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메탈이란 무엇인가?
헤비메탈과 하드 록의 차이점
많은 록 팬들에 의해서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항의 하나는 과연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의 해석도 분분하다. 연주인들의 볼륨의 강도, 박자관념에서의 중후함, 액센트 강약의 차이등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측과 블루스에 기본을 둔 헤비 사운드가 하드록이며 하이 데시빌의 출력을 이용한 스트레이트한 표현 방식이 헤비메탈이라고 주장하는 측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헤비메탈 그룹들도 블루스에 기초를 둔 팀이 허다하며, 60년대의 그룹 크림이나 지미 핸드릭스의 작품에서 오늘 날의 헤비메탈 사운드에 못지 않은 고출력의 직선적 표현 방식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주장들은 그리 확언 할 수는 없다. 다만 무겁고 볼륨이 강하며 직선적인 형태를 취한 음악 장르로서, 록큰롤의 진보된 형태를 하드록이라 일컬었으며, 여기에서 더욱 다양해진 악기의 악세서리와 연주인들의 정교한 테크닉이 향상되면서 72년 레스터 뱅크스란 컬럼니스트에 의해 헤비메탈이란 단어가 표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헤비메탈과 하드 록의 차이점이란 시대의 흐름이 낳은 표현방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며 그 예로 70년대초까지만 해도 하드 록이라 불리우던 장르가 그 이후 현재까지는 하드 록이란 단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헤비메탈이라 표현하는 추세만 봐도 직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헤비메탈은 하드 록의 진보적 형태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논리일 것이다.
하드록의 생성과정
스탠다드 팝이 주류를 이루던 50년대 초반을 거쳐 중반으로 접어들며 대중음악의 다변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특히 56년에 등장한 엘비스 프레슬리는 그 특이한 제스처와 음색으로 비난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흔히 50년대 스타를 엘비스라 지칭하고 있듯이 그가 대중음악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데 하드 록의 생성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56년 여름에 발표된 로커빌리 스타일의 <Hound Dog>은 이후 수많은 후배들(특히 하드 록 그룹의 멤버들)이 연습곡으로 다투어 연주했던 사실만 보아도 엘비스가 하드 록의 생성에 불을 당겼다고 봐야 타당할 것이다.
이 밖에도 로커빌리 피아노의 대부로 칭송받고 있는 제리 리 루이스와 <Great Balls Of Fire>,<Summertime Blues>로 유명했던 에디 코크랜, <Tutti Frutti>로 명성을 날렸던 리틀 리처드 등도 당시로선 획기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해 하드록의 모태를 형성하는데 한몫 거들었다.
하드록과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밴드들은 대체로 기타, 베이스, 드럼의 단순한 편성으로 이루어졌으며 간혹 건반 악기를 다루는 그룹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밴드들이 가장 중요하게 꼽는 악기는 일렉트릭 기타이다. 일렉트릭 기타의 개발이 없었다면 하드록과 헤비메탈이 탄생될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렉트릭 기타는 헤비메탈의 원류
일렉트릭 기타는 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34년 봅이라는 기타리스트가 자신이 즐겨 연주하던 마틴 어쿠스틱기타이다 일렉트릭 픽업을 달고 그것을 앰프에 연결시켜 밀튼 브라운이 이끌던 그룹 뮤지컬 브라우니즈와 함께 연주했던 것이 최초의 증폭연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통기타를 이용한 하나의 시도로 평가받았을 뿐이며 그로부터 2년 후인 .3년 캔사스 출신의 기타리스트 에디 더럼에 의해 세미 솔리드 바디형식의 일렉트릭 기타의 파이오니아로 꼽아야 할 것이다.
에디는 자신이 고안해 낸 일렉트릭 기타를 가지고 그 유명한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서 성능 테스트를 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등장한 베니 굿맨 악단의 기타리스트 찰리 크리스찬에 의해 일렉트릭 기타의 확산이 시작되었다. 찰리는 40년대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가 개발한 블루스의 외줄 튜닝 애드립은 마치 혼의 소리를 방불케 하는 투명하고도 정확한 것이었다. 이러한 찰리의 주법을 가장 잘 전수하여 발전시킨 스타가 에릭 클랩턴이다.
