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대한 기억>
나의 아버지는 1925년 음력 5월7일생으로 소띠시며 어머니와도 연세가 같다.
그르므로 1910년의 한일합방과 1945년 해방전까지 이른바 일본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셨고 6.25전쟁과 5.16등의 사회적 격동기를 다 거쳐 오셨으니 시대적으론 불운한 세대인 편이다.
최종학력은 대구에 있는 지금의 대구공고 전신인 대구공업학교에서 중,고교를 합친 5년제를 졸업 하셨다.
글도 모르는 문맹자가 수두룩한 그시절에 학벌도 나쁘진 않으셨다.
할아버지께서 젊은시절 대구의 도청에 다니실 적에 아버지도 같이 다니셨다.
아버지는 도청의 관제과에 다니셨는데 일제가 남긴 재산을 관리하는 곳이다.
거기서 아버진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부동산을 해방후 일반 국민에게 불하 해
주는 일을 담당 하셨는데 당시는 소위 "끗발"이란게 상당했다고 한다.
과거에 공무원들의 이권이나 재량은 상당히 많았는데 거기에서 아버진 얼마든지 기회나 권한이 있었지만 자신의 소유로는 하나도 건진게 없었다고 하신다.
그만큼 대쪽같은 성격에다 청렴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25동란때는 원래 선산 동부동 연못근처에 있던 우리집이 인민군들에 의해 불타 버려 동부동의 새로운 땅(동부동 418번지)에 집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내가 태어났고 고2때 죽장동으로 이사 가기전까지 살았다.
그후 아버진 우리나라에 농협이 처음 창설될 때 창립멤버로 입사를 하셨다.
공교롭게도 아버지도 공업학교를 나오셨지만 나중에 금융계통에서 퇴직시까지 일을 하셨고 나도 공대를 나왔지만 기아자동차에서 5년 근무한후 삼성의 금융계통에서 20년간 일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시골에는 은행이 없는 대신 농협이 은행역할을 했다.
초기의 농협은 완전동에 있는 조그마한 2층 사무실에 있었는데 나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 부터 아버지가 계시는 사무실에 어머니나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몇번 가 본적이 있다.
그곳에서 몇년후 선산읍내 중심도로에 위치한 선산 초등학교 앞에 농협건물을 신축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제일 크고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아버지는 초기에 예금계 출납계등을 맡아 일하시다가 나중에는 대출담당 상무로 퇴직시까지 근무 하셨다.
따라서 대출을 부탁하는 고객들이 항상 우리집을 들락거렸다.
지금은 은행에서 제발 돈좀 빌려 가라고 사정을 하지만 당시엔 돈 쓸 사람은 많고 대출해줄 돈은 적은 관계로 사채이자에 비해 4/1도 안되는 은행돈을 빌리려는 사람이 줄을 섰으므로 은행 문턱이 높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객들은 아버지께 개인적인 청탁을 하기 위해 출근전 이른 새벽부터 우리집에 찾아 왔었다.
아버지,어머니 남매가 다 한방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부터 방안에 담배연기가 자욱하여 코가 매워서 잠이 깨면 윗목에서 아버진 손님들과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때로는 새벽부터 술잔을 나눌때도 있었고, 낮에는 농협사무실 근처에서 접대성 술을 나누실 때가 많고 퇴근후 에는 요리집 등지에서 본격적인 술자리에 참석 하시니 집에 오실때는 항상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오셨다.
그런데 항상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은 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으셨다.
방에 들어서실 때는 좀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럴땐 누나와 동생들은 얼른 잠든척 하고 있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리곤 했다.
그러나 나만은 밤12시가 다 되도록, 때론 자정이 넘도록 아버지가 오시지 않으면 마루에서 숙제를 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대문을 열어 드리곤 하였다.
그럴때 마다 아버지는 "넌 장남이니 절대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해서 중학교때 부터 대구로 나가 나중에 1류 대학교에 입학하여야 한다"고 몇번이고 말씀을 하셨다.
자주 간식거리를 사 가지고 오셔서 나만 맛있게 먹었는데 혹시 내가 잠들어 있을땐 깨워서라도 먹으라고 하셨다.
누나나 동생들은 한번 잠들면 흔들어도 잘 일어나질 못했는데 난 벌떡 일어나서 맛있게 먹는게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것 같아 불평없이 먹었다.
가끔은 술을 드시지 않고 게다가 이발까지 말끔하게 하고 일찍 들어 오실때가 있었는데 그럴땐 남매들이 우루루 마루로 나가서 "아부지! 인제 오십니까?"하고 합창을 하며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그런날은 남매들 대표로 내가 총대를 메고 아버지께 "아부지! 저희들 영화구경 하고 싶은데요"라고 말씀드리면 흔쾌히 돈을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신이나서 신발을 신자마자 뜀박질을 하여 완전동에 있는 공회당이라는 허름한 영화관으로 달려가서 재미있게 흑백영화를 보았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좋은 영화가 들어왔다"고 하시면서 가족 모두를 영화관으로 데리고 가셨는데 제목이 "가는 봄 오는 봄"이라고 기억된다.
겨울에 가끔 써커스단이 들어 올때면 낮에 광대들이 차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동네방네 선전을 하고 다녔다.
그런날은 저녘에 아버지가 일찍 들어 오시기를 학수고대 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써커스가 시작될 시간이 되어가도 오시지를 않으면 우린 울상이 되고말았다.
드디어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 서시는 기척이 나면 우린 우루루 마루로 달려 나가 인사를 드리면서 약간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말씀을 드린다.
아버지께서는 의아해 하시면서 "왜 그러냐?"고 물으시면 내가 대표로 "써커스 구경을 가고 싶은데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가서 그럽니다"하고 대답하면 아버지께서는 "조심해서 갔다 오너라" 하시면서 돈을 주셨다.
그러면 우린 돈을 받자마자 냅다 뛰어서 써커스장으로 달려가 두시간 동안 한 겨울에 난로도 없는 써커스 공연장 천막안에서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추운줄도 모르고 구경을 하였다.
여름에 가끔 수박을 사 가지고 오시면 큰 그릇에 수박과 설탕, 사이다 등을 넣어 섞은 일명 "수박화채" 라는걸 만들어 먹기도 하고, 겨울이면 찐빵이나 만두,군고구마,찹쌀떡,영덕대게,해삼,멍게 등을 사 오셨다.
또한 지나가는 장삿꾼이 호객을 하면 불러서 자주 사 주셨는데 특히 겨울이면 할머니께서 해삼을 좋아하신다며 자주 사 오셨다.
아버진 우리 남매들을 한번도 때리신 적이 없었다.
반대로 어머니께는 무지무지하게 많이 맞았다.
혹시 어머니께서 우리들을 때리는 장면을 아버지께 들키게 되면 아버진 화를 내시며 "아이들을 왜 때리면서 가르치느냐?"고 어머니께 야단을 치셨다.
그러나 그 다음날은 아버지가 안계실 때를 틈타 어머니께 어김없이 전날 저축해둔 맷감을 다 맞았다.
어떨땐 너무 많이 맞아서 "혹시 계모가 아닌가?" 라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하여튼 아버지는 인자하신 면도 많고 성격이 급하신 면도 많았다.
난 어릴때 부터 우리 집안에서 분란이 일어나는걸 많이 보았다.
아버진 할아버지,할머니,어머니와 각각 다투신 적이 많았는데 모든 화근은 삼촌 때문이었다.
삼촌은 원래 직업군인으로서 그당시 계급은 중위였다.
춘천,원주 등지의 일선부대에 있을때 사령관의 부관으로 있었는데 한번씩 휴가를 나올때 마다 옆구리에 권총을 차고 찦차를 타고 거창하게 운전병까지 대동하여 우리집에 나타났다.
그럴때 마다 우리집에는 잔치가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마당에서 참숯에다 고기를 굽고, 어머닌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난 술도가(양조장)에 가서 약주를 받아 오는 한편 기생들이 장구를 울러메고 우리집에 도착하면 연회가 시작되는데 그렇게 1박2일을 삼촌은 동네친구들 다 불러서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향응을 즐겼다.
당시에 아주 귀한 전축(오디오)도 가져왔는데 일제 LP판으로 마루에서 서양춤을 추다가 또 장구가락에 맞춰 민요도 부르고 하여튼 동서양 버젼을 번갈아 가며 신나게 노는걸 보았다.
그럴때 마다 할머닌 기분좋은 표정이셨지만 아버지,어머니께선 별로 좋지 않은 안색을 보이셨다.
그런식으로 잘 나가던 삼촌이 드디어 사고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삼촌이 우리집에서 빚보증을 서도록 하여 큰돈을 빌려 가 춘천에서 요리집을 차렸는데 얼마못가 경험 미숙으로 폭삭 망해 버렸다.
그길로 삼촌은 도망가서 도망병 신세가 되었고 우리집은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도망병 신세인 삼촌을 겨우 아버지가 수습하여 불명예 제대라도 되게끔 해 주었는데 얼마후 삼촌은 살길이 막막해지자 오리떼 마냥 가족들을 이끌고 우리집에 나타나서 얹혀 살기 시작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굉장히 화를 내시고 있었는데 고함소리와 함께 삼촌이 마루에 걸터앉아 마~악 물을 마시려는 찰나에 물그릇을 발로차서 물그릇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삼촌의 입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할머닌 "내가 죄인이다" 며 가슴을 치고 어머닌 "어머님은 왜 작은 아들을 감싸기만 하여 집안을 이 모양으로 만드시느냐?"고 할머니께 원망을 하고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는데 난 그런 광경을 보면서 "삼촌이 무언가 크게 일을 저질렀구나!" 라고 직감하였다.
그런후 우리집의 부동산이 많이 처분되었고 아버진 평생 그빚을 갚으셔야 했다.
어느해 연말에 아버진 보너스도 두둑히 나와 기분이 좋으실 것임에도 불구하고
월급과 함께 모두 농협부채의 원리금 상환으로 나가버려 상당히 우울한 모습으로 잔뜩 술에 취해 집에 나타나셨다.
그리고는 삼촌이 사가지고 온 전축판을 마당에 던져 모조리 부셔 버렸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쯤 아버진 궁리끝에 부업으로 선산 동부동 비봉산 자락밑에 집과 땅을 별도로 구입하셔서 양계장을 차리셨다.
할아버지에게 관리를 맡기고 삼촌도 거기서 열심히 일 하라고 이른바 일거리를 하나 구해준 셈이지만 삼촌은 틈만 나면 닭을 잡아 술이나 마시고 놀다가 끝내 어떤 중화요리집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다니기까지 하였다.
아버진 미워서 삼촌을 우리집에서 쫓아 내 버렸다.
그길로 삼촌은 대구 원대동으로 가서 리어카에 채소를 실어다 팔며 판자집에서 상당히 곤궁하게 지내다가 또 아버지께 와서 마지막이라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버진 단 한명 뿐인 형제라서 그러셨는지 아니면 할머니의 성화에 못이기셨는지 또 돈을 빌려서 주셨다.
그돈으로 삼촌은 시계방을 차린다며 돌아다니다가 어느 시계방 주인에게 인수할 뜻을 비췄다.
그리고 삼촌은 당분간 시계수리 기술을 익혀야겠다며 들락거렸는데 나갈땐 주인 몰래 시계를 하나씩 갖고 나가 팔아 버렸다.
보다못한 시계방 주인은 경찰에 사기죄로 고소하였고 삼촌은 구속되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숙모가 우리집으로 "주연사망 급래(急來)"라고 전보를 보냈다.
아버진 부랴부랴 장례를 치르려고 제집 할아버지를 모시고 대구에 가셨는데 삼촌이 죽은게 아니라 구속 되었다는게 아닌가?
아버진 숙모에게 "사람이 죽었다면 시체가 있을게 아닌가? 당장 송장 내놔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셨다.
결국 또 구속된걸 해결하느라 상당히 돈을 쓰셨다.
이래저래 아버진 매일 술로 세월을 달래시게 되었다.
