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는 걷기다
1. 걷고 싶다
다비드 브르통(David Le Breton)1)은 현대 사회의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주체[자아]의 위기’, 즉 ‘정체성’의 위기로 진단 한다. 시공을 사는 인류의 주체[자아] 또는 정체성의 핵심 요소가 육체, 곧 몸으로 본다.
브르통은 뒤르켐2)과
바르트3)의 사유에 의거해 ‘몸의 사회학’을 통해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가 내놓은 21세기 대안은 ‘걷기’였다.
<걷기 예찬(Eloge de la marche)>에서 브르통은
바슐라르4),
소로5),
루소6),
뷔샹쥬7) 등이 이룩해 놓은 사유의 지평을 현대화시켜 21세기 독자들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래서 이 책은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폭넓게 독자들을 끌어들였고, <걷기 예찬>에 빠져들게 하였다.
올리비에8)의 <나는 걷는다>와 코엘료9)의 <순례자> 등의 글들은 걷기에 대한 충동을 더욱 자극한다.
하여 브르통의 <걷기 예찬(Eloge de la marche)>에 나오는 사상은 ‘사람이 왜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상적 명분과 당위성을 제공해준다.
2. 왜 걸어야 하는가?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이므로 사람이 걸어야 한다.
<걷기 예찬>에 따르면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도보 여행은 인생의 맛과 느낌을 더 깊고 충만하게 만든다. 걷다보면 공간적 거리가 아니라 걷는 시간이 건기의 대상이요 목표, 곧 목표가 된다.
걷는 것은 ‘시간의 고고학’이다. 그래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 속에 녹아 있는 모든 인생의 참 맛을 느끼고 음미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인생이 주는 맛을 모두 흘려버린다. 대신에 무엇인도 잘 모르는 어떤 욕구에 따라 시간의 암흑 속을 떠돈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느끼고 있는 일상의 분주함은 우리의 본질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허구인지도 모른다. 일상을 떠나서 걷게 될 때, 그래서 시간의 고고학 속으로 빠져들 때 우리는 비로소 고대로부터 늘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는 인생의 참된 의미와 참맛을 체험할 수 있다.
도보여행자는 이름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며 만인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걷기에 나서는 순간 우리는 한없이 넓고 방대한 자료로 가득 찬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걷기의 미학이다.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 담겨 있는 [컴퓨터 하드 디스크 같은] 기억이다. 때문에 걷는 사람들의 길은 살아 있지만, 자동차가 다니는 포장도로에는 역사도 없고 이야기도 없다. 때문에 “자동차 운전자는 망각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브르통의 이 말은 걷기를 잃어버리고 허무한 삶에 속도를 내며 열중하는 현대인들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걷기에서 찾아낸 미학은 매우 풍성하다. 인간이 걸음으로써 비로소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시간 속에서 멈추거나 머무를 때와 장소를 정할 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때와 장소에 자아를 충만하게 만드는 왕국을 세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걷기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시간을 부리는 주인이 된다. 이같이 걷기를 통해 시간의 주인이 됨으로써 인간은 멈춘 시간, 곧 죽음, 영원한 시간, 곧 영원한 삶을 감지하게 된다. 하지만 도심의 분주함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치고 시간을 부리는 ‘시간의 주인’이 있는가? 그러나 길에 서서 걷을 때 사람들은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말은 잃어버렸거나 왜곡되었거나 위기에 빠진 인간의 자아의식, 곧 ‘주체성’ 또는 ‘정체성’을 회복하고 성장시키는 기회를 잡는다는 말이 된다. 걷기는 분명 사람이 자아의식을 치유하고 성숙시키는 인간주체에 대한 미학이다. 걷기는 우리 몸을 구체적으로 체현(體現, personification/personaficatio)하는 것이다. 체현(體現, personification/personaficatio)은 정신적인 것을 구체적인 형태나 행동으로 나타내거나 몸으로 실현하는 것, 만드는 것, 곧 외부의 것을 내부로 받아들여 인격화하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은 홀로 됨을 통하여 타자와의 관계를 더욱 더 구체적으로 설정하게 된다. 걷기를 통한 체현은 상처와 회복과 피곤과 휴식의 양면 가치를 발견하게 한다. 그런가하면 걷기는 침묵을 통해 대자연의 참된 소리들을 진지하게 경청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는 알베르트 카뮈의 말대로 침묵은 불필요한 소리에 귀를 막고 진실한 소리를 듣는 경험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순명의 영성(oboedientiae spiritualitas)’이라는 정자에서 잠시 쉬어가야겠다.
