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2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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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초를 뒤흔든 박저생 사건
아버지의 여자를 간음한 아들, '죽여라'
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건국한 국가다. 왕실과 불교 그리고 권문세족이 뒤엉켜 부패한 고려를 뒤엎고 개국한 조선은 도덕률을 지향했다. 유학에 근거한 도덕은 군신간의 충(忠), 부자간의 효(孝), 부부간의 별(別)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유교국가 조선을 떠받치고 있는 가공할 위력의 삼각편대다.
이러한 조선에 국초를 뒤흔드는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박저생(朴抵生) 사건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첩을 간음하고 그 아비가 죽자 아버지가 취했던 그 여자를 다시 아들이 첩으로 삼는 희대의 치정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건을 일으킨 문제의 당사자들은 원대복귀라고 변명하지만 삼강오륜을 따지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들을 고발하는 어미
태종 12년 12월. 찬바람이 스산한 사헌부에 사건을 고변하는 부인이 있었다.
"아비의 첩을 간음한 자가 있으니 법대로 처결하여 주소서."
"너는 그 아비와 어떠한 관계이냐?"
"처이옵니다."
사건을 접수한 사헌부 장령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다면 어미가 아들을 고발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 아들과는 어떠한 관계인가?"
"의자(義子)입니다."
이제야 가닥이 잡혔다.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아비의 후처 즉 아들의 계모가 의붓아들을 고발한 것이다. 밑그림을 완성한 장령은 아들 박저생을 잡아들였다.
"네가 네 아비의 첩을 취한 것이 사실이렷다?"
"아닙니다요. 그 여자는 원래 소인의 첩이었습니다요."
갈수록 가관이다. 심문관은 다시 어지럽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네 첩을 네 아비가 빼앗았다는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요."
"왜 관가에 고하지 않았느냐?"
"아버지가 소인의 여자를 품었다고 어찌 관가에 고발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기다렸습죠."
햐, 기막힌 효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효다.
"네 여자를 아비가 빼앗았다 하더라도 아비의 첩을 네가 다시 취한 것은 네 아비의 첩을 네가 간음한 것 이라는 사실을 네가 몰랐더냐?"
풍속의 기강을 다루는 사헌부의 논고는 준엄했다. 법리적으로 사무생유(死無生有) 즉, 죽은 자는 죄를 물을 수 없고 산자의 죄를 묻겠다는 뜻이다. 또한 효(孝)란 인륜도덕에 바탕을 둔 효가 가치가 있으며 수평관계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닙니다요. 소인의 여자를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요."
심문관은 기가 막혔다. 사건을 고발한 계모는 그 여자가 의붓아들의 첩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유산다툼을 하다가 의붓아들을 고발한 것이다. 문제의 여자를 잡아들였다.
푼수 같기도 하고 요부 같기도 한 여자
"너는 누구의 여자였더냐?"
"박자성의 첩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박자성 아비의 첩이었습니다."
"고얀지고, 아들의 여자가 어떻게 아비의 첩이되었더냐? 아들이 허락이라도 하였더냐?"
"아닙니다요. 서방님이 출타한 밤에 아비가 소첩의 방을 침범하여 범하였습니다."
"네가 행실이 방자하지 못하고 요기를 뿜어 유혹한 것이 아니었더냐?"
"아닙니다요. 소첩은 옹녀와 변강쇠가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아비가 변강쇠 같았습니다."
심문하던 심문관이 민망하여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질문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왜 관가에 고변하지 않았느냐?"
"아비가 더 좋았습니다."
심문관은 기가 막혔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심문에 응하는 파독(波獨)이 딴 나라에서 온 여자로 보였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푼수 같기도 했고 눈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요부 같기도 했다. 천박성에 백치미(白痴美)를 겸비한 파독은 아버지와 아들을 인륜과 도덕을 파괴하는 패륜의 늪으로 빠지게 한 장본인이었다.
희대의 치정사건과 재산싸움을 접수한 사헌부는 사건의 성격상 가벼이 다룰 수 없어 사간원, 형조와 함께 임금에게 보고했다.
