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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새해부터 '양승국 변호사가 산에서 만난 사람'이란 글을 쓰는데, 그 첫번째로 이병욱 교수님에 대해 썼습니다. 지난 번 악기박물관 3주년 공연 다음날 마리소리골 골짜기를 이병욱 교수님과 같이 오르며 이야기 나눈 것인데, 여기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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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욱과 어울림
눈이 온다. 올겨울 첫눈이... 그것도 그냥 흩뿌리는 것이 아니라 온 대지를 한 겹, 두 겹 흰옷으로 갈아입히고 있다. 강원 홍천군 서석면 검산리 마리소리골 - 청주 서원대학교 음악교육과 이병욱 교수님의 음악 산실인 마리소리골을 찾아가는 날은 이렇게 첫눈이 하늘과 땅을 하얗게 오가던 날이었다. 56번 국도를 벗어나 은세계로 변한 마리소리골을 조심조심 들어가니 악기박물관은 먼 길 오느라고 수고하셨다며 플래카드를 활짝 펼치고 골짜기로 들어오는 이들을 반갑게 환영한다. 오늘(2010. 11. 27.)은 마리소리골에 악기박물관이 문을 연지 3주년이 되는 날. 오후 5시부터 개관 3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첫눈이 길에서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쉽게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공연은 20분 정도 지나 시작된다.
몇 번 이병욱의 음악세계를 찾아 마리소리골을 방문하였으나, 이번 방문에선 그저 음악만 듣다 가려는 것은 아니다. 이병욱 교수님은 중앙대학교 음대 작곡과를 나와 서양음악을 찾아 독일 칼스루헤 국립음대 대학원으로 유학의 길까지 떠났으나, 1988년 귀국하자마자 국악과 서양 음악의 만남을 주도하여 ‘어울림’ 1집을 내셨다. 요즘이야 국악과 서양 음악의 접목 나아가 화학적 결합을 시도하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그 당시에 서양 음악을 하시던 분이 어떻게 서양 음악의 본거지에서 돌아오자마자 국악을 찾게 되었을까? 하여 이번에는 이병욱 교수님과 산길을 거닐면서 평소 궁금하였던 이병욱의 음악세계를 탐구해보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바깥으로 나오니 마리소리골의 아침 공기는 상쾌하다 못해 그때까지 내 머리 속에 남아있던 전날 어울사랑(이병욱과 어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과 같이 하였던 주기(酒氣)를 일순간에 날려버린다. 어울사랑 평가회가 끝나고 회원들이 저마다 길을 찾아 떠난 후, 이교수님과 골짜기 더 안쪽으로 개울을 따라 길을 오른다. 우리가 이렇게 골짜기 길을 따라 오를 때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백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길을 안내하고, 어제 내린 첫눈은 그렇게 쉽게 자기의 존재를 잊혀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발밑에서 ‘뽀드득 뽀드득’ 유난히도 소리를 크게 내고 있었다.
양 : 어제 악기박물관 개관 3주년 공연 하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악기박물관은 어떻게 문을 열게 된 것이죠? 아니 그전에 이곳 마리소리골에는 어떻게 들어오시게 되었어요?
이 : 1995년인가? 제가 과천에 살 때인데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관악산 과천산장 주인이 이곳에 올 때 같이 가자고 하여 따라오게 되었어요. 그 때는 이곳까지 차로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 마을에서도 꼬불꼬불 비포장 길을 한참을 걸어 들어와야 했었지요. 그런데 이 골짜기를 돌아보는데, 순간적으로 이곳에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제가 고향도 충남 서산이고, 재직하는 대학도 청주 서원대로 이곳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그 때 이상하게도 이곳에 터를 잡아야겠다는 강렬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 땅값이 비싼지 싼지 생각도 않고 이 골짜기의 땅을 사고, 1996. 8.경에 이곳에 본채를 짓고 이어서 음악 작업을 위해 토굴도 지었죠. 그 때 생각에는 ‘이곳은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다. 음악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여기 와서 작업을 할 수 있고, 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즐겨 방문하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이었죠.
