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1111번째의 육필 편지(장사익 이야기)
이원우
용인에서 마포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지하철을 이용한다 치자. 네 번 환승을 해야 한다, 도중에 1분도 머뭇거리지 않고 목적지까지 간다 해도, 두 시간 넘게 걸린다, 천금을 준다 해도 혹한이라면 젊은이들조차 발품을 팔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게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이리라.
한데 나이 들면 무모해져서 그런가? 한 촌로(村老) 이국창이 보기에도 힘겨운 차림을 하고 집을 나서는 게 아닌가. 우선 그는 세련과는 약간 거리가 먼 패딩을 걸쳐 입었다. 해서 움직임이 둔하고말고. 게다가 캐리어를 끌고 가는데, 속에 든 것이 무거워 보인다.
그래도 주위 사람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없다는 듯 그는 태연자약한 표정을 짓는다. 가관 아니냐고? 글쎄다, 적절한 표현일는지…. 그러는 중에도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눈빛 하나는 강렬하다. 스스로도 그 사실엔 긍정하듯 자신이 들으랍시고 한마디 내뱉었다.
“안광(眼光)이 지배를 철한다 했지. 책을 읽을 때 명념해야 할 덕목이지만, 오늘밤 행사 내내 모든 걸 꿰뚫어 보는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였을까? 제삼자라도 그러는 그의 온몸에서 솟아나는 듯한 대단한 각오를 읽을 수 있었으리라. 그가 늙을 노(老) 자쯤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행동거지를 연이어 보인 것이다. 그러다 플랫폼 끝에 서서 그가 뜬금없이 발성 연습을 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레미파솔라/솔파미레도시라솔
기본음인 ‘도’에서 시작하여 한 옥타브 올려 ‘라’까지 도달했다가, 내려온 최저음 ‘솔’에서 거친 과정이다. 나이가 팔순에 가까워도 그는 무리 없이 어디서든 이를 소화해 낸다. 두서너 번을 그 소란(?)을 피우고도 성이 안 찼던지 그는 이어 O Sole mio를 입에 올렸다.Chebel-la cosa ‘naiur-na-ta’e so-le……sta-nfron-tea stan-fron-tea-te
일상(日常)이 되어 있는 그의 기행에 이번에도 반응이 엇갈렸다. 여남은 명의 승객 중 서넛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네댓은 코웃음을 쳤다. 두 경우 다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참, 단 한두 명은 그에게 미소와 가벼운 박수를 보냈다. 그가 가수임을 아는, 말하자면 그의 가창력을 인정하는 팬인 거다.
하지만 그는 다음 역에서 하차했다. 집찰구(集札口)를 통해 밖으로 나와서는 급히 택시를 타고 귀가한 그를 보고 아내가 화들짝 놀란다. 그가 아내에게 하는 말이다.
“도무지 안 되겠어, 자칫하면 색소폰 망가뜨리겠어, 맨몸으로 갔다 오지 뭐.”
“아니, 당신 특유의 연주법을 공식 석상에서 처음 선보인다고 했잖아요?”
그랬다. 그의 캐리어 속에는 얼마 전 마련한 알토 색소폰(프랑스 산 셀마)이 들어 있었던 거다. 자그마치 6백 만 원 넘게 주고 구입한…. 어지간한 중고 자동차 값과 맞먹는, 초보자 혹은 초심자에겐 부담스러운 가격이 아니었던가? 아내에게 캐리어를 넘겨주며 한마디 건넸다.
“비록 캐리어에 넣었어도 그걸 끌고 네 시간여 동안 갔다 온다는 건 무리였어. 하마터면 재 산 1호 망가뜨릴 뻔했지 뭐야.”
이국창(李國唱)은 올해 여든 살을 맞는다. 물론 나라 ‘국(國)’과 노래 ‘창(唱)’을 이름으로 쓰다니, 의아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자꾸만 의아스럽게 들린다면? 그들이 비정상이다. 물론 시조 경창대회에서 최고상 즉 대통령상을 받으면 그는 국창 칭호를 받는다. 그 세계를 몰라서 그렇지 시조국창은 수두룩하다. 이국창이 아는 부산의 ‘시조(時調) 국창’만 해도 여남은 명이 넘는다.
