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때 지방행정 구역이었던 목(牧), 부(府), 군(郡), 현(縣)을 1895년에 전면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전라도는 전주부(全州府), 남원부(南原府), 나주부(羅州府),제주부(濟州府)로 나누어 개편되었습니다.
‣목(牧):목사(牧使)가 부임
‣부(府):부사(府使)가 부임
‣군(郡):군수(郡守)가 부임
‣현(縣):현감(縣監) 또는 현령(縣令)이 부임
전주부(全州府)
【전주군(全州郡), 여산군(礪山郡), 고산군(高山郡), 임피군(臨陂郡), 함열군(咸悅郡), 옥구군(沃溝郡), 용안군(龍安郡), 익산군(益山郡), 부안군(扶安郡), 만경군(萬頃郡), 김제군(金堤郡), 금구군(金溝郡), 고부군(古阜郡), 흥덕군(興德郡), 정읍군(井邑郡), 태인군(泰仁郡), 장성군(長城郡), 고창군(高敞郡), 무장군(茂長郡), 영광군(靈光郡)이다.】
남원부(南原府)
【남원군(南原郡), 구례군(求禮郡), 운봉군(雲峯郡), 곡성군(谷城郡), 순천군(順天郡), 광양군(光陽郡), 임실군(任實郡), 장수군(長水郡), 진안군(鎭安郡), 담양군(潭陽郡), 순창군(淳昌郡), 옥과군(玉果郡), 창평군(昌平郡), 용담군(龍潭郡), 무주군(茂朱郡)이다.】
나주부(羅州府)
【나주군(羅州郡), 해남군(海南郡), 진도군(珍島郡), 강진군(康津郡), 장흥군(長興郡), 흥양군(興陽郡), 보성군(寶城郡), 영암군(靈巖郡), 무안군(務安郡), 함평군(咸平郡), 능주군(綾州郡), 화순군(和順郡), 동복군(同福郡), 광주군(光州郡), 남평군(南平郡), 낙안군(樂安郡)이다.】
제주부(濟州府)
【제주군(濟州郡), 대정군(大靜郡), 정의군(旌義郡)이다.】
※제주도는 1946년 8월 1일 전라남도에서 행정구역상 분리독립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웅치방(熊峙坊)은 1895년 장흥군 웅치면으로 변경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개편으로 장흥군에 속해 있던 웅치면(熊峙面), 회령면(會寧面), 천포면(泉浦面)은 보성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회령면(會寧面), 천포면(泉浦面)은 통합되어 회천면(會泉面)으로 개칭되었습니다.
276년전 1747년에 편찬된 장흥읍지(長興邑誌) 정묘지(丁卯誌)에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는
부내방(府內坊)-11쪽
부동방(府東坊)-16 쪽
안양방(安壤坊)-23쪽
회령방(會寧坊)-31쪽
천포방(泉浦坊)-34쪽
웅치방(熊峙坊)-36쪽
부서방(府西坊)-38쪽
남면방(南面坊)-41쪽
고읍방(古邑坊)- 46쪽
유치방(有治坊)-54쪽
대흥방(大興坊)-57쪽
부산방(夫山坊)-59쪽
용계방(龍溪坊)-64쪽
장동방(長東坊)-68쪽
장서방(長西坊)-72쪽
부평방(富坪坊)-74쪽
이상 16개방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76년 전에 기록되어 있는 웅치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웅치방(熊峙坊)
※원문(原文)은 검정색 글씨, 녹색은 번역한 내용
▣沿革
本古長澤地, 今爲熊峙坊, 來屬本府.
▣연혁(沿革)
본래 장택현(長澤縣) 땅이었는데 지금은 웅치방(熊峙坊)이 되어 장흥부에 내속(來屬)되었다.
※현재의 장평면, 장동면, 웅치면을 합쳐 고려때 장택현이라 칭하였다.
