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남부능선, 변화무쌍한 날씨와 만만치 않은 등로
1. 일자: 2022. 7. 30 (토)
2. 산: 삼신봉(1284m), 촛대봉(1703m), 연하봉
3. 행로와 시간
[청학동 탐방센터(04:11) ~ 갓걸이재(05:03) ~ 삼신봉(05:24) ~ (좁은 조릿대길+돌길/수곡재/헬기장) ~ 세석 4.8km(06:41) ~ (오르막 돌길) ~ 석문(07:43) ~ 의신 갈림(08:04) ~ 음양수(08:30) ~ 세석대피소 (09:00~30) ~ 촛대봉 (09:53) ~ 연하봉(10:59) ~ 장터목(11:20) ~ (긴 돌계단) ~ 유암폭포(12:16) ~ 칼바위갈림(13:18) ~ 중산리 탐방센터(13:53) / 19.26km)]
< 지리산 남부능선 산행을 준비하며 >
여름 휴가다. 다시 지리산 남부능선을 가려 한다. 청학동 ~ 세석 ~ 장터목 ~ 중산리 코스다. 좋은사람들에 예약을 하고 준비에 나선다. 6년 전 청학동에서 최참판댁까지 20km, 11시간의 한여름 산행은 백두대간 종주로 몸 상태가 최상이었음에도 힘겨워 사선을 넘나들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컴컴하여 사위 분간도 안되던 삼신봉, 머리 위까지 자란 산죽의 공포, 활공장에서 물을 나누어 주던 고마운 인심, 머나먼 형제봉과 신선봉, 마을 어귀에서 먹은 오미자의 달콤함 그리고 후미를 기다리며 바람 부는 마을 정자에서 든 꿀 같은 낮잠. 지리산 남부능선은 내게 쉽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 길의 일부를 또 가려 한다.
가야 할 길을 삼분등해 본다. 길의 중심인 남부능선은 영신봉에서 T자를 이루며 남쪽으로 갈래를 뻗어 내린다. 삼신봉에서 세석까지는 경험해 보지 못한 길로 일자로 곱게 이어지지만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여러 차례 오르내리게 된다.
‘능선 중간 수곡재까지는 허리까지 차는 산죽이 특징인 부드러운 길이 이어진다. 이후 세석까지는 잡목이 우거지고 군데군데 암릉도 있다. 한벗샘은 수곡재에서200 미터쯤 내려가야 한다. 수곡재에서 완만한 오리막을 따라 휘어져 오르면 헬기장이 나타난다. 이후 오솔길은 끝나고 여러 차례 오르내리막을 넘나든다. 다소 숨가쁘게 올라 능선 마루에서 쉼터를 만난다. 이후 기암괴석과 고사목이 어울린 경치가 멋지고, 촛대봉이 밋밋하게 흘러내린 모습과 거림골 방향에 전망도 시원스럽다. 잠시 내려서면 외길이 열린 석문을 만난다. 이후 큰 높낮이는 없으며, 의신(대성골) 갈림과 음양수를 지나 세석으로 이어진다. 전체적으로 해발 1200m~1600m높이로 굴곡 심한 길도 있고 무엇보다 지루하게 길어 꽤나 힘들다 한다. 능선 상에 샘물이 하나 있을 뿐 마땅한 편의 시설이 없고 비상 시 어떠한 외부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외진 곳이다. 그래도 인적 드문 등로라 줄곧 호젓한 분위기에서 산행을 하게 되며, 삼신봉에서 지리산 주능선에 장쾌한 전망을 감상할 수 있는 것에 위안을 얻는다.’
세석에서 장터목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연하선경은 내가 지리산 종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신선봉 ~ 연하봉 평원을 지나는 구간이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을 욕심내지 않고 중산리로 바로 하산할 예정이다. 18km, 9시간의 산행을 예상한다.
긴 산길에서 불러올 옛 추억이 기대된다.
< 희망사항 >
오랜만의 무박산행은 무수한 생각과 준비를 불러온다. 처음 지리산을 갈 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 과정이 싫지 않다.