‘순명(順命)’을 라틴어로 oboedentia이다. 이 oboedentia의 어원은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뜻을 가진 oboedire 또는 audire이다. 따라서 순명은 ‘누군가가 나에게 말할지 모르니 나의 귀를 그에게로 향하여 늘 돌려놓는다’는 뜻이 된다. 말하는 이는 라틴어로 ‘권위’를 뜻하는 auctoritas이다. auctoritas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쓴 Auctor, 즉 ‘창조주’에서 온 것이다. Auctor의 어원은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뜻을 갖는 audire이다. 그러니까 제일 원인인 Auctor은 스스로 명령하고 스스로 듣는 존재를 말한다. 즉 ‘창조주’께는 자신에게 명령하고 자신에게 순명하는 존재를 뜻한다. 따라서 oboedientia(순명)는 권위, 즉 auctoritas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 권위는 창조주처럼 자신이 명령한 것에 대하여 먼저 자기 자신이 들을 수 있어야 그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는 권위가 없고 권위가 없는 이는 남에게 순명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서도 조직의 힘이나 직위를 이용하여 명령하는 것은 권위인 auctoritas가 아니라 힘을 상징하는 권력, 즉 potentia가 된다. 순명을 요구하는 권위나 그 권위를 따르는 순종은 모두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그 정당성을 갖는다. 따라서 복음3덕에서 순명은 하느님의 음성을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들을 줄 알고 식별할 줄 아는 덕으로 복음3덕의 중심을 이룬다.
걷기를 통하여 침묵을 실천하는 것, 곧 불필요한 소리에 귀를 막고 진실한 소리를 듣는 경험을 통해서 삶의 맛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걷기를 통한 침묵 체험에는 기쁨의 찬미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설탕맛(고독) 같은 경험도 있고, 악천후를 만나 투덜거리는 소금맛(외로움)과 같은 경험도 있다.
이러한 풍성한 경험을 위하여 우리는 걸어야 한다. 걷기는 언제나 미완상태에 있는 실존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걸음을 통해서 누구나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열게 된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우리는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보행자는 언제나 인간의 키 높이에서 걸으며 세상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어떤 때는 세상과 키를 맞추기 위해서가 세상을 비껴가기 위해서도 걸어야 한다.
베르너 허조그10)의 ‘기원의 순례여행’ 이야기는 걷기의 목적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독일의 영화사 연구가인 로테 아이즈너는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친구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파리에 있는 그녀의 병상을 향해 3주간의 도보 순례길에 올랐다. 친구의 죽음과 싸우고, 시간과 싸우며 걷는 그의 도보여행은 사회를 비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길 위에 선 것이었다.자동차나 비행기로 급히 달려가도 시원찮은데도 그는 생사의 촉각을 다투는 친구를 살리겠다면서도 걸어서 간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요한 11,1-44)이라는 정자에서 잠시 쉬어가야겠다.
라자로의 여동생들은 예수님께서 무척 사랑하시는 오빠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보낸다. 그런데도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라시며 이틀이나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시고 나서는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라고 말씀하신다.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에야 라자로 무덤에 당도하셔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마르타는 뜬금없다는 듯이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며 갑자기 마르타에게 부활신앙을 고백할 것을 요구하신다. 마르타는 순박하게도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라며 부활신앙을 고백한다. 뒤늦게 예수님께 온 마리아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사람들과 함께 울자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신다. 사람들마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라며 원망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예수님께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해가는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신다.
어찌 보면 당시에 예수님만 빼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안타깝고 조금 답답한 심정이 든다.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에는 두 개의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과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야’라는 것이다. 성서에서 “영광”은 ‘그 편으로 무게를 두다’라는 뜻을 갖는다. 그러니까 라자로의 위독한 병과 죽음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 무게가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는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나서야’라는 뜻이 된다. 특히 두 번째 키워드인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는 ‘느림’과 ‘쉼’에 대한 가치를 각성하게 한다.로테 아이즈너는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친구를 살리겠다며 파리에서부터 3주간이나 걸어서 친구에게 간 것처럼 다급하고 황망한 상황에 대한 적절한 태도는 서두르고 허둥대는 것이 아니라 ‘느림’과 ‘쉼’을 통해서 본질에 접근한다는 가르침을 보게 한다.