그후 시카고를 중심으로 꽃피우기 시작한 블루스의 열풍과 함께 머디 워터즈, 하울링 울프, 보 디들리 같은 완벽한 블루스 맨들이 등장하면서 보틀네크를 이용한 슬라이드 기타 주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기타의 몸체가 다소 속이 비어 있던 형태인 세미 솔리드 바디를 이용했었는데 소리의 공명성은 대단히 우수하나 파워가 약한 것이 약점으로 지적되어, 48년 리오 팬더에 의해 몸체가 완전히 밀폐된 솔리드 바디가 개발되기에 이른다.
점차 파워가 강한 사운드를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기타리스트들은 다투어 솔리드 바디로 바꾸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팬더의 다이나미즘을 잘 중화시킨 깁슨사에서 레스 폴에 의해 개발된 고급 모델 깁슨 레스 폴이 등장하면서 솔리드 바디의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팬더의 자랑인 스트래트캐스터와 탤레캐스터, 깁슨의 자랑인 레스 폴과 파이어버드를 현재 세계 유수의 해비메탈 그룹들이 소유하고 있는 점만 보아도 이 양대 메이커가 하드 록과 헤비메탈을 발전시키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하겠다.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패턴을 제시한 크림과 헨드릭스
66년 여름, 에릭 크랩턴,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의 세 사나이로 구성된 전설의 트리오 크림이 탄생했다. 클랩턴은 야드버즈와 블루스 브레이커즈에서, 브루스의 그래험 본드와 맨 프레드 맨에서, 베이커 역시 그래험 본드에서 각각 빛을 발하던 영국 최고의 테크니션들이었다.
앞서 잠시 언급한 찰리 크리스찬을 비롯하여 머디 워터즈, 하울링 울프, 보 디들리 그리고 3대 킹이라 일컫는 비비 킹, 엘버트 킹, 프레디 킹 등 기타의 원조들에게서 장점만을 취하여 블루스의 모든 것 그리고 기타의 모든 것을 획득한 에릭 클랩턴은 기타의 신으로 불리며 신기의 핑거링을 구사했다.
한편 정규 클래식 교육을 받은 잭 브루스는 크림의 사운드를, 불루스와 재즈를 엮어 소위 헤비 리프라는 새로운 테크닉을 개발해 냈다. 이것은 오늘날 헤비메탈 그룹의 연주 형식인 반복되는 코드 터치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드럼의 마왕이라는 칭호를 보유하고 있는 진저 베이커 역시 종래의 리듬 악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드럼을 파격적으로 긴 시간을 할애하는 리드 악기로서의 헤비한 솔로 연주를 시도하여 존 본햄과 코지 파웰같은 후배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는 타악기의 원류인 아프리카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갖고 있을 정도로 학구파이기도 하다. 생존해 있었다면 오늘날의 헤비메탈의 방향을 더욱 전위적으로 이끌어 나갔음에 틀림없을 귀재 지미 핸드릭스는 와와 페달, 퍼즈 박스 등의 악세서리와 피드백주법, 테이프 딜레이의 녹음 방식을 개발했다.
지미 핸드릭스는 헤어 밴드를 비롯 사이키델릭한 의상 또는 이로 기타를 뜯는 등 당신로써는 전위적인 행동을 연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스타이이 오늘 날의 헤비메탈 그룹들이 즐겨 사용하는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데뷔 당시 철저한 헤비메탈 그룹으로 시작했던 그룹 윈의 멤버 전원이 가장 좋아하고 영향받은 선배를 핸드릭스로 꼽고 있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외 유수의 록잡지들이 조사한 헤비메탈 그룹들의 앙케이트에서 거의 전원의 멤버들이 헨드릭스는 나의 전부였다라고 응답해 주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봐도 마땅히 그를 헤비메탈의 킹으로 추앙해야 할 것이다. 그룹 크림이 헤비 사운드의 본질을 제시해줬다면 지미 핸드릭스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승화시켰다.