그래도 그렇지 이름이 국창이라니 너무 심했다는 놀림을 들으며 여태껏 살아온 그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수십 년 그러다 본즉 이젠 면역이 생겨서 그런지 피차가 편한 기분으로 순간순간을 넘긴다. 하지만 그는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딱 한 번 장려상을 받은 적이 있을 뿐이다. 그 분야 국창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그 자신이다. 이국창이라는 이름의 탄생 연유를 밝혀야 할 때도 있을밖에.
그는 성주 이 씨다. 중시조 휘(諱) 이장경의 후손이다.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각각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으로 지었다는 분. 아버지가 그(국창)의 이름을 병창(炳唱)이라 지었더라나? 창(唱) 덕분인지 자라면서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고, 드디어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본인의 고집으로 ‘국창’이라는 예명을 지어냄으로써 문중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하필이면 딴따라냐며 비아냥거리는 집안 어른도 상당수였다는 일화(?)는 우습기만 하다. 왜냐고? 아래가 그 대답이다.
“백년설(白年雪)을 모르는 가요계 인사는 없지요. 아니 중장년(中壯年) 층도 마찬가지입니다. 친일 운운하지만, 그 반대의 시각도 많습니다. 성주 이 씨 가문에서 배출한 걸출한 거목이었 습니다. 그분은 이, 창성할 창(昌) 자, 옥돌 민(珉) 자를 본명으로 썼지요. ‘대지의 항구’는 말 이 많지만(친일 가요 운운), ‘나그네 설움’이나 ‘ 번지 없는 주막’ 등은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성주 후손에서 가수가 많이 배출된다는 게 영광이지 수치가 아닙니다. 국창 이 아주 특별한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면 합니다.”
이제 비밀을 밝혀야 할 때인가 보다. 이국창(李國唱)이란 이름은 애국가와 관련이 깊다. 평생 교육계에 몸을 담았다가 정년퇴임한 그는 그 흔한 표현 그대로 ‘애국가에 살고 애국가에 죽겠다‘는 뜻으로 공언을 해 버린 게 십여 년 전이다. 한 번 다중 앞에서 그렇게 입을 열었으니, 지저분한 표현이지만 ’빼도 박도 못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는 애국가를 목청에 싣고 산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하다. ’창(唱)‘이 부르다는 타동사이고, ’국(國)‘은 애국가가 줄어든 거라고 간주해 보자. ’타동사 뒤에 목적어‘란 어순에 어긋났지만 남들이 이름을 익히기에 수월하리라는 생각에서 굳혀버린 게 이국창이다. 궁색한 변명은 아니리라.
다시 그의 집 앞. 이렇게 소란을 치르다 보니 좀 지체될밖에.
하는 수 없이 이국창은 택시를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색소폰을 내려놓는 대신 그가 아내에게 건네 달라고 부탁한 것은 지휘봉이었다. 서너 달 전 악기점에서 수입할 때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과 맞바꾼 것이다. 대만산(臺灣産)이라 했다.
택시는 쉽게 잡혔다. 목적지를 밝히고 승차하여 편안하게 뒷좌석에 앉았다. 하지만 길이 막혔다, 줄곧. 초조해진 이국창은 발을 구르기 전이라도, 충동 하나를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가 인상이 참 좋아 보이는 기사에게 뜬금없이 3만원과 가수 명함을 조심스럽게 건넨 것이다. 그러면서 아주 부드러운 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기사님, 마포 문화원으로 가십시다. 오늘 저녁 중요한 행사에서 제가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사전 발성 연습을 하려니 시간과 장소가 마땅찮군요. 양해해 주신다면 차 안에서 연습을 좀 하게 해 주시겠습니까? 반시간이면 됩니다. 제 성의도 받아 주시고요.”
뜻밖에 가외 수입을 올린 기사가 어리둥절해하면서 하는 말이다.
“가수시군요. 대한가수협회 정회원 914호. 용인에서 택시를 30년 가까이 몰랐지만, 이런 경 우는 처음입니다. 제 이웃에 유심초 형제가 살고 있거든요. ‘사랑이여’를 부른…. 그 둘을 아십니까?”