처음 와보는 곳인데 이전에 이미 이곳을 와본 강한 느낌이 드는 것을 데자뷰(deja vu)라고 했던가? 나도 처음 대학입시에 떨어졌을 때 친구와 함께 무작정 인천으로 떠나,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바다가 보이는 송도 어느 바닷가에 내렸었지. 바닷가 뒤로는 낮은 야산이 겨울의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웅크리고 있는데, 그 야산으로 오르면서 내가 이전에 여기를 왔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었지. 이교수님도 그런 느낌을 받으셨던 것일까?
양 : 골짜기 이름이 원래 마리소리골이었나요?
이 : 원래 골짜기 이름은 마릿골이었는데, 제가 이곳에 소리의 터전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기에, 제 스스로 마리소리골이라고 바꿔보았지요.
양 : 그렇군요. 그러다가 악기박물관은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지요?
이 : 제가 전에 막스 레거 음악제에 참가하느라고 유럽에 갔었는데, 그 때 어느 시골 박물관에서 초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박물관에서 연주를 하면서 “아!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전시도 하고 연주도 할 수 있는 박물관이 있으면 좋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평소 저의 이러한 소신과 우리 음악의 저변 확대의 뜻에 노승철 당시 홍천군수님도 적극 공감하시며 관심을 가지셨는데, 박물관 계획이 구체성을 띠게 된 것은 이곳 검산리가 정보화 마을로 지정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 제가 마을회관에서 축하공연을 해주는데, 그 행사에 최명희 강원도청 기획실장(현 강릉시장)이 와서 도지사를 대신하여 축사를 하였지요. 당시 최실장과 얘기를 나누던 중 박물관 얘기가 나와, 제가 유럽의 박물관을 보고 갖게 된 생각을 말하였지요. 그 당시 저는 최실장에게 내가 음악을 했으니 악기박물관을 세우면 전시물은 내가 기증받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홍천군 관광이나 지역 홍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하니까, 최실장은 좋은 생각이라며 도와주겠다고 하여 박물관 건립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죠. 그리하여 제가 제 소유의 땅 800평을 홍천군에 기부채납하고 이 땅 위에 홍천군에서 악기박물관을 세워, 어제가 개관 3주년이 된 것입니다.
양 : 보통 박물관 하면 소장품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먼저 떠오르는데, 어제 공연을 보니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문화교실 수강생들 공연이 있더군요. 이렇게 악기박물관에서 전시회를 넘어 직접 음악을 가르치고, 공연도 하니 박물관이 살아있는 느낌입니다.
이 : 그렇죠? 이 깊숙한 골짜기의 박물관에 사람을 찾아오게 하려면 단순한 전시를 넘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살아있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교실을 열므로써 박물관이 이 지역에 음악과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내린 눈으로 하얗게 단장을 한 길은 계속 계곡 안쪽으로 이어지는데, 우리 앞으로는 우릴 따라온 백구 녀석이 찍고 있는 발자국 외에 사람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눈으로 갈아입은 이 계곡에 나와 이교수님이 처음으로 발자국을 찍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교수님과의 오늘의 이 동행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길옆으로 개울도 저 계곡 안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른 때 같으면 개울에선 우릴 맞이하러 계곡 안쪽부터 흘러나오는 개울물의 재잘거림이 들릴 텐데, 오늘 개울은 개울을 여기 저기 덮고 있는 얼음에 움츠려들어서인지 물은 조용히 우리 옆을 지나 내려가고 있다.
