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6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제1독서 : 2티모 4,1-8
복 음 : 마르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참眞 좋고善 아름다운美 예수 성심의 삶
-영적 승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참 좋고 아름다운 6월 예수성심성월입니다.
마침 요셉 수도원을 사랑하는 자생적 모임의 명칭도 생각납니다.
예수성심자매회와 예수성심형제회, 그리고 코이노니아 자매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어제 고백성사를 본 후 난생 처음 보속으로 예수성심호칭기도문을 바쳤습니다.
참 부끄럽게도 예수성심호칭기도문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길지만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대로 인용합니다.
-영원하신 성부의 아들이신 예수 성심
동정 마리아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 성심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성심
영광과 위엄이 가득하신 예수 성심
하느님의 성전이신 예수 성심
지존하신 이의 장막이신 예수 성심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신 예수 성심
사랑의 불가마이신 예수 성심
나눔과 베풂의 그릇이신 예수 성심
자비와 인정이 넘치시는 예수 성심
모든 덕행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
지극한 찬미를 받으실 예수 성심
모든 마음의 중심이요 임금이신 예수 성심
천주성이 충만하신 예수 성심
성부의 기쁨이신 예수 성심
풍부한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 성심
죽은 이들의 희망이신 예수 성심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인내하시는 예수 성심
모든 이의 간구를 들어 주시는 예수 성심
생명과 성덕의 샘이신 예수 성심
저희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성심
극도의 모욕을 당하신 예수 성심
저희 죄로 찢기신 예수 성심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 성심
창에 찔리신 예수 성심
모든 위로의 샘이신 예수 성심
생명이요 부활이신 예수 성심
평화요 화해이신 예수 성심
죄인들의 제물이 되신 예수 성심
주님께 바라는 이들의 구원이신 예수 성심
주님을 믿는 이들의 구원이신 예수 성심
주님을 믿으며 죽는 이들의 희망이신 예수 성심
모든 성인의 즐거움이신 예수 성심
자비를 베푸소서”-
참 길지만 참 깊고 풍부한 예수 성심 영성입니다.
예수 성심 성월 자주 되 뇌이며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성심 안에 모든 영적 선이 다 담겨있습니다. 참 영성의 샘이신 예수 성심입니다.
이런 예수 성심의 사랑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참 좋고 아름다운 삶에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수록 빛나는 예수성심의 영성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성심 영성의 모범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티모데오 제자에게 보낸 제1독서 서간은
그대로 바오로의 혼신渾身의 힘을 다한 유언으로 예수 성심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예수 성심과 일치된 시종여일始終如一의 삶이었기에
참 아름답고 거룩한 영적 승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바오로의 일편단심 예수성심의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영적 승리의 삶을 드러내는 유언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제 유언으로 삼고 싶은 바오로 사도의 유언입니다.
앞전의 티모데오를 향한 간절한 유언도 참 감동적이며
우리 각자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한 것을 간곡히 권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하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고 항구히 간절히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 하라는 것이며
예수성심의 사랑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가능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를 통해서도 빛나는 예수성심의 영성입니다.
복음 앞부분의 율법학자들과 부자들을 참으로 부끄럽게 하는
가난한 과부의 전적 봉헌의 주님 사랑입니다.
이들뿐 아니라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징같은 가난한 과부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전적 ‘자기 증여(self-giving)’의 봉헌에서 자신의 삶을 봤음이 분명합니다.
‘자기 섬김(self-serving)’과 과시욕, 허영과 교만의 율법학자들이나 부자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과부의 전적 봉헌의 삶에 각자 자신을 비춰보며 부끄러워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행하라’는 ‘회개의 표징’같은 장면입니다.
예수성심 사랑의 빛나는 모범이 바오로와 복음의 가난한 과부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자기 증여의 참 좋고 아름다운 삶에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 성심의 사랑과 일치하여
참 좋고 아름다운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창던지기 종목에서 영국 선수 스티브 베클리는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의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고,
그 역시 그 어떤 때보다도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을 6개월 앞두고 발목 부상을 입었습니다.