내가 선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계성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을때 아버진 나를 다시 대구의 중앙초등학교 6학년에 편입시켜 주셨다.
그때 또 막대한 빚을 내어 삼촌에게 다방과 인쇄소를 차려 주면서 "이번이 도와 주는게 마지막 이다. 수입이 생기면 이자를 꼬박꼬박 갚을것과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 학비를 대어주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아버진 출장차 대구에 오실때 마다 삼촌을 만나 경영상태를 점검도 하시면서 개인적인 절약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셨다.
예를들어 "담배도 필터가 달린것은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고객을 대할때 꺼내고 필터가 없는 싼것은 왼쪽 주머니에 넣어 혼자 있을때 피우라"고 하셨다.
그러나 삼촌은 처음 몇달간은 착실한 척 흉내를 내었으나 얼마못가 본색을 드러내며 방탕한 생활에 빠져 들었다.
매일같이 다방마담과 함께 캬바레로 춤이나 추러 다니면서 주색잡기에만 열중하니 다방은 영업이 부진한데다가 그마져 종업원들끼리 짜고 수입의 상당부분을 가로채기에 급급했으니 몇달후 파산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길로 삼촌은 또 어디론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어머니께선 보건소에 결근계를 내고 대구로 오셔서 다방을 정리하였다.
그때 다방을 폐업하고난 후의 방석같은 비품들이 몇십년 동안 우리집 다락방에 쳐박혀 있는걸 보았다.
마지막으로 삼촌을 믿었다가 우리집은 오히려 빚을 더 안게 되고 말았다.
아버지께선 날이 갈수록 술을 더 자주 드셨다.
아버진 몸이 좋지않아 일찍 퇴근하시는 날은 나 더러 가끔 안마를 해 달라고 하셨는데 그때마다 어깨,팔,다리에 모두 뼈만 만져지는것 같아 안타까웠다.
아버지 친구분들 중에 퉁퉁하게 배가 나온 분들을 보면 상당히 부러웠었다.
삼촌은 그후 얼마간 우리집에 나타나지도 않고 어렵게 지내다가 나중에 북한공작원의 청와대습격 "김신조"사건후 정부에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자 졸지에 예비군 중대장직을 맡게 되면서 형편이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버릇 개 못준다"고 형편이 좋아지자 또 다시 주지육림에 빠져 놀면서 도박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다가 어느 단골식당의 주인과 눈이 맞아 자주 외박을 하니 툭하면 숙모와 부부싸움을 하다가 급기야 숙모가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야반도주 하고 말았다.
그후 삼촌은 아예 그 주인과 전세를 얻어 살림을 차렸고 그때 딸도 하나 두었는데 그얘가 바로 "은주"이고 은주
의 엄마가 지금의 명곡동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는 작은숙모님 이다.
삼촌은 한동안 그런대로 잘 살았으나 도박을 계속하다가 경찰에 적발되어 어느날 구속되기에 이르렀고 공무원 신분인 예비군 중대장직도 박탈 당했다.
그리고 난 삼촌이란 사람이 예금통장을 가지고 있는걸 못봤다.
항상 지갑에 현금을 두둑히 넣어 가지고 다니며 싱글벙글 하면서 팍팍 쓰고 다니다가 지갑에 돈이 떨어지면 우울한 표정을 짓거나 신경질을 내었다.
그리고 사촌동생들을 공부는 시키지 않고 초등학교만 졸업시키고 모두 공장에 내 보내었다.
삼촌은 부모로서는 빵점인 사람이지만 난 다행히 아버지,어머니를 잘 만나 그토록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를 대학교까지 졸업시켜 주신 덕분으로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아도 된것 같다.
반면 지금 사촌동생들은 하나같이 다 어렵게 살고 있는데 필경 이변이 없는한 그 자식들에게도 가난이 대물림 될것이다.
또 삼촌은 사촌동생들이 어린나이에 공장에 나가 벌어오는 월급을 다달이 본인이 챙겨 가져갔고 그대신 용돈이라며 쥐꼬리만큼 주었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말년엔 작은숙모께서 운영하는 식당일이나 거들면서 용돈을 얻어쓰며 어렵게 살아가다 그당시 우리집에 자형이 죽고나서 누나 혼자 벽돌공장 일을 하기가 힘겨워지게 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선산집에 와서 일을 도우며 몇년간 지냈다.
그리고 자신의 과오에 대한 벌을 받았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듬해 삼촌도 불과 55세의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죽었는데 그래도 죽기 보름전에 부산으로 가서 큰숙모님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죽었다고 한다.
삼촌은 죽었지만 삼촌이 남기고 간 우리 집안의 부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남았고 우리집과의 길고 긴 악연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땐 아버지께서 출장차 대구에 오시면 언제나 내 자취방에 들리셔서 외식과 함께 영화구경을 시켜 주셨다.
가끔 성적표도 확인 하셨는데 어느날 성적이 갑자기 떨어졌을떈 " 네가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난 무슨 기대를 가지고 사느냐?"고 하며 우시곤 하였다.
그럴땐 나도 그만 눈물이 왈칵 쏱아져 "아버지 정말 열심히 공부하여 다음번엔 반드시 성적이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용서를 빌었다.
우리 가족은 한번도 여행 같은걸 가 본적이 없다.
단순히 먹고 살기에도 바쁜 그 시절의 환경도 그랬지만 간단한 소풍조차도 가 본 기억이 없다.
중학교 2학년때쯤 봄방학때 고향의 친구들과 선산 일선교 다리밑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아버지도 직원들과 야유회를 나오셨다가 나를 만나 같이 카메라 사진을 한장 찍었다.
그게 내가 철들고 나서 아버지와 유일하게 찍은 사진 한장 이었다.
그리고 직장일로 바쁘셨는지 내가 대구에서 입학식을 하거나 졸업식을 할때도 한번도 오신 적이 없었다.
물론 군대에 있을때도 면회 오신적이 없다.
하긴 내가 군에 있을땐 이미 다리를 다치셔서 거동이 힘들었다.
내가 고2때쯤 아버지께선 원래 우리가족이 살았던 동부동 집을 팔아 일부 빚 청산을 하고 죽장동의 농장을 만평가량 사서 새집을 지어 이사를 하였다.
그집은 동네에서도 떨어진 외딴집이라 몇년동안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밤마다 남포불을 켜고 살았다.
보다못한 내가 군에 입대 하기전에 밧데리를 구입하여 형광등을 달아놓고 갔는데 그때 식구들은 "전기불이 들어오니 살것 같다"고 하였다.
농장에는 포도나무가 2천그루, 복숭아나무 약간, 논.밭 5천평, 뽕나무밭 3천평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역시 농사일이란 눈만뜨면 일거리가 늘려 있었다.
가족 모두가 농장에 매달려 일해야 했는데 특히 뽕나무로 하는 양잠일은 아주 바빠 막판에 고치가 형성될때쯤 이면 주야로 일군이 20명씩 매달려야 할 정도로 바빳지만 아버지께선 풀도 한포기 뽑지 않으셨다.
그러나 농협에 다니신 관계로 생산계획을 세우거나 농장일의 순서에 대한 이론에는 해박 하셔서 내가 겨울방학 때나 군에서 휴가를 나올때는 다음 한해의 수확과 매출에 대한 계획을 도표까지 만들어 상세히 말씀하셨지만 한번도 계획대로 소출을 올린 적은 없었다.
난 당시 대구에서 줄곧 학교를 다니느라 그다지 농사일을 거들지 못했으나 누나와 어머니께서는 엄청난 고생을 하셨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진 농협의 상무 자리를 그만 두시고 "농협감사" 선거에 나서셨다.
그런데 선거운동 기간중에 공교롭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날이 구정 3일전 이었는데 장례식때 교동 산소에서 운구할때는 눈이 엄청나게 쌓여 짚신을 신고가니 발이 푹푹 빠져 애를 먹었다.
그리고 장례기간 중에도 아버진 선거운동으로 바쁘셔서 내가 맏상주 역할을 맡아 문상객 맞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여 아버진 그 선거에서 퇴직금은 물론 할아버지의 부의금까지 톡톡 털어 선거자금으로 쓰셨건만 낙선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가정형편도 어려웠는데 아버지의 마지막 희망이 무너져 버리고 그나마 얼마남지 않은 퇴직금도 다 날려 버려 한동안 망연자실 하신채 날마다 술로 마음을 달래시곤 하셨다.
그러다가 어느날 선산 읍내에서 술을 드시고 귀가길에 방천뚝으로 걸어 오시다가 넘어져서 다리에 금이 갔다.
시골이라 정형외과도 없어 그냥저냥 치료하다 보니 점점 더 심해지셨다.
처음엔 내가 자전거 뒤에 태워드려 읍내로 모시고 가곤 했는데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더 다리를 못쓰시다가 몇년후엔 방안에만 계시게 되었다.
내가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할때 아버지께선 "3년후 네가 제대를 할때 쯤이면 농장의 소득도 많이 올려 남은 대학교 2년을 쉽게 마칠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희망적인 말씀을 하셨지만 막상 제대를 하고 집에 오니 오히려
집안형편은 훨씬 더 어려워져 있었다.
난 군대에 있을때도 휴가를 나오면 내내 농장일만 하다가 귀대했다.
특히 8월쯤 나오면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라서 매일같이 따서 팔기에 바빳다.
해질무렵 시작하여 캄캄해지기 전까지 따면 포도가 산더미 같이 쌓였다.
일단 저녘을 먹고 다시 포도를 등급별로 나누는 선별작업을 시작한다.
저녘메뉴는 항상 밭에서 솎은 열무와 나무로 불을 때서 가마솥에서 지은 보리밥과 불때고 남은 숯불에 끓인 된장에다 고추장을 넣고 비벼먹는 열무비빔밥이
였는데 그맛은 지금까지도 잊을수가 없다.
아마 지금까지 내가 먹어 본 음식중에는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고 생각된다.
제대를 하고 오니 아버지께선 그동안에 너무나 돈이 궁하셔서 그랬는지 교동 先山에 딸린 산지기밭 2천평을 단돈 2백만원에 팔아 버리셨다.
그런데 매수자에게 등기를 넘기려고 보니 그 산이 나의 할아버지와 육촌 상태형의 할아버지 두분의 공동명의로 등기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선 대구까지 택시를 대절하여 상태형을 찾아가 "그산은 원래가 우리 선조의 산으로 전해져 내려 왔으므로 명의를 넘겨주라"고 부탁을 하셨는데 상태형은 그럴때 마다 "해 드리겠다"고 몇번이나 약속을 해 놓고도 내가 인감도장을 받으러 가면 끝내 해주지 않아 나와 심하게 싸운적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상태형과 협의를 하니 공동지분을 요구하는 속셈을 드러내기에 1/3을 공동등기 해주고 겨우 등기이전 문제를 해결하였다 .
나머지 2/3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뒤 였으므로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상속되었는데 후일 우리형제 뿐만이 아니라 사촌동생들까지 모두 상속대상이 되면 골치아플것 같아 내가 1990년도에 모든 사람들의 도장을 받아 내 명의로 상속을 받아 놓았다.
난 교동의 先山은 예로부터 장손에게 전해져 오는것 이므로 당연히 내 명의로 해 놓을 권리가 있다고 본다.
그 산은 원래 6030평 규모였으나 아버지께서 2천평을 팔아 버리셨으니 현재 4030평 규모로 되어 있다.
