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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이제부터 영원까지,
산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
내 도움은 주님에게서 오리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다.
그분께서는 네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지키시는 그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신다 . . . .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네 오른쪽에 계시다.
낮에는 해도, 밤에는 달도 너를 해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모든 악에서 너를 지키시고 네 생명을 지키신다.
나거나 들거나 주님께서 너를 지키신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시편 121(120) 순례의 노래)
2018년 3월 17일 (토)
복자 구한선 성지, 복자 정찬문 성지, 순교자 윤봉문 요셉성지 (마산교구)
모진 매질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젊은 순교자를 모시고. .
복자 구한선 성지 (대산성당)
< 복자 구한선 성지 -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대산중앙로 183 >
순교복자 구한선 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른이 된 후 소촌[文山] 교우촌에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고성 통영 교우촌을 지나 거제도까지 전교 여정에 동행.
< 대산 무덤경당 제대 >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한 뒤, 타대오는 레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
그는 갖가지 문초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고 죽음 직전까지 간 뒤 석방되었지만
집에 돌아온 지 7일 만에 장독으로 인해 선종했습니다. 그때 나이는 23세.
순교한 뒤 그의 이마에는 '품(品)' 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하기리의 ‘신씨’들 묘소 한구석에 묻혔습니다.
< 대산 성지 희망의 동산 기념제단 >
모진 매질에도 어머니를 위해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하는 구한선 타대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2016년 10월 복자의 유해를 인근 대산 성당에 조성한 무덤 경당으로 이장하고
복자 구한선 타대오 순교성지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요한 12,24)
주님, 신부님을 도우며 전교에 힘쓰다 23세의 나이에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던
복자 구한선 타대오를 기억해 주소서. 아멘
무두묘라는 가슴 아픈 이야기로 전해지는 . .
복자 정찬문 성지 (사봉공소)
< 복자 정찬문 성지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987(사봉 공소)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중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순교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의 묘가 있습니다.
복자 정찬문은 1822년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신자였던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습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 가을 진주 포졸에게 체포된 정찬문에게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하겠다." 유혹하였지만
결코 배교하지 않았고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 정찬문 안토니오의 묘와 순교비 >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은 그는 혹독한 형벌과 모진 매를 견뎌내고 끝내 순교.
그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의 시신을 어찌하여 사촌들이 몸체만 수습해 고향 인근에 매장하면서
무두묘로 불리기 시작했고,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끝에 잊혀갔습니다.
1946년 문산 성당의 서정도 신부는 굼실 공소 회장에게 무두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길섶에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아 순교자의 유해를 확인, 그 앞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순교자의 묘소를 보존해 온 문산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해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정찬문 안토니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마르 4, 27)
거제도에 믿음의 씨앗을 뿌린 순교자의 피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 윤봉문 요셉 묘 -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 2동 1509-2(산길 입구) >
거제도 진목정 족박골(현 옥포)에는 ‘거제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자 윤봉문 요셉의 묘가 있었습니다.
신유박해 당시 신자들의 유배지였던 거제도에 병인박해 직전 리델 신부가 전교를 위해
다녀가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8년경 박해를 피해 거제로 들어와
진목정에 정착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습니다.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아들로 진 아녜스와 혼인하여 아들딸을 낳고 살면서
형 경문 베드로와 함께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 회장작을 맡아 전교에 힘썼습니다.
< 대나무로 숲속 길로 오르며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 . >
거제에 박해가 일어난 1888년 4월 1일 살이 뭉개지는 고통과 회유속에서도
천주십계와 성교사규를 외치며 진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니 그의 나이 36세.
윤봉문 요셉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거제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 .
3월 길손순례를 마칩니다 ~
2018년 4월 28일 (토)
배나드리, 수리치골, 황새바위 (대전교구)
삽교천가에 형성된 박해시대의 교우촌
배나드리 (삽교성당)
< 배나드리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배나다리 >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북쪽 용동 3리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하였습니다.