▣掌任(요즘의 면사무소 직원에 해당)
‣尊位一人,
‣約正一人,
‣都領將一人,
‣年分監一人,
‣尊位兼書員一人.
▣장임(掌任):직원
‣존위(尊位: 坊長) 1인,
‣약정(約正: 향약담당) 1인,
‣도영장(都領將: 군사담당) 1인,
‣년분감(年分監: 조세 및 재무담당) 1인,
‣존위겸서원(尊位兼書員: 존위 겸 서무담당) 1인.
※존위(尊位):예전에 한 면 또는 마을의 어른이 되는 사람을 이르던 말.
※향약(鄕約):조선 시대에,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주장으로 추진되어 영ㆍ정조 때까지 전국 각지에서 실시하였다.
▣閭里
‣糠山
‣中善
‣林樹洞
‣林內
‣立柱山
‣鹿洞
‣王草
‣五柳洞
‣外五柳洞
‣別谷.
▣여리(閭里):백성의 살림집이 많이모여 있는곳.
‣강산(糠山)
‣중선(中善)
‣임수동(林樹洞)
‣임내(林內)
‣입주산(立柱山)
‣녹동(鹿洞)
‣왕초(王草)
‣오류동(五柳洞)
‣외오류동(外五柳洞)
‣별곡(別谷)
※강산(糠山)은 마을 뒷산의 생김새가 키(箕) 모양으로 생겨서 키산이라 불렀고, 키질을 하면 겨가 쌓인다 해서 겨강字를 써서 강산(糠山)이라 불렀다. 현재는 강산(江山)으로 개칭(改稱)되었다.
※임내(林內)는 숲속안에 들어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숲안으로 불리웠으나 차츰 소리 나는데로 수반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는 임내(林內)가 아닌 큰숲이라는 뜻의 덕림(德林)으로 개칭(改稱)되었다.
※왕초마을의 지명은 이곳에서 인삼을 재배하였다고 하였고, 인삼은 모든 풀의 왕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왕초(王草)라 했다 전해온다.
※오류동마을은 광산김씨 김혼이 임진왜란때 경상좌병사 참모로 싸우다가 전사하자 그의 부인도 자결하였다. 그 후 아들 홍업이 집 앞에다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집에서 글 공부만 하다가 세상을 마치자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오류동(五柳洞)이라 부르고 있다.
▣道路
西自熊峙, 東至別谷十五里, 北自蟹峴, 南至大峙十五里.
▣도로(道路)
서쪽 곰재[熊峙]에서부터 동쪽 별곡(別谷)까지 15리이고, 북쪽 게잿재[蟹峴]에서부터 남쪽 한치재[大峙]까지 15리이다.
▣姓氏
‣林樹洞 : 魏(長興), 鄭(晉州). 奉, 丁.
‣林內 : 崔(慶州). 李(成山). 金(光山).
‣立柱山 : 宣(寶城). 張(豊德). 金, 盧.
‣糠山 : 金(光山). 金(靈光). 金(淸風). 崔(海州). 曺(昌寧). 吳(錦城).
‣中善 : 吳(錦城). 安(竹山) 金, 李.
‣渴鹿洞 : 梁(濟州). 曺, 安(竹山). 金.
‣五柳洞 : 韓(淸州). 金, 李.
‣王草 : 尹(坡平). 韓(淸州). 安(竹山). 馬, 朴, 金,
‣外五柳洞 : 韓(淸州). 金, 曺,
‣別谷 : 崔.
▣성씨(姓氏)
‣강산(糠山) : 광산김씨 , 영광김씨, 청풍김씨,
해주최씨, 창녕조씨, 금성오씨.
‣중선(中善) : 금성오씨, 죽산안씨, 김씨, 이씨.
‣임수동(林樹洞) : 장흥위씨, 진주정씨, 봉씨, 정(丁)씨.
‣임내(林內) : 경주최씨 , 성산이씨 , 광산김씨.
‣입주산(立柱山) : 보성선씨 , 풍덕장씨 , 김씨 , 노씨.
