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36사단이 원주시 소초면 근처로 이사했다는 소식들었습니다.
안동에서 36사단장은 대단한 위치의 인물이었고 그의 저택 또한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어 모두들 우러러 보고 살았습니다.승용차가
귀한 시절 사단장 차가 한번 지나가면 아이들은 목을 뻬어 구경 하곤 했습니다.친구들 중에도 그곳 신병교육대에서 많이 훈련받았더라고요.
당시 군입영은 논산훈련소로 많이들 기차타고 갔는데 69년부터 향토사단에서 경북 북부지방 장정들이 입대했습니다.
70년 1월 매섭게 춥던 그날.내일 입영하기 위하여 머리도 깍고 외삼촌의 입대주도 한잔하고 친척집에서 잠을 청하였으나 쉽게 잠들지 못 하였습니다.
당시 입영장정들은 머리에 수건 하나 질끈 동여메고 가족들 배웅받으며 훈련소로 입영했습니다.자식의 군입영이 못내 이쉬운 부친께서 동행해 주셔 조금은 군대입대에 대한 걱정이 반감되었습니다.
인사장교의 설명과 끝에 한마디 " 지금 집에 가고 싶은 사람 나오세요 보내 드리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말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귀가조치 당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사나이로 태어 났으면 한번은 꼭 가야할 길인데..
라며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기 위하여 막사로 이동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라다 보는 아버님의 측은한 눈동자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집에 큰애는 춘천보충대로 입영했습니다.오랫만에 가족 나들이도 할겸 장장 7시간을 운전하여 보충대 근처 여관에 여장을 풀었습니다.아들 녀석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군입대가 그렇게 모두들 걱정이 되는것 같습니다.
다음날 보충대 연병장에서 인사장교의 사단 배치방법,지참물 등등 장시간의 설명이 끝나고 장정들을 줄맞춰 인솔하여 떠날때 그렇게 울먹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어디 죽으러 가는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아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먼하늘을 쳐다보며 울음을 참았습니다.그리고 100일 후 큰애는 건강하게 훈련 잘 받고 면회오라는 중대장의 전갈을 받고 또 한번, 이번엔 한계령을 넘어 인제로 갔습니다.
안동훈련소는 시설이 정말 낙후되어 있고 식수도 없어 우물물을 길어 설겆이하고, 후배기수들 식강 수입잡고, 도망다니고 ,군대란 훔친다는 말을 수입잡는다라고 하는것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2.3주차 훈련이 지나고 나니 이해가 되었습니다.요령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손수건 같은것 잊어버리면 절대 발설하지 말고 야간 불침번 설때 슬쩍 하나 수입잡으면 되었습니다.악순환의 연속으로 관물이 돌고 돌아 나중에는 자기 물건이 어떤것인지 헷갈릴때도 있었습니다.외삼촌 친구들이 옆중대 중대장에, 한명은 분류계 사병에 진짜 용돈도 많이 얻어쓰고 훈련끝나고 저녁때 옆중대 중대장실에서 간식도 얻어먹고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훈련소 6주 후반기 4주 훈련을 맞치고 어느날 수경사 대위 한명이 중대원을 키 순서대로 연병장에 집합시키더니 30명을 " 너희들은 수경사로 차출되었으니 영광스럽게 생각하여라" 그러면서 이젠 다른곳으로는 차출될 수 없다고 말 했습니다.
차가운 1월에 입대하여 얼어붙은 낙동강 강물에 빨래도 하며 많은 고생하였습니다만 어느덧 국방부 시계의 벨소리에 훈련소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낮에 별이 뜬것은 처음 보았습니다.사단장님께 분열한번 하고 브라스밴드의 환영마취에 손흔들며 조교들과 아쉬운 이별을 했습니다.
아! 이문을 언제 나설까 그날이 오기는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70년 3월27일 늠늠하게 이등병 계급장에 따불벡을 매고 서울로 출발하였습니다.
잠시 동대구역에 기차는 정차하여 가족들과 면회.꿈만 같았습니다.
촌놈이 군대 잘가서 서울 구경하고 참 출세했습니다.그전까지 서울구경 하지 못했는데 참 잘 되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카키복에 동정복 화려한 유니폼의 신일병은 서울거리를 활보하며 정말 재미있고 알찬 군대생활을 해 나갔습니다.북악,인왕의 빵카생활.필동사령부에서의 폭동진압훈련 그리고 출동.모든게 지나가버린 아련한 추억의 책갈피 속에 고이 접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