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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흑전黑田 일본의 쿠로다くろだ C
| 김영재
1. 일본미술과 흑전청휘黑田淸輝003-004
05-1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2. 조선-대만-일본의 양화------011
05-1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3. 세 가지 향토색----------018
05-2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4. 한국미술과 흑전청휘黑田淸輝 ---------------025
05-2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5. 한국미술기록과 흑전청휘黑田淸輝-----------032
05-3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6.결어-----------037
05-3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7. 외래어 인명-모임-어휘 등 한글 음독 순
05-3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040
조선에서 양화洋畵라고 부르는 서구西歐의 미술은 인상주의印象主義였고 일본화한 프랑스 미술이었고 조선의 유일무이한 영향원이었다. 조선은 그 입맛에서 서구미술을 동경하고 추수했다. 그 변곡점變曲點에 흑전청휘黑田淸輝쿠로다 세이키くろだ せいき가 있었다...고 했다.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0黑田淸輝 舞妓 1893
이 단순한 도식이 한국인의 머리에 자명한 진리로 각인된 데는 미술사나 미술 이론은커녕 체계화된 기초자료조차 불비不備한 미술판의 영향이 컸다. 부실한 자료와 선입견 또는 양반취향의 수필조와 주정적 논리진술이 용인될 수 있었던 사회상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의 양화가 태동했던 20세기 미술은 사진술-카메라의 발명에 따라 재현再現의 의의가 퇴색하자 현생인류의 텃세로 대두된 인상-표현-이지-무의식-초현실과 추상 등 기계가 할 수 없는 인간의 미술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기계에 빼앗긴 현생인류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인상-표현을 거치면서 조선인은 일본미술이라는 산파産婆에 의해 억지로 길들여진 프랑스 표 분유粉乳의 맛에 식상하기 시작했다. 앵포르멜Informal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추상표현이라는 애매한 사조에 한국의 입맛을 가미하면서 한국은 주입된 일본제 분유를 걷어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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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한국미술은 오브제Objet와 물질-행위와 설치 및 대지미술의 자기화를 거쳐 다시 표현과 표상으로 회귀하는 세계미술의 순환양상을 따라잡으면서 독자적 세계를 펼쳐나간다. 미술의 암흑시대를 지나면서 징검다리의 형식으로 세계미술과의 대위법적 직조織造를 꾀하고 있다.
1958 장리석張利錫 그늘의 노인 제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대통령상 김영재 한국양화백년 1988
그러나 한국미술을 떠받칠 수 있는 이론적 구조적 취약성은 오랫동안 발목을 잡고 있었다. 파리화단-일본양화-한국양화라는 수직영향도식을 불문율처럼 만든 한국미술판의 중심에 흑전청휘黑田淸輝가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만들고 한국인이 주물럭거린 자빠진 신상神像이었다.
일본에서 흑전청휘黑田淸輝는 신성불가침의 위계를 확보하고 판단중지까지 격상되고 있었다. 일본풍토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 기이한 현상을 한국의 일본미술사에서 왈가왈부하는 건 무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빠진 신상에 걸려 넘어져야 되겠느냐는 각성은 없었다.
튼실한 기초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일 수 있었다. 종적으로 프랑스미술-일본미술에 영향을 준 프랑스 화가 혹은 일본인이 선택한 프랑스화가-일본미술 혹은 일본문화나 체재에 대한 이해가 선결문제였다. 횡적으로는 대만-만주 등 동시대 식민체재하에서의 동종 견해와 정보였다.
그렇게 조선에서 흡수하고 한국에서 뱉어낸 일본의 영향을 진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일본분유의 젖병을 밀칠 준비작업에 불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젖꼭지를 물고서는 거친 세파를 헤칠 수는 없다는 것이 자명하고 필수적인 과제라는 인식은 보편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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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미술과 흑전청휘黑田淸輝
05-1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일본의 양화는 그 본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미술과는 방항과 성취에서 그 궤도가 달랐다. 서구미술의 일본화는 서구미술에 대항하기 위한 실용적인 접근에서 시작하여 일본식 아카데미즘Academism에 대한 전체주의적 기대를 기간基盤으로 하는 구화歐化おうか정책으로 이어진다.
일본양화는 애당초 그 교주고슬膠柱鼓瑟의 범주를 넘어 세계화를 논할 수 있는 체질과 풍토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에 유입된 해외미술은 곧 공예풍의 일본색에 녹아들어가고 깊이가 결여된 모더니즘Modernism이라고 자평하는 일본양화로 남아있었다.
그 일본풍 모더니즘Modernism은 16세기 중엽 도산桃山모모야먀ももやま 시대에서 시작된다. 일본근대회화사日本近代繪畫史에 의하면 일본의 근세양화사近世洋畵史는 18세기 강호江戸에도えど시대 중기의 풍경화의 원근법과 초상화의 음영법이 채용되면서 시작된다.
桃山江戶時代的日本繪畫- 雪花新聞j桃山江戶時代的日本繪畫1.jpg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02黑田淸輝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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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법謝里法ShaihLifa은 대만미술운동사臺灣美術運動史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일본-대만-조선의 입장에서 일본미술을 조망한다. 일본에서 보는 일본미술사와 달리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메이지이신めいじいしん이후 대만과 연관의 입장에서 서구유학생이 기록된다.
미술방면으로는 1869년 국택신구랑國澤新九郞구니자와 신구로くにさわ しんくろう-유영留英: 영국유학-1870년 산구청웅山村淸雄야마무라 산손やまむら さんそん및 1878년 산본방취山本芳翠야마모토 호우쓰이やまもと ほうすい의 유법留法:프랑스 유학의 기록을 보인다.
이후 1890년 원전직차랑原田直次郞하라다 나오다로우はらだ なおたろう-흑전청휘黑田淸輝-등아삼藤雅三후지 마사소우ふじ まさぞう-구미계일랑久米桂一郞구메 케이이치로くめ-けいちろう-강창천심岡倉天心오카크라 덴신おかくら てんしんOkakura Tenshin등이 프랑스法國로 유학-서양근대미술의 씨앗이 된다.
YES24 原田直次郞 西洋畵は益益裝すべし 畵家
近代日本洋畵の200年1984-11久米桂一郞裸婦立像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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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개인私人 화숙畵塾-화실을 열었다. 당시 일본의 미술교육이 상당한 규모였으며, 귀국 서양유학생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다.
1869년 청향독화관聽香讀畵館ぞことくがかん-천상동애川上冬崖카와카미 도우가이かわかみとうがい-1873년 고교유일高橋由一 다까바시 유이치たかばし ゆいち의 천회루天繪樓텐카이로우てんかいろう-1875년 국택신구랑國澤新九郞의 창기당彰技堂しょぎど이 설립되었다.
TakahashiYuichたかはしゆいち新潮社1998-7高橋由一1877鮭さけ
1872년 천정충淺井忠아사이 츄우あさい ちゅう의 십일회十一會じゅういちかい-1888년 원전직차랑原田直次郞의 종미당鐘美堂かねびどう-1888년 산본방취山本芳翠의 생교관生巧館せいこうかん-1894년 흑전청휘黑田淸輝와 구미계일랑久米桂一郞의 합력개발 천진도장天眞道場텐진도우죠우てんしんどうじょう등이 기록된다.