갑자기 백구가 길을 벗어나 길 왼쪽 산으로 달려 올라간다. 순간 노루처럼 보이는 녀석 한 마리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야~아~~ 이 골짜기까지 노루가 내려오다니!” 눈이 덮여 먹이를 구할 수 없어 여기까지 내려온 것일까? 백구는 노루를 쫒아갈 생각은 없었던지 다시 길로 내려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우리 앞을 인도한다. 사람들 낯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와 꼬리를 살랑거리는 녀석에게 저런 야성(野性)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
마리소리골 악기박물관에 들어와 이교수님을 만나다보니 아무래도 마리소리골과 악기박물관 이야기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교수님의 음악세계로 들어가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였으며 국악과 만나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양 : 음악은 언제부터 하시게 되었나요?
이 :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민요와 흘러간 트롯 노래를 곧잘 불러 동네어른들 사랑을 받았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노래는 물론 오르간을 연주하고 하모니카도 곧잘 불어 각종 발표회에는 단골이었지요. 그러다가 중학교 때부터 클래식 기타를 쳤고, 서라벌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전자기타를 치며 올스타 캄보밴드 일원으로 미8군 무대에도 섰고 학교에서도 밴드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죠. 그런데 대학은 연주 전공이 아니라 작곡 전공으로 중앙대 작곡과에 들어갔습니다. 고교 때 연주 활동을 하면서도 나도 이런 멋진 곡을 직접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 작곡과를 지원하게 된 것이죠. 그러나 연주 활동도 계속하여 대학 재학중에는 이봉조 악단에 기타 연주자로 입단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으며, 대학 졸업을 앞두고 1974. 1.경에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씨가 조직한 악극단에도 들어갔습니다.
양 : 이후락씨가 조직한 악극단이라뇨?
이 : 당시 이후락씨가 남북협상을 위해 비밀리에 평양을 몇 번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이후락씨가 평양에서 ‘피바다’ 공연을 보고 나서는 인상이 깊었던지, 남북 문화교류를 위해서 우리도 이에 상응하는 악극단을 조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그 악극단에 들어가 ‘홍도야 울지마라’, ‘이수일과 심순애’를 악극으로 연습을 하였고, 7.4. 남북공동선언도 발표되어 북한에 들어가 공연할 것을 꿈꾸고 있는데, 이후락씨가 중앙정보부장을 그만 두면서 이 악극단도 해체되었습니다.
양 : 당시 그런 악극단이 있었나요?
이 :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아니고, 이후락씨가 중앙정보부 내에 비공개로 조직하여 각종 연회에서 비공개로 공연하는 정도였으며, 그것보다는 빨리 평양 가서 남북이 같이 하는 문화교류를 꿈꾸었던 것이죠.
양 : 그랬었군요. 독일 유학도 갔다오셨죠?
이 : 갑자기 악극단이 해체되니 저는 단독 입영하게 되었는데, 제 전공과 경력으로 육군본부 군악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되었지요. 제대 후에도 공군본부 군악대에서 제가 육군본부 군악대에서 활동하던 것을 눈여겨 보아두었던지 저를 작곡과 편곡 담당 군무원으로 채용하여 4년 정도 근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현대음악의 작곡법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어 1984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칼스루헤 음대 대학원에서 볼프강 림 (Volfgang Rym) 교수님에게 4년간 작곡을 배웠지요. 독일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1990년부터 청주 서원대 음대에서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며 활동하고 있구요.
양 : 그렇게 서양음악을 하시던 분이 국악은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건가요?
이 : 집안이 유교 집안이다보니 어려서부터 한국적 정서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독일 유학을 가서 현대음악을 공부하러 왔다고 하니, 자기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기법과 소재가 우리 전통 속에 농축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미 우리 음악뿐만 아니라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끼, 인도 음악 등 동양 음악에 대해 깊은 관심과 호기심으로 연구를 하고 있더군요. 제2의 모차르트라고 불리던 지도교수 볼프강 림도 저보고 ‘너희 나라 유구한 역사 속에 내재된 전통음악 속에서 현대적인 기법과 소재를 찾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독일에서부터 우리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지요.