헤비메탈의 전성기는 1968-1975
60년대 중반부터 말엽까지 헤비 사운드의 패턴을 제시했던 크림과 지미 핸드릭스의 위력은 한 시대의 대중음악 기호도를 변화시켰을만큼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곱고 깔끔한 사운드로 일관하던 비틀즈의 스타일까지 말기의 앨범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White Album], [Abbey Road]등에서 볼 수 있듯 사이키델릭하면서 헤비하게 만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크림과 핸드릭스에게서 바톤을 받는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은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로 접어드는 소위 록의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해서 가장 치열한 경쟁 끝에 살아남은 헤비 사운드의 승리자였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해산한지 오래인 현재까지도 전세계의 록팬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60년대 말엽을 가리켜 헤비메탈의 개화기로 잡는 이유는 퍼플과 제플린을 비롯하여 17분짜리 러닝 타임으로 모험을 건 LA출신의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Da-Vida]의 등장이라든지 미시건 출신으로 미국 헤비 사운드의 체면을 세워준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무겁고 중후한 연주로 키림의 재판이라 평가받았던 그룹 마운틴 등 카리스마적 그룹들이 다투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성 세대의 충격은 세계 신기록을 보존하고 있는 기네스북을 들추어 보면 잘 나타나 있다. 68년에 대뷔한 딥 퍼플을 '세계에서 가장 요란한 밴드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 당시에 그토록 시끄러웠던 그룹으로 평가받았던 그들이 현재는 록의 고전적인 사운드로 인정해주고 있으니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이 무렵 캐나다에선 헤르만 헤세의 소설 이름에서 따온 스테픈울프라는 그룹 이름으로 등장한 5인조의 사이키델릭 록커들이 <Born To Be Wild>와<Magic Carpet Ride>등을 크게 히트시키며 60년대 말엽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70년대로 접어들며 헤비 사운드는 더욱 다양한 패턴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무려 13년간 불멸의 텍사스 트리오로 군림하고 있는 지지 탑은 72년 <Francene>이란 곡으로 차트에 진입하여 헤비메탈 블루스의 장르를 열었으며, 레이저 광선을 이용한 스테이지로 뉴욕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또한 자신들에게 최초로 헤비메탈 그룹이라는 단어를 부여 해 줬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블루 오이스터 컬트, 뉴잉글랜드 출신의 5인조 하드록 그룹 에어로 스미스가 유명한 <Dream On>을 들고 나왔던 것도 73년 가을 이었다.
에어로 스미스를 필두로 키스와 윈 등이 다투어 등장했던 73년의 그룹들은 오늘 날 헤비메탈 그룹들에 형태면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야 한다. 에어로 스미스를 이끌던 보컬리스트 스티븐 타일러와 윈의 멤버들은 여성을 방불케하는 헤어 스타일과 블라우스, 스타킹등의 착용 그리고 그룹 키스는 얼굴을 위장한 페인팅과 중세의 검투사들을 방불케하는 악세서리, 가죽 제품의 타이트한 의상, 불을 내뿜는 익사이팅한 스테이지등을 갖추고 나와 최근 헤비메탈 그룹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10년 전에 제시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신디사이저의 등장으로 뉴 뮤직에게 전성기를 넘겨 줘
대중음악의 생명인 좀더 새로운 것을 원하는 팬들의 기호도에 의해 순수 악기에서 전자악기로 바뀌던 효시가 일렉트릭 기타였다고 한다면 그것의 가장 직전적 표현방법이 헤비메탈이었다.
일렉트릭 기타가 고안되었던 35년을 전후에서 순수 피아노와 오르간, 하프시코드 등으로 연주되던 건반악기 주자들에게 충격을 준 악기는 로런스 헤먼드가 고안해 낸 일렉트릭 오르간이었다.
이후 코넬 대학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네덜란드인 르버느 무그에 이해서 64년에 마법의 건반악기로 불리우는 무그 신디사이저가 개발되기까지 건반 악기는 가장 과학적인 형태로 변천되어왔다.
