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벚꽃이 염문을 뿌리고 코로나의 긴 터널을 벗어난 거리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고즈넉한 옛 기와지붕들이 맞닿은 눈 덮인 화성행궁의 사진이 부르기에 달려갔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매표소 앞은 긴 줄로 북적인다. 화성행궁은 화성 유수부의 관아로 지어진 것임과 동시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릉원에 참배하기 위해 수원에 거동할 때 머무는 행궁으로 지어진 것이기도 하다. 봉수당은 처음에는 정남헌이라고 하였다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봉수당이라 하였다. 회갑연 진찬연을 거행하였다. 당시 회갑연을 연상케 하는 70가지의 음식과 42개의 상화가 모형으로 만들어져있다. 비록 모형이지만 단아하고 고운 자태의 혜경궁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당시 대전에서 펼쳐진 흥겨운 풍악 소리와 차별 없이 연회에 초청되었던 백성들의 즐거움도 풍성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아버지의 회갑을 생각해 봤다. 마당엔 높은 차일 이 쳐지고 넓은 멍석이 펼쳐졌다. 집 앞 텃밭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비닐로 막사를 둘렀다. 넓은 상을 여러 개 펼치니 손님맞이 식탁이 만들어졌다. 마당 멍석의 중심에 흔히 옛날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회갑연의 갖가지 음식이 진설되었다. 사진이 잘 나오도록 크기와 색상이 조화롭게 음식을 매만진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녘에 들에 나가신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부랴부랴 집으로 오셨다. 땀 범벅된 머리를 감고 보니 샴푸가 아닌 주방 세제 퐁퐁으로 머리를 감으신 것이다. 당시 나는 지금보다 철이 없어서인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시간 다툼을 해야 하는 농사일이 고단하셨을 텐데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이윽고 한복으로 갈아입고 회갑연의 백미인 음식상 앞에 앉으시고 자녀들과 친척들이 절을 올렸다. 특이한 것은 아버지 어머니 외에 홀로되신 큰어머니 당숙모 두 분이 상좌에 앉으시고 같은 색의 한복을 입으셨다. 일찍이 홀로 되신 두 분을 배려하신 것이다. 당시 큰어머니와 당숙모의 표정은 어렵게 살아오셔서인지 수줍고 슬픈 모습이었다. 앉아 있는 그 자리가 마냥 기쁘지만 않으셨나 생각이 들었다. 악기 팀과 전문 사회자가 초청되어 연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노오란 꽃무늬의 은박 입힌 한복을 입은 나는 분위기를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어색한 춤을 추었다. 덩달아 모든 이가 함께하는 춤마당이 되었다. 봉수당 진찬연의 70가지 음식은 없었지만 단연코 인기 있었고 지금도 잊히지 않는 맛이 하나 있는데 소머리를 삶고 적당한 건어물로 끓인 뜨거운 육수를 끓이고 잘 삶아진 국수에 고명으로 달걀 황·백지단, 당근 채, 마지막으로 쑥갓잎을 얹었던 잔치국수다. 계속 밀려드는 손님들로 텃밭의 비닐 막사엔 빈자리가 나지 않았다. 나이 어린 친척들과 조카들은 음식 나르기에 분주했다. 거나하게 흥이 나신 아버지는 손님상에 음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많이 쓰라고 당부하셨던 것이 생각난다. 축하금을 들고 오시는 분들께는 봉투를 확인하시고 정확하게 받은 돈의 배를 돌려주셨다. 봉수당 혜경궁의 진찬연의 모습과 비교할 수 없는 소박한 백성들의 회갑연이 당시 크나큰 잔치였고 즐거움이었다. 마을 전체의 축제였다.
회갑연을 치르고 불과 사 년 후에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후 어머니의 회갑은 조촐한 가족들의 식사로 대신했다. 세월이 흘러 봉수당 진찬연은 끝났지만, 정조의 효심은 그곳을 찾는 모든 이들의 교훈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