서양음악을 배우러 독일 가서, 정작 거기서 우리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니 의외다. 20세기 들어와 서양인들이 철학이나 종교, 미술 등에서 동양적인 것을 찾더니 음악에서도 그렇구나. 서양 음악은 음과 음이 악보에 그대로 고정되지만, 우리 음악은 음과 음 사이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음이 유동하면서 무한한 떨림과 변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서양에선 텅 빈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지만, 동양의 그 공간에는 무한한 생명의 에너지(氣)가 넘쳐흐르고 있지. 그 기의 장에서 우주의 생명과 물질이 태어났다 다시 기의 장으로 돌아가니,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현대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도 서양 사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던 소립자의 세계가 이미 동양사상에는 들어있는 것에 철학적 깨달음을 얻고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라는 명저를 저술하지 않았던가?
서양인들이 발견한 우리 음악의 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정작 우리만 몰랐던 것인가? 사실 ‘국악’이라는 용어 자체가 우리 음악을 서양음악에 비해 천대시 하는 데서 온 것이 아닌가? 그 동안 ‘음악’하면 서양음악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 음악은 ‘국악’이라는 용어로 한 단계 낮은 음악의 범주로 묶어놓았으니... 인도에서는 ‘음악’하면 인도음악을 말한다고 하던데, 우리도 ‘국악’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고 인도처럼 ‘음악’이라 하거나 ‘우리 음악’이라고 함이 어떨까? 지금이야 이병욱 교수님처럼 우리 음악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있는 분들이 많아졌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국악’이라고 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한물 간 고리타분한 음악으로 치부되었었지. 도대체 음악시간에 우리 음악에 대해 무엇을 배웠던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음악교육 때문에 지금도 머리로는 우리 음악을 이해하고 느끼려고 노력하지만 몸은 우리 음악과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감응을 하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고 말았지.
양 : 그런 우리 음악에 대한 깨달음이 1988년 독일에서 돌아오자마자 ‘어울림’ 1집으로 나타난 것이군요? ‘이병욱과 어울림’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주시죠.
이 : 귀국하여 정약용 선생이 우리 음악에 대해 쓰신 악서고존(樂書孤存)을 강해하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주최하는 ‘악서고해’라는 모임에 나갔습니다. 단순히 악서고존을 해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문제 인식하에 우리 문화를 전통 바탕에서 지금의 감성에 맞게 펼쳐나가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해보는 것이죠. 그래서 저도 과연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줄 때 공감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는 생각을 해보면서, 국악의 대중화를 생각하게 되고, 제가 서양음악을 공부했으니까 서양 기법에 우리의 선율과 감성을 어떻게 실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민요를 편곡하고 곡을 작곡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만든 곡을 가지고 연주자들과 만나 ‘어울림’ 1집을 내게 된 것이죠. 그 때 1집에 실렸던 ‘신풀이’가 어제 공연에도 연주가 되었습니다.
양 : 그러한 만남이 어제 악기박물관 개관 3주년 기념공연에서도 ‘이병욱과 어울림’의 연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군요.
이 : 예, 악기나 연주자는 조금씩 변동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가야금, 대금, 장구 등의 우리 악기와 기타, 색소폰, 첼로 등의 서양 악기가 만나 제가 작곡한 곡을 중심으로 연주하고 있습니다. 제가 기타를 오래 연주해왔으니까 기타는 제가 연주하면서 제가 직접 노래도 부르고요.
양 :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작품중에는 ‘오 금강산’, ‘능소화’ 등을 좋아하는데, 그 동안 작품도 꽤 많이 쓰셨죠?
이 : 아마 지금까지 작곡한 곡이 1,000곡이 넘을 것입니다. 제가 작곡한 곡은 제 자식과 같아 하나 하나 애착이 가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고르라면 ‘얼’과 ‘한오백년 살리라’를 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저는 종교음악의 토착화에도 힘을 써 명상음악을 많이 작곡하였고,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사막의 이슬’이라는 곡도 썼는데, 이 곡은 오페라로 발전하여 “솔뫼( 오 김안드레아)”로 공연되기도 하였습니다
양 : 교과서에 실린 곡도 있다면서요?
