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한 여행
박귀숙
후커 밸리 트랙
딸이 Working Holiday를 위해 호주로 떠난 뒤 1년 만에 시드니로 날아가 상봉했다. 퇴직 기념 여행을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시드니에서 바로 뉴질랜드 퀸스타운으로 비행기로 이동했다. 모든 일정은 딸이 예약하고 계획을 다 잡아뒀다. 퀸스타운에서 며칠 보내고 Mt. Cook의 Hooker Valley Track을 출발했다. 편도 5km이지만 왕복 시간은 일반인 기준 3시간이란다. 출발하려는데 비가 세차게 내려 잠깐 차 속에서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옷차림을 단단히 하고, 최소 간식과 비옷, 우산을 챙겨 출발했다. 마스크까지 쓰니 바람 들어올 구석이 없어 추위는 느낄 수 없었다. 길은 거의 평탄하고 3개의 구름다리를 건너야 Lake Hooker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동안 날씨도 변화무쌍했다. 우리의 삶처럼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무지개가 떴다가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그래도 묵묵히 걸었다. 딸내미는 살면서 가장 많이 '엄마'를 불러대며 나의 반응을 살피고는 힘든 과정을 잊게 해주었다. 딸은 나보다 더 숨차고 힘들어했지만, 중간중간 예쁜 풍경이 나오면 영상찍으며 추억을 쌓는 일에 열중이었다. 어쩜 '인생 최고의 날'인 것 같아 탄성을 지르기도 하니 힘든 줄도 모르고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목적지인 훅커 계곡 호수에 도착하니 빙하가 녹아 물빛이 희뿌연 밀키스 색깔 같았다. 호수 곳곳에 유빙이 쌓여 있어 더 예뻤다. Mt. Cook의 설산 또한 완전 천연의 아름다움이었다. 곳곳의 아름다움이 관광객을 더 불러오는지 모른다. 천혜의 관광지였다. 다시 올 수 있을까? 맘껏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고 했다. 그간 바쁘게 달려왔던 일들은 뒤로하고 좀 느긋하게 마음 가는 대로 새롭고 자유롭게 살아 보련다.
(2023년 8월7일)
3달러
오늘은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 해서 숙소에서 일찍 체크아웃하고 나왔다. 먼 길 이동이 있어 아침을 먹으려고 The Greedy Cow Cafe에 줄을 섰다. 나는 메뉴 선택만 하고 딸이 주문해서 아침 식사를 든든히 했다. 그런데 딸이 크루아상 하나 더 먹고 싶다며 내게 주문해 보라 했다. 선뜻 나서기 어려웠지만 쭈뼛거리며 영어로 주문했다. "Can I get please one croissant?" 주문하고 현금결제를 마친 나는 '미션 성공'이라며 기뻐했다. 한참 후 빵이 나왔다. 근데 깜빡한 게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빵이 7달러였는데 10달러를 건네고 거스름돈을 받은 기억이 없고 호주머니에도 없었다. 딸아이는 캐셔한테 상세히 설명하고 3달러를 받아왔다. 거스름돈을 고객에게 정확하게 계산하는 건 캐셔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16년 가까이 캐셔로 일한 내가 그걸 깜빡 잊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냥 잊어버리는 걸까. 아니 영어로 주문한 걸 혼자 대견해하며 무사히 끝냈다는 생각만 한 걸까. 마침 그 광경을 딸이 동영상을 찍어둬서 다시 보니 그 점원은 현금을 받고는 돈통을 닫고 빵 주문서를 다른 동료에게 전하고 있었다. 영수증 달라는 것도 잊었으니, 거스름돈도 서로가 잊은 모양이었다. 3달러! 적은 금액이지만 잊지 못할 기억이다. 어떤 TV프로에서 엄마를 모시고 어린 자녀와 일본 여행을 간 여배우 생각이 났다. 초등생인 아들에게 과자를 사 오게 했다. 일본어와 몸짓으로 주문하고 거스름돈까지 챙겨 온 아이에게 장하다고 칭찬하던 그녀가 생각났다. 그런데 어리숙한 엄마인 나는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의기양양 했지만, 딸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딸과 여행 할 때면, 내가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했는데, 이젠 낯선 외국에서 딸의 도움으로 여행하고 있다. 어느새 딸은 듬직하고 믿음직스럽게 자라 내 옆에서 보호자가 되었다. 딸이 운전하고 맛집을 검색하고 취향에 맞게 여행지를 골라 이곳저곳 맘껏 구경하게 하고 먹거리도 입맛에 맞는 걸 택하게 한다. 완전 VIP 여행 가이드다!