<삽교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 .>
이곳은 삽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1.3km)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리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1817년 이곳에도 박해의 손길이 뻗쳐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
민 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이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천주님께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고향
인언민(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
삽교 성당 관할구역인 용동 3리의 배나드리 교우촌 인근 용동 2리에 있는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
< 귀요미 1학년 ~ >
용동리는 공주에서 체포되어 해미에서 순교하여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의 고향.
이곳에는 “순교자께 영광”이란 글귀를 새긴 돌과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기념비를 설치,
십자가 모양으로 조성한 정원 한 가운데 육중한 자연석으로 만든 야외제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 아직도 귀요미이고 싶은 ~~>
골짜기마다 신앙의 숨결이 배어 있는
수리치골
< 수리치골 -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용수봉갑길 503 >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로,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이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수리치골이 특히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페레올 고 주교에 의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구성되어
공주 지방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 성지의 천주 성삼상과 승리의 성모상 >
수리치골 교우촌이 확인 개발되기까지는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를 설립한 정행만 신부님.
수차례 답사를 통해 위치를 확인한 정 신부는 1986년부터 인근 부지를 매입하여
성직자들을 위한 성모성심 봉쇄수도원을 1990년에 완공하고
천주성삼상을 제막하고, 성모 칠고상을 제작하여 설치하였습니다.
< 수리치골의 십자가의 길 >
1997년 봉쇄수도원이 다른 곳으로 옮긴 후 현재 이곳에는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본원이
들어와 한국교회 성모성심 신심의 뿌리를 지키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수리치골 성지개발을 위한 25만원을 경산베네딕도 학생 이름으로 봉헌함.
순교의 넋은 새가 되어 하늘로 오르고
황새 바위
< 황새바위 -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 118 >
공주 들머리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바위 위에 소나무가 밑으로 늘어져 있고
황새가 서식했다 해서 '황새바위'로 불린다.
공주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이요 충남 지역 신앙의 요람.
.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공주 감영이 있었고,
잡혀 온 천주교인들은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배교를 강요당하고 이를 거부할 때에는
‘황새바위’ 라고 불리는 곳에서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공주 황새바위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는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한양 등
매우 다양하며, 그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도 248명에 이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손자선 성인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내포 지방의 사도’ 이존창이 있습니다.
공산성을 마주하고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는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해 세운 13.8미터 높이의 순교탑이 서 있고,
공주의 순교자 248위의 명패가 새겨진 돌무덤 형태의 경당이 있습니다.
또한 무덤경당 앞 순교자 광장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비석이자 12사도를 상징하는
12개의 빛돌이 세워져 있다.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등록.
보너스 문화탐방 공주 공산성 Go ~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와 마주하는 곳에 공주 공산성이 있다.
2018년 5월 19일 (토)
성거산성지, 남방재, 온양신정동성당, 아산 현충사 (대전교구)
박해시대의 사목 중심지, 순교자들의 본당
성거산 성지 (소학골)
< 성거산 성지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위례산길 394 >
성거산(소학골) 성지는 한국의 성지 중에서 차령산맥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보기 드문 곳.
< 성거산 성지(소학골) 쉼터 제대에서 성령강림 대축일 전 미사 >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1,22)
주님, 저희도 각자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겠나이다. 아멘
맛있는 점심 식사 중 ~
순교자의 길을 따라 오르며 ...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으로 서덕골, 먹방이, 소학동,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등 삶의 터전(교우촌)이 7개가 있었습니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가 은거했던 곳이고,
박해가 끝난 뒤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
병인박해 때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
공주 감영에서 참수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배문호 베드로,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에 안치.
성지 전체로는 제1줄무덤에 38기, 제2줄무덤에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있어 실제 안장된 순교자는 훨씬 많다고 합니다.
< 제 2 줄무덤 앞에서 >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 10)
내포지방에 살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순교를 당한 수 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
성거산 성지는 2008년 12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등록.
삼대가 순교자, 조윤호 요셉 집안을 기억하며. .
남방재
< 남방재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서부북로 763-42 >
성 조화서 베드로(1815-1866,12,13)는 구 교우 집안으로 수원에서 살다가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기해박해 때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 남방재로 옮겨왔다
아들 조윤호 요셉 성인은 신창 남방재에서 태어났다.