‣갈녹동(渴鹿洞) : 제주양씨 , 조(曺)씨 , 죽산안씨 , 김씨.
‣오류동(五柳洞) : 청주한씨 , 김씨, 이씨.
‣왕초(王草) : 파평윤씨, 청주한씨, 죽산안씨, 마씨, 박씨, 김씨.
‣외오류동(外五柳洞) : 청주한씨, 김씨, 조(曺)씨.
‣별곡(別谷) : 최씨.
※임내(덕림)의 원문에는 경주최씨가 아닌 해주최씨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인 연재가 경주최씨로 수정하여 기록한다.
임내(덕림)에 18세기까지는 진주정씨, 죽산안씨, 천안전씨는 세거 하지 않았고 19세기 이후에 이거 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정씨의 경우 나의 고조부님의 종형(從兄)님되시는 諱(휘) 邦華(방화)선조님께서 경주최씨와 혼인하면서 5대조 부친를 모시고 덕림에서 사시기 시작하셨다.
▣山川
‣獅子山 : 雄鎭百里, 注精一坊, 見龍溪.
‣白石峙 : 白石在其上下故名, 其下有文章石‧將軍石, 峙之左右, 多出雄文健武, 盖此云.
‣蓮香淸 : 上下蓮峰, 雙立半空. 下有瀑布水, 沐浴療病,
‣霽峯 : 獅山北麓, 有石峙跡.
‣熊嶺 : 在獅山南麓, 其下有沐浴溪, 溪邊有亭.
‣天峙 : 接安良.
‣龍湫洞 : 在天峙下, 旱則杞雨.
‣水落峰 : 限安良.
‣彌勒坂 : 在熊峙下, 長十里, 廣三里, 左右立石.
‣馬耳山 : 一名兄弟峰, 下有侍墓洞, 洞人金錠(珽)侍墓處故名.
▣산천(山川)
‣사자산(獅子山) : 강성한 울타리를 100리에 거쳐 두르면서 한 방(坊)으로 흐르는 것이 뛰어나다. 용계방(龍溪坊)에 기록되어 있다.
‣백석치(白石峙) : 흰 돌이 그 위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 졌다. 그 아래에는 문장석(文章石)과 장군석(將軍石)이 있다. 고개의 좌우에 출중하고 웅장하며 문양이 건장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대개 이와 같다.
‣연향청(蓮香淸) : 위아래로 연봉(蓮峯)이 상으로 반공중에 서있다. 아래에 폭포수가 있는데 목욕을 하면 병이 치료된다.
‣재봉(霽峯) : 사자산 북쪽 기슭의 석치(石峙) 가는 길에 있다.
‣웅령(熊嶺) : 사자산 남쪽 기슭에 있고, 그 아래에 목욕을 할 수 있는 계곡이 있으며 계곡 주변에 정자가 있다.
‣천치(天峙) : 안양방과 연결되어 있다.
‣용추골(龍湫洞) : 천치(天峙) 아래에 있으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올리는 곳이다.
‣수락봉(水落峰) : 안양방과 경계이다.
‣미륵판(彌勒坂) : 곰재(熊峙] 아래에 있으며, 길이가 10리이고, 폭이 3리이며, 좌우에 입석이 있다.
‣마이산(馬耳山) : 일명 형제봉이라 하고, 아래에 시묘동(侍墓洞)이 있는데 마을 사람 김정(金錠)이 시묘살이를 했던 곳이기 때문에 이름이 생겼다.
▣形勝
山岳周遭, 楕野中闢
▣형승(形勝)
산악이 두루 둘러 있고, 길쭉한 들판이 가운데서 열려 있다.
民役:
雜役:
▣堤堰
蓮香湺 : 引水與寶城共灌田.
▣제언(堤堰)둑.제방
연향보(蓮香洑) : 물을 끌어들여 보성과 함께 논에 물을 댄다.