(2023년 8월 9일)
해돋이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 여행 날이다. 평소 해돋이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딸은 특별한 계획을 했다. 딸은 그걸 보자고 새벽에 출발하잔다.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거의 한 시간쯤 달렸다. 이른 새벽 찬바람마저 세찼다. 그나마 그제 눈이 펑펑 쏟아진 날씨와는 달라 행운이었다. 항상 아침마다 딸내미는 꼼지락대는 나를 다그친다. 대여섯 살 아이처럼 '미안합니다'라며 어리광을 부리다 숨죽이며 안전운전을 도와주기 위해 조수석에 앉았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긴 터널도 지나고 한없이 고지를 향해 오르락내리락 아슬아슬하게 올라갔다. 거의 하늘 밑까지 올라온 듯했다. 여명이 바다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구글 지도를 보고 딸이 찾아낸 그곳은 해돋이를 감상하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기도하듯이 숨죽이며 구름 너머로 뚫고 나오는 해를 향해 두 손을 모은다. 순식간에 둥그런 모습으로 힘차게 떠오른다. 우린 그 순간 환호를 지르며 서로 부둥켜안고 멋진 일출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다. 정말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고맙고 장하다. 그 힘든 곳을 위험 무릅쓰며 운전하지 않았던가. 엄마에게 날마다 더 멋진 곳을 보여주고 싶어 기후에 맞게 스케줄도 잘 잡는다. 그간 고생했던 날이 눈처럼 사르르 녹는다. 맘껏 소리쳐 외친다. “고맙다. 사랑한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 (2023년 8월 12일)
뚜벅이 여행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시드니까지 날아왔다. 여기엔 딸이 6개월간 Working Holiday를 위해 머물렀으니 구석구석 알고 있는 곳이라 뚜벅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전날 공항에서 긴장했던 시간 속에 심사대를 통과하고 개선장군처럼 무사히 빠져나온 안도감으로 이곳에선 여유로웠다. 맛있는 베이글 집을 찾아 딸과 함께 먹는 아침은 그 자체로 충만감을 주었다. 딸은 사나흘 사용할 교통카드를 중앙역에서 충전해 줬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우산도 챙기고 옷도 따뜻하게 입었다. 시내 중심가를 걸어서 돌아다녔다. “저곳은 내가 8주간 살았던 호스텔이야.” 또 “저쪽에서 처음으로 일했던 곳도 보이네.”라며 친정집에 온 듯 즐거워했다. 우리 모녀는 시드니 거리를 걸으며 지난 시간의 얘기꽃을 피웠다. 트램을 타고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도 구경하고 로열 보타닉 가든까지 걸었다. 오래된 나무들과 꽃들을 보고 감탄하며 여유를 즐겼다. 그곳은 지난번 동료들과 함께했던 추억을 불러오기도 했다. 많이 걷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왔다. 비 오는 날엔 수제비가 맛있겠지며 한국인이 운영하는 손칼국수 집을 찾았다. 지하철로 30분 거리였다. 전철역 바로 옆에 있어 찾기가 좋았다. 실내는 테이블이 4~5개의 좁은 공간이어도 괜찮았다. 손칼제비와 양푼 비빔밥(소)을 주문했다. 손칼제비에 양념장(청양고추 간장 장아찌)을 넣으니, 맛이 배가 되었다. 면과 수제비가 얇아서 졸깃한 맛이 일품이었다. 멸치로만 우려낸 국물 맛도 좋았다. 또한 양푼 비빔밥은 고향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맛이기도 했다. 여행지나 맛집을 구경시키고 맛보여 주려고 거리에 개의치 않고 찾는 딸의 맘이 느껴졌다. 오늘도 일인 다 역을 감당한 최고 가이드에게 짝짝 짝짝짝 박수를 보낸다. 이틀이 지나면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1년간 이곳에서 억척스럽게 살아 낸 만큼 이제부터는 너의 앞날에 더 멋진 꿈의 길이 활짝 열릴 것이야. 화이팅! 수고했어! 고마워!
사~아~랑~해~♡
(2023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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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딸과 함께 한 여행은' <수필과비평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딸이 호주에 Working Holiday 를 떠난다는 소식을 전하며
착잡해 하던 엄마 박선생의 표정이 새삼 생각납니다.
어느새 1년, 간간이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벌써
1년이 되었군요.
먼곳으로 달려가 함께 여행을 하고
딸이 사는 모습도 보고 돌아왔으니 이젠 안심해도 되겠군요.
여행이야기를 재미있게 소개해 주어서 잘 읽었습니다.
송화 고문님, 시차적응도 제대로 못한 상태인데 카페에 글을 올리셨군요.
지난 여름에 딸과 함께한 여행은 내게 큰 추억을 남겼습니다. 그동안 못 만나고 살아서 실컷 여행하며 얘기하고 잘 지냈어요. 고맙습니다.
@해바라기/박귀숙 모녀의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언제였던가, 따님 대학입학 합격 소식 전하셨던 때가.😉
이제 성인이 되어 어엿이 엄마를 모시고 외국에서 여행을 주도하네요.
해바라기님, 딸래미 쳐다만 봐도 좋으시겠어요.ㅋㅋㅋ
행복한 모녀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축하합니다. 멋진 엄마와 딸에게.
따뜻하고 멋진 글 많이 많이 쓰셔요.
박해경 선생님,
세월이 참 빠르죠?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어느덧 보호받는 때가 되었네요. 이만 리나 떨어져 있어 자주 볼 수 없음이 명절이면 자꾸 생각나지요. 이제 딸의 앞날을 멀리서 지켜보며 응원할 수 밖에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