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31. 부활주일예배설교
빌립보서 3장 10~16절
완료형 부활과 진행형 부활
■ 오늘은 일 년 중 가장 행복한 날이고, 가장 신나는 날입니다. 부활절-부활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성탄절을 기독교 최고의 축제로 만들었지만, 기독교 최고의 축제는 부활절입니다.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산 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탄절과 부활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이 주인공이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예수님이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살리시려 사람으로 오신 날이고, 부활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살려내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취-완성-승리의 의미에서 부활절은 기독교 최고의 축제입니다. 일 년 중 가장 행복한 날이고, 가장 신나는 날입니다.
그런데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쁜 날인 오늘 부활절이 오늘 하루만 부활절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만 부활절이면, 부활의 의미는 이해했을지라도, 부활의 능력은 경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설명이 필요하겠죠? 좋습니다.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으니 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 바울은 본문을 통해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바를 피력하였습니다. 그것은 ‘부활에 이름’입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알고자 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를 알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고자 하고, 이렇게 알기 위해 애쓰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잡하죠? 이해를 돕기 위해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새번역>이 도움이 되시죠? 자, 정리해 봅시다. 바울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부활에 이름’입니다. 이렇게 부활에 이르기를 바라는 그가, 이해하고 제시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부활에 이르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야 하는 과정, 즉 ‘부활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단순히 한 번만, 혹은 한 번 정도만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을 거쳐야 이르게 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에 이름’은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완료형 부활’과 ‘진행형 부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우리가 이르고 싶은 부활은 예수님이 완료하신 부활입니다. 그러나 그 완료형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진행형 부활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 이것이 바로 진행형 부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완료형이고, 나의 부활은 진행형입니다. 그렇기에 부활 신앙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붙잡고 다시 살아나기 위한 거룩한 몸부림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절이 오늘 하루만 부활절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2~14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부활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란, 예수님이 이루신 부활,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그 부활, 그리고 그 예수님께 붙잡혀 소원하는바 부활을 이루기 위해 힘차게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을 푯대 삼아 말입니다. 참으로 바울은 자신이 ‘부활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 또한 부활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야 부활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 과정을 살아내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이며,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자,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부터 어떤 말씀과 일을 하셨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지식 습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아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의 개념입니다. 알면 살아야 진정한 앎이 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아는 것은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일하신 것을 사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은, 부활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깨닫고, 이를 삶으로 살아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부활은 사는 능력이자 살리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최절정으로서, 살려내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어두움을 깨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살게 되고, 이뿐 아니라 어두움에 갇혔던 사람들도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려내는 데는 치유의 역사도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억울한 고난, 모욕 가득한 고난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손해도 보고, 가난해져도 보고, 위협도 당하고 하면서 신앙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그리스도와 같이 죽은 것)은, 철저한 낮아짐, 종으로서의 섬김,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는 것이 우리가 일생을 통해 추구하는 바여야 합니다. 15절의 표현이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온전히 이룬 자들”이란, ‘믿음이 성숙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지니”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에 마음을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일생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중에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즉 어떤 문제에 관해서 다른 생각/틀린 생각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황하기도 하고 이상한 눈초리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분명히 가르쳐주십니다. 잘못 이해해도 바르게 잡아 주십니다.
그러니 ‘틀리면 어떻게 하지?’, ‘다르면 어떻게 하지?’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직 부활에 이르는 과정의 삶에 집중하십시오. 16절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면 됩니다. 다를 때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말 것은, 바로 잡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 이제 우리의 삶의 입장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의 삶은 부활의 과정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에 온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부활절에만 아니라 매일 말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이 매일 부활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매일 부활의 찬양이 흥얼거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도 매 주일이 부활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진행형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