옛부터 전해져 오는 마을이름은 "용동골"이라 하는데 각 묘소의 위치가 족보책에도 나와 있으나 간단히 설명하자면, 능선을 넘은 별도의 아랫자락에 나를 기준으로 4대 선조이신 증조부(김영기:金永基)님의 묘가 있고,이어서 능선을 타고 내려오며 맨 윗자리가 6대 선조 이신 현조부(김대집:金大集),그 다음이 현조모 두분(서산 유씨,밀양 박씨), 그 다음이 증조모(여강 이씨)님의 묘와 그 밑에 아주 작은 묘가 하나 있는데 어릴적 죽은 막내동생 상욱이의 묘이고,그 다음이 조부(김진용:金鎭龍~좌측),조모(김옹종:金翁宗~우측)님의 묘가 나란히 있고, 그아래에 아버지(김성연:金性淵~좌측),어머니(김정태:金貞泰~우측)의 묘가 있는데 맨 아래 삼촌 (김주연:金珠淵~좌측)과 숙모(김순연:金順連~우측)의 묘도 있다.
5대 선조인 고조부님의 묘는 현재로서 확인불가한 상태라고 한다.
원래 삼촌이 사망했을때 숙모가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자"고 했는데 내가 "화장후 뼈라도 우리산에 묻어 주자"고 하여 묘를 쓰게 되었지만, 그후 사촌동생들은 10년이 지나도 한번도 삼촌묘소에 참배도 하지 않고 벌초 한번 한적이 없었다.
물론 숙모도 온 적이 없었는데 작은숙모 만이 추석때 한번씩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그래서 묘를 쓰게한걸 후회 했었는데 그후 숙모가 사망 했을때 사촌 동생들이 또 삼촌옆에 묘소를 쓰자고 하기에 "난 절대 안된다"고 했더니 그녀석들이 "향후 반드시 벌초를 할테니 쓰게 해달라"고 사정사정 하기에 허락해 주었다.
그후 매년 벌초를 잘 하더니만 그녀석들도 꾀가 생겼는지 몇년 전부터 번갈가며 하자고 하여 지금은 짝수 년도엔 내가,홀수 년도엔 사촌들이 하고 있다.
교동 先山은 2005년도부터 "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되어 자연녹지로 되는 바람에 향후 그 산은 묘지로서의 여건이 좀 어려울 수 있으므로 기회가 닿으면 팔고 다른 산을 구하여 납골당을 만들 생각이다.
만약 내가 다른 산을 구하여 "납골당"을 만들어 놓는다면 지용이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그 산은 절대 팔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교동산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처분이 되지 않고 나의 사후에 구미시에서 강제로 편입을 하거나 필시 팔아야만 하는 사정이 생기게 된다면 지용이는 반드시 3천평 규모의 다른 산을 구입하여 근사한 납골당을 지어서 후대에 전해야 할 것이다.
그때가서 산을 팔때는 6촌 상태형님과 공동명의(내가 3/2,상태형님1/3)로 되어 있으니 6촌형님의 형수 및 아들,딸 등과 상의해야 할것이다.
그경우 지용이는 만에 하나라도 선산(先山)을 팔고나서 "일반적인 납골당이나 절간 같은데 조상들의 유골을 보관하고 그돈을 다른데 투자 하는일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유념하기 바란다.
선산(先山)이란 일종의 재산같은 개념을 가지고 보면 안되는 것이고 우리가문의 족적과 같은것 으로써 장손이 맡아서 향후 자손대대로 물려 주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지켜 주기 바란다.
내가 제대를 하고 오니 아버지께선 건강이 더 나빠지셧고 또 술도 매일같이 드시다시피 하여 거의 알콜중독 상태일 정도가 되셨다.
하긴 내가 군대에 있을때도 휴가를 나와 포도를 따서 팔고 남은 잔여물 들을 모아 내 키만한 단지에 포도주를 담궈 놓고 다음 겨울 휴가때는 한잔 할 수 있을것으로 기대했지만, 막상 그 다음 휴가때 와 보면 아버지가 다 잡숫고 한방울도 없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아버지는 술에 취해 어머니와 다투시다가 아버지는 홧김에 쪽마루 유리문을 다 깨 버리셨다.
방문은 전통 한지로 발라 놓았으니 바깥 유리문이 없으면 방안은 시베리아 벌판같이 춥게 된다.
난 임시방편으로 비료포대를 잘라서 유리 대신에 끼워 넣었더니 한결 나았다.
그리고 아버지께 부탁을 드렸다.
앞으로는 술을 끊으시라고....그리하여 약 3개월은 술을 드시지 않았지만 그 후엔 또 술을 드시기 시작했다.
내가 복학한 이듬해 77년 10월경 기아자동차에 취직이 확정되어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더니 아주 기뻐 하셨다.
그리고 내게 부탁을 하실게 있다고 했다.
"동생 상국이가 대학교도 못 들어가고 재수를 하다가 이제 겨우 전문대학 이라도 합격하였으니 2년간 학비를 부담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난 "제가 책임 지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그로부터 상국이에게 2년간 하숙비와 등록금을 대주어 무난히 졸업시켰다.
또한 그무렵 시집간 누나가 한번씩 집에 와서 자형과 같이 못살겠다고 하소연 했다.
당시 농장일도 시원찮고 하니 아버지는 그 땅의 나무를 다 뽑아버리고 벽돌공장을 차리자고 하셨는데 아버지께서는 자본이 없으시므로 누나에게 "노서방(자형)과 함께 와서 해 보라"고 권유하셨다.
다행히 땅속 10미터 까지 양질의 모래로 되어 있고 건축붐이 한창일때 였으므로 여건과 전망이 밝다고 보았다.
우선 필요한게 당시는 그땅이 상대농지로 되어 있으니 공장용지로 전용허가를 받아야만 했는데 당시로서는 전용허가를 받기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자형의 형님이 중앙정보부 사람을 통하게 해 주어 내가 건설부를 수차례 들락거린 결과 1년만에 겨우 허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어렵사리 벽돌공장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윤이 남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누나는 힘든일이 생길때 마다 간혹 내가 서울에서 회사에 다닐때 선산집에 가면 "난 이제 더 이상 못하겠으니 장남인 네가 하고 내가 투자한 돈이나 내놔라!" 면서 불평을 했다.
그럴때 마다 누나와 심하게 다투었는데 "우리집은 언제 돈걱정 좀 안하고 편히 사는 날이 올런가?"싶은 생각에 젖어 서울로 가는 동안 내내 울적하였다.
아버지는 지속적으로 술만 드시다가 드디어 당뇨병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당시엔 차도 없어 택시를 대절하여 대구의 병원에 가서 검진 한번 받는것도 너무 힘들고 경비도 많이 들었다.
나중에 병세가 너무 심하신것 같아 경대병원에 입원도 시켜 드렸지만 임시방편일뿐 별 차도가 없으셨다.
아버지께서 경대병원에 입원해 계실때 공교롭게도 자형이 교통사고로 죽어 그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지만 아버지의 병실에 가서 차마 자형이 죽었다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이미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것 처름 아버지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듯 했다.
나중에는 술을 드려도 못 잡숫고 담배도 피우시질 못했다.
아버지께선 젊으실적엔 당시 필터가 달린 최고급 담배만 피우셨다.
그것도 반쯤 피우다가 마당에 버리시면 할머니는 "좀 더 피우다 버리지..."하시면서 아까워했다.
그러나 아버진 말년에 집안에만 계실때 용돈이 없어 필터도 없는 "새마을"이란제일 싼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그것도 반쯤 피우다가 끄고 보관했다가 다시 피우실 정도로 아껴서 피우셨다.
술도 청주 같은 고급 술만 드시고 안주는 전복초밥 같은 고급안주를 잡수셨지만 말년엔 제일 값싼 소주 한병을 사서 안주도 없이 깡소주로 아끼면서 한잔씩 드셨다.
그런 광경이 난 안타깝게 보였으나 누나나 동생들은 그저 아버지를 피하고 어머닌 술 잡숫는게 못마땅하여 핀잔만 주었다.
한번은 군대 있을때 휴가를 나오면서 월급을 모아 새로나온 "드라이 진" 이라는 고급술을 한병 사 가지고 와서 아버지가 저녁을 드실때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시면서 한잔 드시더니 "참 맛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어머닌 옆에서 "왜 해로운 술을 사왔느냐" 면서 못마땅해 하셨다.
물론 나도 술이 아버지께 해로운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오래 사시지도 못할건데 맛있는 술이라도 한잔 대접 해 드리는게 도리일것 같아서 사 드렸다.
나중에 아버지의 병세가 아주 심해 지셨을때 어머닌 "차라리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게 당신 자신도 편할것 같다" 고 말씀하셨다.
아버진 그렇게 말년에 비참하게 사시다가 지용이가 엄마 뱃속에 있을때 향년 57세의 짧은 일기로 인생을 마감 하셨다.
때는 1981년 음력 3월28일(양력 5월2일) 이었다.
난 그때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임종을 지켜 드리진 못했다.
아버진 결국 삼촌 때문에 고생고생 하시다 돌아 가신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더 깊은 원인은 "아버지의 의지가 약하셨기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진 직장에 다니실때도 종종 친구중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선뜻 빌려 주셨다.
그럴때마다 어머니께선 "못받을게 뻔한데 왜 빌려 주느냐?"고 핀잔을 주셨지만차후 그 친구가 또 찾아오면 또 빌려 주셨다.
우리집에 거지가 오면 반드시 뭐라도 주어서 보내라고 하셨다.
그 정도로 인정이 많으셨다고 해야할지, 마음이 약하셨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런 성품이기에 삼촌에게 몇번씩이나 큰돈을 주신 것이다.
나 같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동생 상국이가 이글을 보면 서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나 같으면 상국이에게 그냥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난 주더라도 반드시 정확한 판단을 하고 돈을 줄것이다.
그런 경우엔 나의 자식이라도 마찬가지 이다.
속담에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란 말처름 이미 글러먹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면 "물에 빠진놈 구하려다가 같이 죽는꼴"이 되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부탁을 어머니께서도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누누히 하셨다.
다행히도 현재 내 동생들은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서 내가 같이 빠져 죽을 일은 없을것 같다만....
하지만 난 요즈음도 가끔 아버지가 그립다.
만약 건강하게 살아 계신다면 손자들을 아주 귀여워하시며 여생을 편안히 보내실텐데...그런 생각이 떠오를때 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그려 진다.
그러나 어찌하랴!
지나간 시절이 무심하고 또 이미 흘러 가 버린 세월이 무상할 뿐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도 26년이 지났다.
지용이가 태어나든 해에 돌아가셨으니 지용이의 나이만큼 세월이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난 해가 갈수록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더 새롭다.
지금은 벽에 기대어 계신 모습 만이라도 보고싶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자식이 클때는 못느끼지만 후일 자신도 자식을 낳아 키워보면 그때 안다"고 했는데 그말이 맞는 말인것 같다.
지금 내가 자식들을 어느정도 키워놓고 보니 이제야 그때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잘 알것 같다.
말년에 병들고 돈도 없어 궁핍하게 지내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나마 어머니와 함께 편히 잘 지내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린다.
그러나 지용이나 한별이는 걱정마라.
나는 건강하게 잘 살것이고 또 너희들에게 민폐를 끼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손자들이 성인이 될때까지 잘 도와주며 말년을 보낼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어머니는 경북 상주가 고향이고 아버지와 같은 1925년생 소띠 이시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재산도 많았고 또 일제시대에 관직에 계셨기 때문에 비교적형편이 넉넉하여 어머니를 서울대부설 간호학교까지 보내 주셨다고 한다.
1945년 4월1일, 어머니께서 21세때 간호사 면허증을 취득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니 생모는 사망하고 계모가 들어 오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계모와 같이 살기가 싫어 김천도립병원에 취직하여 외과수술실에 근무 하시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매로 아버지를 만나 선산으로 시집을 오셨다.
막상 결혼을 하고보니 어머니는 처녀때 생각했던 이상과 현실이 너무나 거리가 멀어 심신양면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매일같이 시어머니인 할머니에게 꾸중과 잔소리를 들어야 했고 음식이나 바느질도 서툴러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일관하며 지내시느라 고생이 많았고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리셨다고 한다.
내가 어릴적 부터 어머니는 평소 자신은 소띠라서 "고생을 많이 해야 할 팔자"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기억된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여러가지가 있다.