이처럼 걷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간의 행위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세계는 날로 좁아진다. 걸어야 만하는 인간이 걸을 수 없는 환경으로 자꾸 바뀌어가는 것이다.
3. 지평을 걷는 사람들
인류역사 속에서 걷기의 의미는 상실되지 않은 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대대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브르통은 <걷기 예찬>에서 인류의 지평을 걷는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인류는 시공 내에서 언제나 ‘삶의 stance와 horizon’을 확인하고 재구성하려는 거부할 수 없는 본성을 드러냈다. 그 본성은 ‘걷기’를 통한 여행이나 이주를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였다. 모두가 다 질병과 절망과 나아가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과 결말을 내는 것이었다. 걷기는 멋과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stance와 horizon’을 확인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건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르며, 인간의 한계상황 속에서의 절망이라는 본질적인 암초에 부딪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물적 본성으로 걷기를 두려워한다. 인간이 자동차나 기차와 같은 교통수단들을 만들어 이런 두려움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문명은 인간을 편리하고 안전하게도 만들었지만이기적인 본성을 자극하여 Red Ocean에 빠지게 하였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려는 원초적인 노력을 게을리 하고 그 같은 본성을 퇴화시켜 자본이 인간 자신을 지배하도록 하는 소외와 탈존재화를 자초하였다. 현대인들은 자연 속에서 겪어야 했던 한계상황에 대한 도전과 고난에서 해방된 대신에 도시화인한 내외적 황폐라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연에서의 도전이 인간의 존재를 찾기 위한 도전이라면, 도시에서의 도전은 인간의 존재성을 함몰시키는 도전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응전을 감행해야 하는가?
4. ‘걷기’의 인간 정신성
‘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지극히 본질적인 필요에 의해서만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걷는 것은 헐벗음의 훈련이다. 걷기는 인간을 세계와 정면대결하게 만든다. 걷기 위해서는 짐을 최소화해야 한다.짐이 많을수록 걸을 수 없다. 자기 절제와 상황 예측, 그리고 긴요성에 대한 가치판단이 있어야 한다.
걷기는 시간을 그 본래의 조건에서 해방시켜 고난 속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으로 난 길을 찾아 가게 한다. 인류는 빠르고 안전한 길을 만들어 왔다. 걷기란 인간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곱씹어 생각하게 한다. 그 같은 숙고는 내면정신을 거듭나게 한다. 이러한 걷기의 정신성 설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아포리즘(aphorism, 원리)이 필요하다.
- 걷기는 다른 리듬 속에 몸을 담그는 것이다.
- 시간, 공간,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
- 그 같은 새로운 관계설정으로 주체[나]는 세계 속에 자신의 자리를 회복하고 그 가치를 상대적 시각에서 저울질하게 되고 스스로의 저력에 대한 믿음을 되찾아야 한다.
- 걷기는 나르시스적인 방식이 아니라 사는 맛과 사회적 관계 속에 제자리를 찾게 함으로써 인간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준다.
결국 걷기는 인간의 거듭남의 방법이다. 걷기를 시간의 고고학에서 전형적인 인류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나아가 거듭남의 종교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걷기의 정신성이 결국 인간을 거듭남에 이르기까지 인도한다는 사실은 ‘걷기 예찬’을 ‘걷기의 미학’으로 승화시킨다. 걷는 행위에 인간의 본질로 향하는 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
1) 브르통(David Le Breton, 1953년생) : 현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사회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오래 전부터 ‘몸’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몸과 사회>, <몸과 현대성의 인류학>, <위험의 열정>, <살아있는 살>, <고통의 인류학>, <몸이여 안녕> 등의 책을 펴냈다.
2) 뒤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 : 프랑스의 사회학자. 타르드와 함께 콩트 이후의 프랑스 사회학계의 쌍벽(雙壁).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교육자로 보르도대학을 거쳐 파리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육학을 강의하였다. 《사회학연보》를 창간하여 뒤르켕학파로 불리우는 거대한 사회학의 한 학파를 형성하여 세계의 사회학계를 이끌었다.