사리법謝里法은 일본의 양화에 대한 인식과 기교가 일류수준에 도달하였으며, 국가정책적 총 노선을 서향화向西化-서구화에 힘쓴 결과, 서양회화가 일본본토에 번식繁殖할 수 있도록 조장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혁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이었다.
1876년 명치明治9년 구화歐化정책의 일환으로 공부미술학교工部美術學校こうぶびじゅつがっこう가 개설된다. 공부미술학교工部美術學校의 예과豫科 화학과畵學科 조각과彫刻科 중에서 화학과 교수로 폰타네시Antonio Fontanesi가 초빙된다.
近代日本洋畵の200年1984-08明治の初期洋畵Fontanesi1876-78
1877년 명치明治 10년 고교유일高橋由一의 ‘련鮭=연어鰱魚サケ’는 예술로서의 양화로 평가된다. 본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사실주의적 태도로 대상에 접근한다. 그리하여 사물의 존재에 대한 반응이 그림에 반영되고 나타난다고 평가된다.
TakahashiYuichたかはしゆいち新潮社1998-7高橋由一1877鮭さ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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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원전직차랑原田直次郞의 종미당鐘美堂-1888년 산본방취山本芳翠의 생교관生巧館せいこうかん이후 1890년 원전직차랑原田直次郞-흑전청휘黑田淸輝-등아삼藤雅三후지 마사소우ふじ まさぞう-구미계일랑久米桂一郞-강창천심岡倉天心등이 프랑스法國로 유학-서양근대미술의 씨앗이 된다.
岡倉天心 絵画作品集
이들은 개인私人 화숙畵塾-화실을 열었다. 당시 일본의 미술교육이 상당한 규모였으며, 귀국 서양유학생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다.
사리법謝里法은 대만미술운동사臺灣美術運動史에서 일거日擧=일정日政 시대 대만의 미술운동을 개관하고 있다. 1895년 청일전쟁淸日戰爭과 하관下關시모노세끼しものせき 조약條約=条約죠야쿠じょうやく으로 대만 할거割譲가 행해지고 근대화 동화정책이 추진되었다고 쓰고 있다.
사리법謝里法은 일본의 양화에 대한 인식과 기교가 일류수준에 도달하였으며, 국가정책적 총 노선을 서향화向西化-서구화에 힘쓴 결과, 서양회화가 일본본토에 번식繁殖할 수 있도록 조장했다고 썼다.
그러나 일본의 시각과 프랑스의 인상주의 혁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본의 양화는 막부의 공식 양화연구소인 번서조소蕃書調所-蛮書調所반쇼시라베쇼ばんしょしらべしょ에서 서양과 대항하기 위한 실용학문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近代日本洋畵の200年1984-02평하원내 서양부인도제작년도미상
정식 서양미술교육은 명치明治 9년=1876 일본전통화법을 보완하고 단점보충을 보충하며 화풍교습을 위해 공부성공학료工部省工學寮고우부쇼우고가쿠료우こうぶしょうこうがくりょう가 공부대학 내에 창설되었다.
1889년 명치明治22년 일본최초의 양화미술단체인 명치미술회明治美術会めいじびしゅつかい가 탄생한다. 양화의 바탕으로서의 서양 정신구조를 포착하여 일본화하고 일본 유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일본 양화의 총결산처럼 생각된다.
明治美術会 静岡県立美術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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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흑전청휘黑田淸輝가 라파엘 콜렝Raphael Collin의 고전적 묘법과 외광 아래 인물 등 초기 인상화풍을 절충한 아카데믹Academic한 구성과 온아한 분위기의 양명陽明한 화풍을 들여오면서 명치미술회明治美術会 계열은 음지로 밀려난다.
After the BathLouis Joseph Raphael Coiin Fine Art America
흑전청휘黑田淸輝의 천진도장天眞道場으로 대변되는 화사한 외광파 작품 경향은 세계미술을 일본화 혹은 향토화한다는 문화적 쇄국주의의 타성과 일본인의 기질에서 볼 때는 명치미술회의 경향 혹은 방향과 다른 흐름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흑전청휘黑田淸輝는 석고상모사塑像臨寫와 인체모사活人臨寫를 가르치면서 회화를 배우려면 천진天眞을 중시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회화를 위한 회화로 뛰어들라는 이야기라 볼 수는 없었다. 명치미술회 등의 고질적 구속이나 속박을 벗어던지라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었다.
단지 기존의 일본화단에 염증을 느끼는 젊은 세대에게는 천진天眞조차도 명치明治20년대=1887년대를 풍미했던 낭만주의浪漫主義의 흐름과 함께 감성적 해방을 가져다주는 신선함으로 다가왔을 수는 있겠지만 역시 파리화단의 자유분방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About:Acceptance and Reinterpretation: Western Paintng in East Asia in the early 29th century Skim607.Omeka.net/Kuroda Seiki The Fields 1907
1912년 대정大正타이쇼たいしょう시대와 함께 일본 양화는 형식화된 명치明治 양화와 절연하고 화려하고 의욕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전대의 성취나 왜곡에 대한 분석과 대응이 결여된 채 일본풍토에 녹아들어간 양화는 세계미술과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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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대만-일본의 양화
05-1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일본은 먼저 수입한 양화를 일본 입맛에 맞게 주물럭거렸다. 아예 일본이 나아가야할 양화를 일본 규격화하고 불문율화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조선과 대만에 선심을 썼다. 그것을 세계미술로 당연히 믿고 따르리라 믿었다. 일본중심의 양화세계가 펼쳐질 것으로 착각했다.
조선이 서구-프랑스의 미술을 처음으로 접한 1910년대 명치明治43년에 창간한 백화白樺시라카바しらかば誌는 매호마다 미술관련 글과 세잔Paul Cezanne 고흐Vincent van Gogh 고갱Paul Gauguin 마티스Henri Matisse 등 작품을 도판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白樺 (雑誌) - Wikipedia
1910년 고촌광태랑高村光太郞타가무라 고타로たかむら こうたろう는 잡지雜誌 묘昴스바루つばる에 일본의 인상파 선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녹색의 태양緑色の太陽마도리이루노 다이요우みどりいろのたいよう’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작가들에게 개성존중과 표현의 자유를 고취했다.
緑色の太陽.jpg
당시 조선의 양화는 망국의 암울함보다 더 컴컴한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고희동高羲東의 술회는 그 어둠을 밝혀줄 작을 불씨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육하원칙六何原則과는 무관한 노변잡담은 금과옥조로 모셔졌다. 기록은 기록만으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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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高羲東은 2월 하순 단신 동경행-4월 초순 ‘다행히도’우에노上野 공원안에 있는 도오쿄오 미술학교 서양화 예비과에 들어가 앉게 되고 다행히도 6월 하순에 본과 편입시에도 떨어지지를 아니하고...그리저리하여 6개년이 되던 해 3월에 졸업이라는 한 고비를 지냈었다 라고 술회한다.