“그럼요. 그들의 본명은 각각 유의형과 유시형. 그들을 모르면 간첩이지요. 대신 그 둘은 저 를 모를 겁니다. 저는 무명(無名)에 가까워서요, 허허.”
“기왕지사니 저도 노래를 좋아하는 터, 우리 둘이서 ‘사랑이여’를 한 번 불러 보면 어떻겠 습니까? 제 차에 반주기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걸 마다할 리가 없었다. 이국창도 수십 년 노래 인생에서 그야말로 처음 겪는 일이라 마치 횡재를 만난 느낌일 수밖에. 둘이 의기투합한 셈이다. 전주가 터지고 둘은 목청을 모았다
별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여/ 꿈처럼 행복했던 사랑이여/ 머물고 간 바람처럼/기약 없이 멀어져 간 내 사랑아…
택시 기사의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이국창은 적이 놀랐다.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보내자, 기사가 화답한다. 술 취한 승객을 만나면 가물에 콩 나 듯 가끔 있는 일이라 전제하곤, 이국창더러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기사가 덧붙인다. 이국창 말에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섞인 것으로 봐서 용인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다고. 10년 좀 넘었다는 얘기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하면 적응을 잘했다는 뜻이었을까? 아무튼 택시 안에서 이국창은 산뜻한 출발을 만끽할 수 있었다.
길이 계속 밀렸다. 그래도 행사 개회 시간이 충분하게 남은 터, 이국창은 조바심을 갖지 않았다. 그의 청이다.
“기사님, Oh Danny Boy가 반주기 안에 수록되어 있을까요? 원어로 즉 영어 가사가 뜨는 것 말입니다. 부탁합니다.”
“예 있습니다. 하지만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한 번 시도해 보십시다. 오늘 저녁 선보일 곡입니다.”
하지만 기사가 그냥 기우(杞憂)를 토로한 게 아니었다. 전주부터 음정이며 화질이 엉망이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이국창은 기상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완창(完唱)할밖에. 둘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듯했다고 하자.
O Sole mio는 아예 없다고 했다. 어쩌겠는가? 오늘 저녁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다면, 다시 말해 한 곡으로 끝내야 한다면 단연코 O Sole mio를 택하려 했는데…. 어쩌겠는가? 그는 무반주로 연습을 할 수밖에.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남은 시간 40여분, O Sole mio에 혼신의 힘을 쏟자꾸나!”
드디어 목적지 마포문화원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기사가 물었다. 마치 잊고 있었기라도 한 듯한 어조로 말이다.
“오늘 무슨 행사입니까?”
“내가 존경하는 문우(文友) 한 분이 문학상을 받습니다. 많은 내빈이며 하객들이 자리를 가득 채울 텐데 그분들을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지요.”
“아니 문우라면 글 쓰시는 분 아닙니까?”
“그렇지요. 저 소설가를 겸업하고 있습니다. 둘 다 시원찮은데, 항상 과욕을 부리는 게 탈이 지요. 실은 오늘 한국 최고의 가수가 초대받아 옵니다. 혼자지요. 대신 문우들은 원로에서 중진, 신예에 이르기까지 백여 명이구요. 문학 행사입니다.”
“이국창 선생님, 대단하시군요. 소설까지 쓰신다니…. 그 가수가 누구입니까?“
“장사익 가수, 아니 장사익 선생이라 불러야겠군요. 정말 그는 위대합니다. 나보다 일곱 살 적지만, 나는 그를 존경합니다. 그 까닭을 뒷날 만나서 이야기할게요. 제게 문자로 기사님 전화 번호 입력시켜 주세요.”
행사장 안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관내 기관장과 내빈 및 하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가운데에 첫째 줄에 앉아 있던 J 시인이 일어서면서 이국창에게 손짓을 했다. 자기는 일이 있어 먼저 나가니 그리로 오라는 뜻이었다. 뒤돌아보니 아는 문단 선배 몇 분이 보였다. 그들에게 일일이 목례를 보냈다.
이윽고 그는 앞에 서 있는 주인공 P 작가를 찾아갔다. 마침 옆에는 지역구 문인 회장 K 작가도 서 있었다. 둘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둘이서 거의 동시에 의아스럽다는 듯 입을 여는 게 아닌가?