병인년 12월에 박해로 체포되어 심문과 모진 고문을 받고 배교를 거부하다가
아버지 조화서 베드로는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되고,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 아들을 염려하는 아버지에게 윤호 요셉은
"저는 하느님을 배반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고 전주천에서 교살 되었으며 두 순교자는 1984년 시성.
그의 가문은 구교우 집안으로 할아버지 조 안드레아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기해박해(1839) 때에 순교하였다.
< 조윤호 요셉 성인과 7명의 순교터 >
그의 깊은 신심과 성실한 수계생활에 깊은 존경심을 자아내는곳.
2016년 주보성인 순교 150주년을 맞이하여 생가터 주변에 남방재 성지개발을 하게 되었다.
남방재 스탬프는 온양신정동 성당에서 ^^
문화탐방 현충사 go ~
2018년 6월 16(토) ~ 17(일)
마재, 세미원(두물머리), 양주순교성지(양주관아지) (의정부 교구)
구산성지, 성 남종삼 묘(십자가의 길), 송추성당 (수원교구)
소박함을 간직한 신앙 공동체, 김성우 성인의 고향
구산성지
< 구산성지 -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북로 99 >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는 구산(龜山) 마을은 팔당 부근
한강변에 위치하며 순교자들의 숨결이 170여 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
< 구산성지 십자가의 길 >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이자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교우촌인 구산 마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산에서 태어난 김성우 성인은 36세에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성인은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기도 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고,
1840년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
갖은 고문을 당한 성인은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고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47세.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 암브로시오 등에 의해 수습되어 고향에 안장.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 5, 37)
< 구산성지 친교의 장 쉼터 앞에서 >
김성우 안토니오성인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가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구산 성지 순교자 묘역에는 김성우 성인과 가족 그리고 구산 출신 순교자 등
9위의 무덤이 진묘와 의묘 형태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정약용 4형제가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성가정의 모범
마재성지
< 마재성지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698-44 >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마재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신앙의 태동지.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오른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바오로)과 딸 정정혜(엘리사벳)도
바로 이곳 마재에서 태어났습니다.
< 마재 성가정 동산 >
성 정하상 바오로 (1795-1839년)와 2차 사제 영입운동
신유박해(1801년)로 주문모신부가 순교한 후 한국천주교회는
또 다시 33년간 목자 없는 암흑시기를 맞이합니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은 1816년 부터 유진길, 조신철과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내는 등
45세에 순교하기 까지 9차례나 동토의 북만주길을 다녀 왔습니다.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
유방제(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조신철가를로 세 분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모두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 마재 도마성당 >
다산 정약용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당쟁의 와중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스스로 천주교를 떠났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 마재 도마성당 앞에서 >
긴 유배생활 중 신심을 되찾은 정약용은 유배에서 돌아온 후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보속의 삶을 살다가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화탐방 세미원 (두물머리) Go ~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 한강이 시작되는 곳.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와 일출,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이 ~
병인박해 때 순교자를 배출한 경기 북부의 치명지
양주순교성지(양주관아지)
< 양주순교성지(양주관아지) - 경기도 양주시 부흥로1423번길 35-12 >
박해시대 경기도 북부 지역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나
박해가 진정되고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재건 속도가 빨라져
1830년대 초 고양지역에선 70-90명 규모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 2017년 복원을 마친 양주 관아 >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양주 관아는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졌습니다.
“치명일기”에 의하면 바로 이곳에서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김윤오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김 마리아, 박 서방 등 5명이 순교.
1997년 양주목사의 집무처인 동헌(매학당)의 복원을 시작으로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반영하여 2017년 동헌부의 부속건물과 내아를 복원.
< 2016년 부터 시작하여 개발하고 있는 양주관아지 성지 터 >
의정부교구에서는 "치명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양주 관아 일대의 치명지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고,
이를 근거로 양주 향교 앞의 순교터를 매입하여, 2016년 5월 양주 순교터를 의정부교구 내
첫 순교성지로 선포하며 현양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숙소인
< 한마음 청소년 수련원 - 경기도 양주시 버들로 147-142 >
교구에서 운영하는 한마음 청소년 수련원에서
이른 아침 십자가의 길을 바치다 ~
남상교, 성 남종삼, 남규희 3대 순교자들의 안식처
성 남종삼 요한 묘
< 남종삼 요한 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 22-2(의령 남씨 가족묘) >
장흥면 울대리의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부친 남상교,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한 장자 남규희 등 삼대 순교자의 묘소가 있습니다.
