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숏컷
책방 앞에 그야말로 옛날식 미용실이 있다. 은 미용실. 이름도 ‘은 미용실’이라니! 뭔가 직관적이고 정직한 게 정파의 기운이 넘친다. 전면 유리창에 A4로 '남성컷 5000원'이라고 떡하니 적혀있다. 바랜 간판과 낡은 알루미늄 샷시와 ‘컷 파마의 집’이라는 고딕체 소개글이 돋보이는 ‘은 미용실’. 망원동으로 이사하면서 동업자 상냥이에게 ‘나 여기서 이발해야겠다’고 하였지만 동업자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너도 파마해’라고 부추겼는데 아무리 정파라 하여도 저 허름한 미용실에 나는 가지 않겠다는 고집을 보았을 뿐이다.
난 짧은 머리카락이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명동에 있는 미용실을 다녔다. 학교가 명동에 있어서이기도 했고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염색과 파마를 하는 친구들과 함께 그들의 헤어스타일 변화를 같이 즐기기 위한 대동이었다. 그러나 주로 커트만 하는 나는 머리 손질이 빨리 끝났고 그들의 헤어 변신을 기다리기 위해 취미에도 없는 미용이나 패션 잡지를 무료히 읽어야 했다. 그들은 꼬부라지거나 달라진 색의 머리를 흔들며 내게 야, 너도 머리 좀 길러봐. 라고 했다. 숏컷이 얼마나 편한지 떠들어봤자 내 입만 아팠다.
명동의 미용실들은 아니 명동에 있으니 왠지 헤어샵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커트 가격만 해도 싸야 만 원 무슨 선생님한테 자르면 2만 원 내외였다. 그게 20년 전. 책방 오픈하고 커트 하러 산울림 소극장 근처 미용실에 갔는데 커트가 3만 원이란다. 나는 ‘아’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나왔다. 3만 원을 벌려면 만 원짜리 책을 10권은 팔아야 하는데… 지금 하루에 6권 팔릴까 말까 하는데 아씨. 뭐 그랬던 기분. 내 머리는 그냥 자르면 되는데, 속으로 생각했지만 짧은 커트도 다양한 스타일이 있고 미용사들도 그 솜씨를 익히기 위해 노력을 했을 테니까, 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3만 원에 커트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난 언제부터 숏컷을 유지했던가. 초등학교 4학년? 3학년?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커트할 때마다 항상 들었던 말은… 쓰기 전부터 벌써 진부한데 “남자같애”(역시 진부하다), “남자야?”(남자 아니야), “남자잖아.”(남자 아니라고!), “남자네”(맘대로 생각해라), “남자 맞는 거 같애.”(그래 남자다 남자야) 숏컷 하나로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니, 그건 어처구니없지만 누군가에게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나를 설명했고 여성성과 남성성을 가르는 허구나 이미지를 설명해야 했다. 숏컷은 내 정체성의 집약이었다.
엄마도 항상 내가 머리카락을 자르면 “또!또!또!! 이노무기집애 머리가 또 이게 뭐야”라고 하였으며, 심지어 중학생 때 한번은 미용실로 찾아가 쟤 여자니까 머리 남자처럼 자르지 말라고 당부를 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아랑곳 않고 구레나룻이 귀를 덮을 즈음, 미용실로 달려갔다. 숏컷이 좋았다. 그 시원함 개운함. 좀 과장하자면 일종의 해방감도 느꼈다. 책방 업무로 헤어스타일에는 신경 쓸 시간도 없고 신경 쓰는 것도 아까웠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더니 짧은 머리카락은 더 짧은 머리 더욱더 짧은 머리가 되었다. 그냥 짧게 자르기만 하면 되었으니 명동 이대 홍대의 미용실에 갈 필요도 없다.(돈도 없다)
그래서 드디어 오늘 미용실 계의 정파 ‘은 미용실’에 갔다. 머리가 새하얀 분이 100년된 가위를 오동나무 서랍에서 꺼낼 것 같은 신비한 분위기는 아니었고, 뽀글파마로 무장한 친근한 인상의 이모님 두 분이 앉아계셨다. 한 분이 사장님이고 한 분은 친구분인데 ‘저녁으로 떡볶이를 먹을 것인가, 떡볶이에다 순대까지 먹을 것인가’를 두고 소담소담 얘기를 나누는 분위기였다. “귀 주변이 지저분하니까 잘라주세요.”라고 나는 말했다. 내게 “남자야, 여자야”라고 묻지 않아서 일단 좋았다. 바리깡이 내 귀를 스칠 때 섬세하게 귀를 접어주어서 또 좋았다. 현금 1만 원을 내밀자 돈 통이 아닌 바지 뒤춤에서 주섬주섬 거스름돈 5천 원을 꺼내주어서 마지막으로 좋았다.
커트하는데 걸린 시간은 5분. 5분 전 “나 머리자르고 올게’라고 말한 뒤 뛰쳐나갔던 책방으로 다시 들어가자, 5분 전에도 못생겼던 동업자가 그대로 못생긴 채로 “머리 잘랐어? 미용실 안 갔어?”라고 묻는다. '이런 쯧쯧' 나는 짧아진 구레나룻을 보여주지만 구레나룻의 길이를 모르는 자가 어떻게 커트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는가.
*외래어 맞춤법 표기를 지키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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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에 강한 유혹을 느낍니다. 한길 숏컷 멋지십니다!! 글도 무척 재미있어요^^
저도 작년부터 숏컷을 유지하고 있는데 숏컷 진짜 좋아요. 머리를 밀때의 해방감에 공감하고 갑니다!
전에 쓰신 책이 있다고 들었는데, 너무 궁금해요. 유쾌하지만, 뼈가 있고, 두번 보고 세번 보면 다른 느낌! 책 좀 알려주세요~
파랑님 글을 읽으면 현실 웃음이 터집니다. 껄껄 웃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잘 읽었습니다!
파랑님 저도 너무 재밌게 잘 읽었어요. 파랑님의 글은 노래 부르듯 리듬감 있게 읽혀서 정말 읽는 동안 즐거워요.
100년된 가위가 든 오동나무 서랍이 넘 웃겨요 ㅎㅎㅎ
파랑의 숏컷처럼 개운하고 가벼우면서도 멋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숏숏컷을 유지하면서 사는데 지난 3년 여동안 영국에 있으면서 커트할 때마다 매번 우리 돈으로 4만 원 이상을 지불했거든요. 그런데 미용실이 한 시간 단위로 손님 예약을 받으니 천천히 45분 가량 소요되요. 머리카락을 자른다기보다 다듬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요. 파랑의 글을 읽고나니 저도 저만의 숏컷 경험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내게 “남자야, 여자야”라고 묻지 않아서 일단 좋았다. 바리깡이 내 귀를 스칠 때 섬세하게 귀를 접어주어서 또 좋았다. 현금 1만 원을 내밀자 돈 통이 아닌 바지 뒤춤에서 주섬주섬 거스름돈 5천 원을 꺼내주어서 마지막으로 좋았다."
묘하게 웃기고 흡입력 있는 파랑님의 글은 숏컷만큼 파랑님 답고 매력적입니다. 저도 늘 상고머리였는데 최근에 기르고 있는데 아 이 글보니 미용실가서 자르고 싶네요.
심야에 현웃 터져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