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여기서 나는 루카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 하나를 예로 들어보겠다.
듣기에 따라 흡사 선사禪師의 선문답처럼 들리는 말씀이다.
어느 날 예수는 당신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러니까 당시의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에게 동시에 말했다.
"그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그들의 질문에
그분은 '궁극의 실재'는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 있는 것도 아니다"
라는 대답으로, 시간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집착을 다른 데로 돌리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사람들이 특별한 시기, 축제, 예배, 절기 등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면
하느님의 일이 언제나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벌거벗은 지금을 사는 대신,
성탄시기나 부활시기, 주일 아침 또는 언젠가 아주 먼 훗날
이루어질 깨달음의 날을 기다릴 것이다.콜로 2,16-19 (1)
그런 다음, 예수는 장소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들이 "오는 그 나라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느냐?"고 묻자
그는 '여기서도 찾지 말고 저기서도 찾지 말라'루카 17,23고 대답한다.
일단 하느님의 행위를 어느 한 장소, 전례, 성사
또는 다른 어떤 사건에 제한하면,
우리는 그 일이 다른 장소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심지어 그 일이 거기 아닌 다른 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까지
쉽게 결론을 내리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하는 예수의 행위는
어떤 점에서 에크 하르트 톨레(독일 출신의 철학자-옮긴이)가
'지금의 힘power of now'을 주창함으로써 하고 있는 행위들과 비슷하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확실한 개념'으로 통해온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절대자'를 찾으라고 한다.
진정한 영적 교사라면 마땅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야 한다.
안 그러면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진정한 실재를 느끼게 해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실력 없는 교사일수록 여기에만 또는 저기에만 또는
'오직 교회에만'이라고 말하지만,
훌륭한 교사는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를 말한다.
예수는 위의 대화를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마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7.22
이 말은 여기 '아니면' 저기, 지금 '아니면' 그때에 갇혀 있는
모든 종교에 대한 심판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영적으로 눈이 먼 우리가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고집불통 유다인들'이나 '완고한 가톨릭 신자들')을
영적 맹목이라고 비판하느라고 자신의 변화를 위한 메시지를 놓친다는 점이다.
이 두 본문에서 예수는 고대 힌두교의 산스크리트어 네티,
네티neti.neti를 정확하게 되풀이하고 있다.
어떤 말로도 담을 수 없으면서 온전히 알 수 있는
거룩한 무엇을 지키고자 고대 현자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를 가르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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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콜로 2,16-19
16 그러므로 먹거나 마시는 일로, 또는 축제나 초하룻날이나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17 그런 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18 거짓 겸손과 천사 숭배를 즐기는 자는 아무도 여러분을 실격시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런 자는 자기가 본 환시에 빠진 나머지 현세적 생각으로 까닭 없이 우쭐거립니다.
19 그는 자기의 머리이신 분께 단단히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온몸은 이 머리로부터 관절과 인대를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잘 연결되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