"박저생이 처음에 파독(波獨)을 첩으로 삼았으나 그 아비 박침이 중간에 범간(犯奸)하였고 박침이 죽자 박저생이 다시 첩으로 삼았으니 부자가 공간(共奸)한 정상이 명백합니다. 고변자 곽씨는 규문(閨門)의 추한 것을 발설함으로써 그 남편의 죄악을 드러내게 하였고 파독은 아비와 아들의 첩이되기를 달게 여겨 거부하지 않았으니 일일이 율(律)에 의하여 논죄(論罪)하소서." - <태종실록>
아버지는 현행법을 어긴 범죄자이고 아들은 법 이상의 관습법에 의한 범죄자이며 이 사건을 고발한 곽씨도 죄가 된다는 법리해석이다. 또한 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파독이 피해자로서 고발했으면 죄가 없으나 달게 여겼으니 죄가 되므로 별개의 사건으로 다뤄 엄히 다스리자는 것이다.
죄가 의심나거든 가볍게 벌을 주라
"이 계집은 본시 박저생의 첩인데 그 아비가 간음을 행했으나 이 계집이 실지로 고하지 아니하였다. 그 아비가 죽은 뒤에 박저생이 재간(再奸)하였어도 아비의 연고 때문에 그 아들을 고하지 아니하였다. 이제 직접 아비의 첩을 간음한 것으로 여겨 참(斬)함은 그것이 '죄가 의심나거든 가볍게 벌을 주라'는 뜻에 있어 어긋난다.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 <태종실록>
태종은 박은의 상소를 상기하며 사건을 사헌부로 돌려보냈다. 순금사겸판사(巡禁司兼判事) 박은이 사형의 삼복법(三覆法)을 청하니 그대로 따른 것이다. 삼복법이란 오늘날의 삼심제로서 박은이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사죄(死罪)에는 삼복(三覆)한다고 하였으나 형조와 순금사에서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육전(六典)을 따르도록 하소서'라고 주청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삼복법이 시행되었다.
"조(祖)와 부(父)의 첩을 간음하면 참(斬)한다. 하였으니 박저생의 죄는 마땅히 이 형벌을 받아야 하며 인륜(人倫)의 대변(大變)을 용서함은 옳지 못합니다."
인륜을 망각한 죄인을 엄히 처벌하자고 사헌부와 의정부에서 강력히 주청했다.
"박저생은 장(杖) 1백 대에 유(流) 3천 리, 곽씨는 장 90대에 도(徒) 2년 반(半), 파독은 장 1백 대에 처하여 외방으로 내치라."
이에 박저생의 아들이 신문고를 쳐 억울함을 호소하고 나섰다.
"소생의 아비가 비록 스스로 밝힐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여러 번 대유(大宥)를 거쳤으니 죄를 면할 만합니다."
박저생의 아들이 억울하다며 폭로한 내용이 일파만파 파문을 일으켰다. 박저생이 그동안 사헌부와 형조에 갖다 바친 뇌물이 얼마인데 죄를 주냐는 항변이었다. 조사를 담당했던 사헌부와 형조가 발칵 뒤집혔다. 폭로에 수사기관이 어수선한 사이 박저생이 순금사 옥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뒤가 캥긴 순금사에서 놓아준 것인지 탈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으로 있던 박저생의 아우 박강생이 의정부에 투서하여 삼성(三省)에서 형의 죄를 오결(誤決)했다고 항의하고 나섰다. 삼성에서는 박강생이 말을 꾸며 해당 관서를 능욕하였다 하여 아전을 보내어 두 사람과 곽씨의 집을 수직(守直)하게 하였다. 사건은 점점 꼬여갔다.
아버지의 여자를 첩으로 삼은 사나이, 밀양에 나타나다
옥에서 사라졌던 박저생이 경상도 밀양에서 체포되었다. 이름을 바꾸어 박의(朴義)라는 사람으로 행세하던 박저생이 전 언양감무(彦陽監務) 장효례와 재산을 다투다 신분이 드러난 것이다. 밀양 지군사(知郡事) 우균에게 체포된 박저생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순군옥에 다시 투옥되었다.