이경성李慶成은 고희동高羲東이 2월 하순 상야공원 안에 있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예비과를 다니다가 5월 하순 본과 편입, 그럭저럭 6개년이 되던 3월에 졸업했다고 썼다. 그럭저럭이나 다행히도 라는 말이 회자膾炙될 때 사실이나 인과관계는 사랑방 퇴물에 불과했다.
이경성李慶成은 다시 고희동高羲東이 1909년 동경미술학교서양화과 입학 장원효태랑의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구로다 기요대루하고 후지시마 다께지 등의 교수를 받았다 고 했다. 영향관계의 추론은 커녕 검색도 안 되는 이름과 구름잡는 방담으로 조선양화사는 시작되고 있었다.
장원효태랑長原孝太郞나가하라 코따로ながはら こうたろう-구로다 기요대루->흑전청휘黑田淸輝쿠로다 세이키くろだ せいき-후지시마 다께지->등도무이藤島武二후지시마 다께지ふじしま たけじ 등은 당시 강사진과는 별개의 혹은 간접적인 영향원으로 보인다.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10 1908-09
FujishimaTakeji藤島武二ふじしま たけじ新潮社1998-08 黑扇1908-9
흑전청휘黑田淸輝는 강창천심岡倉天心과 페넬로사Ernest Fenellosa가 1889년 설립한 동경미술학교에 양화과洋畵科요카카ようかかyokaka가 신설되자 교육부 장관인 서원사 공망西園寺 公望사이몬지 긴모치さいおんじ きんもちSaionji Kinmochi에게 추천 받는다.
About:Acceptance and Reinterpretation: Western Paintng in East Asia in the early 29th century https://skim607.omeka.net/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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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밝은 빛과 색의 인상주의와 아카데믹기법한 새 스타일을 소개, 1896 동경미술학교 개설 양화과洋畵科 신설 제반업무와 커리큘럼Curriculum작성에서 교수임용까지 관할했다. 그러나 전폭적인 분위기-스타일-누드나 자화상 등 장르 결정과 개인지도와는 다를 수 있었다.
더욱이 흑전청휘黑田淸輝는 1910년 양화가로서는 처음 제실기예원帝室技藝員-1916년 자작子爵 수여-1919년 귀족원의원貴族院議員에 당선-1921년 삼 구외森 鷗外모리 오우가이もり おうがい의 뒤를 이어 제국미술학원帝國美術學院 2대원장이 되었지만 다음해 1924년 병사했다.
고희동高羲東은 ‘화필생활 30년에’ 라는 회고담에서 2개월 목탄 데생을 배우고 다른 학생들의 커리큘럼에 합류했다고 했다. 흑전청휘黑田淸輝-콜랭Raphael Collins의 계보가 프랑스 인상파와 배치된다고 판단하기에도 무리한 시간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관호金觀鎬의 문전門展 입선작 석모夕暮를 흑전청휘黑田淸輝에 빗대는 것은 작품으로 보아 견강부회牽强附會랄 수 있었다. 더욱이 콜렝에게 사사받을 때 지도를 받았다는 샤반느Puvis de Chavanne의 작품과는 연결고리는 물론 설득력에서 문제가 적다 할 수 없었다.
1916김관호 金觀鎬석모 동경미술대학 소장 김영재 한국양화백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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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반느Chavannes는 색채-기법-구성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시각에 따른 인상의 기록보다 서사적인 기록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석모夕暮의 범본이 되었다면 누드의 도입-허술한 고유색과 어눌한 해부학적 기법 및 고식적인 구성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Canvas Paintings - Wall Art/Young Girls on the Edge of the Sea By Pierre Puvis de Chavannes
흑전청휘는 일본에 길들여진 프랑스 미술로 일본-중국-조선-대만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원이었겠지만 나라마다 수용의 양상은 달랐다. 조선의 경우 김관호 이후 흑전청휘의 범주나 영향보다는 민족적 기질 쪽이 더 많이 반영된 이를테면 반골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만미술사臺灣美術史에 의하면 동경미술학교의 강사진은 그 당시 일본의 권위있는 화사畵師인 전변지田邊至다나베 이타루たなべ いたる-매원용삼랑梅原龍三郎우메하라 류자브로うめはら りゅうざぶろう-석정백정石井栢亭이시이 하쿠데이いしい はくてい-유도생마有島生馬아리시마 이쿠마ありしま いくま-길촌방송吉村芳松Yoshimura Yoshimatsuよしむら よしまつ 등이었다.
なんぼや 梅原 龍三郎(うめはら りゅうざぶろう)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15有島生馬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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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법謝里法은 이 시기의 대만화가 다수가 동경미술학교 학원파의 기교를 훈련했고 회화적 기본관념은 시종 인상파-혹은 외광파와 야수파 사이였다고 쓰고 있다.
謝里法 臺灣美術運動史033 52 53 陳植棋
그러므로 조선 최초의 양화가가 그린 최초의 본격적인 양화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고희동高羲東의 자화상 두 점이라 할 때 인상파-외광파-야수파의 영향권 아래서 제작되었다는 추론을 위해서는 조선 외의 자료를 뒤져야 한다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再考 近代日本の繪畫2004고희동
이종우李鍾禹는 1915년 서울에 살던 고목배수高木背水たかぎ はいすい와 고가우웅高架祐雄고우카 쓰게오こうか すけお 및 석전부조石田富造이시다 토미조우いしだ とみぞう 등이 조선미술협회朝鮮美術協會를 조직하고 정동교육구락부에서 협회전을 가졌다고 회고한다.
1924在城畵家の相互扶助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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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李鍾禹는 고목배수高木背水의 사생에서 자극받고 1917년 약 1년간 *교오토京都의 *관서미술연구소에서 입학에 필요한 데상이며 기초공부를 했다고 1971년 8월 31자 기사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245 ‘양화초기’라는 기사에서 술회한다.
貴重 /[高木背水・波・6F]/黒田清輝の時代・佐賀市
이어 1918년 봄 기다리던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는데 당시는 아직 외국인 취급을 받아 정식학생이 아니고 관비 장학금 등의 혜택을 받았다고 했다. 이러한 기술 역시 일본의 정책적 회유의 근거는 추측할 수 있으되 영향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제공되지 아니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대만미술운동사臺灣美術運動史에서의 기술에서처럼 석천흠일랑石川欽一郞이시가와 킨이치로いしかわ きんいちろう의 영향권에서 정형화된 대만미술의 이른바 향토색이 대만인의 대만풍토를 대만식으로 표출한다는 태도와는 다를 수 있었다.
謝里法 臺灣美術運動史013 石川欽一郞 風景
사리법謝里法은 일본의 문전門展분덴ぶんてん-문부성미술전람회文部省美術展覧会에서의 갈등에서 비롯된 바 소장파들이 결성한 이과회二科會니카카이にかかい 출현 이후의 입체파立體派 구성파構成派 미래파未來派 다다이즘Dadaism 등의 회화사조와 독립살롱獨立沙龍의 무심사전無審査展 등 자유로운 화풍이 대만미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고 진단한다.
kousin242.sakura.ne.jp
大正期新興美術運動の槪容と硏究史 日本近代美術史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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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일목요연한 영향관계를 보여주는 사리법謝里法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대만미술이 얼마만큼 천착穿鑿되었는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처럼 두루뭉수리로 까뭉갠 조선미술에서는 이만한 진술도 기대난이었다.