약 4년간 미비된 부분을 보완하는 시기를 거쳐 68년 월터칼로스가 시연한 앨범[Switched On Bach]이 세인들의 관심을 모으며 순식간에 1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음은 물론 69년 초에 거행된 그래미상에서 3개 부문의 트로피를 따내는데 성공한다.
잇달아 등장한 신디사이저 앨범으로는 휴고 문테니그로 악단의 [Moog Power], 겔손 킹슬리의 [Music To Moog], 크리스토퍼 스코트의 [Switched On Becharach],존 이튼의 [Electro Vibrations]등이 60년대 말을 풍미했다.
그러나 록 그룹이 신디사이저에 손대기 시작 한 것은 70년대 초반부터이며 신디사이저 의 마술사라 일컫는 키스 에머슨, 릭 웨이크먼 등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들에 의해 다투어 도입되기 시작했다. 한편 신디사이저를 과학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전문적 독일 그룹들인 탠저린 드림, 크라프트베르크 등이 가세하면서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대중음악을 이끌어 나갔으나, 70년대 중반부터 음악적 기초가 없는 펑크 록커들에 의해 신디사이저가 단순한 리듬 패턴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소도구로 전락되기 시작했다.
이에 영국의 의회에서 까지 신디사이저의 남용은 소리 공해에 지나지 않으니 규제해 달라는 안건이 상정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심오하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았던 1968-1975년에 걸친 록의 황금기에 헤비메탈은 꽃피웠으며, 이후 단순한 것을 원하는 대중들의 요구에 의해 뉴 뮤직과 댄스뮤직의 홍수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헤비메탈이 쇠퇴한 것은 절대 아니며 헤비메탈의 전성기를 잠시 내주고 있을 뿐이다. 74년 전성기를 마감할 무렵 등장한 캐나다의 뛰어난 트리오 러시는 거이ㅡ 모든 헤비메탈 그룹들이 기피해 오던 신디사이저를 과감히 도입하여 프로그레시브 헤비메탈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이뤄냈으며, 뒤이어 오스트레일리아를 세계적인 록의 강국으로 부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낸 AC/DC가 금속성으로 점철된 최근의 헤비메탈 패턴을 들고 혜성같이 등장하기도 했다.
80년대는 뉴 뮤직과 댄스 뮤직이 차트를 누비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헤비메탈은 어떤 장르보다도 막강한 선배들을 보유했던 뿌리 깊은 영역이기 때문에 최근까지 흔들리지 않고 맥을 이어오고 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AC/DC가 최근 부진한 틈을 타 영국의 신진 세력인 아이언 메이든과 데프 레퍼드 그리고 미국의 신진 세력인 콰이어트 라이어트, 머틀리 크루, 래트 등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한 [Love Drive]앨범으로 국내에서 재능을 먼저 간파했던 독일의 스콜피온스, 스콜피온스의 자매 그룹이라 할수 있는 UFO와 마이클 쉥커 그룹, 네덜란드의 반덴버그, 스위스의 크로커스, 프랑스의 트러스트 등이 각국을 대표하고 있다.
한편 글렌 팁든과 K.K. 다우닝의 탁월한 트윈 리드 기타리스트를 보유하고 있는 베테랑 주다스 프리스트, 신기에 가까운 핑거링을 보유하고 있는 반 헤일런, 잠시 활동을 쉬고 있는 무서운 잠재력의 보스톤, 극도로 헤비한 블랙 사바스, 사바스의 분신 오지 오스본, 역시 마음먹은 대로 기타를 만지는 게리 무어, 딥퍼플의 분신인 레인보우와 화이트 스네이크, 제플린의 분신인 로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 등 그리 쉽게 물러설 인물들이 아닌 두터운 저변을 쌓고 있다.
이제 이렇게 면면히 비난과 찬사속에 헤비메탈의 맥은 이어져 오고 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헤비메탈을 광란하는 차원에서 감상하는 차원으로 수용하는 의젓함을 갖자는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플린의 <Stairaway To Heaven>을 정중동으로 받아들여 록 클래식으로 승화시킨 저력을 갖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