돌베개에서 출간한 오래된 최고의 안내서 ‘지리산’을 다시 꺼내 읽는다. 책에서 무박산행의 느낌이 전해진다. 졸리고 몽롱한 기분, 찬란한 아침, 외로운 길, 대피소의 풍경, 이름 모를 꽃들과 나무, 연하봉 평원에서의 선경, 산행 후의 성취감과 기분 좋은 노곤함…. 글이 먼 기억을 불러온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다르리라 믿는다.)
< 청학동 가는 길에 >
버스를 내리자 습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얼굴에 와 닿는다. 한여름 자정이 가까워지는 사당은 고요 속에 착 가라앉는 느낌이다. 몇 마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마치 산꾼의 의무인 냥 밤차에 몸을 싣는다. 산악회 버스는 만원이다. 지리산을 향한 염원은 나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장수에서 잠시 정차했다. 본격적인 휴가철인가 보다. 이 외진 휴게소에 사람들이 꽤 많다. 하늘에 별이 꽤 보인다. 날씨에 대한 기대가 생긴다.
< 청학동 ~ 삼신봉 >
청학동 가는 길은 멀었다. 새벽 4시간 넘어 탐방센터 앞에 선다. 하늘에는 성근 별이 있다. 흐린 날씨가 되리라 여겼는데, 이곳에서도 일출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다. 가슴팍에 랜턴을 달고 발 밑을 비추는 작은 불빛을 쫓아 산을 오른다. 일행들은 놀라운 속도로 앞서간다. 지리산 온다고 2주 연속 꽤 길게 산을 올랐지만 지리산은 격이 다름을 직감한다.
졸음도 떨쳐낼 만큼 초반 오름이 만만치 않다. 800m어름에서 1284m 삼신봉으로 올라야 한다. 어둠을 핑계로 땅만 보고 걷는다. 올려다 보아야 아득한 곳은 기만 꺾이게 마련이다. 계곡 물소리가 거세다. 그렇게 50여분, 갓걸이재에 닿는다. 삼신봉 0.4km, 잠시 쉬어가리라 먹었던 마음은 동녘을 불그스레 물들이는 일출의 잔상에 사라지고, 내쳐 산정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바람이 몹시 부는 삼신봉 정상, 6년 전 기억과는 다르다. 그때는 정상 부근이 더 넓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바람 부는 바위 난간에 선다. 멀리 하동 마을에 불빛이 아른거린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의 불빛은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안도감을 준다. 힘겨운 여정을 마치고 내려가 쉴 곳이 있다는 든든함이 이유일 게다.
산들이 너울거리며 기지개를 편다. 잿빛 하늘과 산들 앞으로 푸른 기운도 감지된다. 산과 하늘의 경계가 흐릿하다. 여기는 지리산 남부능선의 중심 삼신봉이다. 이 아침을 대지가 살아나는 이곳에서 맞는다. 거친 숨을 내쉬며 올라온 보람을 느낀다. 아쉬운 건 구름 속으로 해가 숨었다는 게다.
잠시 함께했던 일행들이 떠나고 혼자 남는다. 내가 후미인가 보다. 왔던 곳으로 내려가 이제 본격적으로 남부능선 길에 들어서야겠다.
< 삼신봉 ~ 세석대피소 >
좁은 길을 따라 걷는다. 정상 등로가 맞나 싶을 정도로 희미하다. 바람이 몹시 분다. 어두운 하늘에 잠시 다시 붉은 기운이 돈다. 웃자란 나무 틈으로 하늘을 본다. 잔뜩 낀 구름 사이로 작은 불덩이 하나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다가 사라진다. 조금 기다리자 불덩이가 커진다. 그리곤 오렌지빛 불기둥이 주변을 물들이다. 은은하게 퍼지는 붉은 기운에서 생명을 읽는다. 다양한 주홍빛이 농담을 달리하며 하늘을 물들인다. 장관이다. 더 넓고 트인 곳을 찾아 나서지만 주변은 온통 조릿대와 관목투성이다. 그 사이 하늘은 노란빛으로 바뀌었다. 잠시 빛내림을 목격한다. 차라리 삼신봉에서 기다렸다면 더 멋진 풍광을 오래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기대하지 않았던 지리산의 일출을 목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짧은 감동을 뒤로한 채 길을 이어간다. 작은 암릉의 연속이다.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길 사정에 당황한다. 지도상으로는 1200미터 대의 평탄을 숲길이었는데 현장의 상황은 전혀 아니다. 게다가 앞을 가린 조릿대도 시야를 방해한다. 하늘은 더 어두워진다. 주위엔 나 혼자다. 휙 하는 인기척에 놀라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바람이다. 섬뜩했다. 1.5km 정도를 험로와 씨름하다 보니 정신이 바짝 든다. 남부능선, 만만한 놈이 아니다!