"지난 가을 형조에 잡혀왔을 때 포(布) 240필을 징수하였으니 내 사죄(死罪)는 이미 속(贖)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벌금인지 뇌물인지 재산형인지 성격은 알 수 없지만 적지 않은 물품을 바쳤으니 자신의 죄는 사면되었다는 항변이다. 사건을 다루었던 사헌부와 형조에 불똥이 튀었다. 대사헌(大司憲) 허응이 연산(連山)으로 귀양 가고 집의(執義) 이맹균은 원주에, 장령 이명덕은 곡산으로 지평 허항은 진주로 유배당했다.
이에 장령 김질, 지평 이승직이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곽씨를 불러 심하게 고문했다. 직계상관들이 줄줄이 귀양 간 것에 따른 보복성 고문이었다. 여기에서 또 문제가 터졌다. 곽씨의 아들 박눌생이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나선 것이다.
보고를 받은 임금이 곽씨를 석방하도록 명하고 김질과 이승직 등을 견책하여 김질은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가게 되고 이승직은 지의주사(知宜州事)로 내보냈다. 대사헌 한상경이 아뢰었다.
"김질과 이승직은 곽씨를 엄하게 고문하였으니 공정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곽씨의 죄는 비록 실지의 율(律)에 의거한다 하더라도 이죄(二罪) 이하에 해당되며 또한 그들의 고문은 사정(私情)을 두고 행하였으니 이는 관리가 법을 받드는 뜻이 아닙니다."
지방으로 좌천된 김질과 이승직은 파면되었다. 삼성에서 박저생의 죄를 치죄(治罪)하고자 하였으나 유지를 거쳤으므로 대벽(大辟)을 면하고 울주에 부처(付處)되었다. 귀양살이하는 몸이 울주에 잠자코 있으면 되련만 울주에서 탈출한 박저생이 김화현에 스며들어 도망생활을 하던 중 그 현(縣) 사람의 토지를 빼앗으려다 체포되어 신분이 탄로 났다.
"박저생은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고 이름을 바꾸어서 이익을 다투었으니 율(律)에 의하여 시행(施行)하되 무부(無父)·내란(內亂)의 죄로 다루소서."
대사헌 한상경이 강력처벌을 주청했다. 한양으로 압송된 박저생은 순군옥에 투옥되었다. 이튿날 박저생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살이라고 공식 발표되었지만 사실과 진실은 박저생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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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잘못을 꼬집은 윤저
할 말을 하는 사람이 진정한 신하다
태종 이방원을 평생토록 괴롭히는 질병은 '창병(瘡病)'과 '각기병'이었다. 창병은 풍속이 문란했던 당나라에서 비롯된 병이라 하여 당창(唐瘡)이라고도 불리는 화류병이다.
현대 병리학적으로 말하면 임질, 매독과 같은 성병으로서 전염성이 강해 여자를 밝히는 사람들에게 복병처럼 뒤따라 다니는 질병이다. 606호나 페니실린 한방이면 끝. 소리가 나는 세균성 질병이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특효약이 없었다.
각기병(脚氣病)은 현대인들과 맥을 같이한다. 영양부족에서 오는 질병성 각기병과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구분하지 못한 옛 사람들이 통틀어 각기병이라 불렀지만, 임금은 후자 쪽에 가깝다. 다리를 쓰지 않아서 생기는 병이다. 현대인들이 걷지 않아서 하체가 부실하듯이 옛날 군주는 걸을 일이 별로 없었다.
어의(御醫)의 극진한 치료를 받았지만 다리가 부실한 태종은 '통진현 사람, 전 내부소윤(內府少尹) 이방선이 각기병을 잘 고쳐 그가 지은 약 한 냥쭝만 먹으면 곧 낫습니다'고 아뢰는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신이 추천하는 약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각기병에는 많이 걷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터득한 태종이 이숙번을 불렀다.