무척 개구장이였던 나는 옷이 튿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머니는 항상 재봉틀로 수선을 해 주시거나 헌옷을 다시 리폼하여 잘 만들어 주셨다.
그덕분에 친구들이 사 입은 엉성한 옷하고는 달리 좋은 옷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 부터 벽에 "가갸거겨"를 붙여 놓고 한글을 외우게 해 주신 덕분에 난 한글을 다 깨우치고 나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학교를 파하면 맨 먼저 해야 되는것은 어머니께 항상 그날 수업받은 내용 전부를 시간대별로 설명 드리는 것이다.
만약 더듬거리거나 하면 "수업시간에 딴생각 하고 있었다"고 혼나야 했으므로 항상 수업시간에는 정신차려 듣고 과정보고(?)도 착실히 해야만 했다.
특히 학년이 올라갈수록 집에서 행하는 모든 과정이 철저하도록 시키셨다.
집에 오면 맨 먼저 청소부터 해야 하는데 우선 마당을 빗자루로 깨끗이 쓸고 마루와 모든 방을 걸레로 닦은후 얼굴과 손발을 씻고 숙제를 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가 놀 수 있었다.
그리고 놀다가도 반드시 저녘 식사시간에 맞추어 들어와야지 만약 늦으면 "밥상 다 치우고 없다. 굶어라"며 야단을 치셨다.
어머니는 매사를 철저히 가르치셨고 조금만 어긋나면 매도 무지하게 때리셨다.
너무 많이 맞을때는 "혹시 계모가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어머니께서도 조용한 밤엔 간혹 옛날 얘기를 들려 주셨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얘기가 하나 있다.
***시대는 정확치 않으나 고려시대쯤 으로서 그당시에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부모가 일정 나이가 되면 산에 토굴 같은걸 지어서 그곳에 음식을 남겨주고 기거하다가 돌아가시면 그 자리에 묘를 만드는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느 효심 깊은 아들이 산에 고려장을 만들지 않고 집에서만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가 그만 관가에 들키고 말았다.
당연히 국법을 어겼으므로 관가에 끌려가 죄를 물어야 할 형편에 놓였는데 어머니께서는 자신 때문에 아들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막혀 관청에선처를 호소하였다.
한편 그때 조정에서는 아주 곤란한 일이 발생 하였는데 사연은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무지무지하게 큰 동물을 한마리 보냈는데 과연 그 동물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고려의 조정에서 재어보라고 하였다.
만약 그 동물의 무게를 정확히 재지 못하면 고려국의 공주를 중국으로 시집보내야 한다고 사신이 통고하였다.
어마어마하게 큰 그 동물은 당시 중국에서 교역을 통해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코끼리 였는데 고려국 조정에서는 처음 보는 동물일 뿐더러 그렇게 큰 동물을 어떤 방법으로 무게를 재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신료들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조정내 에서는 코끼리의 무게를 잴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동물이라고 해봤자 황소 정도 였는데 아주 굵은 막대에 거꾸로 매달아 사람들이 들어서 저울추로 수평을 맞추어 재는 전통적인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몇톤씩 나가는 코끼리를 매달수도 없고 들 수도 없으므로 고심을 거듭 하다가 급기야 왕의 칙령으로 전국에 방을 붙이게 되었다.
"만약 이 동물의 무게를 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백성은 무조건 왕의 특권으로 소원을 하나씩 들어준다"고 하였다.
이때 관가에 끌려 온 효자아들이 그 방을 보고 "자기가 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으로 압송되어 갔는데 왕은 "방법을 알아내면 소원대로 해 주겠으나 만약 알아내지 못하면 극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효자아들은 우선 아주 큰 통나무를 사각으로 길게 그리고 똑같은 사이즈로 여러개 자른뒤 뗏목처름 묶어서 왕궁앞에 있는 깊은 연못에 띄웠다.
그리고는 코끼리를 그위에 올라가게 하였더니 뗏목이 수면아래로 내려갔다.
뗏목의 단면중 수면에 닿은 부분에 선을 그어서 표시를 하고는 코끼리를 내려오게 하였다.
그다음엔 100근짜리 추를 하나씩 뗏목에 얹어 코끼리가 올라갔을때 뗏목의 단면에 표시된 부분까지 계속 얹었다.
그리하여 코끼리가 올라갔을때 표시된 부분까지 추를 얹어 그 갯수를 세어 보니 정확히 코끼리의 무게를 잴 수 있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임금님은 손뼉을 치며 "오호라! 바로 그 방법이로다"하면서 무척 기뻐하였다.
이어서 "그대가 공주를 살렸도다. 소원이 무엇이냐?" 하였더니 효자아들은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면서 "어머니를 고려장에서 해방될 수 있게끔 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장은 엄연히 국법이었므로 고심끝에 임금님은 효자아들의 집 앞마당에 고려장을 지어도 되도록 허락 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아들은 매일 어머니에게 음식을 드려 살렸는데 나중에는 조정에서논의끝에 아예 고려장 제도 자체를 폐지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와같은 얘기들을 간간히 해 주셨다.
내가 결혼후 너희 엄마와 서울에서 살다가 다시 삼성생명에 입사하면서 처음 대구로 내려 왔을때 내가 한번은 심하게 감기몸살을 앓은 적이 있었다.
약을 먹고 조리를 하였지만 아무것도 먹을수가 없고 점점 더 몸이 아파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일요일날 어머니를 오시라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간호사 출신이므로 감기정도에 대한 처방지식은 있어 내게 항생제 주사나 링거를 놓고 약도 조제해 주셔서 일주일만에 나은 적이 있었다.
그처름 어머니께선 한평생 아버지가 편찮으실때 마다 주사를 놓고 간호를 잘 해 주셨고 가족중 누가 아프거나 하면 곧잘 치료를 해 주셨다.
88년도 막내동생 혜정이가 죽고나서 90년도 무렵부터 병이 나셨는데 처음엔 가벼운 우울증 증세로 시작되었다.
우울증으로 나도 한때 고생한 적이 있지만 그건 정말 "무서운 병" 이란건 어머니를 통해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그 병은 처음에는 가벼운 내과적 이상증세만 느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적극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심각한 증세로 발전하여 아주 고생하게 되고 나중에는 전신의 기운이 다 빠지면서 일상생활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게 된다.
내과적인 병은 수술이라도 하여 낫든지 죽든지 간에 양단간 결판이 나지만 우울증은 시름시름 오랜 세월을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게끔 사람을 괴롭힌다.
게다가 환자 본인 뿐만이 아니라 그가족까지도 엄청난 고생을 겪어야 하는 정말 암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다.
어머니께서는 2001년도경 정신이 있으실때 자서전을 남기신게 있어서 옮겨 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의 자서전***********************************************************************************
그시절에는 내가 태어나기전 1950년 6월25일 이른바 "6.25 사변"이 터졌다.
어느날 갑자기 포성이 들리면서 전쟁이 터지자 어머니는 누나를 업은채 짐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선산군 행정구역 이었던 낙동강을 누나를 업고 나룻배로 건너 가족들보다 먼저 30리길을 걸어 해평면에 당도하니 마침 미리 피난을 가고 없는 빈집이 있어서 들렀는데 나중에 그 집에서 가족들을 다시 만나 며칠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10분 이내에 도망가지 않으면 폭격하겠다"는 방송이 나와 일행 20명 가량은 혼비백산하여 뿔뿔히 흩어져 다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할아버지께서 길가의 큰 나무에다가 모이는 장소를 가리키는 팻말을 달아 놓으셔서 가족 모두가 다시 모일 수 있었다.
그당시를 회고하자면 선산군 산동면까지 20리를 거쳐 장천면까지 30리 길을 합하면 도합 50리(20Km에 해당함)을 걸어서 갔는데 발가락이 불어 터지고 배는 고프고 그야말로 괴롭고 정처없는 피난길 이었다.
겨우겨우 이름도 모르는 냇가에 당도하니 어느듯 해는 지고 캄캄한 밤이 되었
는데 먹을게 없어 피로와 허기에 지칠대로 지쳤지만 별도리 없이 노숙으로 하루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근처 부락을 찾아가니 마침 빈집이 있어서 쌀과 된장,간장 등을 훔쳐 강변으로 돌와왔다.
막상 식사준비를 하려니 솥도 냄비도 없어 빈깡통을 주워 냄비를 대신하고 돌멩이를 세워서 밥을 짓고 젓가락도 없어 나무가지를 꺾어 겨우 식사준비를 마쳤는데 어른과 어린아이 순으로 식사를 하니 어머니와 숙모는 겨우 허기만 면할 정도로 밖에 먹질 못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10리를 가면 또 15리를 가라 하고 무작정 국군이 시키는 대로 산도 넘고 물도 건너 가다 보면 해가 저물어 밤이 되었다.
홑이불로 천막을 치고 좁은 공간에서 자자니 때는 7월이라 무덥기만한 견디기 어려운 피난살이가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마침 간호사 면허증을 품안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일자리가 있나 해서 부락으로 나가 보았다.
나가보니 CID라는 방첩부대 사무소가 있었는데 이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무조건 잡아 창고에 가두어 놓고 한사람씩 불러내어 문초를 하고 심할 경우 말촉으로 사정없이 때리는것을 보았다.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 그 광경을 보고 되돌아갈까? 생각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부락에서 이리저리 해메다가 "민사처리" 라는 간판을 발견하였다.
그곳에서 간호사 면허증을 보여주니 마침 피난민 수용소에서 의료반을 구성하고 있기에 거기에 배속되어 일할 수 있었는데 그덕분에 어느정도 배고픔은 해소하고 잠자리도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어머닌 간호학을 배울때 서울대병원에서 실습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어느 의사를 그곳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 의사에게 야전병원 같은곳에 취직자리를 부탁하니 자기 동기생중에 육군병원에 소위가 한명이 있다고 하면서 소개 해 주겠다고 했는데 피난길에 가족들을 그냥 두고 막상 가지는 못하셨다고 한다.
몇달후 UN군의 멕아더 장군에 의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국군이 다시 북상을 하게 되면서 전세는 역전 되어 집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경북 영천에서 군용차로 대구로 와 며칠 쉬다가 겨우 마차를 한대 구하여 어른들은 마차에 타고 어머니와 숙모는 말고삐를 붙잡고 선산까지 100리 길을 하루종일 밥도 굶은채 걸어오니 집은 이미 잿더미로 변하였고 살림살이나 가재 도구들도 모두 불타고 없었다.
다행히 그당시 할아버지께서 군청에 근무하신 관계로 관사를 빌려 수년간은 살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와 삼촌은 군인으로 선산중학교 광장에서 생활을 하셨다.
증조 할머니께서는 피난길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는지 돌아오신 후 한달만에 사망 하셨다.
그 당시는 어른이 돌아가시면 3년간을 빈소를 차려 놓았다.
처음 1년간은 아침,저녘으로 매일 진지상을 제사상 위에 올려놓고 한참 있다가 식사를 하고, 2년째부터는 초하루와 보름날 즉, 1달에 두번씩 차리는데 처음 1년을 소상,그 다음을 대상 이라고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소상이니 대상이니 하는건 전혀 모르고 그저 밥은 전기밥솥으로 옷은 세탁기로 해결하며 물도 길러 갈 필요없이 24시간 수도꼭지에서 찬물,더운물이 나오니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어머닌 피난에서 돌아온 후 식량이 부족하여 미국에서 원조받은 석유냄새 나는 알랑미 쌀로 밥을 지어먹고 입을 옷도 변변히 없어 추운 겨울에 내복도 입지 못한 채 관사 우물에서 물을 길어 부엌까지 옮기려면 손등은 갈라져 피가나서 상당히 고통스러웠다고 하셨다.
빨래는 도랑물에서 하는데 비누가 없어 콩을 까고 난 껍질을 태워 생긴 재에 물을 부어 짜낸 잿물과 쌀등겨 가루를 섞어 만든 엉성한 비누로 빨래를 하자니 세탁은 잘되지 않고 갈라진 손등이나 손바닥만 동시에 쓰라리고 아팠다.