남종삼은 103위 한국 성인 중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으로
부친 남상교의 영향으로 일찍이 천주교 교리를 알고 입교.
승지까지 오른 남종삼은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관리들의 시기와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이 양립할 수 없자
관리직을 내놓고 부친이 은거하던 묘재로 내려갔습니다.
1863년 말경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었고,
당시 수시로 러시아가 침범해 통상을 요구하자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
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묘재로 가서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듣고,
치명을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성사를 받은 후 한양으로 가던 중 체포.
남종삼은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습니다.
‘백서(帛書)’의 주인공
가마골 황사영 알렉시오 묘
< 황사영 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118-25(가마골) >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습니다.
무덤에서 석제 십자가와 황사영의 토시가 들은 항아리가 나와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로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며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습니다.
주님, 하느님을 바로 모시기 위해 부귀도 명예도 수려한 외모까지도 모두 버렸던
황사영 알렉시오를 기억해 주소서. 아멘
< 순례지 송추 성당에서 신부님과 기념 사진 >
2010년 의정부교구는 ‘순교자의 길’ 순례길을 개발하여 실시.
2018년 부터 묘역이 속한 송추 성당을
남종삼 요한 성인과 가족 순교자 묘소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순례지로 지정했습니다.
1박 2일 수원교구, 의정부교구 6월 순례를 마칩니다 ^^
2018년 7월 21일 (토)
천진암, 양근성지 (수원교구)
천주교 신앙의 발상지
천진암
< 천진암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놓여 있다.
어느 때인가 없어져 주춧돌만 남았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암자가
바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천진암이다.
< 천진암으로 가는 길 약수터에서 . . >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당대의 석학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습니다.
권철신, 일신 형제와 정약전 · 약종,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석학들은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
2079년까지 마감공사를 통해 3만석 규모의 위용을 드러낼 천진암 대성당 터
<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돌제대 >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은 이벽에게 그리고 마재의 정약종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들에게 세례를 주고,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켜 수도 한복판에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와 ~ 덥다 더워요 ~
< 천주교 창립 선조 묘역 >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 일신 형제의 묘를 이벽의
묘 옆으로 이장해 창립 선조 묘역을 마련했습니다.
< 22미터 높이의 세계 평화의 성모상과 뒤쪽에 보이는 가르멜 수녀원 >
성지 입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정하상과 유진길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성직자 영입 운동과 조선 독립교구 설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순교성인들.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퍼져 나간 순교성지
양 근
< 양근성지 -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 >
양근(楊根)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으로 남한강 변에 폭우와 홍수로부터
제방의 붕괴를 막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가 많았던 데서 유래한 지명.
양근은 신유박해 이전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권철신과 권일신이 태어난 곳입니다.
<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순교부부상 >
양근 성지는 조숙 베드로와 권천례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한 곳으로,
이 동정부부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잡혀서 순교.
이들 외에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일명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졌던 곳입니다.
< 순교자 기념성당 봉헌 기념 조형물 > < 양근 성지 십자가의 길 예수상 >
또한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 윤점혜, 권상문이 참수형으로 순교한 곳 . 그 외에도 조용삼, 홍익만이 순교한 곳.