“아니, 이 작가님. 웬 지휘봉입니까?”
“…….”
“지휘봉을 왜 들고 오셨는지 물었습니다.”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이국창이 대답한다.
“집 바깥을 나가면 예사롭게 이걸 들고 다닙니다. 말하자면 지참물(持參物)이지요.”
“역시 괴짜시군요. 허허. 색소폰은 갖고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니 운반 자체가 힘들어서….”
그러곤 이국창은 두 번이나 집을 나선 좀 전의 이야기를 우스개 삼아 늘어놓았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귓전을 어지럽힐 정도로 떠들면서 말이다. 특유의 농담까지 섞다 보니,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파안대소해서 어색한 분위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회를 맡은 L 시조시인의 모습이 눈에 띄는 게 아닌가! 가톨릭문인회 사무국장을 오래 맡았었던 분이라 알은체를 하곤 귀엣말을 했다.
“국장님, 오늘 국민의례 때 애국가 몇 절까지 부릅니까?”
“1절만 부를 겁니다. 요즘은 웬만한 행사 때 모두 그럽디다. 한데 왜 그러시지요?”
이국창은 지휘봉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행여나 누가 지휘를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행사에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며칠 전 어떤 문학 행사에서 제가 애국가 지휘를 했거든요. 반응이 무척 괜찮았습니다. 유튜브에 떴는데 조회수가 3천 회를 넘었습니다. 광고까지 붙었습니다.
“그래요, 그거 듣느니 반가운 소식이군요. 하지만 너무 황망 중이라 힘들겠습니다. 낯선 이 선생님이 무대에 올라가시면 혹시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용서하세요.”
이국창은 머릴 긁적이며 돌아서는 수밖에. 그래도 못내 아쉬웠다. 애국가 지휘를 하며 선창先唱)을 하면, 자신의 존재를 마포의 유지들이며 문인들에게 심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오늘 장사익 선생도 온다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반주가 ‘사장조(長調)’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그 음정에 맞춰 부를 수 있었고.
실망한 그는, 이왕이면 1절보다는 4절을 제창하는 게 뜻이 있다는 자신의 확신도 밝히지 못했다. 여태까지 자신이 체험했던 몇 가지 경우를 덧붙이려다 그것마저 그만둘 수밖에.
행사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만큼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아귀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현장에 있으려니 기분 또한 덩달아 좋아 이국창은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앞서 들먹인 두 곡을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드디어 시상식이 끝났다,
잠시 휴식 시간이 있었다. 한 30분쯤 되었을까? 이국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문우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늘 자기가 부를 노래를 머릿속에서 계속 재현해 내었다. 물론 휘파람과 허밍으로도 그 둘을 허공에 날렸고말고.
분위기는 점점 들떠 올랐다. 모두가 왁자지껄! 한데 갑자기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지는 게 아닌가. 뒷좌석에서부터 마치 야구장 파도 응원 때처럼 굉음(?)이 옮겨오고 있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터뜨린 말이다.
“장사익이닷!”
과연 장사익이 들어서서 앞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이국창의 시선이 붙잡을 수 있었다. 이국창은 다시 한 번 나지막이 부르짖었다.
“아, 드디어 내가 그를 만나는구나. 나보다 더 정확하게 애국가 선창을 한 가수를 말이다!”
행여 이 말을 들었거나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냉소를 보내리라. 저 친구 건방이나 교만이 보통을 넘었구먼그래. 자기가 뭔데 천하의 장사익과 비교하려 든단 말이야? 어정뱅이 이상도 이하도 외양(外樣)도 아닌 주제에 자신을 다중 앞에서 치켜세워?
그러나 실제론 그의 말이 맞는다는 데에 남들은 주목해야 하리라. 일고여덟 해 전 사직 야구장에서 그는 전(前) 부산 시민의 자격(?)으로 팬이라 이름 아래 ‘애국가’를 선창한 적이 있는 것이다. XTM-TV에서 라이브로 중계했는데, 그때까지 어느 가수나 유명 인사에게도 인색했던 극찬을 쏟아낸 것이다. 캐스터와 해설위원이 말이다. 선창의 의미며 목적에 부합된다는 평을 그 둘은 잊지 않았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이거였다.