"의정부(政府)에서 인주(仁州)·안산(安山)·부평(富平)·광주(廣州) 등지를 강무(講武)하는 장소로 삼도록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토질이 진흙이며 산과 골이 험하고 막혀서 달리고 쫓는 데 불편하고 또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이 있으나 땅이 평탄하여 달리고 쫓기에 편리함이 철원만 못하다."
"광주가 좋습니다." 이숙번이 광주를 추천하자 우대언(右代言) 윤사수를 불렀다.
"네가 일찍이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으니 기내(畿內)의 주(州)·현(縣)을 모조리 다 순행하였을 것이다. 인주(仁州)의 부평(富平)이 광주(廣州)의 경안(慶安) 수곡(水谷)과의 거리가 몇 리(里)나 되느냐?"
"모두 하루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이번 행사가 백성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지금의 거둥은 예전과 같지 아니합니다. 백성들이 이바지하는 것은 다만 꼴(芻藁)뿐이니 다른 폐는 없습니다. 다만 감사와 수령이 거둥하는 향방을 미리 알지 못하면 공억(供億)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가는 곳을 일찍이 정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금년에는 풍년이 들었으니 꼴을 준비하는데 철원 백성들이 괴로워하지 아니할 것이다. 나의 이번 행차를 도당(都堂)과 대간에서는 모두 옳지 못하다고 하나 옛 제왕들은 사냥하는데 일정한 장소가 있었으니 어찌 도성 가까운 곳에 원유(苑囿)를 설치하였겠는가? 반드시 백성들이 살지 아니하고 비어 있는 먼 땅을 골라서 만들었을 것이다. 강무를 파한 뒤에 철원에 사냥하고자 하니 미리 관리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라."
강무(講武) 장소가 결정되었다. 호군(護軍) 이자화를 보내 임강(臨江)·장단(長湍)·우봉(牛峰)·토산(兎山) 철원의 야산 산림(山林)을 불태워 강무를 준비했다.
사냥을 하려거든 사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군사를 동원한 강무 즉, 군사훈련 뒤에는 사냥의 여흥시간이 있었다. 이 시간을 활용하여 운동하겠다는 복안이다. 장단과 철원 봉성(鳳城) 벌에서 강무(講武)가 펼쳐졌다. 정례적인 군사훈련이다. 한양과 경기도 일원의 수많은 병사가 동원된 군사훈련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사냥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비록 평탄하다 하지만 돌멩이가 소와 양처럼 풀밭에 묻혀 있는 곳이 매우 많습니다. 말을 모실 때에 뜻하지 않은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전하께서는 종묘사직을 위하여 자중하시고 바른길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이계공과 김위민이 행악(行幄)으로 나아가서 아뢰었다.
"내가 이곳이 험한 줄 알고 있으니 어찌 함부로 말을 달리겠는가?"
"전하께서 이미 사냥터로 들어오셨는데 풀밭 사이에서 새가 날아올라 화살을 쏘려고 할 때 졸지에 말고삐를 놓치는 변이라도 생기면 후회하신들 무엇하겠습니까?"
"사냥을 하려면 사냥감을 보고 뒤쫓아야지 평탄한 길만 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중축(中軸)을 따라가며 사졸(士卒)들의 용감함과 겁내는 것을 볼 뿐이다. 그대들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 뒤를 따르면서 보라."
연 사흘에 걸친 사냥이 끝났다. 노루와 고라니 꿩 등 다수의 금수(禽獸)를 사냥했다.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김여지에게 사냥개(田犬)와 화살을 내려주며 명했다.
"전일에 천신한 것은 상살(上殺)이 아니니 젖(醢)을 담아서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사용하도록 하고 오늘 상살(上殺)한 금수를 종묘에 급히 천신하라."
군주가 사냥터에서 사냥감을 사냥하면 좋은 것을 골라 조상에게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짐승의 왼쪽 표(膘) 즉, 어깨 뒤 넓적다리 앞 살을 쏘아 오른쪽 우(腢), 어깻죽지 앞의 살로 관통하는 것을 상살(上殺)이라고 말했으며 이것을 건두(乾豆)로 만들어 종묘에 천신하였다.