식민치하에서도 조선과 대만은 탈일본이라는 추동력은 동일했겠지만 그 양상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대만에게 일본은 혜택을 주는 수혜국授惠國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은혜를 베풀었던 수혜受惠의 나라 일본에 지배를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국치國恥였을 것이다.
謝里法 臺灣美術運動史061 106 107
대만이 일본에 의해 촉발된 미술권역에서의 민족운동이었다면 조선은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민족투쟁이어야 했다. 묘사보다는 내면의 반영이요 투박하고 못생긴 그림이 체질과 생리에 더 가깝다고 느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조선과 한국의 화가가 다듬어져왔을 수도 있었다.
1940구본웅具本雄 여인 국립현대미술관 한국근대미술걸작전2008
東京國立近代美術館 編 東京國立近代美術館所藏名品集 洋畵2004-31里見勝藏1924
1941김중현金重鉉 무녀도 유화 41x46cm 국립현대미술관
3. 세 가지 향토색
05-2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이경성李慶成은 1930년대를 통해 전개된 이른바 향토적 소재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자아의 간절한 염원이 내포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고 썼다. 한국인의 독자적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 향토색鄕土色이 발현했다는 말로 들린다.
한국에서의 향토색을 일제의 강압적 아카데미즘의 영향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김현숙金炫淑은 동경미술학교의 아카데믹한 교수급 화가들이 민족적 현실-일제저항-인간문제-역사 사회적 의식을 차단하고 단순한 자연미의 재현이나 향토적 풍경 및 재현 인물 정물화를 종용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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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나 만담漫談 류의 수상隨想이 전횡하는 미술판에서는 괄목할만한 탁견卓見이라고는 하나 기록의 분석 검토에 따른 객관적인 결론이라기보다는 선입견적 정황적 추론적인 것이라 할만 했다. 선전鮮展의 수상권에 들기 위한 자발적 선택조차 강요라 하기는 어려울 수 있었다.
오히려 향토색은 총독부總督府의 주문 혹은 방임에서 비롯할 수도 있었다. 전람회 진열품을 동양화 서양화와 서書로 나누되 ‘조선에 본적을 지니고 있는 자의 제작품에 한限한다’ ’조선에 살고 있지 아니한 미술가의 출품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규정이 그 단서일 수 있었다.
제1회조선미술전람회규약 1922
이 규정에 따라 선전鮮展 1회전에 출품된 대부분의 작품이 당시 동경유학에서 보고 배운 대로 정물 시골과 도시근교 등 소재를 인상주의-자연주의 터치Touch로 버물린 이른바 향토색 소재가 차지했다. 일본 소재로는 인물화 12점과 일본 풍경 19점이 포함되었다.
황정수는 황토색의 표현은 일본제국주의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기 위한 정신적 기반으로 만들어낸 미술계의 문화적 현상 중 하나이며 조선미술계를 지배했던 교토화단京都畵壇이 그들의 역사와 전통을 이식해서 선전鮮展을 향토색으로 가득 채웠다고 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일본의 전통을 이식한다면 향토색이나 황토색일 수도 없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양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인물이나 인물이 있는 풍광에서 일본의 전통이나 일본색-식민지의 향토색을 추출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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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일본에서 조선색 혹은 조선향토색은 차별없이 수용되었다.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일체보다 이국정서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등도무이藤島武二의 꽃바구니-화롱花籠을 인 조선처녀가 일본양화사에서 조선향토색이라 배척되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FujishimaTakeji藤島武二ふじしま たけじ新潮社1998-10花籠1913
사리법謝里法은 당시 대만 화가들이 민족운동에서의 영향력을 위해 제전帝展-대전臺展-부전府展=대만총독부미술전람회台湾総督府美術展覧会에서 요구하는 탁상의 정물이나 시골과 도시 근교 등의 소재와 준칙을 따랐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석천흠일랑石川欽一郞의 대만 향토미 표현이 막대한 영향력을 구사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 대만 화학생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일본인 화가의 이국정서표출과 이를 거부반응없이 추수追隨한 대만화가의 행복한 친화관계처럼 들린다.
총독부로서는 의당 선전鮮展에 민족자결이나 미술사조의 견인-용인-추장推獎할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리법謝里法은 대만臺灣의 총미전總美展=총독부미술전람회總督府美術展覽會1927-1936는 심사위원의 구성이나 발언의 수위에 따라 유동적인 전시기구라 썼다.
web2.nmns.edu.tw 日治時期臺灣官辦美展之行政探討A Study on the Administration of ...
이것은 명치미술회明治美術會나 외광파의 활동 및 영향력에 따라 당시 선전鮮展이나 대전의 심의기준은 가변적일 수 있고 공통분모가 향토색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일본색으로 결집된 혹은 공통소를 추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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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양화백년의 산맥에서 빼어난 일본 토착 사실주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천정충淺井忠의 제1회 명치미술회전1888 출품작 ‘춘무春畝봄의 밭이랑’ 등과 선전鮮展-부전符展-총미전總美展 심사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이론적 자료나 시각적 근거는 박약했다.
文化遺産オンライン 春畝 淺井忠筆 一八八八年
오광수吳光洙는 ‘한국현대미술사’ p.43에서 당시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의 심사위원審査委員 명단을 싣고 있다. 어느 누구가 몇 회전의 심사를 맡았다 등의 단서는 붙어있지 아니하다. 더욱이 심사위원은 목적적으로 결집된 상임 심사위원단은 아니었다.
화전영작和田英作와다 에이사꾸わだ えいさく와 강전삼랑조岡田三郞助오카다 사브로스께 おかだ さぶろうすけ 및 등도무이藤島武二와 장원효태랑長原孝太郞 및 소림만오小林萬吾고바야시 만고こばやし まんご는 각자의 위상과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수시로 교체되는 심사위원이라는 성격상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의 집단개성의 방향이나 성격이나 방향을 주도할 위치라 할 수는 없었다.
東京 ソウル 台北 長春 官展にみる 近代美術 兵庫県立美術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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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考 近代日本の繪畫 小林萬吾門付圖1900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09 JFujishimaTakeji藤島武二ふじしま たけじ芳蕙1926
近代日本洋畵の200年1984和田英作-野遊1925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14岡田三郞助あやめの衣ころち1927
분산 누락된 자료를 수습해야 정리되는 안정증태랑安井曾太郞야스이 소타로やすゐ そうたらう Yasui Sōtarō와 남훈조南薫造미나미 군조みなみ くんぞう나 유도생마有島生馬 및 고촌풍주高村豊周다까무라 토요치까たかむら とよちか 등 역시 미술운동의 주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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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심사 일본인 화가들은 한국인 기술의 소위 한국미술사에서 의식적 무의식적-기술적 체계적으로 누락되어 있다. 영향력이 크지 않거나 한국인 화가들이 그 영향관계 혹은 계보를 밝히지 않았거나 못했기 때문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심사위원-일본인 화가들의 작품과 일본향토색 혹은 황토와 연결 짓기는 쉽지 않았다. 조선에서 향토색 혹은 황토색에 대한 관심은 김종태金鐘泰와 같은 화가 평자들의 훈도비평 나혜석羅蕙錫 등 자성론이 영향원이었을 것이지만 역시 자생적이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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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동아日報 1928년 음력 무진 9월 김종태金鐘泰는 ‘李鍾愚 君의 개인전을 보고’에서 썼다.