“성악을 공부한 분 같아요. 정말 드물게 애국가를 선창하신 이국창 씨. 애국가 선창사(先唱 史)에 길이 남을 겁니다.”
그 방송이 이국창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악영향을 끼친 바도 만만찮았다고 하자. 어디서든 그는 그 영상을 틀어놓고 자랑하기에 바빴으니…. 카카오톡으로도 수없이 동료며 친구들에게 퍼 날랐다. 그런 걸 접하는 사람들이 호감만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혼자만 몰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리라. 물론 세월이 흐를수록 스마트폰을 펼치는 빈도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드디어 장사익 가수가 무대에 섰다. 2부의 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그가 ‘귀천’을 불렀는데, 직접 그의 노래를 들어보고 이국창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슴을 꿰찌르는 강도(强度)가 방송으로 접하던 때와는 또 달랐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아나운서 뺨칠 정도의 솜씨를 자랑하는 L 국장은 일사천리로 프로그램을 일어나갔다. 그는 때때로 유머를 섞음으로써 분위기를 시종일관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십 분쯤 시간이 흐른 뒤에 이국창은 장사익 가수를 찾아간다. 물론 둘의 만남은 처음이다.
“장사익 선생님, 이국종이라 합니다. 꾀죄죄해도 가수입니다. 대한가수협회 정회원….”
“아,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이국창이 건넨 명함을 보더니 장사익 가수는
“하시는 일이 많군요. 소설을 쓰시구요. 사진이 참 멋집니다. 군모(軍帽)를 쓰신 이유가?”
“예. 일선 부대에 안보 강연을 무료로 다닌 지 3년입니다. 제가 제대했었던 26사단 직할 중 대와, 사령부 예하 73여단과 3개 대대를 중심으로…. 애국가 바로 부르기를 강조합니다.”
“…….”
“몇 년 전에 저도 야구장에서 ‘애국가’ 선창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산 사직 야구장에서였지요. 롯데와 기아의 경기를 앞두고.”
장사익 가수는 그쯤에서 이런 느낌을 가졌으리라. 이 양반 참 말이 많군 그래, 길기도 하 고, 쯧쯧.
그렇지만 이국창은 그걸로 끝내지 않았다. 눈치가 없어서일까?
“동계 올림픽 개막 식 때 장 선생님의 ‘애국가 선창’을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 어서서 따라 불렀지요. 가족들이 웃고 야단인 가운데…. ‘애국가’와 평생 인연을 맺어온 제게 장사익 선생님의 그 선창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 같은 사건이라 여겼습니다.”
“과찬의 말씀이군요.”
“아닙니다. 특정인을 들먹여서 미안합니다만, 조용필도 야구장에서 애국가 1절을 소화시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첨을 떨려는 목적이 아니라 제가 들은 애국가 선창 중에 장 사익 선생님이 으뜸이었습니다. 아마도 전무후무하겠지요.”
하긴 그의 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귓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어느 여가수의 망발을 유튜브를 통해 시청할 수 있다. 그날 여가수는 콘서트에서 독창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음정 박자를 제 맘대로 뒤바꾸어 애국가를 불렀다.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고음으로…. 현장의 팬들은 감상만 할 따름이었으니 이를 무엇으로 증명할까? 아연실색할 따름이었다 하자.
마침 이국창 자신의 차례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걸어 나와 무대에 올라섰다. 나머지 이야긴 2부 순서가 끝나고 다시 털어놓을 수 있으리라 여기고.
몇 시간 전에 택시 안에서 소란을 피운 O Danny Boy(아일랜드 민요)와 O Sole mio(이탈리아 가곡)를 부르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처럼 장사익 가수 앞에서 열창한다는 생각에 뜻밖의 고음(高音)을 터뜨렸으니…. 가수들은 반주가 없을 경우 그런 식으로 첫음을 잡음으로써 불안을 돌파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거다. 예서 재현해 보자. Ma n’a-tu so le—cchiu bel-lo’ohi ne
그렇게 서투른 이탈리아어 발음(발성)으로 O Sole mio를 끝내고 나니 이마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한데 장사익 가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다. 그래도 무대에서 내려올 수는 없었다. 이국창은 내친김이다 싶어 Oh Danny Boy를 혼신의 힘으로 불렀다. 그때까지 군모를 쓰고 있었는데 그 까닭을 설명했다.