▣臺謝
‣三槐亭 : 金南溪珽, 種三槐於糠山村前, 講習其下改糠山, 名[曰]槐亭(曰).
‣冠童亭 : 在沂流溪上, 亦金公所榭. 其前觀魚始, 亦金公所築.
詩曰: 溪水潔余心, 春風吹我服. 冠童亦有隨, 魚鳥渾相識.
▣대사(臺榭):크고 높게 세운 누각(樓閣)이나 정각(亭閣)
‣삼괴정(三槐亭) : 남계(南溪) 김정(金珽)이 강산촌(糠山村)앞에 괴목(槐木: 회화나무,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고 강습을 하면서 그 아래를 강산(糠山)이라 고치고, 이름을 괴정(槐亭)이라 했다.
‣관동정(冠童亭) : 기류(沂流) 계곡 위에 있고, 이 또한 김정[金珽]이 만든 정자이다. 그 앞의 관어대(觀魚始) 또한 김공(金公)이 쌓았다.
시에
溪水潔余心(계수결여심)
春風吹我服(춘풍취아복)
冠童亦有隨(관동역유수)
魚鳥渾相識(어조혼상식)
계곡의 물이 내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니,
봄바람이 내 옷에 불어오네.
어른과 아이들이 또한 따르고 있고,
물고기와 새들도 혼연히 서로를 알아주네.
冢墓: 金仲兼墓在 : 在坊南王草洞.
총묘(冢墓): 김중겸(金仲兼)묘 : 웅치방 남쪽 왕초동(王草洞)에 있다.
▣人物
文科
‣金華俊 : 光州人, 式南子. 天才極高, 六歲能詩, 崇禎癸酉進士, 同年丙科, 以承文著作兼侍敎. 丙子扈駕, 媾成乞養母, 兄弟諶樂. 自號棠溪居士, 不就仕.
문과(文科)
‣김화준(金華俊) : 본관은 광산으로 식남(式南)의 아들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주가 극히 높아 6세에 시에 능했다. 숭정(崇禎: 1628~1644) 계유년(癸酉年: 1633)에 진사에 급제하고, 같은 해에 [대과] 병과(兵科)에 급제했다. 승문원(承文院)에서 저작(著作: 정8품) 겸 시교(侍敎: 정8품)를 했다. 병자호란 때에 어가(御駕)를 호종했으나 [청나라와] 화친이 이루어지자 어머니 봉양을 핑계대고 사직을 구걸하자 형제가 심히 기뻐하였다. 자호(自號)를 당계거사(棠溪居士)라 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武科
‣金獜(麟) : 官縣監.
‣金得 : 獜弟, 隆慶登科, 官副司直.
‣金南傑 : 得子, 萬曆科, 官監察.
‣金南彦 : 南傑弟, 守門將.
‣金喆鳴 : 南彦子, 縣令.
‣金喆龜 : 喆鳴弟, 訓僉.
‣金籍 : 自庸子, 副將.
‣金百元 : 籍孫, 萬戶.
‣金得立 : 金海人, 萬戶.
‣金得元 : 得立弟.
‣金演 : 光山人, 參孫, 訓僉.
‣崔屹 : 文憲公沖之後.
‣崔峴 : 屹弟.
‣ 崔嶂 : 峴弟與兄同榜.
무과(武科)
‣김인(金獜) : 벼슬은 현감이다.
‣김득(金得) : 인(獜)의 동생으로 융경(隆慶: 1567~1572) 연간에 급제하여 벼슬은 부 사직(副司直: 종5품)이다.
‣김남걸(金南傑) : 득(得)의 아들로 만력(萬曆: 1573~1620) 연간에 급제하여 벼슬은 감찰(監察: 정6품)이다.
‣김남언(金南彦) : 남걸(南傑)의 동생으로 벼슬은 수문장(守門將: 종6품)이다.
‣김철명(金喆鳴) : 남언(南彦)의 아들로 벼슬은 현령(縣令: 종5품)이다.