오른쪽 귀 부근을 관통한 것을 중살(中殺)이라 하여 빈객(賓客)을 대접하는 데 썼으며 왼쪽 비(脾), 즉 넓적다리뼈에서 오른쪽 연(腢), 어깨뼈로 관통한 것을 하살(下殺)이라 하여 포주(庖廚)에 충당하였다.
사냥을 끝낸 임금일행이 녹양평에서 일박 후, 환궁 길에 살곶이(箭串) 냇가에서 술자리가 베풀어졌다. 세자 양녕대군을 비롯한 왕자와 종친 그리고 대소신료가 연회에 참석했다. 산해진미가 마련되고 풍악이 연주되는 풍성한 자리였다.
"이 과일이 무엇이냐?"
"감귤(柑橘)이옵니다."
지신사 김여지가 대답했다.
"보기도 좋고 맛이 좋구나. 어디에서 나는 토산품이냐?"
"구주의 토산품이오나 제주에 이식하여 생육한 과실입니다."
"백성들을 풍족하게 먹이려면 육지에 심는 것이 좋겠구나."
이후, 상림원별감(上林園別監) 김용을 제주에 보내 감귤나무 수백 주(株)를 순천, 고흥 등지의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에 옮겨 심게 하였다. 감귤 나무의 최초 육지 상륙이다. 그뿐만 아니라 종묘에 천신하는 시물(時物)에 감귤을 포함하도록 명했다. 감귤이 임금님의 제사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진정한 신하다
여흥이 무르익고 임금이 술에 취하자 칠성군(漆城君) 윤저에게 춤을 추게 했다. 갑작스러운 하명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윤저가 어쭙잖은 춤사위를 선보이고 자리에 앉자 술잔을 내려주며 물었다
"경은 마땅히 나의 과실을 바른 대로 말하라."
"전하가 신민(臣民)의 위에 계시어 모든 하시는 일이 반드시 바른 대로 하시는데 주상의 하는 일이 만일 그르다면 신이 어찌 감히 따르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빈잉(嬪媵)이 이미 족하니 반드시 많이 둘 것이 아닙니다.”
윤저가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곡을 찌르는 바른 말이다. 후궁들이 많은데 화산군(花山君) 장사길의 기생첩 복덕(福德)의 딸 장씨를 후궁으로 들여와 순혜옹주(順惠翁主)로 삼은 것을 꼬집는 말이다. 모든 신하들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수군대기만 했지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사안이었다.
"무릇 인신(人臣)의 도리는 먼저 인군(人君)의 사심(邪心)을 공격하는 것이 가하다. 윤저가 비록 배우지 않았으나 학문의 도(道)가 어찌 여기에 더할 것이 있겠느냐?" - <태종실록>
도리에 어긋난 임금의 잘못을 지적해주어 고맙다는 뜻이다. 지신사 김여지를 돌아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태종이 세자 양녕을 돌아보며 말했다.
"칠성군은 태조를 따르면서부터 오늘에 이르렀고 또 내 잠저(潛邸) 때에 서로 보호한 사람이다. 질박 정직하고 의를 좋아하는 것이 누가 이러한 사람이 있겠느냐? 너는 나이 어리니 마땅히 독실하게 믿고 공경하여 무겁게 여겨야 한다."
"신이 이미 늙었으니 다만 주상의 은덕을 입을 뿐입니다. 어떻게 세자 때까지 보겠습니까?"
윤저가 감격하여 울면서 말했다. 이에 감동한 태종이 윤저에게 타던 안마(鞍馬)를 주었다. 임금이 타던 말을 내려준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현대적 의미로 풀이하면 대통령이 타던 승용차를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윤저가 사양하니 태종이 말했다.
"경이 사양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주는 것이니 오늘 받았다가 명일에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가하다."
윤저는 황송한 심정으로 말(馬)을 받았다.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말이 어떤 말인가. 장식이 화려한 어마(御馬)는 뭇 백성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말이지 않은가. 태종이 타던 말을 하사받은 윤저가 그 말을 타고 다녔는지 가보(家寶)로 모셔 두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