이들은 모두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 양근 성지 순교자 기념성당으로 들어 가며 . . >
뿌리만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처럼
순교자들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욱 튼튼해져 갔다 ^^
2018년 9월 15일 (토)
홍주순교성지, 갈매못, 다락골 (대전교구)
읍성 곳곳에 순교의 피가 흐른 충청도 첫 순교 터
홍주순교성지성당(상가건물 1층)
< 홍주순교성지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37-1 >
내포 지역의 중심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홍성읍 한복판에 자리한
홍주성은 그 전체가 순교의 현장.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 35)
20평 남짓 상가 건물을 임대로 사용하고 있는 홍주성지성당에서 순례미사
길손단장님께서는 이미 잘 조성된 성지보다는 개발이 시급하고 작은 성지에서
순례미사 계획을 세우시는 세심한 배려를 늘 하신다 ~^^
<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 조양문 >
박해 당시 붙잡혀 온 교우들이 이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현재 홍주성의 옛 모습 중에서 성벽과 일부 건물이 복원되었고,
원형 복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 복원된 홍주 감옥 >
교회의 순교록과 관변기록 등을 통해 확인된 홍성 순교자는 모두 212여명.
그러나 무명 순교자를 감안하면 실제 순교자는 1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
순교록에 의하면 홍성 순교자는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 많았고 생매장된 순교자도 있었습니다.
< 홍주 순교성지 비석 >
2008년 3월 홍성 본당은 홍성군과 함께 순교비를 세웠습니다.
이 장소는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이들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읍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이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
석양놀에 살아나는 순교의 피
갈매못 순교성지
< 갈매못성지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 >
서해안 바닷가에 있는 갈매못 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 위앵 신부
그리고 황석두 · 장주기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
유리문을 열면 서해바다가 한 눈에 펼쳐지는 갈매못 성전의 제대 유리화
< 갈매못 승리의 성모 성당 외부 모습과 십자가의 길 의 모습 >
1866년 3월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다블뤼 주교는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
대원군과의 만남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이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하고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힌 것입니다.
< 갈매못 성지의 순교성인비와 순교복자비>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고 국혼도 가까운 시기여서 서울에서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으로 처형지가 옮겨졌습니다. 이들 4명과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 요셉까지 합세하여 모두 다섯 명이 갈매못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성금요일에 순교한 다섯 성인 중 황석두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인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넷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했다가,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로 옮겨졌습니다.
2013년 2월에는 갈매못 순교성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
이름도 없이 줄지어 신앙을 증거하는
청양 다락골 줄무덤
< 청양 다락골 줄무덤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 >
청양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자리한 곳.
< 청양 다락골 성지 제1 줄무덤 >
마을 뒷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는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빼내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 청양 다락골 성지 십자가의 길 >
주님, 저는 당신만 믿고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 운명 당신 손에 달렸으니,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시편 31(30), 2-3)
대전교구는 교구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1월 기념성당을 건립하여 봉헌식을 거행했다
2018년 11월 17일~18일 (토,일)
왜고개 성지, 당고개 순교성지, 옛용산신학교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서울대교구)
관청리 형방과 진무영,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 갑곶순교성지, 반주골(이승훈 묘)(인천교구)
순교 성인들의 시신이 머물다 간 곳
왜고개 성지
< 왜고개 성지 -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40길 46 >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7명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2명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교회의 사적지.
또한 왜고개는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는 모두 10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 중 8명이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왜고개는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
따뜻한 어머니의 품으로 거듭난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 성지
< 당고개 순교성지 -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139-26 >
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이
음력설 대목에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입니다.
< 당고개 야외제대 >
이곳에서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습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홍병주, 홍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이문우, 최영이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만은 성인품에 오르한 것은 못한 것은
어린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말 것 같아 배교하겠노라고 옥을 나온 모정의 결과.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순교의 칼날을 받았고,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습니다.
성지 전체를 ‘어머니의 따뜻한 품’으로 형상화해 순교자들의 고통보다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신앙의 후손인 우리를 감싸주는 모성적 사랑을 표현한 듯 ^^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던 최초의 근대식 신학교 성당
옛 용산신학교 성당(원효로 성당)
< 옛 용산신학교 성당 -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19길 49 >
1866년 병인박해로 배론 신학교는 폐교되었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2년 뒤인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습니다.
1892년에는 신학교 교사를 신축했고, 성당은 그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 건립되어 축성되었습니다.
신학교 성당은 지난 1982년 교사와 함께 사적 제255호로 지정.
< 용산 예수성심성당 역사전시관 >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곳.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서
부터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
그밖에도 많은 기해박해, 병인박해 때 순교한 사제들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습니다.