등로가 좀 순해진다. 오솔길이 조금 넓어졌고 무엇보다 발 밑 돌들이 사라졌다. 살 것 같다. 조릿대 숲이 깊다. 풀이 갈라놓은 길 뒤로 커다란 나무들이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서 있다. 몽환적이고 오싹한 느낌이다. 아침 습기에 옷이 젓고 풀이 살을 스친다. 버스 옆자리 반바지 차림에 남자는 이 길에서 고생깨나 하겠다. 속도를 내어본다. 수곡재와 한벗샘 갈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출입금지 표식을 본다. 작은 공터는 옛 헬기장이었나 보다. 산에 와 걸으며 본 길 사정은 오래 전 쓰여진 책과는 많이 달랐다. 곳곳에 전망대가 있다 했으나 이 역시 달랐다.
세석이 5.2km 남았다는 이정목과 만난다. 삼산봉에서 2.8km를 1 시간 15분만에 왔다. 부지런히 왔는데도 예상보다 속도가 나지 않는다. 이제부턴 오르막 대세 길이리라. 바위투성이의 오르막을 오르내린다. 길의 변화에 잠시 흥분했지만 7시가 넘었는데도 어두운 하늘도, 습기도, 돌길도 도움이 되어 주지 않는다. 그나마 부는 바람이 땀을 식혀 줄 따름이다.
남부능선이 덜 알려지고 산꾼의 출입이 많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길을 특징 지울 만한 것이 적다. 걷는 내내 적당한 조망 터를 발견하지 못했다. 흐린 탓도 있겠지만 길 자체가 조망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 여겨진다. 몇 번의 오름 끝에 커다란 바위지대와 만나다. 바위 틈으로 빛이 세어 나온다. 연무 속에서도 뚜렷한 빛에 잠시 당황한다. 석문이다. 생각보다 크다. 예사롭지 않는 기운이 느껴진다. 삼각대를 세운다. 석문을 등지고 내 모습을 담는다. 잠시 지리산의 새로운 명소와 마주한 기분을 만끽한다.
석문을 지나고도 한동안 돌투성이의 오름이 계속되었다. 산 어깨를 돌아드는 좁은 길을 걷고 언덕 하나를 더 올라서자 의신 갈림이 등장한다. 가보지 못한 곳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의신에서 세석도 9km에 육박하는 거리다. 갈림을 지나자 등로가 순해진다. 안개와 연무는 여전하다. 길이 순해지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지나온 8km의 여정이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다시 걷고 싶지 않은 곳이다.
길가에 핀 야생화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리, 벌개미취, 어린 구절초, 동자꽃, 며느리밥풀꽃, 잔대 그리고 야생 비비추 등이 험한 길에 벗이 되어 주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그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대부분은 보는 즉시 지워질 테지만 반갑고 고마운 존재에 대한 나만의 애정을 보낸다.
언제부턴가 비가 내린다. 부지불식간이란 말이 떠오른다. 갑자기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음양수다. 남부능선 유일의 샘터다. 물 길 위 바위 틈에 산오이풀이 보인다. 샘이 아니라 석간수다. 물에 손을 적셔본다. 찬 기운이 느껴진다. 다시 카메라를 세운다. 사진을 본다. 내 얼굴에는 힘겨움과 안도감이 공존하다. 한 장의 사진은 긴 글보다 현장의 분위기를 더 잘 전달해 준다. 사진의 매력이다.