‣김철귀(金喆龜) : 철명(喆鳴)의 동생으로 벼슬은 훈첨(訓僉)이다.
‣김적(金籍) : 자용(自庸)의 아들로 벼슬은 부장(副長)이다.
‣김백원(金百元) : 적(籍)의 손자로 벼슬은 만호(萬戶: 종4품)이다.
‣김득립(金得立) : 김해인으로 벼슬은 만호(萬戶)이다.
‣김득원(金得元) : 득립(得立)의 동생이다.
‣김연(金演) : 광산인으로 삼(參)의 손자이며, 벼슬은 훈첨(訓僉)이다.
‣최흘(崔屹) :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 984년~1068)의 후손이다.
‣최현(崔峴) : 흘(屹)의 동생이다.
‣최장(崔嶂) : 현(峴)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급제했다.
※당시 우리 진주정씨 선조님들께서는 現장흥읍 남외리인 부내방(府內坊)에서 세거하였으므로 부내방(府內坊)편에 선대(先代) 11분이 기록되어 있다.
▣寓居
‣魏大器 : 丁酉乱見倭至入, 鄕校綴冊子爲甲, 拔東門椽擊逐, 伏屍數十里, 一邑賴得全.
‣李春南 : 完山人, 身長面大, 勇力過人. 以御營軍丙子乱, 隨駕入南漢, 奪出城外, 斬胡將一人. 又斬馬首. 上執春南之手, 嘉嘆賜唐[表裏]嘉善.
▣우거(寓居):정착되지 아니하고 임시(臨時)로 삶, 남의 집에 임시(臨時)로 붙여 삶
‣위대기(魏大器) : 정유재란 때 왜군이 침입하자 향교(鄕校)의 서책을 엮어서 갑옷을 만들고, 동문(東門)의 서까래를 뽑아 격전을 벌어 몰아내어 엎드려 있는 시체가 수 십리가 되어 한 읍이 힘입어 온전하였다.
‣이춘남(李春南) : 완산인으로 키와 얼굴이 장대하고 씩씩한 힘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다. 어영군으로 병자호란 때 어가(御駕)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 밖으로 탈출하여 오랑캐 장수 한 명과 말머리를 베었다. 임금이 춘남의 손을 잡고 칭찬하면서 당표리(唐表裏)를 하사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를 주었다.
▣南行
‣金自知 : 光州人, 禁府都事, 始居糠山.
‣金自庸 : 自知弟, 號听流堂, 以行誼授, 漢城參奉.
‣金篙 : 自庸子, 參奉.
‣金築 : 篙弟, 直長.
‣金簹 : 築弟, 礼(副)[部]侍郎.
‣金簡 : 簹弟, 直長.
‣金仲謙 : 簡子, 參奉.
‣金用礪 : 築子, 漢城參軍.
‣金世饒 : 籍孫, 參奉.
‣金澤南 : 仲謙孫, 號養亨, 參奉.
‣金式南 : 澤南弟, 號秋浦, 自少至孝行才卓. 號廷試獻三山策, 見東文選. 時遭昏朝, 肥遯海南西浦村, 或稱海隱居士.
‣金枰碩 : 光山人, 寢郎.
‣金參 : 枰碩子, 主簿.
‣金混 : 參孫, 直長.
‣梁弼元 : 億柱子, 直長.
▣남행(南行) :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또는 유학(儒學)으로 하는 벼슬
‣김자지(金自知) : 본관은 광산으로 벼슬은 의금부 도사(都事: 종5품)이고, 강산(糠山)의 입향조(入鄕祖)이다.
‣김자용(金自庸) : 자지(自知)의 동생으로 호는 기류당(听流堂: 웃음이 흐르는 집)이다. 행의(行誼: 품행과 도의)로 한성참군(漢城叅軍)을 제수 받았다.
‣김고(金篙) : 자용(自庸)의 아들로 벼슬은 참봉이다.
