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통신에서 나와 바둑을 두어 보신 어느 분이 대뜸
" 당신은 여자이지요? " 하고 물어왔다.
어떻게 아느냐고 되 물으니 바둑 두는 스타일을 보면 안다고 했다.
바둑을 두어 보면 여자들은 대부분
자기 대마 죽는 것은 생각 안 하고
상대의 대마만 잡으려고 죽기 살기로 덤빈다면서...
그랬다. 특히 내 바둑은 차분히 집 짓기 보다는
시작부터 공격적인 전쟁놀이였다.
그것은 상대가 나보다 상수이건 하수이건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펼치는 나의 바둑 전법이다.
그래서 오히려 내 바둑알이 전사하는 확률이 더 높지만,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나의 나쁜 버릇이다.
처음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 남편으로부터
바둑을 배울 때 정식으로 배우지 못한 탓도 있다.
남편 또한 동네에서 어깨너머 배운 솜씨로
나를 가르쳤으니 오죽 하랴.
바둑알이라고는 생전 처음 만져보는 나에게
꼼짝 못하게 가두어, 따먹는 게 바둑이라며 무조건 두자고 했다.
그래서 시작한 바둑인데 같이 놀아주니까
암것도 모르는 마누라의 검은 돌을
"아다리 아다리" 해가며 따먹는 게 그리도 재미있는지
그때마다 낄낄대며 얼굴엔 웃음꽃이 만발이었다.
은근히 괘씸해서 나름대로 바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출근한 뒤 검은 돌, 흰 돌 모두 가지고
혼자서 두 몫을 다 하며 쇼를 한 결과
결국 사흘 만에 남편에게서 백 돌을 빼앗았다.
그야말로 제자가 스승을 앞섰으니 청출어람을 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니 남편의 바둑 실력도 형편없었던 모양이었다.
암튼 그렇게 입장이 바뀌자 날마다 벌어지는
바둑 대전은 말 그대로 피 튀기는 전쟁터였고
느긋하게 바둑을 두는 나와는 반대로 남편은
마누라에게 한 번이라도 만방으로 이겨 보겠다며
입에 거품을 물어보지만 소용 없었다.
과욕을 부리다 대마가 죽게 되면,
빈번히 무르기를 청하고 거절하면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 져서 고성이 터지고
급기야는 죄 없는 바둑판과 알을
달밤에 체조하듯 마당으로 들고 나가
산산조각 내는 사태가 일기도 했다.
남편과의 친선 게임인데 끝까지 물러주지 않는 나도 나지만
바둑은 일수불퇴인데 한 두 수도 아니요, 당장 죽은 바둑을
열 수 스무 수 물리라니 어디 될 법이나 한가?
또한 판판이 지면서도 하수인 걸 인정 안하고
죽어도 맞바둑을 두겠다는 남편이 얄미워
더욱 무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고집불통인 남편은 이길 때까지 밤새도록 바둑을
다시 두자고 했지만 결국 한번도 나를 이기지 못했다.
어쩌다 한 번 져주려고 해 본적도 있지만
이건 어찌된 사람이 져 줄려야 져 줄 수도 없게 바둑을 두니
나중엔 눈 감고 두어도 결과는 내 쪽의 승리였다.
나 역시 바둑 상대라곤 오직 남편 하나 뿐이었으니
바둑 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늘지 않아
세월이 갈 만큼 가도 항상 그게 그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간에 두면서도 열 받는 건
어느 내기 바둑 못지 않게 살벌하고 험악했으니
우리들도 참으로 못 말리는 부부였음이 틀림없다.
그 후 십 오 년 간 바둑을 두면서 남편에 의해서 바둑판이
다섯 개쯤 박살 나고는 우리 부부는 바둑 휴전을 했다.
좋은 사이가 공연히 바둑으로 인해 벌어질까 염려해서 인데
마누라가 어쩌다 동네 아저씨들과 두는 꼴도 못 보는지라
아예 바둑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수 년 뒤에 컴에서 인터넷 바둑을 접하게 되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사이버 바둑을 두면서
나의 옛날 버릇은 그대로 나타났다.
하수인 남편과 맞바둑을 두면서 맘대로 유린하며 두던
나의 공격적 바둑 습관이 여기서도 여실히 나타난 것이다.
처절하게 깨지고 나면 뼈저리게 각성을 하고
다음 바둑을 둘 때는 "아생연후살타"를 수없이 외쳐 보지만
정작 바둑에 임하면 마음은 순식간에 돌변한다.
상대의 허점이 보이면 앞 뒤 돌아다 볼 사이도 없이
무조건 돌진하고 사정없이 끊고 본다.
그리고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욕심 또한 많아서(다른 면에선 욕심을 버린 지 오래임에도)
조금은 안 먹는다.
작게 끊어 먹으면 그것만으로도 이길 것을,
붙여주어 가며 대마잡이에 혈안이 된다.
그러다가 십 중 팔구 내가 당하면서도...
그러다 어제 둔 바둑에서 실로 오랜만에
원하던 대로 크게 키운 대마를 사냥했다.
내 돌도 상대의 진중에 들어가 위태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그것이 사는 순간 나는 그야말로 대망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어쩌다 소 뒷발에 쥐잡기였을 터이지만 그 쾌감을 어디에 비하랴!
東西로 걸려있는 수많은 상대의 대마(꼭 살아있는 것 같은)를
옥죄어 들어가 결국 한 집 밖에 안 나게 만들었을 때의 그 희열을...
* 아주 오래전 써 둔 글을 옮겨왔읍니다.
새로 글을 쓸만큼 팔 부상이 낫지 않어서요.
첫댓글
아니! 이런 바둑의 고수 이신줄
모르고 혼난 사람들 많군여~
저도 바둑을 배우다가 성격이
급해 못배웠답니다.
낚시와 바둑 두가지만~
어째꺼나 들어본 바둑 초보때
들은 풍월~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자신의 말이 산다음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가야 한다는뜻
즉 약점을 살피지않고 무모하게
상대돌을 공격 하다가는 오히려
해를 입기 쉽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는 말이죠~
장기판 에서도 적용되는 글!
여하튼 대단하신 영숙님 존경
합니다 ㅎ
바둑 고수는 아니고 물바둑 7급이랍니다. ㅎㅎ
@은숙
구래두 물바둑 7급이면
대단한거죠 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오목두 재밋드라구요.. ㅎㅎ
하산한지 오래라 도전하시면 안받을래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