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위의 기록은 이천년 전 예수님의 말씀이다.
기록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셔서 오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면 아무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께 올 수 없다고 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 올 수 있는 자는 초림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들어온 기성교단 백성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하나님이 이끌어서 예수님께 오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게 기성교단 백성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예수님께)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라고 하셨다는
대목에 주목하길 바란다. 예수님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신다고 했으며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초림 때는 살리는 일을 하시지 아니하고 오늘날 재림 때
재림하신 예수님(새이름)이 살리는 일을 하신다고 했던 것이다.
요한복음 12장에서도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요16:12,13>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조차 말씀을 다 알려주지 아니했다고 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이며 계시록 필자 요한도 봉한 성경을 뗄 자가
없어서 울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말씀을 깨달아야 영생인데, 깨닫지 못함으로 인하여 초림 때는
살리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했으니, 그게 곧 마지막 날 재림 때 살려주시는
재림주가 되신다. 말씀을 깨달으면 영생이라고 했듯이 깨닫게 하는
일도 오늘의 마지막 때요, 영생을 주시는 일도 오늘의 마지막 때가 된다.
즉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늘의 재림주이듯이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라고 언급하셨을 때
“내가” 라는 존재도 오늘의 재림주로 다시 오셨을 때를 뜻한다.
재림주만이 오늘날 봉한 성경을 인 떼시며,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마지막 날에 살려주시는 천국의 주인이 되신다.
“(예수님께)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 고 하셨기
때문에 마지막 때가 오기 그 이전은 살리는 일이 없이 죽어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살린다는 말은 죽어 있었음을 전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인간은 예수님이 오시기 그 이전은 물론 예수님이 오신이래 지금까지도
봉한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내내 죽어 있는 무덤이었다.
살아 있다고 큰소리 치고, 구원받았다고 깃발을 나부끼고, 성령 받았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회칠한 무덤으로 있었다.
무덤 속엔 더러운 시신이 악취를 풍기며 썩고 있는데 무덤 바깥만
회칠해서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있으면 만사형통인줄 안다.
그런데 요즘엔 기성교단들이
경건의 모양조차도 유지할 힘이 없는지 내팽개쳐진지 오래인 것 같다.
신학적 교리는 예수님 때부터 구축됨이 전혀 없이 오직 경건의 모양새를
갖추어 지난 이천년을 버티어 왔으나, 이제는 무덤의 회칠마저도
비바람에 씻겨져내려 그 몰골이라니,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끔찍한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온통 그들의 무너지는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죽어서 천국간다고 주장한다.
아니 황금종이 울리고 황금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천국에 다녀왔다는
신비체험담에 대한 서책들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하룻 밤새 썩은 잇발이 없어지고 금 잇발이 솟아났다!
부흥집회 때 금가루가 내렸다! 이슬성신이 내렸다! 등등으로
교회들은 온통 귀신의 처소로 변했다.
예수님은 “(예수님께)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셨는데, 귀신의 처소가 되어버린 오늘의 교회들에서
과연 몇이나 살리실 것인가?
계7장에서는 인맞은 자 144000 이 있다고 했고, 14장에서는 시온산에
144000 이 새노래를 배우며 구속함을 받는다고 했으나,
과연 144000 만큼이나 많은 수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믿는자 수억이나 되는데 그중에 144000만 첫열매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분통을 터뜨리기 일수인데, 내가 보기엔 144000도 너무 많다.
그들의 악행과 어리석음에 대해서 관대해지고 인내하고자 하는 뜻에서
지금까지 구원받을 반열이 144000 이나 되는 듯이 말을 했으나,
사실 냉정해지기로 한다면 구원반열은 144000 이 아니고 144명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왜일까?
[계21:15-17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사람은 죽는 몸이고, 천사는 영생체이다. 그런데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함을 볼 때, 이는 천국혼인잔치인 신인합일을 뜻하고 신인합일은
곧 인간이 신의 몸을 받으므로서 불멸성을 입게 되는 영생체(구원의 몸)가
됨을 뜻한다.
그런데 이 같은 신인합일의 척량이 144 규빗이라고 했고 그것은
장과 광과 고가 같다고 했다. 장과 광과 고가 같다는 것은 정방형이라는
뜻이고, 정방형이라는 것은 영적개념에서 “정확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이는 정확하게 144명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왜 144가 144000으로 거품을 잔뜩 물고 나올 수 있는가?
성경이 모두 오늘에 대한 예표이며 그리하여 상징이며 비유비사이듯이
숫자도 때에 따라선 상징적인 숫자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실수 144에 붙은 000은 세 자리로서 천(千)을 의미하며 千은 또한 “天”을
상징한다. 궁극적으로 000 이 天을 상징하기 때문에 144000은
천국시민권자로서 144 명이라는 말로 귀결될 수 있음에서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성경에서 144000을, 장과 광과 고가 같다는 말을
덧붙인 가운데 단지 144로 표현했겠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다시 오시는 예수님(새이름)이 마지막 날에 살리시는 첫열매
숫자가 144000 이 아니고 144 일지 모른다.
첫 열매로서 144000의 구원도 너무 적다고 투덜거리고 비방했거늘
이제 144000 이 아니라, 144명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기가 막혀 할까?
욕먹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말은 차마 못할 것이지만
나는 얼마든지 욕질 정도가 아니라 돌 맞을 각오도 되어 있다.
첫열매로 구원받을 수가 이렇게 극소수이므로 부디 정신을 차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떠들면서 하나님을 만만히
보지 말라. 마귀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솜사탕으로 달래주고 얼래주지만
참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아주 엄격하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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