< 성심기념관 >
(옛 용산신학교 생활관- 사적 255호)
이곳에 안치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신학교 성당을 비롯해 명동 성당,
절두산 등지로 옮겨 모셨고, 역대 교구장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안장했습니다.
한강변에 우뚝 선 신앙의 파수꾼
절두산 순교성지
< 절두산 -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6 >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습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는 수많은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처형되었고, 그래서 29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 복자 주문모 신부님상을 바라보며 . .>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순교터에 성당과 순교 기념관을
건립을 시작해 이듬해 10월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우뚝 솟은 절벽 위에 3층으로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7위와 1위의 무명 순교자의 유해를 모신 지하 성해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된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997년 11월 교회의 노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성지 일원을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이란 명칭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
그동안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성지는 있었으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곳은
절두산 순교성지가 처음입니다.
인천교구로 이동합니다 ~ 다음 날
12월 18일 (주님의 날)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가 된 군영
관청리 형방과 진무영 (강화성당)
< 진무영순교성지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643(강화 성당 내) >
진무영은 숙종 때 해안 방어를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강화도와
그 주변 군사들을 함께 엮어 창설한 군영이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를 계기로 그 기능이 확대되었고, 양인과 내통한 혐의로 1868년 음력 5월
장치선, 최영준, 박서방, 조서방 등이 순교하면서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형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장치선과 최영준은 리델 신부를 안전하게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박해의 상황을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서 남은 신자들을 구제하고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고자 했습니다.
<강화성당 내 조성된 진무영 순교성지 >
현재 강화 성당 구내에 진무영 성지가 조성되어 있으나 진무영 터가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옛 강화 농협 자리에 있는 은혜 교회부터 북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는 강화 성당까지를 진무영 터로 추정.
강화 본당은 2004년 성당 구내에 성지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무명 순교자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현양동산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
<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 -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1486(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내) >
100여 년의 박해시대를 거친 한국 천주교회에는 적게는 1만 명,
많게는 3만 명의 순교자들이 있지만 이름 정도라도 알려진 순교자는 약 1,000여 명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이름조차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 절대 침묵 >
그래서 2002년 인천교구는 강화도의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내에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해 한국의 특히 무명 순교자들에게 봉헌하였습니다.
< 순교자의 십자가 길 >
현양동산에는 2005년 11월 3일 무명관 2층에 ‘일만위 순교자 기념성당’이 마련되었고,
성당 내에는 홀로 기도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개인 성체조배실도 만들었습니다.
2007년에는 ‘주님 위로의 동산’과 ‘순교자의 십자가 길’이 조성되었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남종삼 요한 성인의 유해 일부를 모신 ‘성 남종삼 기념관’도 건립했습니다.
<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 무명순교자 현양탑 >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은 ‘순교자를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위한 곳입니다.
.
주님, 한국의 모든 무명순교자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쓰러져간 무명 순교자들의 고귀한 순교정신을 통해
저희도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는 ‘길’을 찾고 배우게 하소서. 아멘
< 일만위 순교자 기념성당에서 주일미사 봉헌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 13,30)
나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 날 때
'올 것이 왔구나.’ 하십시오.
(신부님 강론 중에)
피로 물들었던 강화 앞바다가 한 눈에
갑곶순교성지
< 갑곶순교성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00 >
강화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역사 및 문화 유적입니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를 야기했던 병인양요의 현장으로 강화대교 서쪽 끝에 있는
갑곶돈대에서부터 박해의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 박순집 베드로 묘와 갑곶 성지 성당(최순복관) 외부 모습 >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
결국 프랑스 군은 후퇴했으나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 갑곶성지 바다의별 성모성당 성전 >
갑곶 성지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고,
또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당한 강화에 살던 신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이 갑곶진두에서 순교.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 순교성지를 조성하였습니다.
신앙의 숨결이 서려 있는 곳
강화고려궁지(관청리 형방)
강화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1232년(고려 고종 19년)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궁궐을 건립하고 39년간 사용하던 곳.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곳 동헌과 형방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자행.