이 : ‘오 금강산’, ‘검정 고무신’, ‘어부사시사’, ‘가시버시 사랑’ 등은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양 : 그렇게 많은 곡을 작곡하셨으면 당연히 상도 많이 타셨겠어요.
이 : 예, 작곡상은 빠지지 않고 탔다고 할 수 있겠는데,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린다면 90년도에 대한민국 작곡상 최우수상과 백상예술 대상, 92년도에 KBS 국악대상 작곡상, 94년도에 대한민국 관악작곡상 등을 탔고, 최근에는 2010. 2. 말에 한국작곡가회가 주는 한국작곡상을 탔지요.
참 많은 곡을 쓰셨고, 참 많은 상을 타셨다. 처음 이교수님이 국악의 대중화를 위한 곡을 쓰실 때에 국악계 일부로부터는 어디서 이상한 놈이 들어와 우리 음악을 망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이제는 국악, 양악 할 것 없이 음악계에서 이교수님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이교수님은 혼자서만 우리 음악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니다. 가족들 모두가 국악을 하면서 가족 악단 ‘둥지’를 결성하여 공연도 하고 있다. 아들 이영섭은 대금, 딸 이은기는 가야금, 며느리 김복음은 거문고, 사위 이석종은 장구를 비롯한 타악기 그리고 사모님 황경애 여사는 전통춤과 장고. 부럽다. 온 가족이 음악으로 하나 되어 음악을 즐기고 대중들에게 멋진 음악을 선사하고 있으니...
양 : 가족들 모두가 우리 음악을 하신다면서요?
이 : 사실 제 아내도 어렸을 때에는 전통 무용을 배웠지만 자라서는 피아노를 배워 저와 결혼하고는 오랫동안 피아노 학원을 경영하였고, 아이들에게도 피아노, 바이올린 등 서양 악기를 배우게 했죠. 그러다가 제가 본격적으로 우리 음악을 찾게 되면서, 아내도 어렸을 때 전통 무용을 배우던 꿈과 열정이 되살아나 중요무형문화재 97호이신 이매방 선생에게 살풀이 춤을 이수하는 등 전통 무용을 다시 시작하였죠. 아이들도 제가 어울림 연주자들과 어울려 음악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도 우리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하여 아들 영섭이와 딸 은기가 모두 국악예고에 들어가 영섭이는 대금, 은기는 가야금을 전공하게 된 것이죠.
양 : ‘둥지’라는 가족 실내악단은 어떻게 결성된 것입니까?
이 : 제가 이렇게 우리 음악을 한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서 방송에도 나가게 되었는데, 1995년인가? KBS에 가족들이 다 같이 나가 연주를 할 때에 김호성 아나운서가 ‘둥지’ 가족 실내악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정식으로 창단 연주회를 가진 것은 99년도입니다. 이후 아이들이 커서 시집, 장가를 가면서 사위와 며느리도 우리 음악을 하는 연주자를 맞아들였고, ‘둥지’라는 이름으로 음반도 2집까지 냈습니다.
이제 평탄한 계곡길은 끝나고 구불구불 산을 타고 올라야 한다. 이 산을 올라 주능선을 타고 계속 가다보면 아미산으로 갈 수 있겠지? 지난 6월에 히말라야 8,000미터 14봉을 완등한 오은선씨도 아미산을 올랐다가 이곳 마리소리골 악기박물관을 찾았었지. 우리도 산을 타고 계속 오르고 싶으나, 일기예보만을 믿고 아이젠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서 돌아서려 한다. 기타를 치시는 이교수님은 손이 생명인데, 괜히 미끄러운 눈길을 오르다가 손이라도 다치시면 안 되지 않는가? 우린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이병욱 교수님이 어울림 1집을 내실 때만 하여도 서양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이렇게 우리 음악에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우리 음악을 자기 음악 세계에 받아들인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이병욱 교수님이 거의 처음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인간 이병욱과 이병욱의 음악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각자 또는 끼리끼리 이교수님의 음악 세계와 인연을 맺어오다가, 이들이 이병욱의 음악 세계를 사랑한다는 공통분모로 모인 것이 이병욱과 어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약칭하여 어울사랑.