“Oh Danny Boy는 아시다시피 전장에 나가는 아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아일랜드의 민요입니 다. 우리나라에선 ‘아 목동아’로 알려져 있지요. 제가 군부대에서 안보 강연을 하다 보니 장 병들에게 부모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이 Oh Danny Boy를 애창하는 편입니다. Danny가 뭐 냐고 많이 묻습디다. Danny는 이름입니다.”
그날 그는 저녁 눈치 없는 늙은이라는 이야길 더러 들었으리라. 자신이 생각해 봐도 젠체하는 습관을 여과 없이 드러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랴. 그래서일까? 행사 후의 저녁 식사 시간 내내 그는 좌불안석이었다.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떠들어댔으니…. 마침 맞은편에 유명한 색소포니스가 앉아 있었으니 나름대로의 지론 하나를 펼친 거다.
“저는 못 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술도, 담배도, 춤도, 바둑도, 당구도, 심지어는 자동차 운전 도 못 합니다.”
“설마하니 그렇기까지야…. 다른 건 몰라도 운전을 할 줄 모르신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사실입니다. 운전을 못 하니 딱 하나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뭔데요?”
“반주기를 운반할 수 없으니 실제 색소폰 연주를 하려면 애로 사항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운전 못 하신다면 색소폰 연주가 힘드시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 어쩝니까?”
이국창은 또 설명해 나간다.
“실은 오늘도 용인에서 여기까지 색소폰을 캐리어에 넣어 끌고 올 생각이었습니다. 무사히 닿기만 하면 제가 혼자서 색소폰 몇 마디 연주하고 또 육성으로 노래를 부르려 했는데…. 다 시 말씀드려 높은 음이 중심이 된 마디는 색소폰으로, 낮은 음 마디는 육성으로 소화시키려 했습니다. 제가 가진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보면 악보와 우리말, 이탈리아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바장조’입니다. 제일 높은 음이 한 옥타브 위의 ‘파’인데, 이게 색소폰으로 소릴 내면 ‘라’가 나오거든요. 사실 ‘라’를 육성으로 내기는 힘듦을 느낍니다. 그 조화를 외람되지 만, 오늘 선보이고 싶었는데….”
“같은 테이블의 일고여덟 명이 웅성거렸다. 알 듯 모를 듯한 그의 설명이 동의를 얻기는 힘들었으리라. 어쨌거나 그는 일어서면서 한마디 남겼다.
“장사익 가수님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제가 형님으로 모시는 오기택 형님도 여기 마포에 계시니 이 또한 기쁨이구요. 다른 건 제쳐두고라도 장사익 가수님이 동계 올림픽 때 절창(絶 唱)한 애국가를 잊지 못할 겁니다. 마포의 문우들도 오늘부터 더욱 존경하게 될 겁니다.”
귀로엔 지하철을 이용했다. 떠나기 전, 이 일화를 소개하지 못했던 점이 아쉬웠다. 마포 FM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는 그였다. MC는 박수정 대한가수협회 이사. 마칠 무렵 다음 출연자가 누구였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차도균 가수라 대답했다. 물론 사전 교감(交感)이 있었지만, 그는 차도균 가수도 형님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차고 치는 어쩌고저쩌고’ 소릴 들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다음 방송 떄, 차도균 선배와 MC가 대담하는 동안, 이국창은 내내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점심시간에 되어 다시 자리를 옮겨 앉아서 이국창은 구내(區內) 마포대로 238번지에 작업실이 있는 최백호에게 전화를 안부를 주고받았다. 차도균 선배의 말.
“백호 보게, 여기 앉은 이국종이 자네와 너무 닮았어. 목소리까지…”
“아, 그분 제 누님과 사범학교 동기동창이십니다. 한명숙 ‧ 고(故) 금사향 선배님들도 한결같 이 그러셨어요.”