‣김축(金築) : 고(篙)의 동생으로 벼슬은 직장(直長: 종7품)이다.
‣김당(金簹) : 축(築)의 동생으로 벼슬은 예부시랑(禮部侍郞)이다.
‣김간(金簡) : 당(簹)의 동생으로 벼슬은 직장(直長)이다.
‣김중겸(金仲謙) : 간(簡)의 아들로 벼슬은 참봉이다.
‣김용려(金用礪) : 축(築)의 아들은 벼슬은 한성참군(漢城叅軍)이다.
‣김세요(金世饒) : 적(籍)의 손자로 벼슬은 참봉이다.
‣김택남(金澤南) : 중겸(仲謙)의 손자로 호는 양형(養亨)이며, 벼슬은 참봉이다.
‣김식남(金式南) : 택남(澤南)의 동생으로 호는 추포(秋浦)이고,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재주가 탁월했다. 정시(庭試: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대궐에서 친히 보는 과거)의 부름을 받고 삼산책(三山策)을 올렸는데 동문선(東文選)에 보인다. 때에 혼조(昏朝: 광해군)를 만나 해남 서포촌(西浦村)으로 피해 달아났기에 혹 해은거사(海隱居士)라 칭한다.
‣김평석(金枰碩) : 광산인으로 벼슬은 침랑(寢郞: 陵園의 참봉)이다.
‣김삼(金參) : 평석(枰碩)의 아들로 벼슬은 주부(主簿: 종6품)이다.
‣김혼(金混) : 삼(參)의 손자로 벼슬은 직장(直長)이다.
‣양필원(梁弼元) : 억주(億柱)의 아들로 벼슬은 직장(直長)이다.
‣양자하(梁自河) : 필원(弼元)의 손자로 벼슬은 주부(主簿)이다.
‣김조(金曺) : 창봉이다.
司馬:
‣金簡 : 成化進士, 見南行.
‣金廣通 : 籍子, 正德生員.
‣金珽 : 簡孫, 天性至孝親, 病革斫脂灌血, 居庐三年. 自童年成文章, 中庙乙卯司馬. 遊金沖庵崢(淨)門, 德行爲人所推. 士禍後, (遂)[隱]居於海南西浦村, 扁堂曰, 自晦仍稱南溪.
‣金玖 : 珽弟, 進士, 未聚而卒.
‣曺漢定 : 昌寧人, 生員.
‣梁德柱 : 濟州人, 正德庚午生員. 從遊申靈川, 潛己卯後隱巾山中, 贈詩曰: 巾山處士道名高, 睥睨紛紛一世豪云. 見府東.
‣梁幹 : 億柱孫, 生員. 見府東.
‣金玧 : 珽弟, 進士, 未(聚)[娶]而卒.
‣曺漢定 : 昌寧人, 生員.
‣梁德柱 : 濟州人, 正德庚午生員. 從遊申靈川. 潛己卯後隱巾山中, 贈詩曰: 巾山處士道名高, 睥睨紛紛一世豪云. 見府東.
‣梁幹 : 億柱孫, 生員. 見府東.
사마(司馬) : 사마시(司馬試)
‣김간(金簡) : 성화(成火: 1465~1487 )연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남행(南行)편에 기록되어 있다.
‣김광통(金廣通) : 적(籍)의 아들로 정덕(正德: 1506~1521)연간에 생원에 급제하였다.
‣ 김정(金珽) : 간(簡)의 손자로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부모에 효성스러워 병을 고치기 위해 손가락을 자라 피를 공급하였고, 시묘살이를 3년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을 이루어 중종조 을묘년(乙卯年: 1496)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충암(沖庵) 김정(金崢)의 문하에서 취학하여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로 사람들에 의해 천거되었다. 사화(士禍) 후 해남 서포촌(西浦村)으로 은거하여 집의 현판[堂號]을 자회(自悔)라 하고 거듭 남계(南溪)라 칭했다.