신은 검정 고무신인데 자주 찢어지는 불량품이지만 그것도 아껴 신는다고 고추따러 밭에 갈때나 시내를 벗어나면 바구니에 넣고 맨발로 논두렁을 다녔다.
가을이면 3,4일 간격으로 숙모와 함께 20키로씩 고추를 따서 머리에 이고 집까지 오면 목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게 정말 힘들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의 친정이 궁굼해서 선산서 상주까지 가셨는데 그때는 주먹밥 2개를 싸서 90리 길을 도보로 고개를 넘어 상주에 당도하면 해가 기울어 갈 무렵이 되었다.
친정에서 약 20일 정도를 쉬고 다시 걸어서 선산으로 되돌아 왔는데 늦은 가을이면 오가는 사람도 별로없어 무서움에 굉장히 마음 조리면서 되돌아 오셨다.
피난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951년경 내가 태중에서 7개월쯤 되었을때 어머니는 크게 놀라신 적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천지가 안보이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하여 그자리에서 그만 주저 앉고 말았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군청관사 우물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후로 식욕도 없어 잘 먹지도 못하니 빈혈로 인해 수시로 눈앞이 캄캄해져서 일하다가 그자리에서 주저 앉기도 하고,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해 못견딜 지경이 되었으나 가족들중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대로 있다가는 도저히 해산할 용기가 없어서 상주 외갓집으로 겨우 여비만 마련해서 갔는데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과 다리에 심한 부종을 보고서 심히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친정에서 한달정도 몸조리를 하고 나니 하늘이 도우셨는지 나를 정상분만 했다고 하신다.
그후 다시 한달정도 산후 몸조리를 하고 있자니 할머니께서 어머니를 데리러 오셨기에 같이 선산으로 되돌아 왔다.
그후 군청의 요청으로 관사는 비워주고 동부동 동사무소 근처로 방2칸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그집은 매일 사람들이 들끓고 하여 도저히 안정이 되질 않아 노상동에 있는 절에 문간방을 하나 얻어 기거하게 되었다.
거기서 며칠후 낮잠을 자고 눈을 떠보니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고 별빛만 번쩍번쩍하여 억지로 일어나 창문가로 다가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데 절에
사는 어린 상제가 어머니곁에 다가오는것 같아 무심코 손짓을 하고는 쓰러져 버렸다.
스님 두분이 올라와서 동부동 집으로 연락을 하는 한편 손발을 주무르고 비비고 하였는데 그동안 온가족이 올라오고 마침 의사도 같이 와서 가슴에 강심제 주사를 놔 주어 그 덕분에 되살아 나셨다.
그런후 업혀서 동부동 집으로 되돌아왔지만 도저히 집에는 있을수가 없어 또
다시 이문동에 문간방을 하나 빌려 잠시 기거 하였는데 식사라고는 꽁보리밥에 반찬도 없이 먹고 지냈다.
그러다가 얼마후 외갓집에서 외삼촌이 선산에 출장차 왔다가 어머니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셔서 다시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3개월정도 있다가 다시 선산으로 왔는데 또 가슴이 답답하여 김천 도립병원에 가서 X-레이를 찍어 보니 심장이 보통사람의 3~4배는 될 정도로 부어 있었다고 한다.
그럴때마다 외갓집으로 가서 안정을 취하고 회복되면 다시 선산으로 오고 그러기를 10여년간 지속 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삼촌이 여러번 우리 집안을 말아먹은 과정을 기록 하셨으나 이미 아버지의 기억편에서 설명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리고 내 막내동생 상욱이가 태어난 후 3살때 죽은 과정을 기록 하셨기에 다시 옮겨 본다.)
그당시 상욱이는 모기에 물려 뇌염에 걸렸었다.
매일같이 고열에 시달리므로 어머니는 할머니 몰래 항생제 주사를 놓았으나 좀처름 열이 내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관심 하시기에 걱정이 되어서 상주 외갓집에 데리고 가려고 했더니 할머니는 "그까짓 병은 깨벌래 두마리만 삶아 먹이면 되는데 병원까지 데리고 가느냐?"며 노발대발 하였다고 한다.
촌노인의 무지의 소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상주에 가려고 겨우 차비만 마련하여 상욱이를 안고 버스에 오르니 대만원이라 더워 전신에 땀을 흘리며 통로에 끼여 서 있는데 한 청년이 자리를 양보 해주어 겨우 앉아 갈수 있었다.
상주의 홍익병원에 가서 매일같이 치료를 하였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선산으로 돌아온 후 곧 사망하고 말았다.
상욱이는 인물도 좋고 성격도 착해서 어머니는 평생 잊을수가 없다고 하시며 늘 가슴에 묻고 살아오셨다.
그리고 막내동생 혜정이도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고 사라졌다.
평생 잊을수 없는 한이 되어 지금의 병을 얻게 되신 것이다.
******************************************************(어머니의 자서전끝)
어머니는 보건소에 근무를 하시면서도 내가 고2때 아버지께서 죽장동에 농장을 구입하여 이사를 갔으므로 그때문에 농사일도 많이 하시게 되었다.
보건소의 담당업무는 모자보건(母子保健) 이었다.
따라서 버스도 없는 시골을 걸어서 가가호호 방문하며 하루종일 출장을 다니 고 또 퇴근하면 바로 저녘 준비를 하고 설겆이를 마치면 밤중에도 밭에서 풀을 메고 또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고...또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은 하루종일 밭에서 일을 하시고...그렇게 힘들게 지내셨다.
그중에서도 봄,가을 누에를 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누에는 처음에 싸리나무로 엮은 "잠박"이라고 하는 것에 눕혀서 시작하는데 그 갯수가 천개씩 되니 일이 어마어마 하였다.
누에를 치기 전에는 개울가에 가서 깨끗이 씻고 소독을 한 뒤에 뽕잎을 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잘게 썰어서 주지만 점점 커가면서 나중에는 인부 10명이 열심히 뽕잎을 따다 주어도 누에들이 먹어 치우는 속도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소독도 소홀히 하면 안되기 때문에 어머니는 퇴근 하시자마자 약통을 둘러메고 약을 치는데 "잠실"이라는 교실만한 방을 3군데나 돌며 열심히 약을 뿌리셨다.
누에가 뽕잎을 다 먹고 나면 나중에 "고치"라고 하는 하얀 장구모양의 것이 형성되고 고치의 주위에 묻은 허드레 실을 물레에 돌려 일일이 제거해 주어야 납품이 가능한데 그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 "고치"의 실을 풀어서 씰크천을 만들고 마지막에 고치안에 남는 것이 바로
"뻔데기"인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여 농협에 납품을 하면 돈은 전부 아버지가 가져 가시고 어머니는 한푼도 만져 보지 못하셨다고 한다.
물론 시대가 다르기는 하지만 나의 어머니에 비하면 너희들 엄마는 나에게 매우 호강하며 산 편이라고 생각된다.
어머니께서 그러한 고생을 하시는 한편에선 "우리집을 빚더미에 앉혀 놓은 삼촌이란 자는 마침 예비군이 창설되어 중대장직을 하면서 형편이 좋아지자 첩을 얻어 개폼을 잡고 있는걸 보니 무척 속이 쓰라리다"고 몇번이고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드디어 숙모가 어린 사촌동생 둘을 남겨두고 부산으로 도망 가 버리자 이번에는 할머니가 쌩뚱맞게스리 "손자들(사촌동생들) 밥해 주는게 걱정된다"며 대구로 가 버리셨다.
결국 어머니는 농사일과 직장일 두가지를 다 할 수가 없어 부득불 보건소를 그만 두시게 되었다.
농사일에 전념하였지만 아버지의 성화에 견디기 힘들고 그때 혜정이가 간호학교에 입학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다시 구미에 있는 산부인과에 취직을 하셨다.
어머니는 그당시 "59세의 나이로 직장생활을 하자니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많았으나 돈을 벌어 혜정이를 공부 시킨다는 일념으로 참고 견디었지만 혜정이는 3년후 졸업과 동시에 죽고 말았으니 그 허무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회고 하셨다.
그 여파로 심적인 병을 얻게 되었고 이후로 점점 더 심해지셨다.
처음에는 무슨 신체적인 병이 있나 싶어 여러군데의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를 받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점점 더 고통을 호소하시기에 내가 서울의 삼성종합병원에 두달간 입원을 시켜드려 조금 호전이 되셨는데 정밀검사를 한 결과 내린 병명은 "극심한 정신적 결함에 의한 신체적인 반응"이란 것이었다.
그후 서울에 있는 상국이 집에서 통원치료와 입원치료를 수년간 반복했지만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2001년도 부터는 병원에서 줄곧 입원하시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상국이와 제수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동안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긴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처름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로 인하여 우리 형제간의 갈등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특히 너희들 숙모인 제수씨가 어머니를 서울에서 모시고 있다가 "대구로 모시고 가라"는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가 적절치 못하여 나에게 한동안 심하게 꾸중을 들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차라리 죽장동 집을 팔지 않고 그대로 계시면서 조금씩 농사일도 하면서 계속 몸을 움직이셨더라면 그런 정신적인 병까지 도달하지 않았을것 같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라는 화타 김영길씨의 책을 읽으면서 느꼈지만 어머니는 젊으셨을때 부터 정신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죽장동에서 농사일을 계속 하시면서 잘 견디셨던것 같다.
따라서 직장일이건,농사일이건 간에 거기에 몰두 해 있으면서 계속 몸을 움직이는 동안은 괜찮았는데 직장도 그만 두고 게다가 선산집까지 팔아버린후 하는 일 없이 "뒷방노인"이 되면서 부터 병을 얻으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게다가 어머니는 누구와 대화를 잘 하신다든지,운동을 즐기신다든지,이웃과 어울려 놀러를 가신다든지 하는것 과는 거리가 먼 내성적인 성격이시니 더 더욱 그랬으리라 짐작된다.
병원에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뵈올때 마다 눈물이 나고 괜시리 화도 났었다.
우리 집안의 과거사가 한심한 삼촌이란 사람 때문에 불행하였든,아버지께서 일찍이 병사 하신게된 원인이 되었든 간에 아무튼 "가난이 원수" 였을 것이다.
가난이 원인이 되어 자식들이 못배우거나 불행하게 자라게 되면 그 가난은 또 후대에 이어지게 될것이다.
그리하여 가난은 계속해서 대물림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대 누군가가 그 고리를 끊어야만 한다.
다행히 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대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고 또한 나의 노력을 보태어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부모의 명령이 가히 절대적이어서 형제 중에 한명만 잘못되어도 잘못된 장본인을 구하느라 그 집안의 가세가 급격히 몰락 해 버리는걸 종종 볼 수 있었다.
물론 현대는 그런 시대도 아니지만 내 동생들도 대부분 중산층 대열에서 잘 살고 있으니 우리 대에서 더이상 가난을 물려주진 않을것 같다.
지용이와 한별이는 너희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겪으신 역사와 또 그 과정에서 아빠가 겪게 되었던 지난날들을 잘 기억하여 앞으로 살아가는데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아무튼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자식들에게까지 가난이 대물림 되지 않고 이정도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그저 나를 잘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어머니께서는 1995년도부터 발병을 하셔서 2007년도 경북 의성 도리원의 제남병원에서 돌아가실때 까지 병원생활을 하셨으니 참으로 긴긴 세월을 병고에 시달리신 셈이다.
2007년도 새해 설을 앞두고 오랫만에 동생 상국이가 내려와 어머니를 뵙고난후 나에게 "어머니께서 폐렴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는 연락을 하였다.
급히 영대병원으로 후송시켜 열흘정도 치료한 결과 다행스럽게도 호전되어 다시 도리원 병원으로 모셔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83세로 연세가 많으시니 체력이 허약할대로 허약해져 점점 증세가 나빠져만 가는것 같았다.