‘첫째 충실한 뎃상에 감복하겠다. 그리고 담백한 색채가 퍽도 고결한 것 갓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통폐는 가벼운 것과 딱딱한 것인가 한다. 파리를 알 수 잇을만치 파리의 기분을 잘 내어 노앗다고 하겟다. 그러나 조선인 작가로는 조선의 고유색을 가져야할 것이다. 군의 예술에도 우리의 향토미가 잇섯으면 하는 것이 나의 기대이다‘
라는 내용이다.
1926이종우李鍾愚 루앙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영재 한국양화백년 1988
나혜석羅蕙錫은 개벽開闢 1924 제5년 6월호에서 일 년 만에 본 경성의 잡감을 썼다.
일러
서양류의 그림을 흉내낼 것이 아니오 다만 서양의 화구와 필을 사용하고 서양의 화포를 사용함으로 우리는 임의 그 묘법이라든지 용구에 대한 선택이 있는 동시에 향토라든지 국민성을 통한 개성의 표현은 순연한 서양의 풍과 반듯이 달라야할 조선특수의 표현력을 가지지 아니면 아니 될 것이다
라고 역설한다.
1954박상옥朴商玉 한국양화백년 토끼와아이들 3회대통령상 무제-1 김영재 한국양화백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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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이건 훈도건 향토색이나 황토색은 화가들이나 식자 화가들에게서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실질적인 방향이라던가 구체적인 지침 혹은 세계미술사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대부분의 글들에서 발견되는 것은 당위와 의무에 대한 잡감雜感이랄 수도 있었다.
선전鮮展의 이른바 선전귀족이라는 특권과 영화를 누리겠다는 수구세력은 국전國展을 장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국전國展의 아카데미즘Academism이라 할 수 있을 귀족적 이상적 인물상은 한국미술의 금자탑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미술판의 시선-반응-평가는 싸늘했다.
이경성 근대미술동화출판공사1974 김인승 남자
김인승화집 동아일보사1987 나부
한국미술은 한국인의 미술이었다. 미술이라는 공분모 속에서 각개병사의 각개전투가 큰 틀에서 한국미술이라고 불리웠을 따름이다. 한국의 미술이란 때려 울리지 않는 엄마 없이 잘 노는 이이였다. 엄마 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일본미술의 양상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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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과 흑전청휘黑田淸輝
05-2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한국미술의 기술에서 맨 앞에 놓이는 일본인 화가의 이름이 있다. 일본미술이 한국양화의 기폭제가 되었으니 그 중에서도 영향력이 큰 화가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한국양화에서 일본미술이 없었더라면...은 역사의 흐름에서보아 그다지 의미 있는 질문은 아니다.
1910년 고희동高羲東의 도일을 기점으로 한국양화의 막이 오른다...라 했다. 고희동高羲東의 너스레에 의하면 무작정 동경행에 석고상을 처음 보고 예비과를 거쳐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가고 그러고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흘러 졸업했고 한국양화의 효시라는 명예와 멍에를 안는다.
謝里法 臺灣美術運動史043 72 73 臺灣美術硏究所 1927
노변잡담爐邊雜談이 미술론인양 회자되던 지난 반세기에 김관호金觀鎬 김찬영金瓚永 나혜석羅蕙錫의 이름이 도배를 할 무렵 이종우李鍾禹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낙양의 지가를 올린 일본인 화가 이름에 쿠로다 기요떼루-쿠로다 세이키くろだ せいき가 있었다.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06黑田淸輝 樹蔭1898
흑전청휘黑田淸輝쿠로다 세이키くろだ せいきKuroda Seiki...쿠로다 기요떼루...부르는 사람마다 이름이 다르되 본명이 뭐든 많이 부르는 이름이 이름인데다가 얼굴은 하나이되 서너 개로 바뀌는 일본식 이름은 일본인의 단정함으로 단장한 뒤에 곧 단정하지 않은 얼굴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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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외래어표기에 저촉되는 기요떼루라는 이름과 함께 국적불명 검색난해라는 꼬랑 등의 혼돈을 거쳐 흑전청휘黑田淸輝는 한국인 화가들의 계보인양 회자되었다. 프랑스 인상파-아류-꼬랑-쿠로다의 전거불명의 자의적 분류는 프랑스-일본-조선의 계보인양 고착되었다.
미술에서 작품은 그나마 기록이라도 남겼다. 때로는 에피소드나 수퍼스타 만들기라는 화랑의 꼼수에 장안이 떠들썩하기도 했다. 비평과 이론과 미술사라곤 없는 조선-한국에서 민족적 의식을 내세워 좋은 조선인과 나쁜 총독부라는 원초적 편 가르기만 난무했다.
이경성李慶成은 ‘한국의 근대미술’에서 당시 백마회白馬会하쿠바카이はくばかい는 자연주의 그것도 인상주의의 아류였으므로 고희동高羲東이 처음 받아들인 것도 그러한 인상파의 아류였다고 썼다. 자연주의-인상주의-인상파 아류는 논리상 대등개념이라 할 수는 없었다.
庚戌 白馬會畵集 坂井義三郞 編 山田書店 美術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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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명치明治29 6월 백마회白馬会는 흑전청휘黑田淸輝-구미계일랑久米桂一郞-등도무이藤島武二-산본방취山本芳翠-소림만오小林萬吾 등에 의해서 결성된다. 일본화한 고전적 아카데미즘Academism을 중시하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再考 近代日本の繪畫2004小林萬吾 物思い1907
백마회白馬会는 프랑스에서 인상파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을 때 사실표현 혹은 외광묘사의 경향과 일본취향의 감미로운 주정적 표현을 표방하고 있었다. 유럽의 자연주의나 프랑스 인상주의 혹은 인상파와는 다른 계열이므로 그 아류라 규정할 수 있는 흐름은 아니었다.
조선-한국에서 미술사의 이름으로 재료의 도입과 기법의 연수에 영향을 미친 일본인 화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1930년대부터는 일본의 양화나 양화가 혹은 미술운동은 그저 이름 정도라도 거론이 된다면 요행이랄 정도로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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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라는 이름의 글에서 논리를 찾기 또한 쉽지 않았다. 이경성李慶成은 근대미술가논고에서 이종우李鍾禹의 ‘인형이 있는 정물’은 물체와 물체가 조성하고 있는 함수관계-치밀한 공간계산-백색과 녹색의 대비에서 오는 신선한 정감이 인상적이다 라고 썼다.
