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8장은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율법의 종들은 언제나 남을 정죄를 합니다. 죄인은 죄인을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죄인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위해 애통해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사이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떠나간 후에 여인에게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여자가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하십니다(요8:11)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죄를 안 한다고 말씀 해놓고는 바로 정죄하시는 모양새이기 때문입니다.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 자체가 바로 정죄 아닌가요? 바로 네가 죄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 부분이 알쏭달쏭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시고는 가서 속 편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이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이러쿵저러쿵합니다. 이를 부연 설명하면, 예수님은 이 여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위치 곧 어두움에 있는 자체를 정죄하시는 겁니다. 네가 어둠에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깨우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두움 자체가 이미 정죄되었기 때문에 어두움 안에 있으면 우리도 정죄를 받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죽을 죄를 지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종이 되어서 그대로 살겠다는 그 자체가 바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정죄를 받았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 있으면 자동으로 우리가 진노를 받아 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정죄하지는 않으십니다. 여인 자체에게는 정죄하지 않지만, 어두움에 있는 그 자체는 정죄를 받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어두움에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또 일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하십니다.
이제 구원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세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심판의 폭탄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맞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은 진노를 발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어두움에 있으면 어두움 그 자체에 진노의 폭탄을 토하시기 때문에 그 진노의 폭탄을 나도 맞게 된다는 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죄 받을 곳에 있으면 정죄를 받습니다. 옛날 초대교회 교부가 목욕을 하다가 이단이 목욕탕에 들어오니까 얼른 목욕탕에서 나와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고 했습니다. 왜요? 벼락 맞을까 싶어서... 그건 인간적으로 너무 한 일이지만 일리는 있습니다. 그 사람하고 같이 있다가는 그 사람이 벼락 맞을 때 같이 맞을까 싶어서 거기서 나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와 사망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당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어두움에서 벗어나라”는 뜻이죠.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허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빛과 어둠이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체 그대로 놔두고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용서하는 나를 봐서 제발 죄짓지 말고 의롭게 살도록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두움에 있을 때에 네가 한 일은 내가 정죄하지 않을 테니 이제 어두움에서 벗어나라’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요8:12절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두움에 있다가 빛으로 나온 사람은 어두움에 있는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 겁니다. 어둠에 그대로 있는 사람은 여인을 잡아온 사람들처럼 남을 정죄합니다.
어거스틴이 회심하도록 영향을 준 훌륭한 교부들도 그토록 많이 있었지만 이 성경말씀이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보고 ‘아하! 내가 지금까지 어두움에 있었구나 이것이 바로 내가 이렇게 방탕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구나!‘ 하고 깨닫고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인 그리스도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이야깁니다. 개과천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볼 때 사람 자체를 바로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혈과 육의 싸움입니다. 괜히 사단에게 당해서 서로 동족상잔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지금 저 사람이 어두움에 처해있구나. 저 사람이 성령을 소멸시켰구나. 저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입혀 주신 의의 옷을 잊어버리고 더럽혔구나‘ 이렇게 보시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어두움에 들어가면 하는 짓은 그런 것들뿐입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어두움을 좋아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어두움 속에 가면 하는 짓거리는 다 죄밖에 없습니다. 눈 딱 감고 일주일 동안만 어두움 속에 한 번 있어보세요. 음란 영상도 보고 싶고, 아니면 어디 좋은데 놀러가고도 싶고, 아니면 음담패설의 유튜브도 보고 싶고... 어두움에 있으면 그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도 어두움 속에 있는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시는 어두움에 다니지 말고 세상의 빛인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하면 죄와 사망의 종이 되어서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죄에 대한 유일한 처방전입니다. 왜냐하면 생명 안에는 죄가 없고, 빛 안에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특징이 뭐냐 하면 빛과 생명의 나라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싶어도 죄의 품목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품의 성향에 있어서 죄를 향한 성향이 전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고 똑바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젠 어둠에서 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