그해 6월경에는 이미 나도 잘 못알아 보실 정도가 되시기에 돌아가시기 일주일전쯤 작은숙모와 연락이 닿아 같이 도리원병원으로 가 병문안을 드렸는데 그땐 작은숙모도 알아 보시지 못하고 엄마가 드리는 바나나 마져도 잘 드시질 못해 예감이 좋질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7월14일 토요일 누나와 금화가 병원을 다녀 오면서 "급히 병원으로 가 보라"고 하기에 엄마와 함께 가보니 이미 사경을 헤메고 계셨다.
이틑날은 동생 상국이에게 지용이와 함께 오라고 연락하여 가족 모두가 일요일 밤을 지새며 임종을 지켜드렸다.
그날밤은 넘기셨으나 다음날인 월요일 오후 6시40분에 숨을 거두셨다.
때는 2007년 7월16일(음력 6월3일) 83세의 일기로 어머니의 한많은 인생이 막을 내리시게 되었다.
장례는 방촌동에 있는 강남병원에서 치렀고 장지는 역시 교동 先山에 모셨다.
묘지일을 고향친구 이정배군이 할머니때도 묘소일을 도와 주었는데 어머니때도 헌신적으로 도와주어 참으로 고맙게 느꼈다.
그런데 돌아가신 다음날이 하필이면 휴일(제헌절)이어서 성당에 연락이 닿지않아 장례미사를 드리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래서 우리아파트 앞 무태성당에서 연도미사를 10일간 드리는 한편 집에서 매일 묵주기도를 드리며 고통속에 돌아가신 어머니 (본명:엘리사벳)의 영혼을 위로해 드렸다.
연도미사를 마치고 대학교 동창모임이 있던날 밤에 집으로 와 어머니의 영정을 뵈오니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대성통곡을 하며 한참이나 울었다.
장례식때 상주의 외갓집에는 전화번호가 변경되어 연락을 못했는데 출상 다음날 서울의 막내 외삼촌과 연락이 닿아 외숙모와 함께 삼오제날 선산으로 오셔서 같이 묘소에 참배를 드리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2001년도 논공병원으로 오시고 나서 자꾸만 집으로 가게해 달라고 하셨을때 난 "이제 집으로 못 가신다"고 짜증을 내었고 또 2005년도 도리원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도 병원을 옮기게 해 달라고 하셨을때도 난 "안됩니다,
이병원에 그냥 계셔야 합니다"라면서 짜증을 내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름 오랜 투병생활을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화가나서 한 말이었지만 그게 지금와서
생각하니 내내 후회가 된다.
난 자라면서 그다지 크게 어머니께 속을 섞혀 드린적은 없다고 기억된다.
항상 착한 아들이 되려고 노력했었고 어머니께서도 그런 장남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많이 의지하면서 사셨다.
나에겐 그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시골태생이 도시로 나가 일류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대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을 다녀 이만큼이라도 자식들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병만 아니었더라면 말년에 걱정없이 행복하게 수를 다 하셨을텐데 그런 몹쓸
병에 걸려 말년을 오랜세월 병고에 시달리게 되신게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묘지는 아버지 옆에 합장으로 나란히 모셨다.
때가 여름이라 장마가 지면 묘소옆의 경사진면이 걱정이 되었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
이제는 육신의 짐을 모두 벗어버리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 가셔서 편히 쉬고 계시리라...
<지용이와 한별이에 대한 기억>
지용이는 내가 엄마와 결혼한지 만 1년만인 1981년 10월13일 대전 을지병원에서 태어났다.
내가 이름을 지었는데 한자로 획을 12개씩 각각 맞추어서 지었다.
원래는 일선(一善)김씨 문중에 세대별로 돌림자가 있었지만 근대에 와서는 돌림자도 없어지는것 같아 내가 심사숙고한 끝에 지었다.
"슬기로울 지(智)"자는 가운데에 "큰대(大)"자가 들어가 있고, "솟을 용(湧)"자는 가운데에 "밭전(田)"자가 들어가 있으므로 대전(大田)에서 태어났다는 뜻이기도한 동시에 대전은 엄마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그리고 각각 12획 인데 그뜻은 "12달과 12달동안, 1년 365일 내내 즉, 평생동안 슬기롭게 살되 남보다 쳐지지 말고 솟아오르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처음 병원에서 태어났을때 선산에서 어머니가 와 보시고 "그놈 참 밉생이다"라고 하셨을때 너희 엄마는 경상도말 뜻을 몰라 "못 생겼다"는 뜻(실제는 참 잘 생겼다는 뜻임)으로 듣고 울었다고 하는데 내가 가서 해명 해주었다.
하긴 내가 봐도 얼굴이 원체 새까맣길래 엄마가 임신했을때 입덧을 할때마다
"활명수"란 새카만 물약을 시도때도 없이 마셨는데 그걸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엄마가 퇴원하게 되자 지용이를 안고 서울로 열차를 타고 되돌아 왔는데 오는 동안 내내 열차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그래서 그런지 갓난 아기때 울때마다 흔들어 주기만 하면 울음을 그쳤다.
나중엔 아예 흔들의자를 하나 사서 의자다리에 끈을 매달아 T.V를 볼때나 책을 볼때나 늘 흔들어 주고 자다가도 울면 무조건 흔들어 주었는데 하여튼 흔들어 주기만 하면 울지 않았다.
몇달동안 얼마나 흔들어 주었는지 보행기로 갈아탈 무렵에는 흔들의자의 모서리가 다 부서지고 말았다.
한번 울면 악을 쓰고 우는지라 나와 엄마가 골이 아플지경 이었므로 얼른 흔들어서라도 울음을 그치게 해야만 했다
그당시는 2층집의 외풍이 심한 단독주택에 살았기 때문에 겨울에 목욕을 시키고 나서 꺼내면 추워서 발발 떨며 울었다.
그래서 마침 내가 총각때 쓰던 전기난로가 있어 목욕이 끝나고 물에서 꺼낼때 그걸 얼른 비춰주면 따뜻한걸
느끼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좋아했었다.
우풍이 너무 심해 겨울에는 하는 수 없이 방안에 연탄난로를 피워 놓았는데, 나중에 기어다닐 무렵이 되자 연탄난로 뚜껑에 자꾸 손을 대려해서 내가 늘 신경이 씌였다.
그래서 한번은 지용이 손을 잡고 뚜껑에 살짝 손을 대었더니 "앗 뜨거라"하는 표정으로 얼른 손을 빼내더니 그후로 다시는 연탄난로 곁에 가지 않았다.
당시는 카메라도 국산은 없고 일제 밖에 없었는데 시내에 가서 거금 10만원(그당시 내월급의 1/3가량 되었다)을 주고 일제 올림프스 카메라를 1대 사서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다.
엄마가 앨범을 만들어 커가는 과정을 사진으로 정리해 주었다.
그러나 그 카메라는 나중에 대구로 이사간 후 추석때 고향에 다녀오니 도둑이 들어 훔쳐 가 버렸다.
이때까지 살면서 도둑이라곤 그때 한번 맞아 보았다.
지용이가 아직 백일도 되기전 갓난아기때 였는데 한번은 엄마와 심하게 다툰적이 있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지용이가 내 팔위에서 울고 있고 엄마는 온데간데 없었다.
대전으로 전화 해 봐도 오지 않았다고 하여 걱정을 하다가 선산에 있는 동생 금화를 불러 지용이를 맡기고 회사로 출근을 하였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그 다음날 밤중에 문 흔드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엄마가 현관앞에 서 있었다.
엄마는 "아이 생각이 나서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 되돌아 왔다"고 하였는데 그런 네 엄마의 모습이 안쓰러워 금방 나도 마음을 풀었다.
얼마후엔 백일잔치를 하였고 무럭무럭 탈없이 건강하게 잘 자랐다.
81년도 그해 겨울이 끝나고 82년도 봄이 오고 조금씩 기어다닐 무렵이 되자 자꾸만 방에서 부엌으로 기어 나가 갑자기 아이가 보이지 않는 일이 생겨 늘 긴장이 되었다.
여름이었는데 생각끝에 엄마가 빨래를 할때는 큰 프라스틱 물통속에 물을 조금 붓고 넣어두면 혼자서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일이 끝날때 까지 잘 놀았다.
한번은 엄마가 빨래를 하고 나는 집안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방에 있던 아이가 보이지 않자 깜짝놀라 찾아보니 지용이는 그사이 바깥 베란다로 나가 난간의 쇠파이프를 붓잡고 머리를 빼꼼히 내밀며 아래를 조심스레 보고 있었다.
놀라서 내가 얼른 데리고 방에 들어왔지만 지용이는 조심성이 좀 있어 보였다.
좀더 커서 보행기를 타고 다닐 무렵에는 방안을 종횡무진으로 다니며 항상 활달하게 잘 놀았다.
퇴근후 내가 가끔 시내쪽으로 나갈때 마다 종합과일 젤리를 자주 사다 주었는데 그걸 아주 맛있게 잘 받아 먹었다.
그때 먹던 과일젤리 빈병은 지금도 우리집에서 나사못을 넣어두는 용도로 쓰고 있는데 그 병을 볼때마다 지용이가 젤리를 맛있게 먹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러나 한별이는 어릴때 과일젤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집은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여 아이를 키울집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82년도 년말에 마침 기회가 닿아 삼성생명에 입사를 하게 되면서 대구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16평짜리 방 3개인 아파트에 살게 되었는데 그때는 지용이가 이미 세살쯤 되어 이방저방 뛰어 다니면서 아주 좋아했다.
그아파트에도 놀이터가 있었으므로 지용이는 눈만 뜨면 매일 나가서 신나게 뛰어 다니며 놀고 집에 오면 레고같은 장남감에 몰두하며 잘 놀았다.
좀더 커서는 장난감 만들기를 좋아하여 용돈만 주면 문방구에서 재료를 사다가 비행기,자동차,탱크,로봇트 등을 자주 만들었다.
한번은 수두가 걸려 온몸에 물집이 생겨 울기만 하였는데 아무리 달래도 안되기에 자동차 만드는 재료를 사다 주었더니 재료가 다 떨어질때 까지 한번도 울지않고 오직 만드는데만 열중하며 잘 노는걸 보고 신기해 했다.
83년도 처음 대구에서의 생활은 그리 길지가 않았다.
8개월후인 83년 9월에 부산으로 첫 영업소장 발령을 받아 다시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84년도 3월24일 한별이가 부산 하단동의 개인병원에서 태어났다.
난 첫째가 아들이라 다음엔 딸이 태어났으면 하고 바랬는데 소원대로 되어 무척 기뻣다.
지용이는 내가 한자로 이름을 지었으나 한별이는 한자로 지으려 해도 여자라서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한글로 짓자고 제안하여 궁리끝에 "한별" 이라고 지었다.
"대전"을 "한밭"이라고 하는것 처름 "한"이란 우리말로 "크다,높다"는 뜻이므로 "하늘의 별처름 높이 크게 살아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다.
한별이도 지용이와 마찬가지로 갓난아기 때는 얼굴이 새카맣고 볼폼 없었다.
그러나 점점 커가면서 귀여운 얼굴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마음이 놓였다.
지용이는 동생이 태어나자 귀여움을 받지 못할까봐 자주 칭얼 대다가 한별이가 기어다닐 무렵이 되자 곧잘 둘이서 어울려 놀았다.
특히 한별이는 우유병을 물려주면 항상 다 먹고 나서 위로 휙 집어 던졌다.
따라서 우유병은 언제나 방 한쪽 구석에 나뒹굴어져 있었다.
어느날 회사에 출근하니 설계사 한사람이 자기집에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며 한마리 주길래 집에 가져 왔더니 둘다 처음 보는 동물이라 그런지 보자마자 아주 무서워 했다.
그리고 둘이서 놀다가 한별이는 고양이에게 물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안되겠다 싶어 그후 선산 고향집에 갈때 가져가서 풀어 놓았더니 평소 고향집에 그 많던 쥐들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한별이가 아장아장 걸어다닐 무렵에는 근처 에덴공원으로 또는 멀리 해운대로 한번씩 다녔지만 그 당시는 자가용도 없어 버스타고 다니려면 보따리도 많고 하여 자주 다니지는 못했다.