“우리 ‘낭만에 대하여’를 부를 참이야.”
“형님 파이팅입니다.”
이국창은 내친 김에 차도균 선배에게 전화를 냈다. ‘철없는 아내’를 몇 마디씩 바꿔 부르고…. 잠시 졸다가 다시 환승하기를 거듭하여 집에 왔을 땐 거의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아내에게 오늘 밤에 일어났던 일을 대강 일러주곤 씻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던지고 쓰러질 수밖에. 그런데 좀체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그는 그만 일어나고 말았다. 오래된 철제 캐비닛을 열고 서류함을 통째 들어 책상 위에 놓은 그의 손이 바빠졌다. 밑 칸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여진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모두가 4백자 원고지에 육필로 정성들여 쓴 편지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놀라고도 남을 정도로 한글 궁체에 가까운 글자들이, 칸을 꽉 채운 거다. 빼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그만하면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받을 만한 한자 한자가 살아 숨 쉬는 느낌을 준다. 정자正字)가 아닌 흘림체라는 게 함수다.
네 번째 칸에서 주섬주섬 뒤지더니 그는 열 장이 넘는 편지 한 통-각각에 클립을 끼웠다-을 끄집어낸다. 전전(前前) 대통령이 수신인이다. 그 행동을 바라보는 아내에게 그가 한마디.
“참 힘들게 썼는데, 내 청원을 안 들어 주던 대통령이 못내 섭섭했어.”
“또 그 얘기. 노병이 느닷없이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에서 애국가를 선창하게 해 달라는….”
“그래도 그렇지, 육필 청원서(?)는 문화체육부로 이첩되었고, 이게 다시 국방부를 거쳐 국방 홍보원에까지 하달되었으니 말이야. 성사는 본 되었고, 내가 국방홍보원에까지 불려가게(?) 되 단초가 될 줄이야. 쯧쯧. 청와대든 문화체육부든 국방부든 다 현명하지 못하더군. 내가 노병으로서 전 국민 앞에서 애국가 선창을 한다는 게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인지…. 나는 사직 야구장에서 검증을 받은 바 있었으니, 그들의 처사가 못마땅하다는 거야.”
“기회가 있을 테니, 훗날을 도모하기로 하고 그만 주무세요.”
참, 쌓아놓으면 30센티미터가 넘는 육필 편지(사본)의 상당량은 3~4년 전 그가 문인단체의 간부에 출마하면서 회원들에게 한 표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그걸 하나 현명하게 처리해 주지 않은 대통령을 이국창이 불신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 모른다. 이듬해 그는 다시 한 번 ‘마운드 위의 마이크 앞에 서는’ 그 도전을 했다. 이번에는 대통령이 아니라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에게 역시 열 장의 육필 편지를 보낸 거다. 수시로 KBO 사무실에 가서 만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지만, 말보다는 글이 그에게 감동을 줄 거란 확신에서였다. 참, 그는 26사단 출신인 이국창의 전우이기도 하다. 국립 현충원에서 만나기도 하는…. 그에게서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7차전까지 가는 걸 전제로 결승전 때 한 번 실력을 뽐내보라는 거다. 그는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만 되면 그의 ‘애국가 사랑과 선창(독창) 실력’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그해 한국시리즈는 불행히도(?) 5차전에서 끝나고 말았던 거다.
다시 몇 년이 흘렀다. 마포에 다녀오고 나서 말이다. 코로나 바람에 모든 게 움츠러들어 있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시즌 내내 전 경기가 펼쳐졌다. 무관중(無觀衆) 경기 비슷했지만. 한국시리즈도 다가오고 있었고. 꿈틀거리는 ‘애국가 선창’에의 욕망을 그는 떨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다시 전(前) 대통령에게 호소를 한다, 전번보다 원고지에 쓴 양도 많고, 특히 군부대에서 장병들에게 바른 애국가를 지도하던 때의 사진이며 기타 자료도 첨부했다.