비가 더 거세진다. 변덕스러운 것 중 한라산, 설악산, 지리산 일기만큼 심한 게 또 있을까 란 말이 실감난다. 이제 남은 거리는 1km 남짓, 힘을 내어본다. 거림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고 평탄한 등로가 이어진다. 잘 가꾸어진 숲이 등장하고 잿빛 하늘 밑에서도 푸른 나뭇잎들이 싱그러움을 뽐낸다. 세석의 여름은 또 하나의 고운 풍경을 마음에 담게 한다.
데크와 샘터를 지나‘세석 호텔’에 입실한다. 10km 긴 남부능선 종주는 이렇게 끝이 난다. 지리산 남부능선은 긴 길에서 감성을 심화시켜 주는 깊이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힘에 겨웠지만 그 도전과 경험만으로도 내게 상을 주고 싶다.
< 세석 ~ 장터목 >
대피소 식당에도 우리가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흔적들이 있다. 조리대마다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익숙하면서도 산에서 대하니 낯설다. 지고 온 도시락을 먹는다. 무게를 줄이느라 끊여 먹는 음식 대신 준비한 것인데 의외로 맛났다. 산에서는 역시 김치와 고추장이다. 비 내리는 세석에서 빗소리 들으면 먹는 아침, 최고다. 거지 같은 몰골이지만 마음 만은‘티파니에서 아침을’보다 행복하다.
대피소를 나서며 삼각대를 세웠다. 안개가 훌륭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길을 나선다. 촛대봉 오름 0.7km 거리가 멀지만 느껴진다. 긴 휴식 탓에 다리가 산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진득한 오름이다. 비 내리는 촛대봉은 풍경이 없다. 멈칫거리며 주위를 배회하지만 다른 수가 없다. 또 걷는다. 올라섰으니 대세 내림이겠지 하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기억 속의 장터목 가는 길은 편하다 여겼는데, 그건 한참 때 날씨 맑은 날의 이야기이고 오늘은 다르다. 웬 바위와 잔돌이 이리 많은지, 초반부터 힘이 빠진다. 그러고 보니 지리산의 등로는 대체로 돌길이다. 크기가 크다고 품이 넓다고 고도 차가 크지 않다고 얕보아서는 안 된다. 거의 모든 등로가 돌길이라 여기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연하봉 가는 길도 그러했다. 내려서면 올라서고 또 나타나는 바위…. 평소 같으면 주변에 멋진 풍광에 취해 별스럽지 여길 일들이 지금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비바람이 인다. 고원의 풀들이 바람에 쓰러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한다. 다시 보기 힘든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지만 현장감이 없다. 아쉽다. 연하선경이 시작되는 바위 언덕에 당도했다. 잠시 행장을 정리한다. 이곳에서 연하봉까지는 지리산에서도 손꼽히는 풍광 명소인데 오늘은 연무 속에 잠겨있다. 걷는다. 바람이 인다. 야생화가 만발한 고원에 안개가 자욱하다. 문뜩 얼마 전‘헤어질 결심’의 바람 불고 안개 자욱한 바닷가 장면이 떠오른다. 송창식의 저음이 매력적인 노래‘안개’를 흥얼거린다. 모든 노래는 그리움의 표현임을 깨닫는다. 연하선경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새롭고도 인상 깊은 경험이다.
걸음은 한 없이 느려진다. 연하봉을 지난다. 연무 속에서도 멋짐이 뿜어져 나온다. 연무 속 숲은 태고의 공간 감각을 일깨우는 공간이 된다. 장터목 가는 길에 마주한 숲은 더 없이 멋진 화원이었다. 노랗고 붉고 자주색 꽃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를 뽐낸다. 살아있는 것들은 스스로를 흥행시키고자 분주하다. 우보 산행을 하며 모처럼 걷는 재미를 잠시 느껴본다. 장터목도 안개에 젖어 있었다.
< 장터목 ~ 중산리 >
올 게 왔다. 기억에 최악의 하산이었던 장터목~중산리 그 길에 다시 선다. 비가 내리고 돌은 미끄럽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샘터에서 세수를 했다. 차가운 기운이 온 몸에 번진다. 조심스레 돌 계단을 내려선다. 계곡 물소리가 거칠다. 비가 더 오면 위험해지지 않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이정목이 나타난다. 4-9, 시점이 어딘지는 몰라도 4.5km 지점이란 말이다. 장터목~중산리가 5.2km 이니 벌써 0.7km…. 잠시 희망을 읽는다. 물가에 수국이 지천이다. 비는 더 거세진다. 안 되겠다 싶어 배낭에 커버를 한다. 한참을 내려왔다 생각했는데 다른 이정목과 만난다. 장터목 0.5km, 엥, 이건 뭐지! 이리 힘겹게 내려왔는데 겨우 500미터, 잠시 전 본 이정표가 맞겠지 하며 주문을 건다.
