나 여불군과 철거야말로 그 말의 뜻을 너무나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너는 늘 그랬었지. 잠룡비전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사이며, 또한 가장 무사답지 않은 녀석.'여불군과 철거가 숙연해 할 때.
"훗훗… 골치 아픈 이야기를 했군. 자아, 이제 시작해 보자. 시간이 촉박하다.“
"좋아!"
"프핫핫… 무엇이든 하명만 해라. 화약(火藥)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라도 서슴지 않을 테니까!“
여불군은 섭선을 흔들었고, 철거는 장봉을 땅에 곧추세우며 가슴을 쩌억 폈다.
능조운은 여전히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월하마궁(月下魔宮)에는 구천(九天)에 달하는 마졸(魔卒)이 있다. 그들 가운데 태반은 독약의 노예들이다.“
"……."
"……."
"정면으로 쳐들어갈 경우, 죽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일은 피해야 한다.“
"으음……!"
"……."
"철거 혼자 정문으로 가라. 그리고 불군, 너는 다른 곳으로 가라. 사실, 네가 해야 할 일이야말로 제일 중요한 일이다.“
능조운의 눈빛이 한성(寒星)을 닮아 갔다.
"그 일이 무엇이지?"
여불군은 심각해지는데…….
능조운의 입술이 벌어지며 흘러나오는 말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주방(廚房)에 가라!"
"주… 주방이라니? 월하마궁주가 강호거상을 겁내 주방에 숨어들기라도 했단 말이냐? 주방에 가라니?“
"훗훗… 피를 보는 일은 아니다. 밥을 짓는 일이다!"
"뭐라고? 밥을 지으라고?"
"식수(食水)에 약을 조금 타고, 밥에 약간의 정성만 가하면 되는 것이다."능조운은 손을 품에 넣어 하나의 죽통(竹筒)을 꺼냈다.
죽통은 다섯 뼘 정도였다.
"이것은 내가 짬짬이 만든 소수회혼액(素手廻魂液) 가운데 일부이다. 이것을 약간이라도 복용한다면, 악마무후가 쓴 미약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아아, 그렇군."
여불군은 그제야 능조운이 바라는 것을 모조리 이해할 수 있었다.
소수회혼액(素手廻魂液).
소수보록에 적힌 약방문(藥方文)에 따라 만들어진 성약이며, 실로 놀라운 것은 소수회혼액을 이루는 백팔 종(種) 영약(靈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약재가 바로 능조운의 선혈(鮮血)이라는 것이었다.
능조운의 피는 선혈(鮮血)에 가까웠다.
그의 피에는 소수성자의 피가 섞이어 있으며, 천하제일의 독(毒)인 동시에 천하제일의 해독제이기도 했다.
지금 능조운의 얼굴이 유난히 핼쓱해 보이는 이유는, 소수회혼액을 만들기 위해 세 사발이 넘는 생혈(生血)을 흘렸기 때문이리라.
"나는 빚을 많이 진 녀석이다. 빚을 갚으려면 바쁘게 돌아다녀야 한다. 훗훗……!“
"좋아!"
"프핫핫… 천하의 여불군이 네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구나.“
웃음소리가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