‣김윤(金玖) : 정(珽)의 동생으로 진사였는데, 결혼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조한정(曺漢定) : 창녕인으로 생원이다.
‣양억주(梁億柱) : 제주인으로 정덕(正德: 1506~1521) 경오년(庚午年1510)에 생원에 급제하였고, 영천(靈川) 신잠(申潛)이 양억주를 쫓아 교류하며 지냈다. 기묘년(己卯年: 1519)에 숨은 다음 건산(巾山)에서 은거할 때 증정한 시에서 [아래와 같이] 운운했다. 부동방(府東坊)에 기록되어 있다.
‣양간(梁幹) : 억주(億柱)의 손자로 생원이며, 府東坊편에 기록되어 있다.
原題: 再用前韻奉答梁處士
앞 운을 다시 사용하여 양처사(梁處士)에게 받들어 답하다
巾山處士道名高(건산처사도명고)
睥睨紛紛一世豪(비예분분일세호)
八十年來身更健(팔십년래신갱건)
徧遊湖海不曾勞(편유호해불증노)
건산처사(巾山處士)의 도는 명성이 높아
세상에서 흘겨보는 위세가 어지럽지만 일세(一世)의 호걸일새.
80세가 다가오자 몸이 다시 건강하여
호해(湖海)를 두루 유람하기에 일찍이 수고롭지 않다네.
▣高年
‣金冑彬 : 澤南孫, 護軍, 贈左承旨, 亨年八十七.
‣金聖樞 : 澤南曾孫, 嘉善, 亨年八十一.
‣金聲發 : 演子, 通政.
‣曺聖三 : 嘉善.
‣梁渭橋 : 自河孫, 通政.
‣梁渭樞 : 渭橋弟, 通政, 贈刑議, 亨年八十七.
‣梁之沔 : 渭樞子, 通政, 贈工判.
‣梁之浻 : 渭橋子, 通政.
‣梁弘五 : 之沔子, 同樞.
‣金弘業 : 混子僉樞, 自安良來(澫)[寓], 手種五柳作村名.
▣고년(高年):나이가 많음(고령)
‣ 김주빈(金冑彬) : 택남(澤南)의 손자로 호군(護軍: 정4품)이었는데 좌승지(左承旨: 정3품)를 증직(贈職) 받았고, 향년은 87세이다.
‣ 김성추(金聖樞) : 택남의 증손으로 가선대부를 수직(壽職) 받았고, 향년은 81세이다.
‣ 김성발(金聲發) : 연(演)의 아들로 통정대부를 수직 받았다.
‣ 조성삼(曺聖三) : 가선대부를 수직 받았다.
‣ 양위교(梁渭橋) : 자하(自河)의 손자로 통정대부를 수직 받았다.(곧 양억주의 5대손이다)
‣양위추(梁渭樞) : 위교(渭橋)의 동생으로 통정대부였는데,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증직 받았고, 향년은 87세이다.(곧 梁億柱의 5대손이다)
‣양지면(梁之沔) : 위추(渭樞)의 아들로 통정대부였는데,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증직 받았다.(곧 梁億柱의 6대손이다.)
‣양지형(梁之浻) : 위교(渭橋)의 아들로 통정대부를 수직 받았다.(곧 梁億柱의 6대손이다.)
‣양홍오(梁弘五) : 지면(之沔)의 아들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수직 받았다.(곧 梁億柱의 7대손이다.)
‣김홍업(金弘業) : 혼(混)의 아들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수직 받았다. 안양방에서 와서 우거(寓居)하면서 손수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오류동(五柳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
▣戶額
編戶二百九十戶, 男四百七十二口, 女三百九十九口.
▣호액(戶額)
호적에 기재된 호수는 290호이고, 남자는 472명이며, 여자는 399명이다.
▣田結:
▣軍丁:
[출처]장흥읍지(長興邑誌) 정묘지(丁卯誌) (174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