폭포를 여럿 지났다. 사진은 흐릿해서 포기한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이제나저제나 하던 유암폭포가 나타난다. 차원이 다른 우렁찬 소리에 놀란다. 거대한 소리와 물줄기가 압권이다. 그 밑에서 알탕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위험한 스릴이다. 연이어 돌탑지대도 지난다. 등로는 조금은 순해졌지만 여전히 돌밭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이 돌길이 이어진다. 다리를 여럿 지나고 폭포도 여럿 만났지만 고대하는 칼바위 갈림은 먼 그대였다. 다시는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으리란 다짐을 수 없이 한다. 지리산이 갈 만한 산이라 말하는 이들에게 틀렸다고 말해주리라.
예상은 기대의 산물이다. 헛된 기대는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진득이 걷는 정직한 걸음만이 나를 중산리로 데려다 주리라 마음 먹는 순간 거짓말처럼 천왕봉으로 향하는 갈림과 만난다. 불확실성은 사라졌지만 이후로도 1.2km 더 가야 한다. 이곳부터는 길 사정을 잘 알기에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산 밑에 내려오니 날이 갠다. 거의 10시간 만에 환하게 열린 하늘을 본다. 중산리 야영장을 지난다. 다리 위에 선다. 지나온 계곡 위를 멀리까지 바라본다. 아득히 먼 길이었다.
< 에필로그 >
거북산장에서 샤워를 했다. 따듯한 물도 나온다. 주인에게 감사한다. 산행 후 목욕은 산꾼에게는 최고의 호사다. 씻고 나니 몸이 날아갈 것 같다. 형편없는 맛의 비빔밥을 먹고도 밥값이 아깝지 않았다.
귀경 버스는 3시에 출발했다. 대장의 말로는 5호 태풍이 한반도로 방향을 틀었고 그래서 지리산에 비가 왔다 한다. 그랬구나. 그리고, 놀랍다. 이 긴 길을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험로를 한 사람 낙오 없이 모두 제시간에 내려오다니…. 그 중 일부는 천왕봉을 거쳐서 내려왔다 한다. 용자요 실력자다.
차가 함양 땅에 들어선다. 사진 정리를 마친다. 졸음이 쏟아진다. 눈을 감고 비몽사몽 간 지나온 여정을 복기한다. 오늘 지리산은 변화무쌍한 날씨와 만만치 않은 등로로 기억되리라. 특히, 삼신봉에서 세석까지 이어지는 남부능선은 예상보다 좁고 거칠었다. 일자로 곱게 뻗어 내렸다 하지만 도처에 험로가 산재했다. 웃자란 산죽과 발 밑을 살피게 만드는 작은 바위 탓으로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길고 지루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세석~장터목 구간은 편하고 경치 좋은 곳이란 환상이 깨질 만큼 돌 투성이의 험로였다. 그리고 장터목~중산리 구간은 더 없이 거친 돌계단의 연속이었다. 당분간 지리산 생각은 다시 하지 않을 것 같다.
한 시간쯤 곤히 잤다. 버스는 무주 땅에 들어선다. 여름 산하가 차창으로 지나간다. 평온하다. 그래서 더 멋지다. 무사히 하산하여 이 안락한 버스 안에 있는 자체가 행복이 아닌가 생각했다.
일요일 아침. 모처럼 잘 잤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산행기를 쓴다. 어제 산에서의 일들이 되살아 난다. 길고 힘겨웠다. 그래도 기대하지 않은 일출도 보고, 평원에서 바람에 쓰러지는 야생화 군락도 목격하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마음에 그리던 지리 남부능선 산행을 무사히 마치지 않았던가.
먼 길을 다녀오고 나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행복한 것이리라는 믿음이 더 굳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