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古下島 (고하도)
高 下 島 間 儒 達 峰 (고하도간유달봉) 고하도와 유달산 사이의 이 바다는
自 南 向 北 正 要 衝 (자남향북정요충) 남에서 북쪽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
尊 公 雄 據 新 營 處 (존공웅거신영처) 장군께서 이곳에 군영을 정하시고
盡 力 養 兵 再 造 功 (진력양병재조공) 힘 다해 수군 세워 큰 공 이루셨네
<감 상>
목포 앞바다에는 고하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크기가 작아서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으나
이순신 장군께서 이섬을 우리 수군의 본영으로 삼아, 바닥까지 떨어진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곳이다.
1597년 10월 29일에 들어 와서 이듬 해인 1598년 2월 18일까지 머무시며 전함 제조와 수군
전력(戰力) 증강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결과 13척의 전함을 40여척으로 증강, 서쪽으로 치우친
수군 본영을 전향적으로 완도의 고금도로 옮겼다.
이 해 1597년 정유년은 이순신 장군께는 실로 힘들고도 고통스런 한 해였다. 이 해 2월 26일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3월 초에 의금부에 투옥되어 엄중한 문초와 고문을 번갈아
당하고, 4월 1일에 석방되어 백의종군을 시작해 남쪽으로 가다가 이 달 중순 경에 어머님 상을
당했으나, 장례(葬禮)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다시 종군길에 올랐으며,
7월에 조선 수군 대패(大敗)라는 비보를 접해 큰 충격에 빠졌으며 급히 수군 재건에 나서 8월
초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기용되었으나 지휘할 수군 병력과 전선이 지리멸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선 12척과 뿔뿔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숨가쁘게 수군 증강에 나섰고,
9월에 명량에서 적들과 한판 승부를 벌이며 힘겨운 승리를 거두고 수군이 발판을 삼고 의지할
통제영 건설을 위해 군산 앞바다까지 장소 물색에 온 힘을 쏟는 중, 10월 아산 본가에 있던 막내
아들 '면'이 기습해 온 왜적들과 맞서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다가 겨우 마련한 고하도 수군 본영에서 한숨을 돌리면서 슬픔과 탄식속에 장군의 마음은
점점 더 비장(悲壯)해 갔다. 참으로 가혹하고도 통탄스런 한 해였다. 이런 사연을 생각하고 고하
도에 깃든 장군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이 시를 만들었다. 7언 절구 평기식에 운자는 '峰衝功'으로
冬운목과 東운목에서 상통운(相通韻)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