또한 조선시대에 해상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이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한 진무영이 고려궁지 앞에 있었습니다.
1964년 사적 제133호로 지정된
‘고려궁지’에는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호인 강화유수부 동헌과 제26호인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강화동종(1999년에 만든 복제품, 원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이동 전시) 등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머릿돌
반주골 (이승훈 베드로 묘)
< 이승훈 베드로 묘 -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 (남동구 정수사업소 뒷산) >
반주골에는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자 창립 선조의 한 명인 이승훈 베드로의 묘와
장남 이택규와 3남 이신규 마티아 순교자의 묘가 있습니다.
이승훈(李承薰) 베드로(1756-1801년)
여러 번 배교하였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째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셋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자 이연구 ‧ 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반주골에 안장되었던 이승훈의 유해는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
정약종, 권철신 · 일신 형제, 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졌습니다.
< 미래의 이승훈 역사문화 기념관 >
이승훈 묘역은 2011년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됨.
인천교구는 2014년 묘역 일대를 역사문화기념관과 순례길 등을 갖춘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단 한 분의 선교사도 없이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베이징에 가서 세례를 받아 온
한국천주교회를 '평신도의 교회' 라고 부릅니다.
1박 2일 11월 길손 순례를 마치다 ~^^
2018년 12월 15일 (토)
남한산성, 단내, 죽산 (수원교구)
걸어온 길, 시신되어 나간 곳
남한산성 성지
< 남한산성 성지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63-58 >
남한산성은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제 순교자는 2~3백 명으로 추산)이 순교한 곳.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아멘
치명터는 동문에 자리하고 있는데, 동문을 통해 신앙 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더욱이 살아서 동문을 들어온 이들이 죽어서는 물이 빠지도록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습니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되었습니다.
남한산성 로터리에는 천주교인들을 수감했던 옥터와 처형터가 있습니다.
< 순교자현양비와 한옥 양식의 성당 >
수원교구는 1998년 남한산성을 성지로 선포하고 마련한 부지에
순교자현양비와 한옥 양식의 성당을 건립하였고, 성당 뒤편 산에는 야외미사터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순교의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은 2014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보너스 문화탐방 남한산성 Go ~
남한산성 사적 제 480호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됨
남한산성에서 백지사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안식처
단 내
< 단내성지 -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이섭대천로155번길 38-13 >
단내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 단내 성가정성지의 검은 바위와 성모상 >
검은 바위는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그의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생활하며 기도했던 곳.
이곳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며 박해의 괴로움을 이겨냈던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그 가족들의 성모신심을 본받고자 바위 앞에 세운 성모상.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 43)
박해의 회오리가 단천리 교우촌에 몰아쳤을 때 당시 63세 였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갔고,
이때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양묵 베드로가 병든 작은 할아버지를 모시고자 자진하여 잡혀갔습니다. 배교 강요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그들은 그해 말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
단내 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한국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의 성인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주님, 박해의 괴로움을 기도로 이겨냈던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그 가족들의 신심을 기억해 주시고
세상의 모든 가정이 항상 주님의 빛과 은총 안에 머물게 하소서 아멘
단내가 가정성화를 위한 성가정 성지로 명명된 것은 성지에서 기념하는 5위의 성인과
순교자 중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에서는 성가정의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겨울 햇살 아래 기념사진 찍으며 ...
12월 길손 순례를 마칩니다.
수고하시고 함께하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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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해의 순례 기록이 모두 여기에~ 감사합니다.
못 가본 곳이 많아 아쉬웠는데
여기서 편히 순례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율리안나 형님! 감사한 마음으로 꼼꼼하게 읽으면서, 다시금 마음에 새깁니다. 함께 다닐때는 몰랐지만, 대전교구의 순교성지를 요한씨랑 둘이서 다녀보니, 길손순례단 모든분의 노고에 대해서 너무 당연히 받아들였던점 반성하였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시간계획, 순례순서, 미사참례...어느것하나 대충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안전운전이 보장되어야하고...등등 아직 끝나지 않은 순례지는 차례대로 마무리하고 있답니다. 축복장 받을때의 감동을 함께 느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