1927 이종우李鍾禹 인형이 있는 정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영재 한국양화백년 1988
이어 이 글은 이종우李鍾禹의 작품가치는 한국적인 미에 서려있다...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중용의 미로서 적합의 아름다움이다 라 자가 반박하고 있다. 서구적 분석적 관점에서의 논리적 판단이나 미적 심미적 판단보다는 주정적 인상적 소견이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김종태金鐘泰가 지적했듯이 이종우李鍾愚의 작품에서 한국미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국취향이라 할 만큼 한국적 감수성보다는 슈하에프shuhaev의 분위기나 색감 터치가 돋보이기 때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1927년 이종우李鍾禹의 인형있는 정물과 모某부인상이 살롱 도똔Salon d’Automne에서 입선한다. 조선인 화가가 일본 경유 프랑스로 진출이라는 종래의 관행에서 벗어나 프랑스 본류로 직행한다. 조선미술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제전 진출이라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보였다.
설초 이종우李鍾禹 화집동아일보사1974-화집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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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를 개관 기술하는 자료들은 기초자료에 대한 수집-확인-고증을 거쳤다고 보기는 힘이 들었다. 신문 등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 역시 그 출처나 관련정보를 그대로 인용하기가 께름직한-이를테면 오염된 자료가 태반이었다.
이경성李慶成은 한국의 근대미술에서 ‘만 3년 슈하이에프연구소에서 유화를 전공하여 1927년 살롱도톤느전에 입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소위 일본적 유화의 기반을 벗어나 순전히 프랑스 인상파의 아류의 사실적 묘법에 충실한 작품이었다’라고 썼다.
오광수吳光洙는 이종우李鍾禹가 ‘백계 러시아인 슈하이에프의 전통적 고전주의 기법을 배워’ 작품을 제작했다고 했다. 이종우李鍾禹의 중앙일보 양화초기라는 글에는 ‘게르망인가 무슈 개랭인가 하는 자유로운 제작태도의 연구소에서 속눈섭까지 꼼꼼히 그리는 백계러시아인 슈하이에프의 연구소로 옮겼다’고 했다.
문헌과 러시아 관련 기관을 통해 모든 자료는 재검정이 필요했다. 추스린 자료를 종합하면 모스크바 태생 러시아인 슈하에프Shuhaev-Basily Ivanovich는 신고전주의 경향의 화력畵歷을 바탕으로 파리에 체류한다.
슈하에프Shuhaev는 소비에트Soviet 예술가연맹LOSSKh 등에서 활동한 러시아의 고전적 사실적 작품경향으로 1921-26년 오페라Opera 박쥐 미니어춰Miniature 공연연출과 1925-1926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등 파리 오페라Opera 무대장식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이종우李鍾禹가 살롱 도 톤 수상작에서 슈하에프Shuhaev의 영향으로 속눈섭까지 꼼꼼히 그리는 정밀묘법과 콘테 스케치를 연상시키는 담백한 화면구성 및 이국적인 인물을 보여주었다면 파리의 인상파-인상파 아류 혹은 미술사조와는 다른 경향과 활동일 수 밖에 없었다.
Paintings of Shukhaev Vasily Ivanovich
-Шухаев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1887-1973)в2018г. Risunki, Melami i Iskusst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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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경성李慶成은 ‘근대한국미술가논고’에서 설초雪蕉 이종우李鍾禹가 ‘1학년 때 나가하라 고오타로에게 사사하고 그 후 고바야시 만고오小林萬吾 등에게 배웠으나 정신적으로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오카다 사브로스케에서였다’라고 썼다.
이어 ‘이종우李鍾禹가 동경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을 당시의 일본의 양화단은 일찍이 프랑스에서 그림을 공부한 *오카다 사브로스케 등 고란-계와 시카노고 헤이보쿠-鹿子平木의 로안스계라는 두 흐름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했다.
*강전삼랑조岡田三郞助오까다 사브로스께 おかだ さぶろうすけ
岡田三郎助―エレガンス・オブ・ニッポン― | 佐賀県立美術館 | 展覧会 ...
외국인 이름을 쓸 때는 원어도 병기해야한다거나 해주면 좋겠다 도 아니었다. ‘고란=>라파엘 콜렝Raphael Collin’ 구로다=>흑전청휘黑田淸輝등은 원 이름을 유추하여 자료에서 검색될 수도 있지만 ‘로안스’는 표기도 원어도 검색 대조 확인이 난감한 어휘에 불과했다.
음독音讀 훈독訓讀의 관습적 무작위적 호칭-가나仮名かな병기도 없는 한자위주의 인명록-중구난방衆口難防의 난삽難澁한 일본어 표기로는 국제적 소통은커녕 일본인들도 한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보면 한국어로도 검색도 안 되는 한국인에 의한 외래어 표기야 무삼하리오 한다.
다만 흑전청휘黑田淸輝가 콜렝Raphael Collin을 찾았던 전철은 조선의 선구자들에게 서구미술의 조선화를 위한 금과옥조였을 것이고 그것이 흑전청휘黑田淸輝의 지대한 영향력이라면 영향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종우李鍾禹는 슈하에프Shuhaev연구소의 문을 두드렸을 것이고 나혜석羅蕙錫은 비시에르Bissier를 찾았을 것이다.
나혜석羅蕙錫 자화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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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蕙錫이 야수파계열이라는 비시에르Julius Heinrich Bissier의 연구소에서 배웠다는 기록들에서 유추하건대 나혜석羅蕙錫이 세계미술의 본류로 진입하련다는 야심적인 작가 의식과 조선미술가의 사명감을 위해 비시에르Bissier의 연구소를 찾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비시에르Bissier의 작품은 일견 미로Joan Miro의 유기적 상징구조의 단순나열 혹은 온건하고 정적인 상징성과 석도石濤의 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명상적인 필획의 작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작품에서 야수파의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구도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Untitled by Julius Heinrich BISSIER Artprice.com
나혜석羅蕙錫의 그림에서 비시에르Bissier나 흑전청휘黑田淸輝의 영향을 추론하기는 역시 쉽지 않다. 일본화한 프랑스미술의 영향권에서 형성된 화풍을 바탕으로 파리의 야수파 등을 자기화한다는 것은 외면적이거나 표피적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화한 세계미술 역시 문화적 체질의 한계였을 것이다. 일본 양화초기를 풍미風靡했던 흑전청휘黑田淸輝 등의 득세는 유화를 바탕으로 하는 프랑스 외광파의 인상기록방법과 해부학적 뎃생을 빌어 와 일본식의 정형을 수립하려던 일본특유의 풍토에서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습작시기에 빈발하는 해부학적 오류와 명암법적 어눌함이 일본양화의 숨은 실체라면 이종우李鍾禹와 나혜석羅蕙錫이 찾았던 파리 연구소는 구화歐化가 목적인 일본화가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되 파리미술의 조선화朝鮮化에는 미치지 못한 과도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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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미술기록과 흑전청휘黑田淸輝
05-3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그 불모의 한국미술이론에서 고희동高羲東의 양반취향은 이경성李慶成-이구열李龜烈-오광수吳光洙로 흘렀다. 치밀한 자료의 정리와 체계적인 논리화 작업이 한국미술기록에서 뒷전으로 밀쳐진들 그 태도와 자질을 탓하거나 트집잡는 일이 없었다. 일러 행복한 무풍지대였다.