6주 동안 목발을 짚어야 했고 훈련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는 6주 동안 목발을 벽에 기대어놓고 의자에 앉아 창던지기 상상을 했다고 합니다.
창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고, 손가락으로 꽉 쥔 서늘한 금속 손잡이의 감촉을 느꼈습니다.
완벽한 창던지기 자세를 취했고, 던진 창이 높이 아치형을 그리며 날아가는 순간에는
그의 근육도 긴장했습니다. 창이 저 멀리 날아가서 땅에 꽂히는 장면을 계속해서 상상했습니다.
이미지 트레이닝이 중요하다고 말하지요.
실제로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이 훈련으로 향상된 성적을 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만약 스티브 베클리 선수가
‘훈련을 할 수 없으니, 나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어.’라고 포기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을 때는 좌절하며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이 세상 안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처럼 자비의 빈손, 믿음의 빈손, 정결의 빈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넣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었겠지만, 주님께서는 지향을 보시기 때문에 그녀를 칭찬하십니다.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다 넣을 정도로 하느님을 사랑하시는 그녀의 지향을 보신 것입니다.
자캐오도 자기 재산의 절반으로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었고,
과부도 동전 두 닢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부자가 베푼 많은 재산과 가난한 사람이 건넨 두 닢이
하늘 나라에서는 똑같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재물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보다
하느님께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랑의 지향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내게 사랑의 지향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주님께 봉헌할 재물이 없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음을 더 슬퍼해야 합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다 넣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남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찾으며, 약한 자들의 재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는 오래 바치는 위선의 삶을 질책하십니다.
우리 자신도 혹 이렇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복음>의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부자들은 나름대로 여분의 것에서 일부를 바쳤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에 가장 큰 봉헌을 한 것이라고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이는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봉헌과 나눔도 바로 이러한 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돈 모금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십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곧 믿음의 삶이요,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삶임을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곳곳에서 약한 자와 억울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강조하십니다.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참된 봉헌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주군이신 그분,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또한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가 있는 마음입니다. 곧 순수한 마음의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 일리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지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닌 것입니다.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직 ‘마음의 지향’에 달려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 마음을 얻는 길일 것입니다.
이는 요한 까시아누스가 수도승의 목표로 제시한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수한 마음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를 모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생활에 쫓겨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된 봉헌을
일깨워 주십니다.
생활의 봉헌은
생활의 간결함으로
이어집니다.
간결할수록
깊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생활의 봉헌으로
자연스레 드러납니다.
우리를 위한
생활의 봉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과부의 정성이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줍니다.
자신의 생활에서
온 마음을 봉헌합니다.
생활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현실에도
가장
가난한 과부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시는
주님께 의지합니다.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
봉헌하는 맑은 날 되십시오.
생활에서 출발하는
봉헌입니다.
저 먼 나라의 어린이가 굶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다가 8년 동안 옥고를 치른
마틴 니뭴러(Martin Niemoller)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가 옥고를 치른 후 위대한 「2차 대전 책임백서」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 책 가운데 이런 체험이 나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어느 날, 니뭴러 목사가 일곱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 줄로 서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데
심판대 앞에 선 사람들은 한 사람도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니뭴러 목사도 그 대열에 서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이상하게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면서 자꾸 변명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바라보니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나를 반대하고 욕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내게 사랑으로 예수님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다고 믿고 있었던 니뭴러 목사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히틀러가 이렇게 된 것이 바로 네 책임이다.”
이 말을 들은 니뭴러 목사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네가 8년 동안 히틀러 정권에 대해 항거만 했지 한 번이나 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죗값이 너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 똑같은 꿈을 일곱 번이나 꾸고 “이 전쟁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었구나!”라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의 눈물로 쓴 책이 「2차 대전 책임백서」라고 합니다.
신앙인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율법 학자’와 ‘율법주의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기에는 율법주의자일 뿐인 이들이
율법 학자라고 내세우며 다니는 것에 질책하십니다.
우리는 율법 학자가 되어야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차이는 바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생각으로 결정됩니다.