양 : 어울사랑은 언제 어떻게 하여 모이게 된 것이죠?
이 : 악기박물관 개관을 축하하는 음악회를 열었을 때,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마리소리골로 모여들었죠. 이들이 음악회가 끝나고 난 후 뒤풀이 자리에서 모임을 정식으로 결성하자는 얘기가 나와 어울사랑이라는 모임 이름도 짓고 정관도 만들었으며 재작년 여름에는 인터넷에 카페(http://cafe.daum.net/marisori)도 개설하여, 현재 회원이 500명이 넘을 것입니다.
양 : 일종의 이병욱 팬클럽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카페에 들어가보면 어울사랑채 건립추진위원회라는 것도 있는데, 무슨 건물을 지으려나보지요?
이 : 마리소리골 악기박물관에서 음악회를 열면 전국에서 어울사랑 회원들이 모여듭니다. 전국에서 회원들이 이렇게 먼 강원도 산골짜기까지 모여드는데, 음악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흩어질 수는 없죠. 음악회가 끝나면 마리소리골 마당에서 저녁을 먹고, 또 토굴에서 작은 음악회를 엽니다. 작은 음악회가 끝나도 회원들의 뒤풀이는 밤이 깊게 이어지면서 회원들은 각자 토굴과 본채에서 나누어 잠을 자게됩니다. 그런데 방이 제한되어 있다보니 아무래도 회원들의 잠자리는 불편하여 좀 더 넓은 숙소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죠. 게다가 회원들 사이에는 마리소리골의 악기박물관을 현재에 수준에 머무르는데 만족하지 않고, 세계에서 찾아오는 박물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더욱 더 이러한 시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지난 봄에 어울사랑의 임병걸 회원이 발의하여 어울사랑채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이 되어 많은 회원들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죠.
양 : 어제 공연이 끝나고 토굴로 가는데 사단법인 마리소리 음악연구원 팻말이 있더군요. 마리소리 음악연구원은 또 뭡니까?
이 : 마리소리 음악연구원은 악기박물관을 통하여 우리 음악을 널리 알리고, 또 악기박물관에 문화교실을 열어 이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를 누릴 기회를 주고자 2008. 2.경에 설립한 음악연구원입니다. 처음에 이 산골짜기에 무슨 박물관이냐 하며 회의적으로 보던 주민들도, 박물관에서 전통민요, 전통춤, 풍물놀이, 색소폰의 4개 반을 접하면서 문화를 알게 되니 지금은 다들 좋아하죠. 앞으로 마리소리 음악연구원에서는 1박2일 가족 체험 프로그램, 방학을 이용한 교사 연수, 방학중 초·중·고생을 위한 악기 체험 강습 등을 계획하고 있고, 또 세계 민속음악 축제 등을 개최, 전 세계인들의 민속축제의 한마당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얘기하는 사이 우리들 시야에는 악기박물관이 다시 들어온다. 우리와 같이 계곡을 따라 내려가던 개울과 이별하고 악기박물관 마당으로 오르니 악기박물관을 지키는 장승은 잘 다녀왔냐며 그 투박한 웃음으로 우리를 다시 맞이한다. 마리소리골 - ‘마리’라면 ‘머리’를 뜻하는 것일 터. 그럼 ‘마리소리’는 ‘으뜸소리’ 하고도 통하겠다. 이 마리소리골 골짜기가 이병욱 교수님이 꿈꾸는 으뜸소리 골짜기로 세계에 빛날 그날을 그리며 이병욱 교수님과 같이한 아침 마리소리골 산책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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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대단하셔요!! 못하시는게 없으신 양변호사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