주간한국 한국미술평론의 기원을 찾아서-현대한국미술의상황 일지사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사 열화당
그렇게 한국양화초기에 고희동高羲東-흑전청휘黑田淸輝의 지극히 애매한 계보가 형성된다. 그 계보가 옳은지 그른지 의문을 가져야 하는지 덮어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혐일嫌日의 난기류가 험악한데다가 기초자료조차 정비되지 않은 판국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양화의 전개를 짚어볼 수 있는 서너 권의 개론서가 고작인 한국미술계에서 그저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미술만이 판을 친 이유와 배경은 자명했다. 세계미술-일본미술-한국미술을 관통하는 자질과 혜안을 갖추기란 말처럼 쉬운 일일 수 없었다.
흑전청휘黑田淸輝의 작품에는 후속세대들과는 다른 해부학적 구조나 색채조화가 지적될 수 있었다. 초창기 서구미술 도입기의 일본화작업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을 수도 있거나 혹은 무시하거나 경시된 조형적 요소는 때로 작품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Kuroda Triptitch Tokyo Nation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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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무기舞妓Maiko는 해부학적 비례가 어색해 보인다. 상반신과 얼굴에 전력투구한 듯한 그림의 초점을 빗겨 그 나머지 부분을 보게 되면 긴 허리-왜소한 둔부가 눈에 띌 수 있다. 마치 포토샵의 필터-흐림효과-방사상흐림효과를 보는 듯하다.
*무기舞妓Maiko-1928.12.30.이후 公有領域=일본 저작권 시효만료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03黑田淸輝 舞妓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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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축법前縮法Raccourci은 이 그림에서 반영되지 못한 듯 보인다. 그래서 대퇴골大腿骨-넓적다리뼈는 상대적으로 짧고 왜소해 보인다. 결과적으로 무기舞妓의 얼굴과 상반신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보는 사람의 시선을 오래 잡을 수 없어 보인다.
나아가 오른 쪽 옆의 인물은 단순한 그리하여 의미를 부여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로서 그냥 자리를 차지할 따름이다. 그러한 느낌은 상대적인 크기-해부학적 구조-살붙음Modelling에서 어색하면서도 비판금지의 사각지대에 밀려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술이 기승을 부리기 전 화가에게 인체비례의 과장-왜곡-가공은 관용-허용-상찬되었다. 그러나 흑전청휘의 무기舞妓는 회화적 질서를 위한 왜곡으로 보기에는 해부학적 비례의 결여 혹은 부주의로 비친다. 이러한 습작기의 오류라는 인상은 호반湖畔에서 증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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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반湖畔의 명랑하고 화사한 분위기와 눈부신 색채효과는 종래의 침울한 화풍에 비해 맑고 밝은 색채의 구사로 젊은 화가들을 매료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흑백 스케치를 유화로 옮긴 듯한 설채법은 습작과정이라는 한계를 노정露呈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洋畵と日本畵-近代の美術2 高階秀爾 陰里鐵郞 田中日佐夫 編著 講談社 1992-04黑田淸輝 湖畔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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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전청휘黑田淸輝의 화풍이란 파리의 인상파와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국가적 구화歐化정책에 길든 일본미술이 지향하는 것과 획일적 전체주의적 개성의 일본 화가들의 처신 그리고 깊게는 일본기질 혹은 미술풍토가 다르기 때문이다.
흑전청휘黑田淸輝는 콜렝Raphael Collin 문하에서 배웠다고 되어 있다. 인상파의 주류와는 먼 화풍을 흑전청휘黑田淸輝가 선택한 것은 파리 인상파의 아류로서의 일본미술이 아니라 인상파를 받아들이되 배타적 일본우월주의를 극대화하는 방편과 수단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한국에서 흑전청휘黑田淸輝와 콜렝Raphael Collin의 관계는 고희동高羲東-이종우李鍾禹-이경성李慶成-이구열李龜烈-오광수吳光洙에 이르기까지 단골소재였다. 객관적인 자료들이 희소한 미술판에서 흑전청휘黑田淸輝-콜렝Raphael Collin은 독점적인 위광암시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 자료의 근거나 표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착오가 발견되었다. 라파엘 꼬랑 *구로다 기요떼루 등의 구전자료들 외의 정확한 사실과 표기란 기대할 수 없는 이 나라의 유한취미 노변방담류의 수상들이나 횡횡하는 한국미술계에서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구로다 기요떼루->쿠로다 키요테루きよい+음독き/훈독かがやく: 흑전청휘黑田淸輝쿠로다 세이키くろだ せいき의 본명
조선양화에서 흑전청휘黑田淸輝의 영향력은 독점적으로 과대포장되었을 것이다. 한국인화가들의 영향권을 파악하기 위해서 사리법謝里法의 대만미술운동사臺灣美術運動史에서 당시 동경미술학교 강사들의 이름을 찾아야할 정도로 황탄荒誕한 것이 조선-한국미술기록이었다.
KurodaSeiki黑田淸輝くろだせいき新潮社1998-06マソドリソぉ持てる女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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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결어
05-3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한국미술사에서 일본미술관계인사를 조우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연목구어緣木求魚라 할 만했다. 한국에서 미술관계 글을 써왔던 사람들의 기록에서 일본인들조차 이해하지 못 하는 일본화가의 이름이 수두룩할 때 일본이름의 가나仮名かな 표기를 기대할 입장은 아니었다.
사리법謝里法의 대만미술운동사臺灣美術運動史에서나 양화초기를 더듬어야 하는 한국의 실상은 참담했다. 익스플로러Internet Explore-웨일Naver Whale-크롬Google Chrome에서 자료나 표기 등이 상당부분 만회가 되겠지만 한글전용의 나태한 관행은 또 하나의 관문이었다.
일본은 구화歐化라는 분명한 방향이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조선 화가들의 접근방식은 미술이라는 대의에서 본 목적의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자의적인 의식이건 일본풍조의 답습이건 향토색이라는 과제에 대한 태도는 당시 조선과 대만 등에 실천적 강령으로 만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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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미술사에 등장하는 모방작은 작가적 개성이라는 관점에서는 환영할 만한 것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누구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류의 모방조차 빈축을 사는 풍토에서 보면 모사 자체가 허용 혹은 상찬되는 일본 화단의 습작태도와 관행은 이해가 힘들 수 있었다.