저 먼 나라의 한 어린이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그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율법’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지웁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는 자연과 세상이 이렇게 되어 가는 것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믿지만,
율법주의자는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 학자들은 겉모양으로는 모든 율법을 다 알고 지킨다고 사람들이 여기게끔
꾸미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이웃의 가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 곁에는 천 원밖에 없는 가난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 과부는 천원까지 헌금통에 집어넣었습니다. 주님께만 희망을 거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보살펴주시지 않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그런 사람을 자신의 형제처럼 사랑하라는 책임감을 심어줍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그런 책임을 무시하면서 완전한 율법주의자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 학자가 아니라 실제적인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린 이유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율법까지도 이용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낳은 아들이 카인입니다.
그는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이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냐고 그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 말 안에는 자신 안엔 율법이 없다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율법은 책임입니다. 이웃에 대한 나의 책임을 깨우쳐주는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일본 소프트 뱅크의 손정희씨가 중병에 걸려 오래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아프리카의 한 이름 모를 소녀를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 꽃 한 송이, 사과 하나라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처럼 미소 짓게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자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 율법이 비로소 그의 마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생명이요 건강이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건강이 회복된 것입니다.
율법은 세상 가장 먼 나라의 한 아이까지도 나의 책임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책임이 일지 않으면 나는 구원되는 율법 학자가 아니라
구원 못 받는 율법주의자로 머물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산보 가는 길에 새의 둥지를 보았습니다. 소나무 가지 사이에 둥지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몇날 며칠 둥지를 떠나지 않았고,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지만 어미 새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벌써 10일 이상 지났으니 곧 둥지에서 새끼 새를 볼 것 같습니다.
한 마리의 새끼 새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미 새의 눈물겨운 품기가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돌아보면 쉽게 포기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고, 게으름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고,
열등감 때문에 포기한 적도 있고, 이기심 때문에 포기한 적도 있고,
주변의 환경을 탓하며 포기한 적도 있습니다.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 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몇 번 들었습니다.
지난달에 마지막 방송을 했는데 1987년부터 진행했으니 33년이 되었습니다.
방송할 때는 20대 였는데 지금은 50대 후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눈이오나 비가 오나 시청자들을 위해서 방송했다고 합니다.
33년이란 긴 시간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켰던 강석, 김혜영 진행자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충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잠시의 방심과 나태함 때문에 또다시 어려움이 시작되곤 합니다.
한국은 코로나19에 대해서 대처를 잘 하였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개학을 앞둔 시기에 이태원에서의 감염이 있었습니다.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개학이 연기되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밀집된 공간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신나게 돌아다녔고, 확진자는 다시 늘어났습니다.
정부와 지방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대처로 일단락되었지만 경각심을 주기에는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죽비’가 되어 제게도 신발 끈을 다시 조이게 합니다.
신앙인은 천사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카엘 천사처럼 나의 신앙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신앙을 증거 해야 합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의 뜻이나 나의 욕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파엘 천사처럼 신앙의 여정에 좋은 안내자가 되어야 하고,
상처 입은 이웃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저희를 성자의 살과 피로 기르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다스리시어
저희가 말보다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었다.(마르 12, 44)
이 막시밀리안 수녀
지금 수정보완판에는 없지만 예전 가톨릭성가에 “주께 드리네”라는 성가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가겠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내 주 앞에 모두 드리네.“
2절.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겸손하게 바치네.
세상 복락 멀리하니 나를 받아주소서.
3절.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네.
주의 은총 충만하게 내게 내려주소서.
이 성가를 소리쳐 부르면서도 많이 찔렸지요.
내가 정말 아낌없이 주님께 바치고 있는가?
주님만을 따른다고 하면서,
얼마나 많은 곁눈질을 하고 주님께 드리는 시간을 아까워하였는지...
생각해보면 주님에게서 받지 않은 것이 없고 내 것이 없는데도
내 것인 양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인색하지 않지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다 내어주고 싶어 합니다.
시간도, 돈도, 나의 의지까지..
내 마음을 살펴보시는 주님께
겸손 되이 드리도록 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작고 보잘것없어도 주님께서는 양을 보시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예수성심성월을 지내면서, 자주 이 기도 바치시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어질고 겸손하신 예수님,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