그리고 난 회사에서 회의나 회식이 잦아 일찍 퇴근하지도 못했고 토요일 마져 오후까지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하루종일 잠이나 자며 쉬었다.
그러다가 84년도에 다시 대구로 발령을 받아 이사를 갔는데 아파트는 전세를 얻으러 다녀봤지만 도저히 구할수 없어 효목동의 단독주택에서 잠시 살았다.
그집에서 한별이는 돌 잔치를 하였는데 그날 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은 한별이에게 회사 직원들이 많이와 금반지를 끼워주면서 축하 해 주었다.
물론 대전에서 외할머니와 이모부,이모등도 와 축하 해 주었다.
한별이는 어릴때 얼굴이 작고 "귀염상"이라 누구라도 보면 칭찬을 많이 하였다.
어느날 다람쥐를 한마리 사서 마당의 틀안에 가두어 놓고 키웠는데 둘다 틈만나면 마당으로 가 다람쥐를 톡톡 건드리며 놀았다.
그러나 그 다람쥐는 비도 맞고 하는 바람에 얼마 못가 죽고 말았다.
또 하루는 한별이가 현관 계단에서 내려 오다가 턱을 찧었다.
급히 인근병원에 가서 치료 하였으나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어서 금방 나았다.
그러나 그 단독주택은 바로 옆에 기차도 지나가고 또 2층에 사는 아저씨는 술만 마셨다 하면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올라가는등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집도 좋지않아 7개월 정도 살다가 송현동에 신축한 주공아파트 16평으로 옮겼다.
그 아파트는 앞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였는데 그덕분에 그해 겨울은 편안하고 따뜻하게 잘 지냈다.
그무렵 부터 한별이는 그림을 그리는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별이가 조용하다 싶으면 항상 혼자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갈 무렵에는 만화도 스스로 얘기를 지어가며 곧잘 그리곤 했다.
그러나 송현 주공아파트도 6개월 정도 살다가 졸지에 울산저점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다시 울산의 유곡동으로 이사를 갔다.
울산에서는 지용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한창 노는 나이였으므로 장난이 심했다.
어느날은 슈퍼맨 흉내를 낸답시고 담벼락 위에서 그대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얼굴을 심하게 갈아 버렸다.
그정도로 지용이는 개구장이 였다.
거기서는 엄마의 친구 "아름이네"를 만나 두가족이 가끔 어울렸다.
그집 식구들과 같이 식사를 하거나 멀리 설악산까지 콘도를 빌려 장거리 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울산에서도 1년반 정도 있다가 87년도에 다시 대구로 발령을 받았다.
나 혼자 먼저 대구로 와서 내당동에 있는 삼익아파트 19평짜리 전세를 겨우겨우 구해놓고 토요일날 울산으로 갔더니 한별이가 현관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오며 "아빠 많이 보고 싶었어"하면서 반겨 주었다.
다시 대구로 이사를 한후 그해 3월에 지용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한별이는 유치원에 다녔다.
그때 처음으로 자가용도 샀는데 프레스토 1300CC짜리 수동식 이었다.
그날 우리 가족은 시승식을 한다며 앞산으로 드라이브를 갔는데 아이들은 뒷좌석에서 노래를 불러가며 무척 좋아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어느날 아침 일찍 차를 닦으러 나가니 어느새 지용이가 목도리를 두른채 걸레를 하나 들고 같이 닦겠다고 나왔길래 난 "너무 추우서 감기 걸리겠다. 아빠 혼자 할테니 들어가라"고 했지만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차가 생기니 자연히 나들이도 많아져 여기저기 놀이터에 자주 다니게 되었다.
그즈음 한별이는 "레스토랑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근사한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기에 앞산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소원대로 해주었다.
또한 시내로 나가 동아양봉원 골목에 있는 돼지갈비집에도 데리고 갔는데 한번 먹어 보더니 맛있다 하기에 자주 데려가 춘천막국수와 함께 먹었다.
그땐 어려서 그런지 밥을 다 먹고 나면 둘다 식당안을 마구 뛰어다니기에 항상 주의를 주었다.
또한 삼익아파트 바로 건너편에 있는 마포 돼지갈비집에도 자주 갔었다.
그때부터 돼지갈비를 자주 먹어서인지 나중에 커서도 계속 돼지갈비만 찾았다.
그당시만 해도 집에 에어컨이 없어 여름 한더위 때는 무척 더웠다.
어느 여름날 퇴근을 하니 둘다 마루밑에 드러누운 강아지 마냥 축 늘어져서 "더워 죽겠어요, 아빠 퇴근 하시기만 기다렸어요!"라고 합창을 하길래 차에 태워서 에어컨을 켜고 이리저리 일부러 드라이브를 다니기도 했다.
열대야가 있는날은 난 자기전에 물을 뒤집어 쓰고 닦지도 않은채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잤는데 그렇게 하면 기화열 때문에 아주 시원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런데 더위를 많이 타는 한별이도 그걸 보고 그대로 따라 했었다.
지용이는 장난이 심해 내게 자주 혼나기도 했는데 한별이는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오빠가 야단 맞을땐 얼른 책상앞에 가서 공부하는척 하였다.
그리고 엄마는 간혹 너희 둘을 데리고 대전 외갓집엘 다녀오곤 했는데 어느 토요일 미리 회사에서 연락은 받았지만 집에 오니 방안이 텅 비어 있는걸 보니 왠지 마음이 허전 하였다.
방 한쪽 구석에 지용이가 미쳐 매지를 못하고 떠났는지 허리띠가 하나 놓여 있었고 화장실에는 한별이의 칫솔도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게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지용이와 한별이가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순간적으로 아주 이상 야릇한 생각이 스쳐갔다.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려운데...무언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난것 같은...그런 상상이 스쳐갔다.
난 집 근처에서 혼자 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만약에 지용이와 한별이가 사고라도 나서 이대로 영영 볼 수 없게 된다면 난 방바닥에 놓여진 칫솔과 벨트를 보고 얼마나 가슴을 치며 울고 있을까?..."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
오늘 이순간도 마찬가지 이지만, 인간의 삶을 어찌 365일 매일 안전을 보장 받고 살 수 있겠는가?
아무리 조심하며 살아도 언제 어느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게 인간사가 아니던가?
따라서 항상 살아가는 동안 "오늘 하루하루를 가족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해주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다음날 저녘에 대구로 무사히 돌아오는 엄마와 너희들이 더 더욱 반가웠다.
후일 둘다 성장하여 대학생때 한별이가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을때도 지용이가 미국으로 떠났을때도 매번 연락할때 마다 "안전에 유의" 하라고 일러준건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이었다.
90년도 벽두가 되자 우리는 대구에서 다시 안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때까지 영업소장직만 계속 했었는데 안동에서 부터는 관리직인 업무과장으로 보직을 받았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도 생겼고 해서 새로 구입한 르망승용차를 타고 가족이 함께 여러곳을 놀러 다녔다.
인근의 안동댐,하회마을,청송 주왕산,영주 소백산을 거쳐 단양이나 월악산까지,봉화를 거쳐 불영계곡, 영덕을 거쳐 울진까지 때로는 강원도의 영월, 태백까지 여러곳을 두루두루 많이 다녔다.
특히 영덕이나 강구로 가면 먹거리도 다양하여 넓이가 60센티 이상되는 큰 대게도 먹어보고 여러군데 횟집에도 많이 다녔는데 엄마와 지용이는 회를 못먹어 동반 반찬인 "츠케다시"만 열심히 먹었지만 한별이는 회를 잘 먹었다.
그때는 삼성생명에서 매년 여름이면 휴양지를 정하여 휴가때 이용할 수 있었는데 그해 여름에는 월악산에 캠프를 정하여 계곡에서 하루밤 야영을 했다.
내가 밥을 짓는데 지용이가 어찌나 재빨리 왔다갔다 하면서 잘 거들어 주는지 "다 컷구나!"싶은 마음이 들면서 기특하게 여겨졌다.
그날밤 바로옆 계곡의 물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 잠이 잘 오지 않을 정도였는데 지용이는 하루종일 노느라 고단했는지 쿨쿨 잘도 자고 있었다.
한번은 회사의 운전기사가 낚시로 안동댐에서 대형 잉어를 잡았다며 내가 귀가하기 전에 우리가 사는 대일아파트에 두마리나 가져다 주었다.
집에 가니 목욕탕의 큰 양동이에 잉어를 담궈 놓았는데 잉어가 뻐끔뻐끔 벌리는 입과 눈을 보고 무서워서 아무도 목욕탕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나만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기에 난 집에와서 그 광경을 보고 한참이나 웃었다.
내가 잡아서 잉어찜을 해주니 그제서야 모두들 맛있게 잘 먹었다.
울진쪽으로 가다보면 후포 라는곳이 있었는데 전복죽으로 유명한 집이 있어 가끔 놀러 가는 길에 들러서 먹었다.
그러나 한별이 혼자 전복죽을 못먹어 오리지날 전복죽을 비켜 가더니 후일 커서는 전복죽이 입에 맞는지 자주 찾았다.
안동에서는 한별이가 서부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난 입학식 장면을 무비 카메라로 찍어 주었는데 한별이가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느라 작은키를 빼꼼히 내밀고 있기에 얼굴을 줌-인 하였더니 앞이빨이 한개 빠져 있었다.
지용이는 그당시 3학년 이었는데 나를 보기만 하면 여지없이 "아빠 백원만" 하고 졸랐다.
난 매일 200원씩 주었는데 한별이는 아껴쓰며 저축도 하고 그랬지만 지용이는 받자마자 금방 써버려 늘 한별이에게 빌려 달라고도 하고 나를 보면 또 달라고 하였는데 한별이도 빌려주지 않았고 나도 돈을 헤프게 쓰는 버릇이 생길까봐 주질 않았다.
가끔씩은 추가로 백원씩 주기도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 해 보면 "좀 더 자주 줄걸"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왜냐하면 나중에 커서 돈을 아껴 쓰는걸 보니 그때는 기우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어릴때부터 낭비하지 않도록 가르친 덕분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안동에서 그해 겨울에 년말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지용이와 한별이가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눈싸움을 하며 노는걸 비디오로 찍어주고 일요일에는 근처의 일직에 있는 강에 가서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탓다.
얼음판 위에서 지용이는 어느정도 걸음마를 떼는 반면 한별이는 뒤뚱뒤뚱 거리는게 위험해 보여 엄마가 내내 손을잡고 이리저리 다녔다.
새해 연휴때는 안동댐에 드라이브를 갔는데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다니다가 선착장에 있는 오리배를 보더니 한별이가 타 보자고 졸랐다.
그러나 난 바람도 많이 불고 좀 위험한 생각이 들어서 다음에 타자고 했더니 한별이는 실망을 하여 쓸쓸히 언덕을 올라가는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후 봄이 되었을때 배를 태워 주긴 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난 안전을 우선시 했기 때문인데, 하여튼 그 장면을
지금도 비디오로 보면 늘 마음이 짠하다.
하지만 나중에 대학생이 되었을땐 대부분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
모든것이 다 때가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 맞춰서 해 준것이다.
처음에는 너희들에게 휴대폰을 사주고 다음엔 디카, MP3, 노트북, 어학연수,여행을 시켜주었다.
그러다 보면 향후에는 다시 나의 손자들에게도 그런걸 차례대로 사 주어야 할런지 모르겠다만..하여튼 내가 능력이 닿는다면 다 해 줄것이다.
안동으로 간지 1년반 후에는 그곳의 추억을 뒤로 하고 다시 포항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91년 7월경 포항으로 또 이사를 갔다.
포항의 사택아파트는 북부해수욕장 근처여서 이삿짐을 다 옮기고 난 후 해수욕장내의 횟집으로 가 회를 주문 하였는데 우선 산낙지가 상위에 나왔다.