AokiShigeru靑木繁あおきしげる新潮社1998-041906狂女
NakamuraTsune中村彛なかむら つね新潮社1998-08頭蓋骨ぉ持てる自畵像1923-24
NakamuraTsune中村彛なかむら つね新潮社1998-06裸體1916
Yorotesugoro萬鐵五郞よろてごろう新潮社1998-02裸體美人1912
東京國立近代美術館 編 東京國立近代美術館所藏名品集 洋畵2004-32里見勝藏-女1937
東京國立近代美術館 編 東京國立近代美術館所藏名品集 洋畵2004-03梅原龍三郎-半裸體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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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神道신토しんとう-천황天皇덴노てんのう-굴종적 전체주의-맹목적 우월의식Chauvinism이라는 관점으로 일본인-일본미술-양화를 보는 시각이 만만치 않았다. 하나의 통제된 목소리로 수렴할 수 있도록 길들여진 획일성도 간과할 수는 없는 문제점으로 지적될 만했다.
반면 조선-한국으로 이어지는 무정부주의적 반항과 반골의 양화-미술의 방향이라는 진단은 매우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예술가 개인으로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는 보나파르티즘Bonapartism으로 무장한 야생마같은 거친 행보 또한 상찬만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고인 웅덩이 같은 일본열도라는 속성에서 일본미술의 진단이나 전망이 가능하다면 세계미술의 당당한 주류라는 개인의식들이 결집하여 집단개성을 표출하는 한국의 미술-양화는 세계미술이라는 큰 틀에서 살피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문화예술은 사회적 공감대의 위에서 구축構築되는 성城과 같다. 미술이 있어 미술사가 기술된다. 작품이 있어 작품론이 작가론이 그리고 인간론이 씌어진다. 거기에 공식은 없다. 때로는 위대한 예술이 있어 위대한 예술론이 있거나 위대한 예술론이 있어 위대한 예술이 태어난다.
近代日本洋畵の200年1984-02平賀源內 西洋婦人圖 制作年度未詳
Tokyo National Museum Kuroda Tript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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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미술이라는 것을 추스릴 수 없다보면 한국미술이론과 한국미술의 행복한 친화는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미술과 평화적 공존이 기대될 수도 있었던 미술이론은 강단비평과 훈도비평으로 멍들고 시대와 사상에 휩쓸려 온전한 방향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국양화백년은 자리매김이 된다. 그러나 흩어진 구슬같은 미술가들을 꿸 튼실한 목소리의 이론이 뒷받침이 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지베리쉬jibberish는 바벨탑Babel Tower앞의 방언方言처럼 분열의 불협화음에 불과할 수 있을 것이다.
계간미술1980겨울16잊혀진근대미술
1916김관호金觀鎬 석모 동경예술대학 소장 김영재 한국양화백년 1988
범례
-김영재 한국양화의 얼굴 자유문고 2020에서 발췌- 출간 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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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외래어 인명-모임-어휘 등 한글 음독 순
05-3조선의흑전 일본의 구로다
가나仮名かな
강전삼랑조岡田三郞助오까다 사브로스께 おかだ さぶろうすけ
강창천심岡倉天心오카크라 덴신おかくら てんしん
강호江戸에도えど
경도京都교오토きょうと
고가우웅高架祐雄고우카 쓰게오 こうか すけお
고갱Paul Gauguin
고교유일高橋由一다까바시 유이치たかばし ゆいち
고목배수高木背水たかぎ はいすい
고촌광태랑高村光太郞타가무라 고타로たかむら こうたろう
고촌풍주高村豊周다까무라토요치까たかむら とよちか
공부미술학교工部美術學校こうぶびじゅつがっこう
공부성공학료工部省工學寮고우부쇼우고가쿠료우こうぶしょうこうがくりょう
관서미술연구소關西美術硏究所칸사이비쥬츠켄기쇼かんさいびじゅつけんきゅうしょ
구미계일랑久米桂一郞구메 케이이치로くめ-けいちろう-
국택신구랑國澤新九郞구니자와 신구로くにさわ しんくろう
길촌방송吉村芳松Yoshimura Yoshimatsuよしむら よしまつ
남훈조南薫造미나미 군조みなみ くんぞう
녹색의 태양緑色の太陽마도리이루노 다이요우みどりいろのたいよう
다다이즘Dadaism
대정大正타이쇼たいしょう
도산桃山모모야먀ももやま
등도무이藤島武二후지시마 다께지ふじしま たけじ
등아삼藤雅三후지 마사소우ふじ まさぞう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마티스Henry Matisse
매원용삼랑梅原龍三郎우메하라 류자브로うめはら りゅうざぶろう
명치明治메이지めいじ
명치유신明治維新메이지이신めいじいしん
명치미술회明治美術会메이지비쥬츠카이めいじびしゅつかい
명치유신明治維新메이지이신めいじいしん
묘昴스바루つばる
무기舞妓Maiko
문전門展분덴ぶんてん
미니어춰Miniature
번서조소蕃書調所-蛮書調所반쇼시라베쇼ばんしょしらべしょ
반 고흐Vincent Van Gogh
백마회白馬会하쿠바카이はくばかい
백화白樺시라카바しらかば
비시에르, 줄리우스Julius Heinrich Biss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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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법謝里法ShaihLifa
산구청웅山村淸雄야마무라 산손やまむら さんそん
산본방취山本芳翠야마모토 호우쓰이やまもと ほうすい
살롱 도똔Salon d’Automne
살붙음Modelling
삼 구외森 鷗外모리 오우가이もり おうがい
샤반느Puvis de Chavanne
생교관生巧館せいこうかん
서원사 공망西園寺 公望사이온지 긴모치さいおんじ きんもちSaionji Kinmochi
석전부조石田富造이시다 토미조우いしだ とみぞう
석정백정石井栢亭이시이 하쿠데이いしい はくてい-
석천흠일랑石川欽一郞이시가와 킨이치로いしかわ きんいちろう
세잔Paul Cezanne
소림만오小林萬吾고바야시 만고こばやし まんご
소비에트Soviet 예술가연맹LOSSKh
슈하에프Shuhaev-Basily Ivanovich=슈켈에프Shukhaev-Шухаев
십일회十一會じゅういちかい-
안정증태랑安井曾太郞야스이 소타로やすゐ そうたらう Yasui Sōtarō
아카데미즘Academism
양화洋畵요카ようかyoka
양화과洋畵科요카카ようかかyokaka
오페라Opera
원전직차랑原田直次郞하라다 나오다로우はらだ なおたろう
유도생마有島生馬아리시마 이쿠마ありしま いくま
장원효태랑長原孝太郞나가하라 코따로ながはら こうたろう
전변지田邊至다나베 이타루たなべ いたる
전축법前縮法Raccourci
종미당鐘美堂かねびどう
창기당彰技堂しょぎど
천상동애川上冬崖카와카미 도우가이かわかみとうがい
천정충淺井忠아사이 츄우あさい ちゅう-
천진도장天眞道場텐진도우죠우てんしんどうじょう
천회루天繪樓텐카이로우てんかいろう
청향독화관聽香讀畵館ぞことくがかん
콜랭, 라파엘Raphael Collin
페넬로사Ernest Fenellosa
폰타네시, 안토니오 Antonio Fontanesi
하관下關시모노세끼しものせき
화전영작和田英作와다 에이사꾸わだ えいさく
흑전청휘黑田淸輝쿠로다 세이키くろだ せい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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