답신의 무게는 1차와 비교해서 어금지금했다. 한데 11월 중순 어느 날, ‘청원’을 접수했다는 배달증명서가 온 거다. 그러고 나서 석 달 뒤에 약간의 진화가 있었다. 퇴직 교육자 ‧ 문인 ‧ 군부대 안보 강사 ‧ 가수 등의 신분으로서 ‘애국가 사랑’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서신을 보내 줘서 고맙다는 간접 답신이 왔으니…. 세종특별자치시 국민권익위원회 행정분과 교육민원과장이 발신자였다. 그만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천만에! 그건 이국창에게 동문서답이나 다름없다는 느낌을 주었을 따름이었다. 애국가 선창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느냐는 내용은 전무한 거다.
사실 그해 한국시리즈 내내 아무도 애국가 선창을 안 했다. 코로나 탓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첼로로 애국가를 연주하는 걸 그도 봤으니 하는 말이다. 그 까닭만 설명하면 그도 이해하고도 남았으리라. 두 대통령 다 미지근한 반응이었으니 그가 실망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하기야 국무총리 출신의 KBO 회장은 그의 편지를 받고 일체의 반응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두 대통령에게서 적잖은 위안을 얻은 셈이랄까?
드디어 20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당선인이 결정됐다. 그 당선인이라면 이국창의 충정(衷情)을 이해하리라 철석같이 믿는다. 인수위원회 업무가 한창일 떄, 그는 당선자에게 스무 장 가량의 육필 편지를 쓸 생각이다. 이 1111번째의 육필 편지가 이국창으로 하여금 현충일 추념식 혹은 6‧25 기념식에서 애국가를 선창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시리즈도 그를 기다린다.
어쨌든 혼잣말로서의 화두(話頭)조차 애국가 선창이다. 장사익 가수의 모습을 밤낮없이 떠올리는 건은 그를 존경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 정서에 바야흐로 가족들도 혼연일체가 되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이윽고 이웃으로까지 점점 외연을 넓혀야 하지 않을까?
딱 한 사람 더 영원히 기릴 만한 애국가 선창 경력을 가진 가수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수년 전 한글날 경축식 때의 방글라데시 출신 방대한 가수다. 물론 귀화한 제법 오래 됐고, 이국창은 그를, 수원 팔달 시장 공연 시 취재하여 보도한 바 있다. 방대한 한국 사람보다 더 우리말 우리글에 능통한 친구다. 애국가 선창은 더하기 알파? 오후엔 통화를 할 생각이다.
이원우
부산 명덕초등학교장 정년퇴임. 1976년 『새교실』 ‘지우문예’ 3회 천료(김사림 시인). 1979년 『수필문학』 초회 추천(서울대 차주환 교수). 1983년 『한국수필』 2회 천료(조경희 회장). 1997년 『한글문학』 신인상(서울대 구인환 교수) 소설 등단. 부산북구창립문인협회장 ‧ 부산북구문화예술인연합회장 ‧ UNESCO 부산시 사무총장 및 부회장 역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 한국가톨릭문인회 이사 ‧ 한국문인협회 문인복지위원 역임. 韓國戰爭文學會 자문위원. 대한가수협회 회원(914). 덕성토요노인대학장(매주토요일 오후 무료노인학교 21년 운영), <실버넷뉴스> 기자. 가요콘서트 18회. 오케스트라 가곡 협연 2회. 26사단 홍보 대사. 수필집 『어머니의 초상화』 등 15권 ‧ 소설집 『母部隊 여군 만만세』 등 5권 ‧ 기타 4권 등 총 24권, 1천만원 KNN부산방송 문화대상 ‧ 5백만원 화쟁포럼문화대상(소설) ‧ 경기PEN문학대상 ‧ 부산PEN문학대상 ‧ 경기문학인회 문학대상 ‧ 『문예시대』 문학대상』 ‧ 『표암문학』 문학대상 ‧ 부산수필 대상 ‧ 부산북구 문학대상 ‧ 『한국수필』 청향문학상 ‧ 부산가톨릭문학상 ‧ 허균문학상 ‧ 한국전쟁문학상- 황조근정훈장 ‧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봉사본상 ‧ 부산교육상 ‧ 자랑스러운 부산교대인상 ‧ 쿠알라룸푸르 한인회장 감사패(아동도서 전달) ‧ UNESCO 부산협회 공로패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