난생 처음 꼼지락거리는 산낙지를 보고 둘 다 무서워 하다가 한별이는 용감하게 젓가락으로 집더니 먹기 시작했지만 지용이는 끝내 먹지를 못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조카 병진이를 데리고 오셔서 가족 모두 구룡포로 구경을 갔는데 대보의 등대박물관과 해맞이 공원을 돌고 회를 시켜 먹는 한편 낚시도 하고 조개도 주우면서 즐거운 나들이를 했었다.
그후로도 어머니께서 그때처름 건강 하셨더라면 행복한 나날을 보내실 수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을 하면 애석하기 짝이 없다.
포항에서 살때는 인근의 강구,영해,후포,울진까지 나들이를 자주 했다.
아파트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기에 가끔 아침 등교길에 내가 차로 태워주려 하면 한별이는 반드시 "교문 못미쳐서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한별이는 "교문앞까지 가면 다른 아이들이 보기 때문에 창피해요"라고 하였는데 아마 한별이는 다른 아이들 처름 걸어서 학교에 가는게 보편타당 할것이라 시근있는 생각을 한것 같다.
포항과는 인연이 짧았는지 6개월만에 다시 대구로 발령을 받아 92년1월에 또 대구로 이사를 했다.
그때는 대구 월성동의 우방아파트를 처음으로 분양받아 새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사오고 첫눈이 내려서 집 운이 좋은것 같았다.
우방아파트 에서는 오래 살았다.
92년 1월에 입주하여 2003년 12월까지 살았으니 만12년을 살았던 정든 집 이었다.
지용이와 한별이는 거기에서 둘 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니 학창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깃든 동네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할머니도 그 집에서 오래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나 또한 40대의 황금기를 그 아파트에서 다 보낸 셈이다.
이사할 당시 지용이는 초등학교 4학년,한별이는 2학년 이었다.
그후 중학생이 될때까지 지용이는 한창 뛰어놀 시기였으므로 자주 여러가지 운동기구들을 사 달라고 했다.
한번은 야구클럽을 사 달라고 해서 사다 주었더니 인근의 달서공고 운동장에 가자고 하여 나보고 공을 던지라고 했다.
또 농구공을 사 달라고도 하고 스케이트 보드나 자전거도 사 달라고도 했다.
어느 일요일 내가 둘다 데리고 인근의 달서공고 운동장에 가서 달리기를 했는데 "400미터를 세바퀴 돌면 500원씩 주겠다"고 하였더니 지용이는 끝까지 달려 500원을 타 갔지만 한별이는 힘들었는지 중도에서 포기를 했었다.
며칠후 한번 더 달렸는데 이번에는 지용이가 중도에 포기를 하고 한별이는 지난번 포기한것이 약이 올랐는지 끝까지 달려서 500원을 타 갔다.
그만큼 한별이는 어릴때부터 애착심이 강한 기질이 있는걸 보았다.
한별이는 글짓기를 잘해서 상장도 여러번 타 왔다.
한번은 춘천의 소양감댐에 큰동서,처제가 살고 있어 엄마하고 같이 놀러 갔었는데, 그때 한별이는 새벽에 강아지와 함께 뛰어 놀았던 추억을 떠올려 나중에 글짓기 대회때 소재로 삼았는데 그게 대통령상까지 탈 정도로 훌륭한 글이었다.
상금으로 30만원을 받고 상품으로 손목시계를 타와 나에게 주었다.
또한 월성동에서 살 시절에는 매년 여름이면 거창의 안의계곡에 놀러 갔었다.
덕유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의 물이 수영하기에 적당한 수온이여서 커다란 매트형 보트도 가지고 가서 하루종일 신나게 물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그땐 한별이를 내 등위에 태우고 수영해도 될 정도로 체구가 작았을때 였다.
그집에서 둘 다 어릴땐 멀리 강원도 쪽으로 콘도를 정하여 여행도 자주 다니고 용인 에버렌드에도 몇번 갔었다.
지용이가 중학생이 되었을땐 신혼여행을 갔던 제주도에 가 보고 싶어 가족 모두가 콘도를 얻어서 3박4일간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그때 한라산은 휴식년이어서 올라 가 보지 못했다.
지용이가 중학교 3학년쯤 되면서 부터 슬슬 농뗑이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나 또한 직장을 삼성화재로 옮기면서 멀리 대전으로 거제도로 울산으로 혼자서 다니는 바람에 감시감독할 틈이 없어지게 되자 지용이가 공부에 소홀해 진 것 같았다.
한번은 지용이가 중학교때 하루 결석을 하고 친구와 같이 대전으로 뗑뗑이를 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상당히 화가 많이 났었다.
그날 저녁 앞산에 같이 올라가 정신이 들게끔 훈계를 하고 다음날은 내가 학창시절에 자취생활를 하던 초라한 집들을 보여 주면서 "지금의 좋은 환경과 부모에게 감사하라"고 타이르기도 했지만 지용이는 고교때 가서도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한번은 지용이가 고등학교 다닐때 생일날 외식을 시켜 줄 요랑으로 그날 거제도에서 집에 도착하자 마자 엄마와 한별이를 태우고 학원까지 찾아 갔었다.
그러나 지용이는 학원은 빼먹고 다른 곳으로 새 버린게 들통나서 그날 내게 심하게 빳따를 맞기도 했었다.
특히 가장 아찔했던 날은 지용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할때 눈까지 오던날 집에 와서 에스페로 승용차를 몰래 끌고 나간걸 아침에 일어나 알게 되었을때 였다.
그때 만약 인명사고라도 났었다면 지용이는 보험에 들지도 않았으므로 정말이지 집안이 풍지박산 날뻔 했었다.
지용이는 그날 제일 많이 맞았다.
하여튼 지용이는 군대 갈때 까지만 해도 내 가슴을 항상 불안하게 만들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괜찮다.
자신의 위치와 자신이 지금 무엇에 주력해야 하는지를 깨닫기만 한다면 행동은 저절로 따르게 마련인데 다행히도 지용이는 이제서야 철이 다 들은것 같다.
그러나 조금 더 일찍 고등학교때 부터 철이 들었다면 훨씬 더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지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삼촌같은 사람은 평생토록 철이 안든 사람이었는데.....
95년도 7월에는 삼성생명에서 내가 차장으로 승진을 하여 6개월간의 교육과정이 있었는데 그해 늦가을에 일본에도 2달 정도 체류하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하자 마자 성능좋은 비디오 카메라를 하나 사서 여행 가는곳 마다 촬영하여 필름을 집으로 보내 주었다.
난 그때 시간이 날때마다 전자제품 상가나 쇼핑센터에 들러 지용이와 한별이 선물을 하나씩 사 모으는게 낙이었다.
지금은 한국제품이 일제에 비하여 손색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제품의 품질을 더 선호 하였다.
그래서 이리저리 구경 다니다가 "이걸 사주면 아이들이 좋아하겠다"싶은 물건이 눈에 띄면 사 모았다.
당시에는 개인적으로 그냥 먹고 마시는 용돈은 최대한 절약해서 쓰고 가능한 한 선물을 많이 사서 주려고 생각했었다.
반대로 나중에 너희들이 성장하여 돈을 벌어서 나에게 여행을 시켜줄때가 온다면 그땐 선물보다 되도록 맛있는거나 먹고 마시면서 여행을 할것이다.
2003년 12월에는 12년간 살았던 월성동에서의 모든 세월을 뒤로 하고 미리 분양받아 놓은 효목동 태왕메트로시티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때쯤 지용이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하여 다시 대학교 2학년이 되었을때 전체 학부에서 1등을 하여 등록금 전액을 면제 받았다.
실로 오랫만에 기특하게 여겨져 장학금으로 한달간 인도여행을 보내 주었다.
그리고 지용이는 3학년 1학기를 마치더니 미국의 교환학생으로 가기 위해 서울에서 1년간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때 난 내심 토플점수를 획득하기가 어려울것이라 생각되었지만 의외로 그 이듬해 2월에 통과되었기에 또 한번 기특하게 여겨졌다.
한편으로 한별이는 2학년을 마치자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나겠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지용이와 한별이의 학비 그리고 어머니의 입원비와 우리집 생활비까지 합하면 한해 적어도 5천만원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쓰임새가 크게 늘어나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궁리를 거듭한 끝에 단품,대량의 판촉물 판매만이 해결책이라 여기고 CJ(제일제당)와 직거래 협상을 하여 물품을 준비하고 영업에 나섰다.
다행히 과거 삼성화재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선배 임원들이 동부화재,동양화재 등의 타 보험사에 가 있어 서울로,대전으로,부산으로 일일이 찾아 다니며 부탁을 하였다.
삼성화재에도 전국을 돌며 친분이 있는 지점장을 찾아 다녀면서 열심히 영업을 하러 다닌 결과 약 3만세트 정도를 판매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별정수익을 올리고 엄마가 운영하는 매장 수익도 괜찮은 편이어서 그럭저럭 모든 지출을 충당할 수 있었다.
2006년 2월경에는 다시 지금의 서변동 월드메르디앙 38평으로 이사를 했다.
이곳은 교통여건이 좋아 신천대로나 인터체인지도 바로 연결이 되고 또한 바로 옆에 함지산이 있고 뒤로는 팔공산이 둘러져 있으며 정면의 금호강과 더불어 그야말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동네라서 구입하였다.
여기에서 되도록 오래 살다가 나중에는 전원주택 이라도 지어서 이사가고 싶다.
2007년 6월 말경에는 한별이가 다시 휴학을 하고 1년간 일본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기에 수속을 밟아 동경으로 보내 주었다.
지용이는 이제 본인이 원하는 직장에 열심히 공부하여 취직을 할 것이고 한별이도 일본을 다녀오면 졸업을 할것이다.
나도 60세가 되면 모든 일을 접고 등산과 여행이나 싫컷 하면서 남은 여생을 즐기고 싶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보니 태어나서 부터 결혼전 까지가 인생의 제1편 이라면 결혼후 자식을 두면서 바쁘게 살았던 인생의 제2편도 막을 내리고 이제 서서히 인생의 제3편으로 접어드는 시점인것 같다.
나의 시대는 이렇게 석양을 향해 3편으로 가는데 반해 지용이와 한별이는 내가 너희들과 겪은 이글의 내용처름 인생의 2편을 향해 가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난 현재 부유 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중산층에서 지니는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러나 난 지금보다 옛날에 가난했던 시절 즉, 처음 지용이를 낳고 서울의 이층집 단칸방에서 살던 그시절과 한별이가 부산에서 태어나 아장아장 걷는걸 보며 살던 그시절이 훨씬 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었다고 생각된다.
다시말해 그때가 진한 설탕물 한사발 이었다고 비유한다면 시간이 갈수록 설탕물의 그릇은 점점 더 커져서 세수대야 만큼 되었지만 반대로 농도는 묽어져 싱겁게 되어버린것 같은...그런 느낌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행복은 설탕 몇 숟가락만큼 정해져 있는데 물질적인 물만
자꾸 쏟아부어 봤자 설탕물은 많아 질지 몰라도 농도는 엷어지게 되는...그런게 "행복지수"라는 것 아닐까?
결론적으로 그동안 살아오면서 물질이란게 "인간의 행복" 이란 면에서 어느정도의 "충분조건"은 되지만 "필요조건"은 되지 못한다는걸 느꼈다.
역시 정신적인 행복감을 잘 유지해야 참다운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으리라.
내가 기억하는 지용이와 한별이는 나와는 달리 어린시절 부터 가정형편이나 환경적으로 큰 굴곡없이 잘 자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부모의 입장에선 너희들이 자식으로서 큰 병고 없이 무럭무럭 성장 해 주어 감사하게 여긴다.
향후 너희들도 결혼을 하여 배우자를 만나고 또 자식을 두는 그때가 오면
부모가 너희들을 키워준 은공을 잊지말고 적어도 나 보다 더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