3)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 : 20세기 중엽 프랑스의 평론가. 파리대학, 에콜 프라티크 교수를 역임했다. 신비평의 대표적 존재로서 사회학·정신분석·언어학의 성과를 활용한 대담한 이론을 전개하였다. 저서는《비평과 진실》,《기호학 개론》등이다.
4)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 구조주의(構造主義)의 선구자이며 시론(詩論) ·이미지론(論)으로도 유명하다. 디종대학과 소르본(파리대학)에 초빙되어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했다.
5)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 사상가 겸 문학자. 미국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미국 콩코드에서 죽었다. 하버드 대학 졸업 후 가업인 연필 제조업, 교사, 측량 업무 등에 종사했지만 평생 일정한 직업에 정착하지 않고 곧 학업에 매진했다. ‘자연’의 저자인 초월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 등과 친분을 맺었다. 자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항상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6)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그의 유명한 말은 “자연으로 돌아가라.”이다. 이는 그의 주관적 자연주의 교육사상의 요체다. 교육은 자연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자연은 결코 미개 원시의 자연이 아니고, 어린이를 그 심리적 자연에 따라서 이상적인 자연인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그러한 자연인 것이다. 그는 자유로운 자연인과 시민을 대립시켜, 자연인은 그 자체가 완전한 하나의 전체이나 시민은 전체라는 분모에 의하여 위치를 굳히고, 가치를 인정받는 분자라고 보고 이 분수로서의 인간을 전체로서의 인간으로 되돌려서 참다운 자연인으로 만들어 사회를 개조하고자 한다.
7) 미셸 비외샹쥬(Michel Vieuchange, 1904-1930) : 프랑스 모험가. 프랑스 느르베(Nevers)에서 태어나 모로코 남서부의 아가디르(Agadir)에서 죽었다. 그는 사하라 사막의 내륙을 거쳐 제대로 된 도로 하나 없는 서사하라의 모로코령 스마라(Smara)를 걸어서 방문한 첫 번째 유럽이다. 스마라에는 진흙 벽돌 폐허에 의해 덮인 현재의 고고유적이 있는 도시다.
8) 베르나르 올리비에(Bernard Ollivier, 1938년생) : 프랑스 망슈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안해본 일이 없다. 1964년 독학으로 바칼로레아(대학입시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이어 CFJ(Centre de Formation des Journalistes, 프랑스 기자협회의 공인을 받은 저널리즘 부문의 그랑제콜)를 졸업했다. 30여 년간 프랑스 신문과 잡지사에서 정치·사회·경제 기자와 칼럼을 썼다. 은퇴한 후 1999년에 꿈꾸던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 12,000km의 실크로드를 걸어서 여행하였다.
9)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 1947년생) : 브라질 소설가. 가톨릭 신자로 1954년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는 시·연극 경연대회에 참가하였다. 그의 부모들은 그가 작가의 길을 가는 것을 반대하여 청소년기를 우울하게 분노에 차 지내다 병원치료까지 받았다. 그는 아방가르드연극, 히피운동, 브리질 록음악 활동, 잡지사 기자로도 활동한다. 탈 전통종교영성에 심취하여 동양 종교에 관심을 갖고 세계여행을 한다. 1986년에 그는 스페인의 성지순례로 유명한 700마일(1126.3km)의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순례자의 여행을 하게 된다.
10) 베르너 허조그(Werner Herzog, 1942년생) : 독일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그는 1970년대에 이른바 “새로운 독일영화”를 이끌었던 독일 감독들 중에서도 가장 괴짜이면서 독창적인 감독이었다. 헤어조그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나 장 마리 슈트라우프처럼 진보적인 영화노선을 걷지 않았다. 그의 영화의 분위기는 차라리 시대착오적일 만큼 낭만적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일관되게 사회의 외톨이를 묘사했다. 외톨이에 주목하면서 그의 영화는 주류영화의 틀에서 벗어나고 사회에 대해 공격할 채비를 갖춘다. 정상인이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 혹은 사회의 부적응자가 보통 그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유형이다.
|
첫댓글 이 좋은 말씀과 자료에 댓글 하나 없다니...
주님, 굽어살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